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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내․외’ 문제를 통해 정다산의 『중용』 해석을 논함
1. 문제제기
동아시아의 유학사상은 역사적으로 양대兩大 계열이 있었는데, 하나는 내재적 심성이론을 강조하는 계열과, 다른 하나는 외향적 경세사상을 강조하는 계열이다. 중국에서 송유宋儒들이 말한 도통설道統說의 배열순서에 근거하면,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로 부터 다시 맹자에 이르기까지의 심성론을 위주로 하는 유가사상이 수립되었지만, 맹자 사후 이 도통은 전수되지 못하였고, 송유들이 출현 이후에야 비로소 ‘심성의 학문[心性之學]’이 세상에 크게 밝혀졌다. 이 계열의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심성지학’이 ‘근본[本]’이며, 사공事功과 경세經世는 ‘말단[末]’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심성을 벗어나서 사공事功을 말한다면, 그것은 곧 패술覇術로 흐르게 된다고 본 것이다.
상대적으로 경세와 사공事功을 주장하는 일파의 유학자들은 심성지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에 대해 매우 불만이었다. 그들은 유가의 학설은 경세치용을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심성을 담론하는 학문은 모두 현실과 괴리된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의 자극과 영향을 받아서 불교․도가의 교리로 유가경전을 해석한다면, (유학자들이) 담론한 이理는 모두가 공허한 이치에 불과하며, 유학의 용用도 끝내는 무용無用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송․명 이학理學에 대하여 ‘겉으로는 유학자인 듯하지만, 속으로는 부처를 떠받든다.’고 하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유학사에서 ‘심성心性’을 중시하거나, 혹은 ‘경세經世’를 중시하는 서로 다른 경향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일본의 덕천막부德川幕府 시기의 유학은 주자학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었지만, 동시대의 고학파古學派 학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등은 주자朱子(熹․紫陽․文公, 1130~1200)의 심성지학을 위주로 한 이론체계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전개하였으며, 그 사상적 귀착점은 한편으로 선진先秦시기 유가경전을 통해 공자와 맹자에게로 소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공事功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한국 유학도 역시 주자학이 주류가 되었다. 이퇴계李退溪(滉, 1501~1570)와 이율곡李栗穀(珥, 1536~1584) 등의 위대한 유학자들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정다산丁茶山(若鏞, 1762~ 1836)은 유가의 경전을 해석할 때 항상 주자의 학설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그가 정조正祖 13년(1789) 28세 때 저술한 대학강의大學講義나, 순조純祖 15년(1815) 54세 때 저술한 대학공의大學公議 등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자가 교정한 대학大學의 경經1장章, 전傳10장章의 순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주자가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교정한 것이나 기타 심성이론에 관한 발휘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산茶山의 경세제민사상經世濟民思想과 실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후대의 학자들이 그를 사공파事功派에 귀속시켜 실증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그릇된 판단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다산의 중용에 대한 해석 가운데 드러난 주지主旨와 가치체계에 대하여 분석하고, 동시에 또한 그의 사상을 동아시아 유학의 배경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 유학의 발전에 있어서 두 갈래 노선이 있었는데, 하나는 향내적向內的 심성지학心性之學을 중시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향외적向外的 경세지학經世之學을 중시하는 것이다. 양자는 각각 중시하는 것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가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주의해야 할 가치가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나 정다산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중시하는 사공학자事功學者였으나, 중용을 주석할 때는 심성지학에 치우친 주자의 학설을 채택하기도 하였고, 때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태도가 현대적으로는 도대체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을까? 동아시아 유학계에 있어서는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 연구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유가의 ‘내․외’와 관련된 문제와 주자의 중용에 대한 해석
유학은 비록 공자 이래 ‘여덟 종류의 유가[儒分爲八]’가 있었다는 학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서 살펴보고, 여러 학자들의 이론에서 징험한 것으로써 대략적으로 말하면, 크게 맹자와 순자의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다. 그들 간의 가장 분명한 차이는, 전자가 인의덕성仁義德性의 내재적 근원을 중시하였다면, 후자는 성왕례의聖王禮義의 외재적 규범을 중시하였다는데 있다. 전국시대 유가의 ‘내·외內外’ 문제와 관련한 여러 가지 변론들은 이와 같은 양대 계열의 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이라는 두 가지 관념을 사용해서 유학의 두 가지 큰 사업을 형용하였는데,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선진유가들이 희망한 체용일치體用一致와 내외일관內外一貫의 공동 이상理想을 설명하였다. ‘의義’가 ‘내內’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外’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맹자孟子와 고자告子간의 변론의 논지 가운데 하나였다. 1993년 중국에서 출토되고 1998년에 간행된 곽점초간郭店楚簡의 「오행편五行篇」에서는 각종 덕목을 ‘안으로 드러남[形於內]’과 ‘안으로 드러나지 않음[不形於內]’의 두 가지 부류로 나누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선진시기 유학의 내․외과제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다.
그렇지만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대한 해석은 비록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유학자는 없었지만, 사실상 ‘내성’과 ‘외왕’의 선후先後와 주종主從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곧 유가학설은 바로 이러한 노선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중용과 대학의 사상적 속성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통 유가의 ‘체용體用’ 관념을 빌어서 말하자면, ‘체용’과 ‘내외’는 서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아주 복잡한 문제이다. 모종삼牟宗三 교수가 쓴 심체와성체心體與性體라는 책에서, ‘심성心性’은 유학의 ‘체體’이지 결코 유학의 ‘용用’이 아니며, ‘체體’는 내성공부內聖工夫를 말하고 ‘용用’은 본체本體의 발용發用을 말하는 것이고, 극치에 이르렀을 때 외왕外王의 사업事業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학이 이처럼 간단하게 ‘체體’와 ‘용用’ 두 가지 개념을 이용해서 ‘심성의리心性義理’와 ‘경세사상經世思想’의 두 갈래 노선을 구분할 수 있을까? 사실상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이전에 중국유가의 체용학설을 대략적으로 구분하여, 아래와 같이 네 가지의 계열로 나눈 적이 있다.
① ‘체體에 몸담고 용用에 몸담음[即體即用]’의 계열 : 이 계열은 체용體用․내외內外가 동시에 관철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명칭에 있어서는 선후의 구분이 본래부터 존재하며, 공부와 실천에 있어서는 선후의 구별이 없다고 했는데, 예를 들면 북송北宋의 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 남송南宋의 육상산陸象山, 명대明代 중엽의 왕양명王陽明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들은 천인합일天人合一 관념을 중요시하고, 사람은 자신의 내․외를 한결같이 투명하게 하며, ‘격물·치지·성의·정심[格致誠正]’의 공부는 집안과 국가 그리고 천하의 일로 행해야 하며, 이른바 ‘수신·제가·치구·평천하[修齊治平]’도 역시 항상 마음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② ‘체體에 밝고 용用에 달통함[明體達用]’의 계열: 이 계열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대립을 특별하게 구별하여, 내재적으로 품수稟受한 자신의 천리天理의 선성善性을 외재적 세계와 대립시켜, 이미 성체性體의 지선至善한 본원本源으로써 사공事功의 용用에까지 관철시켰으며, 또한 성체性體의 지선至善한 본원本源으로 사심私心의 패업霸業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 계열은 정이와 주희가 그 대표자이다.
③ ‘체용이 모두 예악제도에 갖추어져 있음[體用俱在禮樂制度]’의 계열: 이 계열의 유학자들은 심성지학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논쟁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며, 혹 오로지 유가 문헌을 연구하거나, 혹 오로지 경세사공經世事功을 주장하거나, 혹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문화의 기초를 강조한다. 한漢과 당唐 두 왕조 시대에 이러한 계열의 유학자들이 매우 많았다.
④ ‘용用 가운데 체體가 드러남[用中見體]’의 계열 : ‘경세經世’와 ‘사공事功’ 일파一派의 학자들 가운데 일부분은 형이상학적 심성론心性論과 공부론工夫論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체體’는 ‘용用’을 떠나서 단독으로 인식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실제적인 ‘사공事功’과 ‘경세經世’의 업적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체體’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말할 때, 이 계열에서는 사실상 ‘체體’와 관련해서는 토론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
이상에서 기술한 네 가지 계열에 대해서 말하면, 사실상 두 가지 종류의 체용관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와 둘째 계열은 송․명유학이 위주이며, 그 특징은 체體가 주主가 되고, 용用이 보조가 되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 계열은 한대漢代와 청대淸代의 유학자들이 위주이다. 청대 유학자들의 예를 들면, 그들은 송․명 시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이학가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특징은 실용을 중시하면서 ‘체體’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거나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중국의 위대한 유학자 주자朱子와 한국의 위대한 유학자 정다산丁茶山을 비교해 보면, 그 사이에서 특수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주자의 사상은 주자 사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전파되었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유가사상의 중요한 지표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한국의 유학자들이 주자사상을 흡수하여 유가 경전을 해석할 때, 그들은 시작부터 자신들만의 문제의식과 해석 방법 그리고 사상적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는 ‘명체달용明體達用’의 계열에 속하며, 먼저 향내向內적인 성체性體 공부를 중시할 것을 강조하고, 다시 향외적向外的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공功을 추구하였다. 송사宋史‧도학전道學傳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희朱熹의 북벌방략北伐方略을 기록하고 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반드시 먼저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사물의 변화를 다하여 의리義理가 있는 곳을 끝까지 자세하게 밝힌다면 자연히 뜻이 정성되고, 마음이 바르게 되어 세상의 사무事務에 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자신을 닦고 남을 물리치는[修攘] 계획에 때가 정해지지 않은 것[不時定]은 강화講和하자는 말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금金나라 사람은 우리에게 있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니 화명和明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의리義理의 공정함으로 결단하여 관문을 닫고 조약을 파기하고, 현자를 임용하고 유능한 자를 시켜서 기강紀綱을 세우고, 풍속風俗을 바로잡으면 수년數年 뒤에 나라는 부유하고 군사력은 강성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힘의 강약强弱을 살펴보고, 상대 결점의 얕고 깊음을 관찰하여 천천히 일어나 그 일을 도모하십시오.
이 방략을 보면, 주자朱子의 중점은 여전히 제왕이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의意를 정성스럽게 하며, 심心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수양지계修攘之計’는 도덕수양道德修養을 행하는 공부工夫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북벌北伐’에 관해서는, 국내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린 이후에, 다시 ‘서서히 일어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다. 전체적 절차는 곧 다음과 같다.
제왕격물치지帝王格物致知→ 임현사능任賢使能․입강기立綱紀․여풍속厲風俗→ 국부병강國富兵强→ 서도북벌徐圖北伐
주희도 역시 아주 분명하게 외세를 물리치려고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외세를 물리치기 이전에 반드시 먼저 나라 안을 평안히 해야 하며, 그로써 국가의 방향이 영원히 ‘유학정통儒學正統’의 가운데 자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자가 임금의 ‘같은 하늘 밑에 공존할 수 없는 원수[不共戴天之仇]’에 대해서 도덕수양을 우선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여 ‘서서히 일어나 도모하라’고 한 말을 보더라도, 그의 사상의 대전제가 심성의 ‘체體’를 밝히는 것이지, 경세의 ‘용用’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정다산丁茶山의 사상思想은 줄곧 주자朱子의 사상과 다르다고 인식되어 왔다.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는 반드시 ‘다산이 주자에 동의했다’고 하거나 혹은 ‘다산이 주자에 반대하고 있다’고 하는 어느 한 생각을 마음속에 먼저 가지지 않아야 하며, 반드시 실사구시實事求是로써 관찰하고,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 해석을 통해야만, 아마도 다산이 해석한 중용사상의 특색을 대조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자의 중용에 대한 해석은, 당연히 그의 이기관理氣觀과 공부론工夫論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이 우리가 주의할 만한 것으로, 우선 중용의 의미 전환에 관한 순서의 배열의 문제이고, 그 다음은 이 의미상의 배열을 기준으로 중용 공부의 본말本末과 체용體用을 일관하는 이론구조를 건립하는 것이다. 의미의 전환에 의한 순서배열의 부분에 관해서, 주자의 이론구조는 결코 복잡하지 않은데, 그는 중용을 아래와 같이 여섯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① 제1장 : 자사子思가 전傳의 뜻에 따라 조술하여 입언立言한 것이다.
② 제2장부터 제11장 :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장章(필자주: 제1장)의 뜻으로 끝낸 것이다.
③ 제12장 : 자사의 말은 수장首章의 ‘도불가이道不可離’의 뜻을 되풀이 하여 밝힌 것이다.
④ 제13장부터 제20장 : 공자의 말을 뒤섞어 인용하여 밝힌 것이다.(필자주: ‘도는 떨어질 수 없음(道不可離)’을 밝힌 것이다.)
⑤ 제21장 : 자사가 위 장章에서 공자가 말한 천도天道․인도人道의 뜻을 이어서 입언立言한 것이다.
⑥ 제21장부터 제23장 : 자사의 말은 이 장章(필자 주 : 제21장)의 뜻을 따라 반복하여 밝힌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를 종합하면, 중용의 모든 내용은 두 가지 부분을 포괄하고 있는데, 한 부분은 자사의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서술한 부분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주의해야 할 부분은 제1장을 잇는 주자의 해석이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右는 제1장이다. 자사子思가 전傳의 뜻에 따라 서술하여 입언立言한 것으로, 맨 먼저 도道의 본원本原이 하늘에서 나와 바뀔 수 없음과 그 실체實體가 자기 몸에 갖추어져 떠날 수 없음을 밝혔고, 다음에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요점을 말하였고, 끝으로 성신聖神의 공화功化의 지극함을 말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자기 몸에 돌이켜 찾아서 스스로 터득하여 외부유혹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本然의 선善을 충만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유전되고 있는 이 단락의 글에서, 주자는 특히 두드러지게 모든 ‘덕성지지德性之知’의 근원根源이 천天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동시에 완전하게 ‘자신自身(self)’안에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할[反求諸身]’ 때만이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유학자는 반드시 ‘외부유혹의 사사로움[外誘之私]’을 근절하고, ‘본연지선本然之善’의 확충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자의 지식에 대한 정의와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에 관련된 중요한 의문이 생기는데, 이른바 ‘외유지사外誘之私’는 물욕의 유혹을 제외하고, ‘자신自身’ 이외의 외재세계外在世界에서 찾아낸 지식을 포함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문장의 뜻에 따라 고찰해 보면, 이 문제의 해답은 긍정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는 ‘자신自身’ 이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공부하는 이는 반드시 진리를 구하는 대상을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전환하여야 ― 곧 ‘자신에게 돌이켜 구함[反求諸身]’의 ‘돌이킬 반反’을 운용해야만 ― 비로소 진지眞知를 ‘자득自得’할 수 있다. 만일 공부하는 이가 진정한 진리가 외재사물外在事物의 이치를 인식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앞으로 심성心性의 ‘본연지선本然之善’을 확충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외유지사外誘之私’는 곧 필연적으로 외향적 지식추구 활동을 포괄한다.
비록 이상에서 서술한 분석이 완전히 주자의 짤막한 주해에 의거하여 진행된 것이지만, 독자들은 아마도 여전히 의혹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주자는 대학장구大學章句 ‘격물보전格物補傳’에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대개 인심人心의 신령함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다. 다만 이치에 대하여 궁구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로 인하여 더욱 궁구해서 그 극極에 이름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아침에 활연豁然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표리表裡와 정조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요, 내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 단락에서 드러난 주자 교학의 종지는 ‘오늘 하나의 사물을 끝까지 알고, 내일 또 하나의 사물을 끝까지 안다[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고 하는 ‘사물에 즉하여 이치를 궁구함[即物窮理]’의 여정이다. 그런데 앞서 기술한 중용장구中庸章句의 해석은 거의 양명의 ‘심즉리心即理’와 일치한다. 이와 같이 대조해보면, 우리는 마치 두 가지 다른 형상을 가진 주자朱子를 보는 것 같다. 하나는 외재한 ‘물리物理’가 자신의 ‘영명靈明’을 촉발하는 활연관통의 필수적 요소임을 강조했던 측면의 주자이며, 다른 하나는 ‘본연의 선[本然之善]’의 충실充實함에 의지하여 ‘외부 유혹의 사사로움[外誘之私]’(객관적 지식을 포함하여)을 버리기를 강조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서로 다른 주자의 형상이 대치對峙하는 것으로, 우리는 또한 마치 한순간에 사백 여 년 전 학술계에서 그간 내던져 버렸던 ‘주자만년정론朱子晚年定論’의 쟁론 속으로 뛰어 든 것 같다. 왕양명이 ‘주자만년정론’을 제기한 이래, 분명히 적지 않은 학자들이 양명의 관점에 동의하였고, 주자는 초년에는 사사물물事事物物에서 리理를 구하고 만년晩年에는 이를 돌이켜 후회하고, 오로지 심체心體에서 발명發明하고자 하였다. 사실상 전적으로 주자를 공격하는 것만을 일삼았던 청대淸代 모서하毛西河(奇齡, 1623~1716)가 편찬한 절객변학문折客辨學文에서 조차도 양명의 ‘심즉리心即理’라는 교의敎義가 실은 주자의 중용 주해에서 발휘해낸 것이며, 다만 주자가 심즉리나 치양지致良知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비록 주자가 중용의 제1장 장구章句중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자사가 전한 본래 뜻이 “외유지사外誘之私를 제거하고, 그 본연지선本然之善을 확충한다”는 것임을 가리켜 말하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중용의 전문全文을 통독通讀해 보면, ‘성誠’․‘독獨’․‘중中’․‘성性’ 등의 심체心體와 성체性體에 관련된 중요한 개념의 자세한 해석을 제외하면, 훨씬 많은 내용이 국가의 예악제도와 연관된 ‘천자의 일[社群之事]’과 천자의 도리[社群之理]를 논하지만, 심성心性의 문제와는 거의 직접적 관련은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주자는 장구章句에서 나눈 제18장에서 문왕文王의 일과 주공周公이 “대왕大王과 왕계王季를 왕王으로 추존하고, 위로 선공先公들을 천자天子의 예禮로 제사 지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사례야斯禮也’ 이하의 단락은, 아비가 대부大夫이며, 자식이 사士라는 전제하에, 어떻게 상장례喪葬禮를 진행하는가의 문제를 거침없이 설명하고 있다. 또 제19장의 예를 들자면 ‘종묘지례宗廟之禮’를 논의하면서 작위의 순서와 연령별 순서, 일의 차례 등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제20장에서는 공자孔子가 애공哀公이 정사를 물어온 일을 말하면서,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다스리는 데는 구경九經이 있다”고 한 것을 언급하였으며, 제13장에서는 존친배천尊親配天의 원리를 논하였으며, 제33장에서는 시경詩經의 여러 가지 뜻을 발휘하고 군자지도君子之道와 천도天道가 일치함(이른바 “군자君子가 돈독하고 공경스러우면 천하天下가 평안하다”는 것과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것) 등등을 검증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 유가의 예교주의禮敎主義가 필연적으로 포괄하는 군체윤리群體倫理의 강목에 대한 분석이며, 그러나 이미 앞서 기술하였던 ‘성誠’․‘중中’․‘성性’과 같은 심성관념心性觀念의 해석을 겨냥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주자의 해석 가운데는 이처럼 경세의 차원에 속하는 군체윤리群體倫理의 핵심적 준칙이 여전히 인심人心의 ‘본연지선本然之善’을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자가 중용장구中庸章句 중에서 분명히 모든 진리에 대한 해석을 심성이론心性理論의 발휘에 두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이 곧 리다[性即理]’와 ‘성은 (희노애락)이 발동하지 않은 중中이다[性爲未發之中]’라는 명제에 관련된 주자의 일관된 주장에 속하는 내용들은 번잡하게 늘어놓지 않겠지만, ‘심心’에 관련 된 부분은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 조목의 장구章句 내용을 예로 들어서, 전체적인 모습을 추론해 보고자 한다.
① 도道는 일용사물日用事物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인데, 모두가 성性의 덕德이며 심心에 갖추어져 있고, 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물이 없으며, 그렇지 않은 때가 없어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② 나의 심心이 바르면, 천지지심天地之心 역시 바르게 될 것이며, 나의 기氣가 순順하면, 천지지기天地之氣 역시 순順하게 될 것이다.
③ “선善에 밝지 못하다”는 것은, 인심人心과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을 살펴서 지선至善의 소재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④ 성誠이 지극하여 한 터럭만큼의 사사로운 거짓도 심중에 남겨두지 않는 이가 마침내 그 기미를 살필 수 있다.
⑤ “미미하면서도 드러난다”는 것은, 내재되어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다섯 단락의 문헌文獻은 모두가 ‘심心’의 주체성,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의리義理와 예악禮樂의 본원本源이 모두 ‘심心’에 있음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조목인 ‘치중화致中和’를 해석하면서, 주자는 ‘심心’이 ‘천지天地’의 기氣의 기초가 된다고 하여, 천지지심天地之心이 바른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천지지기天地之氣가 순順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결국 모두 나의 심心이 바르고 기氣가 순順한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직접적으로 생각하였는데, 바로 이런 까닭에 전기박錢基博(역자주 : 1887~1957) 등이 주자朱子의 중용中庸 주해注解가 일찌감치 ‘심즉리心即理’의 학설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유학의 ‘인의仁義’의 설說은, 결국에 가서는 맹자가 말한 바와 같이 내재적인 심성을 확충해서 복잡한 인류사회에 절대적 도덕준칙을 마련한 것인가, 혹 그렇지 않으면 순자가 말한 바와 같이 역사의 발전을 따라서 예악제도禮樂制度가 점차 형성된 것이 성왕이 건립한 객관적 윤리규칙으로 말미암은 것인가와 같이 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쟁점이 되었다.
3. 다산의 중용해석의 여섯 가지 특색
정다산은 중용을 해석한 두 권의 저작을 남겼는데, 중용강의中庸講義(이하 강의講義로 간략하게 부른다.)와 중용자잠中庸自箴(이하 자잠自箴이라 간략하게 부른다.)이 그것이다. 현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2집, 제4권에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1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두에는 뜻 깊은 저술의 배경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건륭乾隆 계묘癸卯 봄(1783년)에 나는 경의진사經義進士로 태학太學에서 수학하였다. 그 다음해인 갑진甲辰 여름<原注:내 나이 23세>에 중용의문中庸疑問 70조가 내강內降되어 태학생으로 하여금 조목에 따라 답변하도록 하였다. 당시 망우亡友인 광암曠菴 이벽李檗이 수표교水標橋 근처에서 독서讀書하고 있었기에<原注: 당시 31세>. 그에게 가서 대답할 방법을 물었다. 광암은 기꺼이 토론하여 서로 초고를 작성하였는데 돌아와서 살펴보니 간혹 이치는 살아 있으나 말이 위축된 것은 자기 뜻에 따라 산윤刪潤하였다. 마침내 예람睿覽을 거치게 되었다. 그 뒤 며칠이 지나서 도승지都承旨 김상집金尚集이 승지承旨 홍인호洪仁浩에게 말하기를 “정약용丁若鏞이 누구이며 그의 문학이 어떠하기에 오늘 경연에서 임금이 ‘반유泮儒(성균관유생)의 답변이 거의 황당무계하지만 오직 정약용의 답변이 특이하다.’고 하니 아마 필시 유식한 선비일 것이다.”하였다.
동유東儒의 이발기발론理發氣發論에 대하여 나의 대답은 성인의 마음에 묵계함이 있어서이지 다른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병오丙午(1786) 여름에 광암曠菴이 타계하였다. 그 뒤 8년이 지난 계추癸醜 가을에 내가 명례방明禮坊(현재 명동)에서 탈고脫稿를 마쳤으나 대답한 것이 견강부회牽强傅會하여 본지本旨에 위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경嘉慶 신유辛酉 겨울에 내가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14년이 되던 갑술甲戍에 대계臺啓가 비로소 그쳤으나 사서赦書가 중간에 막혔다. 당시 나는 다산에 있었는데 그 때 중용자잠中庸自箴 2권을 지었다. 처음에 갑진甲辰년 구고舊稿를 가지고 재차 산윤刪潤을 가하여 본지本旨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따라서 고치고, 임금이 묻지 않았던 문목이라도 의리상 변론해야 할 것이 있으면 참고하여 단락을 나누고(按節) 증보增補하니 모두 6권이다.
정답게 노닐던 때 이미 옛날이요, 아름답던 목소리도 영영 잦아졌구나. 이미 물을 곳이 없고 광암과 토론하던 시절 헤아려보니 또한 30년이 흘렀구나. 광암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면 그 높은 덕과 넓은 학문이 어찌 나와 비교가 될 것인가. 신구新舊 두 책을 함께 훑어보니 마음이 처연하네. 한 사람은 살아 있고 한 사람은 갔으니 탄식한들 어이하리. 책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 금할 길이 없구나. 갑술甲戌년 칠월七月 그믐에 다산茶山에서 쓰다.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건륭乾隆 계묘癸卯는 건륭 48년(1783)이며, 건륭 갑진甲辰은 건륭 49년(1784), 건륭 계축癸醜은 건륭 58년(1793), 가경嘉慶 신유辛酉는 가경 6년(1801), 가경 갑술甲戍은 가경 19년(1814)이다. 이 글로부터 우리는 다산이 정조 8년(1784), 다시 말해 23세 되던 해부터 중용에 대해 명확한 해석을 해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정조가 중용의문中庸疑問에서 제기했던 칠십여 가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팔 년이 지나고 나서(1793) 그는 그 가운데 흠결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다시 순조 14년(1814) 다산 (당시 53세)은 중용자잠中庸自箴을 지었는데, 이는 1784년에 완성했던 원고를 윤색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2집, 제3권에 수록된 자잠自箴 1권과 동집同集, 제4권에 수록된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1권은, 강의講義가 이미 상당 부분 일실逸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현존하는 강의보講義補와 자잠 각 1권에만 의거한다 할지라도, 역시 다산의 중용 해석이 가진 창조적 견해는 충분히 분명하게 발견해 낼 수 있다.
우선 다산은 중용이라는 책과 중국의 역대歷代 중용에 대한 주해注解와 전승 상황, 그리고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편찬한 중용자잠中庸自箴과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두 저작에서, 약간의 해석은 주자의 해석과 일부 부합하는 부분은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깊이 있게 고찰해보면, 주자와 다른 관점이 훨씬 많다.
1) 사람과 사물을 구분해서 음양을 논함
주자朱子 이기관理氣觀의 주제는 “이理와 기氣는 서로 분리되지도 않고 뒤섞이지도 않다[理氣不離不雜]”는 것이다. 그는 음양陰陽을 형이하形而下의 ‘기器’로 생각하였고, 일음일양一陰一陽하는 까닭을 형이상形而上의 ‘도道’라고 생각했다. 후자는 초월적 ‘이理’의 층차에 속하는 것이고, 전자는 경험적 ‘기氣’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와 기의 ‘뒤섞이지 않음[不雜]’이다. 그러므로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천天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하고, 기氣로써 형상을 이루게 하였으며, 이理를 또한 부여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주자의 주지主旨는 대자연의 ‘이理’는 인류가 천명天命으로 품부 받은 ‘성性’과 연계되기에, 선성善性은 천리天理에서 근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화氣化의 세계를 초월하고, 또한 인성人性에 내재한 ‘이理’관념을 이론적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는 다시 대자연의 ‘오행’과 인성人性의 ‘오행’을 서로 대조하여, 덕성德性의 오행五行(仁·義·禮·智·信)은 자연自然의 오행(金·木·水·火·土) 으로부터 품부 받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氣(自然의 五行)가 형성되어 있으면, 이理(德性의 五行) 역시 거기에 부여되었다”는 말을 경험적 측면에서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기理氣’의 ‘(서로) 분리되지 않음[不離]’을 설명한 것이다.
다산은 한편으로는 ‘기氣’의 변화를 ‘음양陰陽’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또 음양의 기화氣化로 만물이 형성되고 그 안에 역시 ‘이理’가 품부되었다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그는 ‘음’과 ‘양’이라는 명칭은 햇빛이 비추는 것에서 기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음양陰陽의 이름은 일광日光의 비춤과 가려짐에서 생겼다. 해가 숨으면 음陰이고 해가 비치면 양陽이다. 본래 체體와 질質이 없고 다만 명암明闇만이 있으니 원래 만물의 부모가 된다고 할 수 없다.
다산은 햇빛이 비추는 곳을 양陽이라고 하고, 어둡고 햇빛이 없는 곳을 음陰이라고 한다고 생각하였다. 대지와 만물은 북극에서 남극에 이르기까지 방위의 전이에 의해서 각각 처한 곳에 따라 얻는 음과 양은 다소多少와 강약强弱이 모두 서로 다르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음과 양은은 순환하고 또한 각각 그 마땅함을 얻는다. 이것은 지면의 층차에서 음양을 말한 것이다. 이밖에 또 우주적 음양이 있는데,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유先儒는 천天에 원래 두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땅으로부터 위를 ‘천天’이라고 하였고, 하나는 창창蒼蒼한 대환大圜을 ‘천天’이라 하였다. 창창한 하늘을 논하면 그 질質이 비록 모두 청명清明하지만 또한, 음양이기陰陽二氣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해[日]를 태양太陽, 달[月]을 태음太陰이라고 한다. 태양은 순전히 불[純火]이며, 태음은 순전히 물이다[純水]. 오성열요五星列曜는 그 성性이 각기 달라 차기도 하고 빛나기도 하며, 건조하기도 하고 습하기도 하다. ……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상천하천上天下天, 수화토석水火土石,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오히려 만물萬物을 열거한 것이다. 하물며 동철초목銅鐵草木이 나아가 만물을 낳을 수 있겠는가?
이 단락에서의 다산의 뜻을 주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해와 달로 음양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오행이 화생해서 만물이 된다는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가 주자의 의사를 겨냥해서 제기된 것이다. 다산이 보기에는 음양은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해와 달의 광선이 지구를 비추는 것은, 다만 자연현상일 뿐 만물을 화생하는 기화氣化의 본원本源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영명靈明으로 천리天理를 논함
다산과 주자 사이의 극단적으로 다른 점은 천리天理의 관념觀念에 있다. 우선 다산은 ‘인人’과 ‘물物’은 동등하게 볼 수 없다고 보았으며, 기타의 생물들은 각각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이[生生之理]’로 성명性命을 온전하게 얻었을 뿐이지만, 인류는 이와는 달리 ‘영명靈明’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초목금수草木禽獸는 하늘이 화생化生하는 처음에 생생生生의 이理를 부여하여 종種으로 종種을 전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온전히 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아 천하만민天下萬民이 각자 배태胚胎할 처음에 이 영명靈明함을 부여받아 만류萬類에서 뛰어나며 만물萬物을 향용享用한다. 지금 말하는 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은 사람과 물物이 함께 얻어 누구는 주인이 되고 누구는 종이 되어 도무지 등급이 없으니 어찌 상천上天이 물物을 생生하는 이理가 본래 이와 같았겠는가?
그는 또한 오상지덕五常之德을,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여 인류人類에게 형체를 부여할 때 이미 동시에 포함하게 되는 인성人性 중의 선성善性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명칭은 본래 사람의 행사行事에서 시작한 것이며, 결코 마음에 내재된 묘리玄理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에서 받을 때 다만 이 영명靈明함이 인仁이 되고 의義가 되고, 예禮가 되고 지智가 됨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만일 상천上天이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를 인성人性의 중에 부여하였다면 그 실체가 아니다.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오상五常의 덕德을 사물도 함께 얻을 수 있겠는가?
다산은 ‘영명靈明’함으로 인仁할 수 있고, 의義로울 수 있으며, 예禮를 행할 수 있고,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완전히 후천적인 실천의 주동성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것은 일을 행할 때 창조적으로 드러나는 도덕가치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성인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자신의 주관적 염원에 의해서 결정되며, 구체적 일은 행사行事에서 징험徵驗되며, 일종의 ‘현리玄理’와 같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이름은 본래 우리들이 일을 행함에서 비롯된다.”는 두 구절의 뜻은 장실재章實齋(學誠, 1738~1801)가 말한 바 “인의충효仁義忠孝의 이름과 형정예악刑政禮樂의 제도는 모두 그것이 부득이 해서 비롯되는 것이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모두 유가의 여러 가지 도덕가치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인류의 생활경험과 누적된 문화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것이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선험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주자가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솔率’자를 ‘순循’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주자가 비록 ‘솔率’을 ‘순循’이라고 풀이하였지만, 주자가 성性을 논할 때 본래 인人과 물物의 성性을 겸하여 말하였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만물자연萬物自然의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솔率’자에 힘쓴 것이 아니다. 또한 “혹 솔성率性을 성명性命의 이理를 따르는 것이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도道가 사람으로 말미암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본다면 이른바 ‘솔성率性’은,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는 것에 불과하니 아마도 옛날 성인의 극기복례克己復禮의 학문과 서로 부합符合되지 않는다.
‘순循’이라는 글자는 ‘그 스스로 그러함에 맡긴다[任其自然]’와 ‘성명의 이를 따른다[順性命之理]’의 ‘임任’이나 ‘순順’의 의미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극克’의 의미와는 서로 부합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다산의 뜻을 살펴보면, 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암암리에 ‘성선론性善論’의 노선을 벗어나려고 함을 의심하게 한다. 만약 다산이 성선性善을 반대하였다고 한다면 그 또한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다만 확실한 것은 다산이 ‘선善’의 근원이 선험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는 단지 오로지 천성天性을 따르기만 하면 곧 지선至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공부를 한 후에야 비로소 범인凡人을 벗어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3) 기욕嗜欲으로 성性을 논함
이학가理學家들은 일반적으로 ‘이理’와 ‘욕欲’을 상대적인 것으로 거론하면서, ‘과욕寡欲’을 주장하며, 동시에 보편적으로 ‘성선性善’은 내심內心에서 근원한다는 ‘내재초월內在超越’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산은 기호와 욕망으로 성性을 논하면서, 상제와 귀신이 살펴보고 있다는 이론을 제기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주재자로 삼고 있다. 자잠自箴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性’자의 본의에 근거하여 말하면, ‘성性’은 마음의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 서경의 「소고召誥」에 이르기를 “나쁜 성질을 절제시키시면 날로 선善에 매진할 것입니다.” 하였고, <原注: 古傳과 今傳에 모두 食色의 欲이라 하였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게 한다[動心忍性]” 하였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육례를 닦아서 백성들의 성을 절제한다[修六禮 以節民性]” 하였으니 모두 기호嗜好로 성性을 해석한 것이다. 천명天命의 성性 역시 기호嗜好로써 말한 것이다. 사람의 배태胚胎가 완성되면 하늘이 영명靈明하고 무형無形한 체體를 부여한다. 그 물物됨이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을 좋아하고 더러운 것을 수치로 여기는 이것이 바로 ‘성性’이다.
여기에서 다산은 ‘성선性善’을 해석하면서, ‘심지소기욕心之所嗜欲’을 강조하고 있다. 다산은 맹자孟子를 이용해서 증명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막 영명靈明한 전체를 가지고 성性으로 삼을 때 반드시 기호嗜好를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나의 성性은 회와 불고기[膾炙]를 즐긴다,” “나의 성性은 쉬거나 상한 것을 싫어한다,” “나의 성性은 음악을 좋아한다,” “나의 성性은 음란한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니 사람이 본래 기호嗜好를 성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성선性善의 이理를 말할 때 번번이 기호嗜好로써 밝힌 것이다.
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솔率’을 ‘순循’으로 해석한 한 구절을 지적하여 가리켰으며, 그는 ‘극기克己’와 ‘용력用力’을 강조하였고, 결코 방종放縱하는 성정性情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곧 천리天理에 부합할 것을 강조하였다. 본래 그가 ‘기욕嗜欲’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심道心’이 ‘항상 하고자 하는 것[常欲爲]’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심道心은 늘 선善을 하고자 한다. 또 선善을 택하여 한번 도심道心이 하고자 하는 것을 듣게 되면 <原注: 그 욕망을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솔성率性’이다.
이렇게 보면 독자들은 아마도 다산이 ‘임기자연任其自然’을 반대함과 동시에 ‘순기기욕循其嗜欲’의 비유를 강조하고 있어서, 자기모순에 빠지고 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道는 여기에서 저기에 이르는 길이다. 도심道心을 따라서 전진前進하면 요수殀壽를 생각하지 않고 그쳐야 할 곳에 그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이 도道는 태어날 때 법을 세워 죽은 뒤에 도달하는 것이니 책임은 막중하고 갈 길은 멀다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포부[經綸禦世]를 도를 실천하는 것[行道]이라고 한다. 시험 삼아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묻는데도 망연茫然하게 깨닫지 못하면 이것을 부지不知라고 하고 이것을 실로失路라고 하는 것이다. 천하天下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솔성率性의 도를 따르게 한다면 비로소 행도行道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에서 실천하기까지의 전체를 ‘도道’라고 해석한다면,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는 결국 도심道心의 자연히 그러한 것에 방임하는 것이 곧 ‘도道’인가, 아니면 혹 ‘용력用力’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해야만 비로소 ‘도道’인가? 여기에서는 곧바로 ‘도道’가 진리의 법칙으로서 도대체 심성心性 중에 내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혹 내 심성心性 바깥에 외재하고 있는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만약 전자와 같은 해석이라면, 다산은 곧 내재적 초월을 주장하는 것이며(곧 초월성의 가치근원을 갖추어 심성心性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약 후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다산은 곧 내재적 초월을 반대하고, 가치의 근원이 경험세계에 있는 객관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신戒慎․공구恐懼의 문제를 토론해볼 필요가 생긴다. 자잠自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성이 살면서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그 욕심을 쫓아 채우게 되면 방벽사치放辟邪侈를 그만 둘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백성이 감히 드러내놓고 범하지 못하는 것은 계신戒慎하기 때문이며 공구恐懼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계신戒慎하는가? 위로 관아가 있어 법을 집행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공구恐懼하는가? 위로 임금이 있어 주극誅殛하기 때문이다. …… 군자君子가 암실暗室 속에 있으면서도 전전율율戰戰栗栗하며 감히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은 상제上帝가 너를 굽어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명命’, ‘성性’, ‘도道’, ‘교敎’를 모두 일리一理에 귀결시킨다면 이理는 본래 지知가 없으며 또한 위엄과 능력도 없는 것이니 어찌 경계하고 삼가 할 바가 있겠으며 어찌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있겠는가?
다산이 신봉하고 있는 ‘상제上帝’가 여기서 출현하고 있다. 바로 성태용成泰鏞 교수가 언급한 것과 같이, ‘상제上帝’는 다산이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반대하고(사실상 ‘전화轉化’ 또는 ‘소융消融’한 것이다), ‘천리天理’설 대신에 취한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다. ‘상제’ 개념은 다산이 예를 들어 상서尚書와 같은 고적 중에서 일찍이 찾아내어 증명하였고, 그로 하여금 서방의 기독교 신앙 중의 ‘상제’ 개념과 격의의 융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미발지중未發之中’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발未發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의 미발未發이지 ‘심心’, ‘지知’, ‘사思’, ‘려慮’의 미발未發이 아니다. 이때를 당하여 마음을 조심하여 공경히 하며 밝게 상제上帝를 섬겨 항상 신명神明이 옥루屋漏에 비추어 임하듯이 하여 계신공구戒慎恐懼하여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야 한다. 특이하고 격렬한[矯激] 행동과 치우치고 편중된[偏倚] 감정 때문에 오직 마음에 범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싹이 틀까 두려워한다. 그 마음을 간직함이 평안함에 이르고 그 마음이 처함이 바른 곳에 이르러 외물外物의 이름을 기다리는 것이니 이 어찌 천하天下의 지중至中이 아니겠는가?
또 말하기를,
마음을 조심하여 공경히 하며, 밝게 상제上帝를 섬김은 문왕文王이 염려하신 것이니 적연부동寂然不動을 오심吾心의 본체本體를 삼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고 하였다. 다산은 ‘미발未發’이 ‘심지사려지미발心知思慮之未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미발지중未發之中’이 바로 상제上帝처럼 사람의 행위를 감시하고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불사不思’․‘부도不睹’․‘불문不聞’을 논하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도不睹’, ‘불문不聞’은 타인他人이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천지天地의 귀신鬼神이 밝게 퍼져있고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귀신鬼神이라는 물物은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러므로 아래 장에서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한 것이니 바로 이장과 함께 조응照應해야 한다.
‘부도불문不睹不聞’은 귀신鬼神이 굽어 살피는 것이지 어찌 사물事物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암실에서 속이는 마음도 신神의 눈은 번개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이 경經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하늘이 굽어 살핌은 동정動靜에 차이가 없으니 반드시 정좌靜坐한 뒤에 조심하고 공경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은隱’이라는 말은 암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미微’라는 말은 세세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장에서는 “은미함보다 잘 드러남이 없다”고 하였고, 귀신장鬼神章(중용 16장)에서는 “은미함이 드러남이여”라고 하였고, 의금장衣錦章(중용 33장)에서는 “은미함이 드러남을 안다”고 하였고, 비은장費隱章(중용 12장)에서는 “비費하고 은隱하다”고 하였으니 모두 ‘부도불문不睹不聞’을 은미隱微로 본 것이다. 정말 귀신鬼神의 체體를 사람이 보지 못하고 귀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지극히 은隱하고 지극히 미微한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나 강감降監하는 위엄이 마치 그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은 그 좌우左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은隱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微보나 나타남이 없다’는 것이다.
다산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귀신감림鬼神鑒臨’은, 또한 ‘천지감림天之鑒臨’이라 한 것이며, 위의 문장에서 말한 ‘상제임녀上帝臨女’이다.(필자가 보기에 ‘여女’는 곧 ‘여汝’이다.) 이로써 ‘상제上帝’와 ‘천天’그리고 ‘귀신鬼神’은 의미가 서로 동일한 것이다. 곧 다산의 천리관념天理觀念과 그의 종교신앙宗敎信仰은 실로 매우 일치하는 것이다.
4) 본말과 선후로‘격물치지’를 논함
주자朱子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즉물궁리即物窮理’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대학장구大學章句, 「격물보전格物補傳」에서 보인다. 주자는 사실 ‘이理’의 전체全體가 바깥에 있다고 결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천하天下의 사물事物’은 이 ‘이理’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인심人心의 허령함’이 이 ‘지知’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사실 하나의 정체整體이기 때문이다. 주자가 이른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이理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인류가 처음 태어날 때의 심령心靈이 ‘전지全知’의 상태이며, 또한 생명이 처음 시작될 때 천리는 전체적으로 인간의 심성에 품부됨을 설명한 것이다. 다만 후천적으로 인욕人欲에 가로막혔기 때문에 반드시 사물에 즉하여 궁리窮理하여 본연의 선을 돌이켜 회복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노력함이 오래됨[用力之久]’을 통하여 일단 ‘활연관통豁然貫通’한 뒤의 상태가 되면 내·외가 동시에 상승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뭇 사물의 표리表裏의 정밀하고 거칠음에 이르지 않음이 없음’과 ‘내 마음의 전체적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음’ 이 두 가지는 서로 인과적인 것이다. 당연히 주자 심성론의 복잡함은 이상의 분석이 결코 그 전체를 살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마치 ‘주경主敬’․‘함양涵養’에 관한 본문의 일단에 대하여 주자가 아직 모두 분석할 수 없는 학설처럼, 「격물보전格物補傳」도 결코 아직 언급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성경조존誠敬操存의 심성공부는 주자의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장차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다산의 견해는 주자 심성론과는 매우 다른 해석이다. 강의보講義補에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성신誠身’은 ‘명선明善’에 있다.”고 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하여 참으로 지선至善의 소재를 알 수 없다면 반드시 호색好色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惡臭를 미워하듯이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살펴보니 격물格物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을 바로잡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知를 극진히 하는 것이다. 격치格致와 명선明善은 같지 않다. 명선明善은 은隱이 나타나는 것을 알고 미微가 드러나는 것을 아는 것이니 하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늘을 안 뒤에 택선擇善할 수 있는 것이니 하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택선擇善할 수 없는 것이다.
다산이 말한 ‘명선明善’은 ‘지천知天’이어야 하며, 다만 여기서 말한 ‘지천’은 ‘하늘이 기만할 수 없다.’ ‘하늘은 선을 선택한다’는 말처럼 종교적 의미가 매우 농후하다. 다산이 말하는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본本과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知’는 또 무엇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다산의 대학공의大學公議의 해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중용에 이르기를 “‘성誠’은 물物의 종시終始이다”라고 하였다. 시始는 자신을 이룸이고 종終은 남을 이루게 함이다. 자신을 이룸은 수신修身이고 남을 이루게 함은 화민化民이다.
그렇다면 수신修身은 원래 성의誠意를 우선으로 삼는 것이다. 공功은 이를 따라 시작해 들어가고 이를 따라 손을 대는 것이니 성의誠意 이전에 또 어찌 두 층의 공부가 있겠는가?
다산은 심성心性의 내부內部를 향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생각하지 않았고, 더욱이 미발과 이발의 문제에서부터 분석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성의誠意’를 근본으로 삼고 있다. ‘성의誠意’ 전에는 결코 이층二層의 공부는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중용에서 말한 ‘성誠’이라는 것은 자신을 이루고 사물을 이루며, 자신을 수양한 뒤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 곧 경세치용經世致用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대학장구大學章句, 「격물보전格物補傳」에서 논한 ‘치지격물致知格物’이론과 분명하게 다른 점이다. 사실상 다산은 ‘학學’을 논하고, 공부를 논하며, 천리天理를 논하는 등의 모든 것에서, 주자의 생각 중 ‘이理’가 사람마다 동일하며 ‘천天으로 부터 얻어서 심心에 갖추고 있다’는 해석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것을 명명한 것이다. 이것은 모름지기 힘을 써서 中을 잡아야 미루어 다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일반 백성[烝民]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예기에 이르기를 승중치천升中致天이라고 하니<原注: [예기]의 「禮器」편에 보인다.>, ‘중中’이라는 것은 성誠이다. 신독慎獨한 이후에 지성至誠하고 지성至誠한 뒤에 중中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중인衆人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또 말하기를,
중인衆人도 미발未發․이발已發이 있으나 단지 미발未發의 중中과 이발已發의 화和는 중인이 얻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經 (중용 수장)에 이르기를 “중화를 극진히 한다”고 하였는데, ‘치致’는 힘을 써서 미루어 극진히 하는 것이고, ‘중화中和’는 이미 이 힘을 써서 미루어 극진히 한 물物이니 어찌 중인이 얻어 소유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분명하게 그는 매번 성경聖經 중에서 기술하고 있는 공부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사대부 이상의, 스스로를 가다듬고 다스릴 수 있고 동시에 치국평천하의 직무를 가진 지식분자들을 대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 평범한 백성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계급적인 귀천과 지식의 다과는 ‘중화中和’의 경지를 획득하였는가의 여부에 대하여도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것이다.
5. 행사行事로 이발已發을 논함
주자는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을 이야기 하면서, ‘성性’을 미발未發로, ‘정情’을 이발已發로 설명하고 있다. 이기론理氣論으로 말하자면 ‘성性’은 ‘이理’에 속하고, ‘정情’은 ‘기氣’에 속한다. 그러므로 ‘미발지중未發之中’은 곧 정감情感이 동하지 않은 성체性體의 순수한 지선의 상태이며, 감정이 이미 발동하여 천리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곧 ‘이발지화已發之和’라고 한다. 이 때문에 모종삼牟宗三 선생은 주자의 성리관념性理觀念을 “존재하고 있지만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지선至善하면서 인성人性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보존하고 있음[存有]’이며, 오직 그것이 고요한 상태에 있어서 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자가 중화中和를 논할 때 뚜렷하게 구분하여 둘로 한 것은 지극히 분명하다. 곧 미발의 때에는 순연純然하고 지선至善한 성체性體이며, 이발已發한 이후에는 이理를 순응하여 주경主敬하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다. 물론 이발과 미발은 모두 의념意念이 발동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결코 구체적인 행위에 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산은 ‘이발已發’과 ‘미발未發’을 해석하면서, 매번 양자의 차이를 나누고 있지 않았고, 다만 ‘지성至誠’과 ‘신독慎獨’으로 해석을 더할 뿐이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독慎獨이 지성至誠이 되고 지성至誠이 신독慎獨이 되는 것에는 이미 의심이 없게 되었으니, 미발未發의 중中과 이발已發의 화和는 오직 신독한 자만이 거기에 해당할 수 있다. 신독하지 못한 자는 미발未發의 때에 심술心術이 먼저 이미 사벽邪辟하고, 기발既發의 뒤에 미쳐서 행사行事가 다시 편피偏陂하니 어찌 ‘중中’과 ‘화和’ 두 글자를 이 사람에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시 ‘이발已發’과 ‘미발未發’로부터 ‘중中’을 논하고 있다.
미발未發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의 미발未發이지 ‘심心’, ‘지知’, ‘사思’, ‘려慮’의 미발未發이 아니다. 이때를 당하여 마음을 조심하여 공경히 하며 밝게 상제上帝를 섬겨 항상 신명神明이 옥루屋漏에 비추어 임하듯이 하여 계신공구戒慎恐懼하여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야 한다. 특이하고 격렬한[矯激] 행동과 치우치고 편중된[偏倚] 감정 때문에 오직 마음에 범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싹이 틀까 두려워한다. 그 마음을 간직함이 평안함에 이르고 그 마음이 지극히 바른 곳에 처하여 외물外物이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이 어찌 천하天下의 지극한 중中이 아니겠는가?
‘중中’의 경계는 분명히 지고한 하나의 ‘상제上帝’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들이 ‘계신戒愼’하는 것은 ‘상제’이며, ‘공구恐懼’하는 것도 또한 ‘상제’이다. 마음속에는 상제에 대한 계신戒愼·공구恐懼가 존재하고 있어야 따라서 심정心情이 평안한 정서를 유지하며, 사물이 다가오면 순응하니 이것이 곧 ‘중中’이다. 다산은 다시 ‘이발已發’과 ‘미발未發’로부터 ‘화和’를 설명한다.
이때를 당하여 기뻐할 만한 것을 보면 기뻐하고 노여워할 말한 것을 보면 노여워하는 것이다. 슬플 때를 당하면 슬퍼하고 즐거울 때를 당하면 즐거운 하는 것은, 신독慎獨의 잠심한 공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만나 발發함에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니, 어찌 천하에 지극한 화和가 아니겠는가?
‘중中’이 되었건 아니면 ‘화和’가 되었건, 모두가 생각의 문제는 아니며, ‘행사行事’야 말로 비로소 중점이 되는 것인데, 이는 바로 ‘득위행도得位行道’의 실제 사업에서 ‘중화中和’를 강론하였다. 따라서 그는
성인聖人은 거실 방에 앉아서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여 모두 법도에 맞지만 그 지위를 얻지 못하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으며, 천지天地도 반드시 자리를 얻지 못하고, 만물이 반드시 길러지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인주人主의 자리를 얻어야 요순堯舜이 되고, 경상卿相의 자리를 얻어 고皋․기夔․직稷․계契가 된 연후에, 남정중南正重이 하늘을 맡고, 북정려北正黎가 땅을 맡으며, 희羲씨와 화和씨가 역상曆象을 관장하고, 우禹와 직稷이 수토水土를 다스리게 하며, 익益에게 불을 관장하는 우인虞人이 되게 하고, 산택山澤을 나열하고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상하의 초목과 조수鳥獸를 다스린 연후에 천지天地가 자리 잡히고 만물萬物이 잘 살게 될 것이다. …… 그 본분을 다한 것이 실재로는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한 데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송宋, 원元의 여러 선생들이 대부분 지위를 얻어 도를 펼 수가 없어 ‘위육位育’의 설에 있어서는 완전하게 심체의 감통感通으로 말하였고 행사行事로서 끝맺음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크고 아득하며 넓고 방탕하여 저수저각著手著腳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다.
이 때문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이발已發’하였지만 다시 모두가 ‘중절中節’한 것은, 우리가 ‘득위행도得位行道’하여 사업을 개척할 때, 실제로 일이 발생할 때에, 정확한 정서반응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행사行事하는 것을 결말로 하는 것’이 곧 ‘이발지화已發之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중화中和를 극진히 하면 (천지天地가) 자리 잡히고 (만물이) 화육化育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는 것은 지성至誠이고, 지성至誠은 천도天道이다. 지성至誠한 사람이 하늘과 합하게 되면 위로는 하늘을 다스릴 수 있고 아래로는 땅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남정중南正重이 하늘을 맡고,, 북정려北正黎가 땅을 맡았으며, 요堯임금 때에 이르러 희백羲伯이 하늘을 맡고, 화백和伯이 땅을 맡아 역상曆象을 바르고, 규얼圭臬을 세웠다. 이에 백도百度가 모두 시행되고 모든 일이 밝게 이루어지고 밝아졌으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각각 담당자가 있게 되었다. 초목草木과 조수鳥獸를 때에 맞추어 기르고 죽이니 이것이 이른바 능히 사람의 성性을 다하고 능히 물物의 성性을 다하는 것이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어찌 신독慎獨이 여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상 강의講義와 자잠自箴 두 가지 저작 중에서, 다산은 ‘미발지중未發之中’과 ‘이발지화已發之和’를 두루 이야기하고 있는데, 모두가 정태적 ‘이理’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주자와 같이 자세하게 의념意念의 미발未發(性)과 의념意念의 이발已發(情)을 구분하고 있지도 않은데, 왜냐하면 다산은 ‘이발已發․미발未發’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하는 것이며 의념意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중화中和’는 일종의 심성心性의 상태이므로 다산은 결코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실제의 행사 이전에 있는 일종의 마음의 준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천명지성天命之性’은 비록 성인聖人과 우인愚人이 함께 얻을 수 있으나 ‘중中’, ‘화和’ 두 글자는 성덕成德의 미명美名이니 반드시 힘씀을 미루어 지극한 한 뒤에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니 어찌 힘을 쓰기도 전에 먼저 중화中和의 덕이 있어 사람의 마음에 박히겠는가?
다산은 다시 유가의 성덕지명成德之名은 ‘행사行事’이후에 성립된다고 강조하고 있어서, 그 사공事功 실천의 사상은 명백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께서 묻기를 “‘지知’․‘인仁’․‘용勇’의 삼달三達에 대하여 주자는 천하고금天下古今이 함께 얻을 수 있는 이理라고 생각했다. ‘지知’․‘인仁’은 진실로 함께 얻을 이理가 있다고 하겠으나 ‘용勇’에 이르러서는 오성五性 가운데 어디에 속하며 또한 함께 얻을 이理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신臣이 대답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명칭은 행사行事한 뒤에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덕人德이지 인성人性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인仁할 수 있고 의義할 있고 예禮할 수 있고 지智할 수 있는 이理가 인성人性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비롯한 네 가지 마음[四心]을 네 가지 덕[四德]의 단서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네 가지 마음은 일개一箇의 영명靈明한 예體에서 나왔고 영명한 예는 널리 만물에 응하니 그 발한 바를 따져보면 어찌 반드시 네 가지뿐이겠습니까? 맹자는 단지 그 네 가지를 거론했을 뿐입니다. 미덥기도 하고 용맹하기도 한 것 역시 행사行事한 뒤에 이름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발한 바를 따져보면 역시 여기에서 발한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이 세 가지로 저 다섯 가지에 짝하려 하신다면 끝내 어긋나서 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다산이 가장 강조하고 있었던 것은 ‘영명지체靈明之體’인데, 이 ‘체體’는 인성人性 중에서 인仁할 수 있고, 의義로울 수 있으며, 예禮를 지킬 수 있고, 지智하게 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하자면, 이는 ‘행사行事’의 완성 이후에, 다시 말해 ‘행行’한 결과에 의거해서 그 ‘덕德’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오행(金·木·水·火·土)’과 오상(仁·義·禮·智·信)의 이론을 채택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이와 같은 신비적인 색채를 가진 숫자로써 억지로 무엇인가 만들어 가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행각하였기 때문이다.
6. 구덕九德과 유상有常으로 중용을 해석함
주희朱熹는 ‘용庸’자에 대해 해석하면서 정자程子의 ‘천하지정리天下之定理’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정리定理’는 바로 ‘도심道心’을 말하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고문상서古文尚書의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를 인용하면서, ‘인심人心’은 곧 ‘인욕人欲’이며, ‘도심道心’은 바로 ‘천리天理’라고 생각하였다.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주어져서 지선至善한 ‘성性’이 된다. 그러므로 ‘도심道心’은 또한 ‘성선性善’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때문에 중용에서 ‘용庸’자의 의미는, 바로 ‘도심道心’을 굳게 정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며, 이 또한 바로 ‘선성善性’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면 형形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상지上智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성性이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비록 하우下愚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마음[方寸]의 사이에 섞여 다스릴 방법을 알지 못하면 위험한 자는 더욱 위험하고 은미한 것은 더욱 은미해져 천리天理의 공변됨이 마침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게 된다. 정치하다면[精] 저 두 가지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을 것이고 한결같다면[一] 그 본심의 바름을 지켜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단락의 글은 주자가 ‘이욕理欲’과 ‘천인天人’을 서로 대립시키고, ‘본심지정本心之正’으로 ‘중中’을 해석하고, ‘불리不離’로써 ‘용庸’을 해석하였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용의 뜻은 곧 본심의 바름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른바 ‘정正’이 곧 ‘천리’다.
주자의 ‘불리본심지정不離本心之正’의 정의는, 분명하게 일종의 ‘심성心性’을 대상으로 하는 ‘향내向內’적 해석이다. 왜냐하면 ‘정正’은 일종의 준칙이 되며, 내심에 온장蘊藏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다산이 ‘중용中庸’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은 일종의 ‘향외向外’적 사고이다. 그는 먼저 주자의 ‘평상지리平常之理’와 같은 이론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독 ‘용庸’자의 뜻에 있어서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였다. 만일 ‘평상지리平常之理’라고 해석한다면 성인聖人은 평상지리平常之理를 ‘지至’라고 명명하였으니 이 역시 옳은 것 같지 않다. ……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중니仲尼의 학문은 요순堯舜에서 근원하였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의 명덕明德․신민新民은 「요전堯典」에 있는 “능히 큰 덕을 밝혀 구족九族을 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만방萬邦과 화합한다.”와 「고요모皋陶謨」에 있는 “몸을 닦음을 삼가며 생각을 영원하게 하며 구족九族에게 돈독하게 펴며, 여러 현명한 이가 힘써 도우면,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루어 나감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라는 말이 모두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말이다.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말이 부절과 같이 합치하니 어찌 홀로 ‘중용’ 두 글자를 중니仲尼가 처음 만든 말로 요순시대에는 이 말이 없었다고 하겠는가?
이 단락의 글은 문헌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상서尚書의 내용으로 중용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며, 의미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일을 성취하는 것’으로 ‘의리義理’를 해석하고 있는 것(바로 수제치평修齊治平의 이론으로 ‘용庸’자를 해석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자면, 다산은 ‘용庸’자의 의리적 함의가 바로 외부에 있는 사공事功의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산은 특히 상서尚書의 「요전堯典」과 「고요모皋陶謨」의 내용이 중용과 일치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시하고 있다.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덕九德은 ‘중中’이고 ‘유상有常’은 ‘용庸’이다. ‘중용中庸’ 두 글자는 아마도 요순堯舜이래로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수한 밀지密旨이며 요언要言이 아니겠는가? 「요전堯典」에 실려 있는 “기夔야! 너를 명하여 전악典樂을 삼으니, 주자胄子를 가르치되 곧으면서도 온화하며, 너그러우면서도 엄하며 강하되 사나움이 없으며 간략하되 오만함이 없게 할 것이다.”는 말은 그것(중용의 뜻)이 치우치지도 않고, 이지러지지도 않음과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다는 것임을 또한 환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대사악大司樂의 ‘중화中和와 용庸’의 가르침은 본래 「요전」에서 또 밝게 드러났다.
옛날에 예악으로써 사람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고요모皋陶謨」에서 “우리 오례五禮로부터 하여 떳떳하게 하소서”라고 하였고, 「요전」에 “전악典樂이 주자冑子를 가르칠 때 중용中庸의 덕德으로 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중니仲尼가 중용으로 가르침을 세운 것이 본말이 「요전」에서 시작하였으니 이것을 안 뒤에 ‘중용’ 두 글자의 뜻이 해와 별처럼 밝게 천지에 설 것이다. 수천년년 인멸되어 밝지 못하던 학문이 하루아침에 어둠을 깨듯 분명하니 무엇이 이처럼 통쾌하며 무엇이 이처럼 즐거운가?
다산은 ‘불편불의不偏不倚’한 것을 ‘중中’이라고 하는 해석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요모」의 ‘구덕九德’을 인용하여 ‘불편부의’ 네 글자를 증명하였다. 그는 다시 ‘용庸’자를 ‘항상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항상됨이 있는 것’의 의미는 바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것이다.
‘중中’의 덕德됨은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그것이 반드시 ‘상常’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람이 가진 덕德이 비록 지극히 바르고 크게 적중的中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변하고, 달로 다르고 해마다 달라진다면 마침내 덕을 이룬 군자君子가 될 수 없다. 반드시 굳게 잡고 항상 지켜 영원히 변하지 않은 뒤에야 비로소 그 덕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堯가 순舜에게 명하고, 순舜이 우禹에게 명하기를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라고 하였는데 고요皋陶는 중용中庸의 학을 주공周公에게 전하여 공자孔子에 이르렀다. 서경 「입정」에서 말한 “정사를 돌봄에 준걸스러운 자들을 불러 상제上帝를 높이니, 구덕九德의 행실을 실천하여 알고 참으로 믿는다”라고 한 것은 고요皋陶의 구덕九德의 설이다. 첫 번째는 ‘모두 떳떳하고, 길한 선비였습니다[庶常吉士]’이고, 두 번째는 ‘능히 떳떳한 사람을 등용하소서[其惟克用常人]’이다. 성成․탕湯․문왕文王을 두루 말한 것이 모두 이 법에서 말미암았으니 고요皋陶의 중용中庸의 학은 성대히 전수되어 성인과 성인이 서로 계승하여 감히 추락한 적인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중용의 의義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고요모皋陶謨」에서 구하지 않으랴.
동아시아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모두가 일본의 고학파古學派 학자들이 유가 경전으로 회귀할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알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공교롭게도 다산이 요堯․순舜․우禹․탕湯․고요皋陶․주공周公․공자孔子 등 일맥이 행도行道한 사실을 이용해서 “구덕이 중이다[九德者, 中也]”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4. 결론
이상의 여섯 가지, 즉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여 음양을 논함’․‘영명靈明으로 천리天理를 논함’․‘기욕嗜欲으로 성性을 논함’․‘본말本末과 선후先後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논함’․‘행사行事로 이발已發을 논함’․‘구덕九德과 유상有常으로 중용中庸을 해석함’ 등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다산 중용의 사상적 특징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특별히 ‘영명靈明’을 강조하고 있다. ‘영명’은 정태적 존재인 ‘천리天理’나 혹은 ‘선성善性’이 아니라, 동태적으로 생활과 사업에서 때에 따라 옳고 그름을 탐색하고, 시시각각 상제의 살핌 아래에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는 행동의 극기克己의 마음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영명靈明’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제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지만, 송대 이학理學을 연구하는 것에는 깊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이학가들의 내면적인 깊은 성찰과 심성心性․의념意念의 각종 근원과 활동에 깊숙하게 몰입하는 것에 대한 심성지학心性之學, 이를 테면 의념意念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 등에 대하여 다산은 기본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있다. 상대적으로 그는 유학儒學, 말하자면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의 덕목 같은 것들을 행사하는 측면에 두었는데, 특히 성현이 자리를 얻어 도道를 행하는 사업의 실행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 있었기에, 우리는 다산이 ‘초월성超越性’을 가진 존재를 승인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기독교의 교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외재초월外在超越’의 계열에 속하여, 시시각각 상제의 살핌과 천天의 살핌을 통해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상제上帝’라는 객체가 주재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성현이나 군자의 주체적 도심道心을 분발 시키고, 그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그 바라고 욕망하는 것에 순응하여 선善을 향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퇴계李退溪나 이율곡李栗穀 등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내면을 지향하는 성정性情의 이발已發․미발未發 등의 문제에 대한 토론은 하지 않았고, 외면을 지향하여 곳곳에서 실사實事와 실학實學 그리고 득위행도得位行道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주자가 ‘도道’를 ‘당행지리當行之理’로 해석하는데 대해서, 깊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道는 길이니,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누가 <방을> 나갈 때 호戶로 다니지 않으리오만 어찌 이 도道로 말미암지 않느냐.”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통하는 바가 도道가 됨을 밝힌 것이다.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 한 길을 다닐 뿐이다. 만약 본성本性의 덕德이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성性도 도道요 심心도 도道이니 혼연히 섞여서 지향指向할 바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사물마다 있지 않음이 없다[無物不有]’고 하였으니 금수초목禽獸草木도 모두 도道가 있는 것이다. 중용 한 책은 사람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써 금수를 가르치고 초목을 가르친 뒤에야 도道의 전체가 비로소 모두 완전히 갖추어질 것이니 어찌 실정에 요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의 ‘당행지리當行之理’는 일종의 심성활동心性活動의 상태이나, 다산의 ‘도道’는 도리어 반드시 실천하고 행사할 때 드러나는 인문적 가치이다. 다산은 종교적 신앙과 유학의 경세사상을 결합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시경詩經․상서尚書․예기禮記등의 서적의 내용을 이용하여 이학가들에게 존숭된 중용中庸이라는 경전을 해석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일본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의 학문적 방법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 근대 경세사조經世思潮의 정신적 취향을 갖추고 있었으니, 매우 특징적인 동아시아 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보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