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의 꿈, 나그네 할머니
소지연
이슬도 채 걷히기 전 잠에서 깨어난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방문을 연다. 밤새 몸을 누이지 못했을까. 불도 켜지 않은 한쪽에 잠버릇 고약한 아기들을 달래며 그림자처럼 앉아있는 사람, 며칠 전에 서울에서 도착한 소** 할머니를 만난다.
얼마 전에 세 돌 치르고 네 살이 된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아이다. 여기 외할머니도 정답지만 그보다 더 재밌고 좋은 이 친할머니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만 솟구쳐 오르는 그리움처럼 그녀의 무르팍에 몸을 내던지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몇 달 전에 일 분 간격으로 세상 빛을 본 여동생 둘도 앞다투어 엎어진다. 우리 넷은 어깨동무를 하고 흔들의자처럼 흔들린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에게 단잠을 선물한 보배로운 시간, 우리만의 새벽 인사는 나를 우뚝 선구자처럼 일으킨다. 우리 집의 유일한 꽃이던 나는 동생들이 나서부턴 아침 등교 시나 잠자리로 갈 때만 부모님을 만난 것 같다. 할머니가 등장한 후엔 예전의 관심을 거의 되돌려 받았으니, 참으로 기적이다.
어젯밤 나는 칭얼대던 동생들이 잠들 때까지, 그래서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언니답게 잘도 참았다. 그때야 거실에서 울리던 할머니의 말소리가 하루를 마감하고 내 방으로 왔다. 얼마 전만 해도 아빠나 엄마가 베갯머리 동화를 읽어 주었지만, 엊그제부터는 할머니의 임무였다. 내가 먼저 좋아하는 디즈니랜드 편을 웅얼웅얼하거나 백설 공주를 연기해 보이면, 내 옆에 기대어 누운 할머니의 보따리에선 수수께끼 같은 옛날이야기가 쏟아졌다.
나는 주로 ‘피터 팬’이나 ‘미녀와 야수’, 또는 요즈음 유행하는 ‘모아나’ 같은 모험이 행복을 쟁취하는 이야기를 거듭거듭 듣고 싶은데, 할머니는 ‘해님과 달님’처럼 아득하고 구슬픈 동방 전설을 생생히도 읊어 낸다. 때로 흥부 놀부나 심청전에 나오는 착한 사람들의 비극과 성공담을 들려주는데 그런 이야기에는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애틋하고 감미로운 유머가 들어 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가져다준 한국말 동화들과 동요들을 엄마는 달리는 차 안에까지 틀어주지만, 내 한국어 문장력은 뒷걸음질만 쳤다. 가까운 미국 어린이 학교에서 재밌는 영어 수업에 빠져들고 나서다.
할머니는 참으로 바쁜 사람이다. 장난감 밭에서 꼬마들과 뒤범벅이 되었다가도 가스레인지에서 뚝딱! 먹을 것을 내려오고, 방에서 아기들 옷을 갈아입히다가도 카톡! 소리에 스마트 폰으로 달려간다. 식사를 음식이 소화될까 싶게 어물쩍 넘기고 엄마 아빠로부터 꼬마들을 빼앗아 빙글빙글 돈다. 그러다 어느새 떠날 날이 가까우면, 풀어 놓았던 짐을 다시 꾸려 놓는다. 그동안 제트기처럼 서울을 다녀오기도 실로 여러 번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몸놀림이 젊은이처럼 쌈박하지만, “ 어이쿠! 물들일 때가 지났네.” 하며 귀밑머리를 만질 때는 노인처럼 힘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 안쪽이 출렁하는 어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 내가 아무래도 할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생뚱한 소리를 흘린다.
할머니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다. 말끔히 저녁 접시를 비워야만 식탁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갑자기 매서워진 엄마와 그만 놀고 잠자리에 드는 편이 좋겠다는 엄숙한 아빠 등 뒤에서 싱긋!, 신호를 보내는 예의 그 눈빛 때문이다. 우리는 듀엣으로 밤 양치질을 끝낸 다음, 숨겨둔 아이패드를 베개 위에 올려놓고 잠들기 좋은 이야기들을 골라 듣는다. 내가 자장가를 들려주길 원하면 할머니는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것을 부르다 말고, 아직도 뒤척이는 내게 ‘푸른 하늘 은하수’로 갈아탄다. 그리곤 반쯤 쉰내 나는 목소리로 조용히 아주 느릿느릿, 마치도 내가 꿈속에서 은하수라도 만나길 바라듯 타령을 한 다발 늘어뜨리는 거다.
할머니가 아주아주 미울 때도 있다. 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아빠에게 안기려고 발버둥을 칠 때다. 인자하던 두 눈이 별안간에 고슴도치같이 올라가며, “ 안 돼! 무겁다.” 안절부절못하지 뭔가. 나는 속으로 ‘평균도 안 되는 경량인데 뭘! “ 투덜대며 생각한다. ’ 할머니는 나보다 아빠를 더 사랑하는 건가.‘
그날 밤 나는 조금 훌쩍거리다 잠이 든 것 같다. 몸부림이 심한 나는 이불을 차 던지고 마구 헤엄쳐 다녔는데 자꾸만 무거운 것이 얹어지고 있었다. 낮에도 동분서주했을 할머니는 밤새 내게 이불을 덮어 주느라 선잠을 잤다. 그런 사람을 잠시라도 미워했다니! 다음날 보답 차 뭔가 웃겨드리고만 싶어, 갑자기 시시콜콜 영어 발음을 고쳐주는 등, 약도 올려 주었다. 반대로 내 한국말 발음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고 잘했다고만 한 그였으니. 도저히 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지 뭔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시시때때로 노트북 하나를 꺼내 와 바라보기만 할 뿐, 제대로 한번 열어보지 않고 끙끙대는 것이다, 그 속에 대체 어떤 비밀이 담겨있기에? 내게만 살짝 말해주면 나는 결코 엄마 아빠에게 이르지 않을 것 같다. 가끔, 아주 자주 먼산바라기를 하는 내 서울 할머니……!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모아나'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하와이 ’모투누이’섬의 신화를 다룬 뮤지컬 애니메이션 영화로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곳 족장의 딸인 ‘모아나‘는 숙명처럼 눈 앞에 펼쳐진 바다 저 멀리 항해를 갈구하지만, 지난날의 마을 선원들 사고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극구 만류한다. 마을에 지독한 흉년이 들자 돌아가시기 직전의 할머니가 슬며시 ’하트(Heart)‘ 무기를 해결의 열쇠로 던져주며 도전의 메시지를 부여한다. 할머니의 타계를 슬퍼하기에 앞서 사명감으로 고무된 손녀딸은 결국 전설의 반신반인, ’마우이‘와 함께 모험의 항해를 감행한다. 저주의 괴물이 된 여신을 찾아내어 빼앗겼던 옛 그녀의 하트를 돌려주자, 다시금 그로부터 은덕이 흘러나와 섬은 힘을 되찾고 융성해진다. 금의환향한 ‘모아나’를 반기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 너머로 할머니의 흡족한 환영이 무지개처럼 떠오른다. 나는 거의 매일 주제곡인 " How Far I'll Go"를 불러 댔다. ‘모아나’의 그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지금 내 옆에 와 있는 이 할머니가 고마워서 행복했다.
이즈음에 우리 할머니에게도 가끔 희귀한 면이 내비쳤다. 네 번째 나의 생일이 가까워지자, 이젠 옷 선물이 필요 없지? 하더니만 슬쩍 요굴 공 하나를 건네준다. 유명 박물관 상점에서 골랐다는 투명한 공 속엔 아름다운 무지개가 꿈결처럼 흐르고 있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살다 저세상으로 간 리트리버 강아지, ’코다‘에게 노랫가락을 작곡해 줄 정도로 곰살맞은 취미도 있다. 지금은 안락사하고 없는 그 녀석을 말할 때면 할머니의 눈은 발그스름해진다. 지금은 꼬마 동생들에게도 옮겨 가는 중이지만, 코다 녀석과 내가 맛본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그녀의 하트였다. 원하는 것을 말하면 언제라도 대답해 줄 것 같은 바다 같은 무한대, 이 나그네 할머니를 오래오래 붙잡아 둘 순 없을까. 지금처럼 바쁘게 다녀도 좋으니, 모아나의 그분처럼 영원히 꿈을 나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노랫가락!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내일 가신다고요, 서울 할머니? 그럼 또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한 번도 열어 보이지 않았던 그 노트북에 제가 몰랐던 얘기들을 실어 오세요!”
이제까지 ‘소 지연’ 할머니의 영원한 꿈, 큰 손녀였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고운글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