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로타리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후 08시30분에 차량에 탑승하고 천년 고도 신라의 찬란했던 역사 문화 유적지 탐방길에 나섰다. 우선적으로 안압지를 보고 첨성대, 분황사지,황룡사, 선덕여왕릉, 불국사순으로 둘러보았다. 안압지(雁鴨池)는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 완성한 연못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안압지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문무왕이 궁궐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라고 하여 그 조성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931년)은 고려태조를 맞아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재위중(632-647)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是王代鍊石築瞻星臺)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것 중의 하나로, 천문관측용 이다. 첨성대의 돌의 갯수가 365개로 1년 365일을 뜻하며, 첨성대 문의 아래 위로 돌이12단씩 쌓여있어 이는 12개월과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첨성대의 문을 통하여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4절기를 판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인하여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 보기에도 위태하였다.
분황사(芬皇寺)는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된 신라 7가람 중 하나로 원효, 지장등 한국 불교의 중심이 되었던 고승들이 거쳐간 사찰이다. 경내에는 전탑을 모방한 국보 제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으며, 신라시대의 석탑으로는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웃에 있는 황룡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 사찰이었다.
황룡사지는 553년에 시작하여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했다. 궁궐을 지으려다 누런 용이 나타나 절을 세웠다는 설화로 전해온다. '신라의 땅이 곧 부처님이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며,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신라의 세 보물(신라삼보) 중 둘을 가지고 있었던 절로 황룡사 9층목탑과 장륙존상이 그것이다.
선덕여왕은 향기 나는 여인으로 신라인들이 가장 칭송하는 여왕이었으며,재위 16년간 분황사와 첨성대를 세웠고,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 건축의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였다. 선덕여왕은 뒷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삼국 통일 하는데 기초를 닦았으며, 죽은 후에는 유언대로 영험한 산으로 알려진 낭산에 묻혀있다.
선덕여왕릉 주변에는 울울창창한 안강 소나무들이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삥 둘러쳐져있다. 안강소나무는 멋대로 자란 소나무로 뒤틀리고 연약하여 상품가치가 없는 못생긴 소나무를 말한다. 선덕여왕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정조로 자란 나무들로 수호신 역활을 자청하고 있다. 선덕여왕님이 너무 좋아 흥에 겨운듯 여기저기서 멋들어진 춤사위를 펼친다.
불국사는 751년 (경덕왕 10)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로 다보탑, 석가탑,청운교, 백운교및 연화교,칠보교 등 경내의 조형물 하나하나가 신라 불교 미술의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법당과 탑이 서있는 기단 위의 가람 자체가 불국을 상징하고 있다. 특히 연화교는 각 계단마다 연꽃봉오리 무늬가 새겨져 있어 관광객들의 시선을 압도하였다. 세계 건축가들도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불국사를 빠져나와 추령재 정상에 위치한 백년찻집으로 향하였다. 황용동 삼거리(왕의 길)에서 하차하여 자전거로 500m 오르막길을 따라 이동하면 백년찻집에 당도한다. 추령재는 해발 310m로 경주시 황용동에서 양북면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추령터널과 불국사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감포로 가는 유일한 통로가 추령고갯길 이어서 사람의 통행과 차량행렬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한적한 고개로 변하였다고 한다.
백년찻집은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로 고즈넉한 정취를 품고 있다. 백년찻집은 커피를 제외한 다양한 차를 서비스하고 있으며, 그 중 제일 비싼 백년차를 맛보며, 바깥 풍경과 함께 낭만에 젖어든다. 한방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으며 속이 따뜻하고 온기가 올라와 건강 보양식으로 안성맞춤 이었다.
한적하고 백년찻집이 있는 추령재, 감포로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답다.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에서두 세 손가락안에 들 아름다운 길로 꼽았다.추령재 정상에서 S자형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져, 10분간 신나게 달린다. 경감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안동교차로에서 토함산로로 접어든후 와읍교차로에서 감은로를 따라 계속 이동하면 감은사지에 당도할 수 있다.
감은사(感恩寺)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위치한 절로,682년(신문왕 2)에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사지의 부근인 동해 바다에는 문무왕의 해릉(海稜)인 대왕암이 있다. 감은사 금당의 기단 아래에 공간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부합한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에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682년 신문왕은 동해의 호국용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으로 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문무왕이 죽기전에 아들 신문왕에게 피리를 건네며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피리를 불어라 그러면 내가 용이되어 나타나겠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뒤 이절은 황룡사,사천왕사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이어져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동탑, 서탑) 2기가 있으며, 서탑엔 '봉황'이, 동탑엔 '죽어서도 용이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을 상징하는 '용 '장식이 있다.
동탑의 방위가 동해구 문무대왕릉에 직접 연결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국 삼국통일의 위업자 문무대왕은 재가불자의 상징 인물이 된 '유마힐거사' 처럼 추앙된게 아닐까. 그러니 죽어서도 그 사리가 호국사찰인 감은사 동탑 사리함에 봉안되어 부처님의 사리(서탑)와 어께를 나란히 하여 나라를 지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감은사를 뒤로한 채 대본 삼거리에서 대종교를 지나 동해안로로 진입하여 이동하면, 대왕암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동해 바다에 솟은 바위가 보이는데 이곳이 문무대왕암 이다. 문무대왕의 위대한 호국정신을 생각하면서, 잠시 머무르다가 차량에 탑승하고 구룡포(九龍浦)로 향하였다. 일망무애한 바다가 파아란 하늘과 어울려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렀다. 바닷 바람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으며, 흰포말을 뿜어내는 파도는 해안가를 철석철석 부딪치는 소리가 와랑와랑 들려오고 있었다.
포항의 구룡포는 과메기로 유명한 곳이다. 구룡포에서 게의 귀족이라 불리는 박달대게로, 부산 횟집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박달대게는 주로 독도수역에서 어획하며, 살은 80% 이상 꽉찬 것으로, 8개의 다리가 대나무통 처럼 길다고 해서 대게라고 불린다. 박달나무 처럼 속이 실하다는 박달대게는 비싸지만 한 마리를 서너명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속이 알차다. 살이 쫄깃쫄깃하고 담백하면서도 독특한 향기가 나 뒷맛이 무척 개운하여 별미중의 최고 별미다. 대게를 먹은 후에는 대게 뚜껑의 장으로 볶음밥이 나오는데 어찌나 맛있는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창망대해를 바라보며 격조 높은 식사와 술로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정겹게 이야기 꽃을 피우고, 마지막 목적지인 호미곶으로 이동하였다. 호미곶은 구룡포에서 약 13km로, 차량으로 17분이 소요된다.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 한반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 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천하제일의 명당이라고 하였으며, 육당 최남선은 일출 제일의 조선 십경의 하나로 꼽았다. 새해 첫 날이면 수많은 인파가 희망을 품고 해돋이를 보러 온다고 한다.
호미곶 주변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호미곶 등대와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詩碑)가 있다. 해변의 호랑이상과 손 조형물이 시선을 압도하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바다 ,동해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니 몸과 마음의 피로가 확 풀리고 생기가 용솟음 치는 것 같다. 1박2일간의 짦은 여행을 마치고 오후 4시30분경 귀경길에 올랐다.
성동고 16회 바이콜릭스(Bikeholics)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