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29
지금은 SNS시대, 산남의진을 널리 알릴 양으로 여기저기 산남의진열전을 올리고 있다.「페북영천」그룹을 만들어 영천을 홍보하고 있는 하경원「인구와 사회연구소」소장께서 고맙게도 열전 28을 읽으시고 격려의 답글을 주셨다.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고 글을 올려서 송구하지만 이해해주시시라 생각하며 소개한다.『그저께 경주에 ‘1915경주 세금마차사건’ 연극공연을 보고 왔어요. 그 당시 신문에 난 기사 한 줄로 현 시장님이 연극을 한번 만들어 보라 하셨다던데··· 그에 비하면 우리 영천의 산남의진사는···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짐망화천지수(朕望華川之水)라는 제목의 산남의진 추모 창작극 사업계획서는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진즉에 만들어 두었지만 예산을 세울 길이 없는 처지라 묻어두고 있는 처지라 너무도 반가운 말씀이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다음 주에는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산남의진 선양을 위한 중장기계획을 소개해 볼까 한다.
이훈구(李勳久) 義士
자는 원칙(元則), 호는 소촌(小村). 이한구 선생의 종형(從兄)이다. 정용기 대장과 대대로 오래 사귀어 정이 두텁고 의기가 부합되어 산남의진이 일어날 때 지방참모(地方參謀)로 지명되어 진후(陣後)를 지원하였다. 의진이 무너지고 그 후에 광복회 동지 우재룡 등과 연락하여 암중 운동을 하다가 광복 청천을 못 보고 서거하였다. 일월향지(日月鄕誌k)에 군인 50명을 모집하여 입진시키고 군량미를 원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4><山南倡義誌 卷下 P75>
이순구(李純久) 義士
자는 성희(聖熙), 호는 환암(環菴), 이한구 선생의 친동생이다. 사서(史書)에 정통하고 정탐에 능숙하여 처음 산남의진에 입진하여서는 각지로 암행하여 정탐하는 활약을 하다가 의진이 지역으로 나뉠 때 청송진 서종락을 따라서 각지 연락을 담당하였다. 의진이 무너지고 만주로 건너가서 광복운동을 하더니 왜적들이 만주까지 점령한데다가 형(이한구)의 아들 둘이 원통하게 서거하여 후사가 맹랑한 처지가 된 소식을 듣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광복 동지들을 도왔다. 을유(乙酉:1945)년 해방을 보고 산남의진 추모사업에서 항상 특별히 후하게 대접을 받았으며 건국공로 표창을 받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4><山南倡義誌 卷下 P75>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김석구(金錫龜) 義士
자는 락서(洛瑞), 관향은 경주(慶州). 정환직 대장의 참변 소식을 듣고 이용훈, 권치상과 더불어 정환직 대장의 사체를 모시고 돌아오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5><山南倡義誌 卷下 P76>
손수기(孫秀基) 義士
자는 공선(公善), 호는 매은(梅隱), 관향은 월성(月城). 가계가 부유하면서도 우국지사(憂國之士)로 이름이 나 있었다. 산남의진에 많은 물자로 원조하였고, 정용기 대장이 순절하고 정순기 등이 호소례(縞素禮:상복을 다 갖춰 입지 않고 약식으로 치르는 예)로서 장례를 거행할 때, 묘 터와 제수품을 제공하고 제문(祭文)과 만사(輓詞:죽음을 애도하는 시가)로써 추도하다. 일월향지(日月鄕誌k)에 산남의진에 군량미를 보급하고 대장 장례에 협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5><山南倡義誌 卷下 P78>
손수락(孫秀洛) 義士
자는 문가(文可), 관향은 월성(月城). 정용기 대장이 순절하고 정순기 등이 호소례(縞素禮)로서 장례를 거행할 때 치관(治棺)과 치산(治山)과 마을 주민 동원을 전부 부담하여 조력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6><山南倡義誌 卷下 P76>
최석진(崔錫振) 義士
자는 영호(永皓), 관향은 월성(月城). 정용기 대장의 미망인 최씨 부인이 해산 후 3일만인 정미(丁未:1907) 8월 22일 여러 아들을 인솔하고 피난길을 출발하여 풍우를 피하지 아니하고 동분서주하면서 3,4개월을 떠돌아다녀도 사람들이 적을 두려워하여 이 의사(義士) 가족을 받아주지 않더라. 최석진 공(公)의 마을 사람들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니 그가 마을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저구(杵臼)와 정영(程嬰)이 조상국(趙相國)의 집을 구원할 새 정영(程嬰)은 살신(殺身)하고 저구(杵臼)는 살자(殺子)하여 조무(趙武)를 구출한 것은 그의 부(父) 상국 순(盾)이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을 생각함이라. 지금 우리가 정공(鄭公)의 가족을 피난시키지 못하면 후세에 부끄러울 것이라 하고 최씨 부인과 그 일행을 은피시키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6><山南倡義誌 卷下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