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는 끝이 없다 / 조미숙
미루던 공부였다. ‘생태해설가’라는 민간 자격증이 있어 관련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전망도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공근로로 상반기 3,4개월 일하고 쉬었다 하반기 다시 접수하고 기다려서 몇 개월 일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언제 일을 못하게 될지 모르는 일자리가 늘 불안했는데 굳이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자격증을 따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앞으로는 국가자격증이 없으면 안 된다고 꼭 따야한다고 부추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숲해설가 전문과정을 신청했다. 광주까지 가서 화, 목 야간 3시간, 일요일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하는 과정을 6개월 정도 해야 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공부였다. 밥벌이의 수단으로 해야 하는 일은 괴롭다. 내 마음을 알았던지 면접에서 떨어졌다.
같이 간 6명 중에 나 혼자 떨어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면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내가 큰 돈 내고 배우겠다는데 광주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시간 내기도 어려운데 꼭 면접을 봐야하는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했다.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았다. 본인들의 체제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골치가 아플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오후에 면접을 본 사람들에게 내 험담을 그렇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떨어졌다는 연락도 없어 내가 먼저 전화해서 떨어진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라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따지려다 구질구질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차피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잘됐다며 스스로 위로하며 단념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교육기관의 불만을 토로하는 걸 들으면 ‘그래 그런 곳에 가서 수업 받지 않기를 잘했다’하면서도 나만 자격증을 따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다시 분위기가 숲해설가나 유아숲체험지도사 중 하나라도 국가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다. 산림청에서 숲관련 일을 하려면 위탁업체에 등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자격증이 없으면 안 되었다. 다시 가고 싶지 않는 광주 교육기관을 찾았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알아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처음인척 모르쇠로 앉았는데 대표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자기 같으면 다시는 안 왔을 거라면서. 그래서 나도 두 번 다시는 안 오고 싶었는데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서 다시 왔다고 허세를 부렸다.
그렇게 시작된 교육은 힘은 들었지만 재미가 있었다. 진도에서 오는 동기생의 트럭에 목포에서 세 사람이 더 합류해서 다녔다. 저녁을 미처 먹지 못하고 출발해야 해서 도시락을 싸가 휴게소에서 돗자리 펴놓고 먹거나 주차장 차 안에서 해결했지만 맛은 좋았다. 동기생들과 오가며 쌓인 시간만큼 사이는 돈독해졌다. 교육 내용도 알차고 강사진의 열의도 높았다. 개중에는 식물 분류학처럼 딱딱한 과목도 있었고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해설가로서 갖춰야 할 인문학적 소양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강의도 많았다. 그 중에서 잊지 못할 시간은 설악산 지킴이 박그림 선생님의 강의였다. 멸종 위기종인 산양의 생활을 좇는 일상을 사진과 함께 시적으로 표현한 것도 감동이었고 케이블카 설치 반대를 위한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일들을 들으며 그 열정에 경의도 표했다. 어쩌면 한낱 동물의 보호가 중요한가 할지도 모르지만 생태계의 보호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서로 존중하며 공존해야 한다. 그래서 “산은 산다워야 한다.”는 선생의 말에 공감한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3시간을 버텨야 하는 이론 시간도 버겁기는 하지만 그렇게도 많은 생물들을 구별하고 알아야 하는 일은 정말 난감했다. 그나마 시골에서 나고 자라 기본적인 것들은 알고 있었고 ‘생태해설사’라는 과정에서 이미 공부를 했고 또 현장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잇점이 있어 완전 초보인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사기는 했지만 공부는 공부였다. 더욱이 난 식물 하나하나의 특징(예를 들면 잎자루가 어떻고 잎맥이 어떻고 하는 식)을 외우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느낌이 이것 같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식물들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비슷비슷한 종류는 많은지 도대체 누가 이렇게 세세하게 나눠놨는지 참 식물학자들이 할 일 없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계, 문, 강, 목, 과, 속 등 골치 아픈 계통도에 따른 분류 방법은 도통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바른 공부법은 아니었지만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는 나이이기도 하고 덜렁덜렁한 성격 탓이어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열심히 외우지 않았다. 간간히 수업 시간에 딴짓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그렇게 6개월의 지난한 과정을 시험과 실습까지 마치고 자격증을 받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유아숲체험지도사이기는 하지만 숲해설가 자격증만으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자격증이 있어야 된다는 판단에 또 광주행을 택했다. 이번에는 금요일 저녁, 토요일 하루 코스였다. 한 달 정도 쉬고 또다시 광주를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숲해설가 과정보다 훨씬 비싼 수강료를 내고 다녔지만 강의는 형편없었고 교육장 시설도 심하게 낙후되었다. 예전에 유치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에서 수업을 받는데 화장실을 그대로 사용할 정도였다. 그리고 유아 교육에선 다들 전문가일지라도 강의 내용과 강사의 자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수 과목은 숲해설가 과정과 같아 이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점점 수업도 재미없어지고 그래서 일부러 지각을 하거나 결석도 했다. 그러다보니 동기생들과 친해지는 계기도 부족해 몇몇은 끝까지 이름도 모르고 교육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어찌어찌 하여 시험을 보고 실습까지 마무리 하고 자격증을 발부받았다.
1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꿈만 같았다. 그런데 또 주위에서 ‘산림치유사’ 공부를 하자고 권했다. 토요일마다 또 광주를 가야한다. 이젠 정말 싫었다. 난 전혀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지만 남들 다 따고 나만 안 따면 경쟁력에서 밀린다는 설득에도 막무가내로 안 하겠다고 했다. 의외로 남편까지 이왕 한 거 끝을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시험이 굉장히 어렵다는 말도 있고 경력도 3년 이상이어야 하는데 공공근로로 일을 해서 경력이 인정 안 되는 나로서는 빠른 방법이 관련학과를 병행해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기억력은 점점 쇠퇴하는데 어려운 공부를 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4월에 시작한 이들이 그 과정을 마친 것을 보니 갑자기 부러웠다. 또다시 내년엔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나 보다. 공부엔 끝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