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세 생신잔치를 맞으신 어머니(우측)
어느 조용한 섬마을에 술 한말을 지고 가라면 못가도 먹고 가라면 갈 수 있는 술고래가 있었다.
적지 않은 농사일이 고달프긴 해도 술벗을 사랑하여 하루가 멀다하게 술타령은 물론이고
늦은 밤 시간에도 술친구 서넛은 데리고 집으로 들이닥쳐 안주를 내놓으라고 성화를 하시는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니 그 뒷바라지를 해야 하시는 어머님의 속내는 어땠을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입학시험을 치르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시골이긴 해도 지역 내 4개 초등학교가 모여서 경쟁을 하였는데, 운 좋게도 전체 차석(次席)으로
입학시험 결과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기쁨도 잠시 8남매의 끝에서 두 번째인 내가 입학시험을 치르던 그 해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집은 물론이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말았다.
그러니 중학교에 입학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등록을 못하고 말았다.
차석(次席)이라는 명목으로 당시 수업료의 절반을 면제받았으나 결국은 3,300원을 내지 못해
포기한 것이었다. 뒤늦게 집안 사정을 알게 되신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입학금 전액면제의
특별혜택을 받았음에도 결국은 중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나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을까?
<머슴살이로>
아버지는 입도 하나 덜고 부잣집에 가서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바로 이웃한 동네에 제법
산다는 집으로 나를 머슴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회고에 의하면 “남들 다 보내는 중학교에도 못 보내 기죽고 풀죽어 있을 아이를
어쩌자고 한 입 덜겠다고 머슴살이를 보낸다니, 그것도 바로 이웃동네로…”
미안하신 마음에 평생을 두고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남의 집에서 생활해야 했던 나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두렵고 망설여졌지만 그 시절 아버지의 한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으로
알고 순명했다.
<인정받는 꼬마 머슴>
내가 간 곳은 과수나무는 물론이고 많은 수의 돼지와 닭을 키우는 큰 농장이었다.
아침마다 농장에서 일 할 일꾼들이 십여 명 남짓 모여 같이 아침식사를 하곤 했다.
건장한 인부들 사이에 끼어 앉아 식사를 마친 필자에게 마님은 “김 군은 잠깐 남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일꾼들이 다 나가고 나면 주판 하나를 주시면서 장부책을 펼치시고는
숫자를 쭉 부르시면 나는 합계를 맞추곤 했다.
초등학교시절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1시간 전에 등교해서 주산을 배웠던 나는 그로 인해
주인집 마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며칠에 한 번씩 하던 이 일을 통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나름 인정을 받은 필자에게
마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다음 날 아침에는 특별히 하얀 쌀밥을 수북이 퍼서
앞에 놓아주시곤 했다.
나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고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할 탓이라는 소중한 교훈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서 3개월은 금세 흘러갔다.
하루는 점심때가 다가오자 닭모이를 배합해서 물지게에 지고 닭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석유를 사기 위해 농장을 방문하던 초등학교시절 같은 반 동네 친구와 마주쳤다.
당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밝히던 시절이라 등잔에 넣을 석유를 이 집에서 사곤했다.
먼 발치에서도 친구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나는 창피한 마음에 지고 가던 지게와 닭모이통을
급하게 내동댕이치고 도망가 숨어버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친구가 부럽기도 하거니와 어린 나이임에도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금의환향 錦衣還鄕>
세월이 흘러 도회지로 나간 나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마침내
수업료 걱정이 없는 사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하게 되었다.
휴가 중에 사관생도 제복을 입고 머슴살이 3개월의 추억이 서려 있는 농장을 찾았다.
나의 깜짝 변신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시던 마님이 씩씩하고 당당하게 거수경례를 하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맨발로 뛰어나와 두 손을 꼭 잡고 눈물까지 글썽이시면서 반겨주셨다.
“네가 예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김 군이냐?” … 어느새 가슴이 먹먹해졌다.
술도깨비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한순간에 그 많던 전답을 빚잔치로
날리고 어린 아들 중학교에 못 보내 안타까워 하셨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머슴으로 보낸 아버지의 처사를 생전에 두고두고 원망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은 “너의 아버지의 주책” 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아버지의 주책(?) 때문에 살아야 했던 3개월의 머슴살이가 오히려 성장하면서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그리고 부모님이 새삼 보고 싶어진다. 끝.


첫댓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셨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