선빈이가 신이 나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데 보니 구슬이다. 30개는 넘어 보였다.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친구가 주었단다. 내가 어렸을 때는 구슬은 귀한 보물이었다. 문방구에서 정찰 가격으로 신품을 사거나 구슬이 많은 아이에게 조금 낮은 가격으로 중고품을 샀는데 가격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당시 우리 주머니 사정으로는 고가품이었던 거다. 그러니 누구에게 그렇게 쉽게 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는 참 다르구나 생각했다. 인심이 후한 건지, 귀한 줄 모르는 건지.
선빈이는 그 구슬들을 장난감 트럭 적재함에 담은 후 곧 형과 놀이를 시작했다. 어떻게 노는가 보니 놀이 방법도 모르는 듯했다. ‘이렇게 해 보자’ 하다가 ‘저렇게 해 보자’ 하며 소리만 요란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떻게 놀았던가? 구슬로 노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당시에는 구슬이라 하지 않고 ‘다마’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말이라는데 그 당시는 모두가 그냥 ‘다마’라고 했다.
먼저 ‘봄들기’라는 놀이가 있다. 흙바닥에 조그만 구멍을 4 개 판다. 3 개 구멍을 일직선 위에 파는데 각 구멍 간의 거리는 약 1m 50cm 쯤으로 하고, 나머지 한 구멍은 가운데 구멍에서 역시 약 1m 50cm 쯤 되는 곳에 파되, 3 개 구멍이 이루는 일직선과 직각이 되는 지점에 판다. 그렇게 준비하고는 구슬을 굴려 각 구멍에 넣었다가 다음 구멍에 넣었다가 하는데 4 구멍을 모두 넣으면 ‘1 년’이라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4 구멍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미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서 미리 정한 ‘몇 년’을 먼저 끝낸 사람이 이기는 거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미리 정한만큼의 다마를 주어야 했다.
삼각형이라는 놀이도 있었다. 길바닥 한 가운데 각 변이 어른 한 뼘쯤 되는 삼각형을 그려 놓고, 모든 아이들이 약속한 숫자(대개 한 명이 3~5 개쯤)만큼의 다마를 그 속에 넣는다. 그 삼각형에서 약 2m 쯤 되는 거리에 삼각형 양쪽으로 2개의 선을 긋는다. 모든 아이들이 삼각형의 위치에서 한쪽 선으로 다마를 던져 그 선에 근접한 정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 선에 가장 가깝게 던진 아이가 1 등이다. 그렇게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한 명씩 선 위에 서서 삼각형 속의 구슬을 향해 제 구슬을 던진다. 삼각형 속의 구슬을 맞춰 삼각형 선 밖으로 나오게 만들면 그 구슬은 맞춘 아이가 갖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한다. 대개의 아이들은 한쪽 눈은 찡그려 감고 남은 한쪽 눈에 손에 든 구슬을 갖다 대는 식으로 목표물을 겨냥해서 다마를 던졌는데 그런 방법을 ‘깔빼기’라고 불렀다. 삼각형 놀이도 여러 가지 변형이 있어서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설명한 것이 가장 기본적인 놀이 방식이다.
그러다가 그것도 시들해지면 ‘홀짝’이나 ‘으찌 니 쌈’을 했는데, - 일반적으로 ‘홀짝’은 더 어린 아이들이, ‘으찌 니 쌈’은 조금 더 큰 아이들이 주로 했다. - 한 사람이 한 손에 몇 개의 다마를 잡아 주먹으로 감싸 쥐면 - 이것을 ‘접는다’고 한다 - 상대방은 주먹 속의 다마 숫자가 ‘홀수인지, 짝수인지’, 혹은 ‘3의 배수인지, 아니면 그보다 1개, 혹은 2개가 많은지’ 맞추는 놀이다. ‘으찌 니 쌈’의 경우, 3의 배수에서 하나가 많은 것을 ‘으찌’, 2개가 많은 것은 ‘니’, 3의 배수에 꼭 맞아떨어지는 것을 ‘쌈’이라고 했다. 이건 다분히 도박성이 짙은 놀이인데 좀 더 커서 청소년이 되면 다마 대신 동전으로 ‘으찌 니 쌈’을 했으며 그것을 ‘짤짤이’라고 했다. ‘야, 짤짤이 한판 하자’ 하는 식으로 말이다. ‘홀짝’이나 ‘으찌 니 쌈’은 ‘기능’이 강조되는 ‘봄들기’나 ‘삼각형’과는 달리 도박 특유의 긴장감이 감도는 놀이였다. 내가 구슬 몇 개를 베팅한 후 상대방 주먹 속의 구슬 수를 맞추면 그로부터 그만큼의 구슬을 받고 못 맞추면 그걸 잃는데, 베팅의 상한선이 없어 몇 번을 못 맞춘 아이가 결국 흥분하여 제가 가진 전부를 한 번에 몽땅 베팅하는 모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렇게 해서 또 못 맞추면 결국 구슬을 다 잃는 거고 그것으로 놀이도 끝났다. ‘접는’ 친구의 다마가 베팅하는 친구의 다마보다 적을 경우 베팅하는 사람이 상대방이 가진 것 전부만큼 베팅할 때는 ‘도리!’라고 선언하는 규칙도 있다. 예를 들어 ‘니꺼 전부 도리, 쌈! 으찌 먹어!’ 하고 베팅해서 상대방 주먹 속의 다마 수가 ‘쌈’이면 상대방의 구슬을 모두 받는 것이고, 만약 ‘으찌’면 그 아이가 가진 구슬 숫자만큼 세어서 구슬을 주어야했다. 만약 ‘니’면 비긴 것이므로 다시 했다.
오랜만에 구슬을 보다보니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옛날이야기를 한참 했다. 이제 다시 우리 아이들 얘기로 돌아가자. 선우와 선빈이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어떤 방법의 놀이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 보자, 저렇게 해보자’ 하더니 결국은 선우와 선빈이가 편을 나누어 서로 50cm 쯤 떨어져서는 거실 바닥 장판 한 칸에 각자 자기 구슬 10 개쯤을 놓고는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구슬을 굴려 상대방 구슬을 맞추는 놀이를 시작했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신종 놀이였다. 아들들은 놀이 중간 중간에도 계속 놀이 규칙에 관해 티격태격하더니 얼마 후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그 다음부터는 깔깔깔 웃어대기도 하고 아휴! 탄식하기도 하며 꽤나 재미있어 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어렸을 때 했던 놀이에 비하면 시시하기 그지없건만 애들은 꽤나 신나 했다.
내 어린 시절의 ‘다마’ 놀이는 기본 성격이 ‘실외 놀이’였다. 흙바닥에 구멍을 파거나 선을 그어야 하니 실내에서는 할 수가 없다. 요즘은 그런 놀이를 할 만한 흙바닥조차 찾기 어렵다. ‘다마’는 이름만 ‘구슬’로 바뀌었을 뿐 모양은 그대로인데 그 놀이 마당인 흙바닥은 사라진 거다. ‘구슬은 의구한데 놀이마당은 간 곳 없네!’이다. 상황이 변하자 아이들은 과거의 ‘실외용 다마 놀이’를 저희 세대에 맞게 ‘실내용 구슬 놀이’로 변화시켰고 또 그에 걸맞는 새 규칙을 만들어 낸 거다. 새 놀이의 방식과 규칙 결정 과정을 보니 동네 모든 아이들이 함께 모여 합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제 상황에 따라 제 좋을 대로 하는 식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게 바로 창의성이다. 아이들 특유의 창의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거다. 어른들이라면 어땠을까? 새로운 놀이 방식을 상황에 맞게 만들고 또 그 놀이 규칙을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어른들이란 기존의 방식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정해진 규칙을 잘 모르면 당황해하며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게 성인들의 방식이다. 어른들의 창의성이란 변형 고스톱(전두환 고스톱, 이주일 고스톱 등)에서 보듯이 기본 원칙은 그대로 두고 부수적인 것만 조금씩 바꾸는 수준이다.
그런 걸 보면 모든 아이들은 원래 창의적으로 태어나는 것 같다. 그 선천적 창의성이 나이 들어가면서 급속히 사라져버리니 참으로 안타깝다. 혹시 부모들이, 학교가,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없이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너희들도 이렇게 저렇게 따라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말이다. 그렇게 원래 있던 싹도 잘라버리고는 왜 또 뒤늦게야 ‘창의력 신장’이니 ‘창조성 함양’이니 하며 되지도 않을 고생을 시킨단 말인가?
괜히 흥분하지 말고 이야기나 빨리 마무리하도록 하자. 우리 아이들 구슬 놀이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엉뚱하게도 ‘아빠인 나만 죽도록 고생’하는 걸로 끝이 났다. 아들 두 놈이 갑자기 저희들끼리 하는 건 재미없다면서 아빠도 와서 같이 하자고 요구해,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붙잡혀 가서 나도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구슬을 굴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첫 판을 내가 이기게 되자 아들 둘이 분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 내가 질 때까지 계속 해야만 했다.
첫댓글 아이들과 배를 깔고 구슬놀이 하는 교수님을 상상하니 ㅋㅋ 웃슴기도 하구 ......행복할 것 같아요
부러워라~~^^
부럽기는......
시클라멘은 해보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실제로 해 보세요. 아주 힘들고 지겨워 죽습니다.
아이들과 게임을 해보면
이기는 것도 뜻대로 잘 안 되지만,
지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도 국민학교 다닐 때 쉬는 시간마다 구슬가방 가지고 친구들이랑 운동장을 누볐었었..........
저 구슬치기 잘했었어요!
가방 가득하던 구슬과 따로 보관하던 칠성구슬(안에 색띠 없이, 그냥 유리로만 만든 레어 아이템)을
외할머니댁에 다녀오는 길에 택시에 두고 내려서 울고 불고 했었는 데 ㅋㅋ
우리 아들(초4)공기놀이 하는 것을 보면 교수님의 글에 공감이 갑니다. 우리때는 공기놀이를 여자아이가 많이 했는데, 지금은 울 아들이 더 많이 합니다. 주머니, 하늘공기, 피아노, 물레방아, 아리랑, 딸기,....설명해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머슴애가 열심히 하는 거 보면 옆에서 웃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네들끼라 이름도 정하고, 법칙도 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쉬는 시간에 한참 할 때는 집에서 연습을 하고 가더라구요...창의성...맞습니다^^*
배를 바닦에 깔면 중심이 왔다갔다 해서 이기기싶지 않았을건데..혹 이긴거 거짓부렁 아닐까???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