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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납포군(納布軍)
정의
군역을 수행하는 대신 포를 납부하는 군인.
개설
조선전기 군역제는 병농일치(兵農一致)와 봉족(奉足)제도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즉, 군인들은 각 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정한 기간 동안 번상(番上), 또는 유방(留防)하면서 봉족의 도움을 받아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봉족은 세조대 보법(保法) 실시 이후에는 보인(保人)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전기의 군역제는 16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동요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서울에 번상하는 보병의 역(役)은 고된 노역(勞役)으로 변질되었다. 그러자 보병들은 보인에게 받은 포(布)로 사람을 사서 대신하여 역을 지도록 하였다. 이를 수포대립제(收布代立制)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는 직업적으로 대립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들 대립인과 관리들의 폐단으로 대립 가격이 폭등하자 군인과 보인들은 견디지 못하고 유망(流亡)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는 1541년(중종 36)에 번상 보병에 한하여 가포(價布)의 수납 절차와 포를 거두는 수량을 통일시키는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번상 보병은 실제 군역을 수행하지 않고 정해진 가포만 지방관에 납부하면 군역을 면하게 되는 납포군화 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도 각 영진(營鎭)의 지휘관들이 군역 복무를 하러 온 군인들을 돌려보내고 그 대가로 포를 받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널리 행하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병농일치의 군역제를 병농분리(兵農分離)의 급료병제로 바꾸는 정책을 점차 확대해 갔다. 즉, 군인에게 입역 활동 시 급료를 주어 안정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군역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급료제를 실시한 것이다. 훈련도감(訓鍊都監)을 필두로 성립된 오군영(五軍營) 체제하에서 대부분의 양인들은 1년에 일정량의 군포(軍布)를 내는 납포군으로 바뀌어 갔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의 군역은 실제 군사 활동을 하는 정군과 그 군사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담당하는 보인의 두 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정 기간 서울로 번상 와서 중앙군의 군사로, 혹은 지방이나 변경에서 유방하여 지방군으로 복무하는 정군(正軍)들은 그들에게 배속된 2~4명의 보인에게 포를 거두어 군사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비록 보포(保布)를 받는다 하여도 정군으로서는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일정 기간마다 번상하거나 유방하는 일이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없이 평화 상태가 계속되자 군인들이 점차 각종 사역에 동원되어 역졸화(役卒化)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번상병들이 보포로 사람을 사서 자신의 번상을 대신하게 하는 편법이 생겨났다. 보통 대립(代立), 또는 고립제(雇立制)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처음에는 번상하는 정규 보병과 대립인 사이의 사적인 계약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것이 보편화되고 또 그에 따른 폐단이 나타나면서 국가가 개입하여 군인들의 번상을 면해 주고 그 대신 포를 병조(兵曹)에 납부하게 하였다. 대역납포(代役納布)가 그것이다. 그리고 병조에서는 값을 지불하고 군인을 고용하는 방식인 급가고립(給價雇立)으로 필요한 군인을 채웠다.
이 대역납포제는 1541년(중종 36)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으로 법제화되어 정규 기병(騎兵)을 제외한 정규 보병에서의 수포가 일반화되었다. 즉, 정병 가운데 보병은 납포군이 된 것이다. 납포군화 현상은 지방의 유방 정병에서도 방군수포로 나타났다. 다만 방군수포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 등 군사 지휘관들이 사리를 추구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법 행위였으나 이미 중종 연간에는 유방하는 군사가 없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방군수포는 만연하였다.
변천
군적수포법의 실시와 방군수포의 성행은 조선전기 군역제가 표방하던 병농일치제가 동요하고 병농분리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였다. 즉, 군역의 수취 방식이 군사 활동 위주의 입역에서 재정적 성격을 지니는 징포로 서서히 변화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6세기 중엽에 성립한 보병의 납포군화 현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전 군종(軍種)으로 확대되어 갔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 근세 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968.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김종수, 「16세기 갑사(甲士)의 소멸과 정병(正兵) 입역의 변화」, 『국사관논총』 32, 1992.
김종수, 「17세기 군역제의 추이와 개혁론」, 『한국사론』 22, 1990.
윤용출, 「임진왜란 시기 군역제의 동요와 개편」, 『부대사학』 13, 1989.
노제(老除)
정의
군역을 지던 양인 장정이 61세가 되는 해에 군역을 면제받는 것.
개설
『경국대전』 「병전(兵典)」에는 나이 60세가 찬 사람은 역(役)을 면제한다는 조항이 있다. 즉, 양인 장정은 61세가 되는 해부터 군역을 면제받는데, ‘늙어서 면제 받는다’는 뜻으로 노제라고 하였다. 15세가 차면 군역을 지기 시작하므로 16세가 되는 해부터 60세까지 모두 45년간 군역을 지는 것이다.
내용 및 특징
『경국대전』 「병전」의 역(役) 조항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60세가 되어서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채워 넣지 못하면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군현에 부과된 군역의 숫자는 인구 변동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숫자가 고정적으로 분정(分定)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을 안에서 실질적으로 정(丁)의 숫자가 늘고 줄더라도 부과된 역총(役摠)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대개 음력 6·7월쯤 서울의 오군영이나 지방의 병영·수영 등 군영에서 고을에 문서를 보내 도망·사망·노제로 생긴 군역의 빈자리를 채우게 하였다. 그러면 고을 수령은 각 면의 면임(面任)에게 새로 역을 부과할 사람을 찾아내도록 지시를 내려 그 결과를 ‘도노고성책(逃老故成冊)’으로 만들어 서울과 지방의 군영에 올려 보냈다.
그러나 군역을 노제받는 과정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 역이 부과되는 사람은 노제되는 사람과 가까운 아들·아우·조카 등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친척이 없으면 대신 군역을 질 사람을 구하지 못해 노제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노제를 받으려면 부표채(付標債)·사정채(査正債)·마감채(磨勘債)·도안채(都案債)·개안채(改案債)·노제채(老除債) 등 여러 가지 명목의 수수료가 붙어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따라서 대신 채워 넣을 사람을 구하지 못하거나 각종 수수료를 내지 못하면 계속 군역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에 따라, 죽어서도 역을 면제 받지 못하고 포를 내야 했던 것이 바로 백골징포(白骨徵布)였다[『현종실록』 14년 12월 18일].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의 동요와 군역전」, 『동방학지』 32, 1982.
송양섭, 「18·19세기 단성현의 군역 파악과 운영: 『丹城戶籍大帳』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제40집, 2002.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담지군(擔持軍)
정의
상여 등 무거운 물건을 틀가락으로 메는 사람.
개설
조선전기에는 국장(國葬) 때 공사의 규모가 큰 경우 군역(軍役)을 수행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상번(上番) 군사나 서울 일원에 거주하는 방리인(方里人)을 동원하였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점차 서울의 거주민들에게 품삯을 주고 역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는데, 이처럼 품삯을 주고 일꾼을 고용하는 고립(雇立) 혹은 모립제(募立制)가 시행된 이후 관부에서 운영하는 토목공사에는 막대한 재정이 지출되었다.
내용 및 특징
『승정원일기』를 보면, 1653년(효종 4) 윤7월 25일에 병조판서를 지낸 박서(朴遾)가 죽자, 장지(葬地)인 금천(衿川)까지 운구할 담지군이 동원되었다. 이때 왕은 박서가 살아 있는 동안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담지군과 조묘군을 정부에서 동원해 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한 병조(兵曹)의 보고에 의하면 장례 때의 담지군은 형조(刑曹)에서 각사에 할당하여 동원하고 조묘군은 병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절반씩 품삯을 주고 일꾼을 부리는 것이 예사라 하였다. 이에 따라 담지군은 형조가 조달하고, 조묘군은 장사기일이 시급하므로 일꾼을 모을 수 없으니 경기선혜청에서 장지 근처의 연호군(煙戶軍)을 차출하는 것으로 처리하게 하였다.
이 기록을 미루어 보면 이 무렵 이미 대규모의 장사(葬事)에서 담지군은 고립(雇立)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서의 장사에 참여한 담지군은 주로 서울에서 품삯을 주고 모집한 일꾼들이며, 조묘군은 장지인 금천 부근에서 동원한 농민들이거나 약간의 품삯을 주고 모은 사람들이었다.
예장 조묘역은 왕자 이하 종친·공신을 비롯한 1품 이상 관료들의 묘소 조성을 담당하는 요역(徭役)이었다. 모립제가 시행된 이후 관부에서 추진하는 토목공사나 왕실 및 고위 관료의 조묘에 고가(雇價)로 지출되는 비용이 확대되었다. 예장 담지군의 비용은 『호서대동절목』 52조와 『전남대동절목』 47조에 그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 이 규정은 대동법 시행 이후 담지군 역시 직접적인 노동력을 동원한 것이라기보다는 품삯을 제공하여 모집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변천
17세기는 부세(賦稅)제도가 크게 변동하는 시기였다. 17세기 초엽부터 요역(徭役) 부문에서 고용노동을 쓰는 모립제가 시행되어 모군(募軍)이라 불리는 노동자가 산릉역(山陵役)에 고용되기 시작하였고, 그 비중도 점차 커졌다. 산릉역은 민간에서 요역으로 징발한 연호군과 군인 그리고 승군(僧軍)으로 구성된 삼색군(三色軍)의 노동력으로 수행되었다. 이 가운데 연호군은 가장 먼저 징발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17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산릉역은 승군의 부역노동과 모립을 통한 고용노동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강만길,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한길사, 1984.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윤용출, 「17세기 초의 결포제」, 『부대사학』 19, 1995.
이지원, 「17~18세기 서울의 방역제 운영」, 『서울학연구』 3, 1994.
대립(代立)
정의
군역이나 요역 등 부역노동을 부담하는 사람이 대가를 지불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입역하게 하는 일.
개설
대립 행위는 군역의 분야에서 15세기 말엽부터 대두하였다. 이 대립 현상은 당초 입번 군사 가운데 경제적 능력을 보유한 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곧 각 관서의 서리·노자(奴子) 등 관속들이 오히려 군사들에게 대립을 강요하는 형태로 상황이 바뀌었다. 서리나 관속들은 대립가를 높게 책정한 다음, 대신 입역할 서울 주민을 알선 소개함으로써 많은 중간이득을 얻고자 대립을 강요한 것이었다. 16세기 군역에서 대립가를 공식적으로 결정한 조치는 사실상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 곧 군역에서의 납포제를 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립은 요역의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군역·직역이 특정 인신을 대상으로 한 것인 데 비해, 요역은 불특정의 민호를 그 징발 대상으로 하였다. 또 군역과 직역의 부역노동이 정기적·정량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요역은 부정기·부정량적이라는 데서 군역의 대립 현상과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대립제가 형성 전개되는 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신역에서의 대립제가 결국 고립제의 성립으로 이어진 바와 같이, 요역에서의 대립제도 고립제를 초래하였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 등 토목공사에서 요역에 징발된 외방 농민들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사로이 대립 행위를 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품삯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급가모립(給價募立)의 모립제(募立制)는 요역노동 분야에서 적용되었던 고립제인 것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이 시행된 뒤, 과도한 군액의 책정으로 일반 가호에 돌려진 군역 부담이 늘어났다. 이에 대응하여 군역을 부담하는 지방 농민들은 대립의 방식으로 무거운 군역노동의 부담을 면하려 하였다. 군역의 분야에서 대립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역제는 주로 지방에서 농민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중앙 및 지방에서 벌어지는 각종 역사에 투입하는 노동력 조달 방식이었다. 이 같은 요역노동은 17세기 이후 그 비효율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원거리 징발의 비효율성은 요역을 부담하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대립을 모색하게 했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부역군이 도성 주변에서 1개월의 부역노동에 응하려면, 사실상 왕래 일자를 포함한 50여 일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17세기 초, 산릉역에 1개월간 부역하기 위한 경상도 농민의 1인당 부담액이 포 20필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주지에서의 영농에 지장을 받을 뿐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경제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로부터 대립가를 치르고 대립인을 세우는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용 및 변천
군역에서의 대립은 15세기 말부터 성행하였다. 번상하는 군사들은 처음 자발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점차 소속 관서의 관속들에 의해 대립이 강요되는 일이 많았다. 관서의 이서(吏胥)·관노 등이 대립을 강요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한잡인(閑雜人)과 결탁하여 대립을 알선해 주고 부당한 중간이득을 취하였다. 지방 군영의 지휘관이 소속 지방군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대신 포(布)를 거두어들이는 방군수포(放軍收布) 현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493년(성종 24) 정부가 대립가(代立價)를 책정한 것은 이서·관노의 무리한 대립가 요구 행위를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조치였다. 이는 사실상 대립제를 공인하는 조치였다.
중종대에는 납포제(納布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사 가운데 상당수가 군적(軍籍)에 오른 것을 기준으로 군포를 바치는 것으로 군역의무를 다하게 된 것이다. 군역은 양인 농민의 물납세로 변모한 셈이었다. 군역이 물납세화되면서 양반층의 군역 부담은 자연히 면제되고, 오직 양인만이 군역을 전담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군역을 부담하는가 여부는 양반과 양인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6세기 말의 군제는, 이처럼 납포제가 일반화되는 가운데 대안으로서 상비 병력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개전초기의 전투에서는 관군이 극히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정부에서 전면적인 군정 징발을 시도하였으나, 대립은 다시 유행하였고 번가(番價) 대납의 관행 또한 부활되었다. 전쟁 기간에 도성의 상번군사는 흔히 대립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방의 입번군(立番軍)이 흔히 호적이나 군적에 오르지 않은 무적지배(無籍之輩)로서 대립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의 거둥 시에 호위하는 군사나 궐문의 수직군사를 비롯한 도성 각처의 입역 군졸이 거의 대립인이었다.
군역제가 동요하는 가운데에서 전쟁으로 인해 군적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던 점, 게다가 개별적인 대립의 행위를 규제할 만한 통제력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점 때문에 대립 행위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군역에서의 대립이 하나의 유력한 생활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전쟁 기간의 특수한 사정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각지에서 몰려오는 유민을 비롯하여 경중의 기민(飢民)들이 상번군 대립의 인적자원이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성 내의 사대부 관료를 비롯한 양반들이 자신의 사노(私奴)를(사노비를) 보내 대립가 수입을 도모하는 일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층의 기민으로부터 양반층의 노비 소유자에 이르기까지 대립은 하나의 호구지책이 될 수 있었다. 도성의 상번군뿐 아니라 외방의 각종 입번군에 있어서도 대립의 폐단이 지적되고 규제 조치가 강구되곤 하였다. 그러나 대립의 관행은 이후에도 쉽사리 종식되지(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농민개병(農民皆兵)의 원칙 아래 운영되던 이 시기 군역제의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역제의 운영에 있어서도 대립의 관행이 개입될 수 있었다. 요역은 군역과 달리 부정기·부정량적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었다. 그만큼 공식적으로 제도화되기도 어려운 면이 있었다. 요역에서의 대립 현상도 요역을 부담하는 농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서 비롯되었다. 17세기 초 산릉역에 동원된 부역군들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사로이 대립인을 세우고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도성에 거주하던 대립인들은 먼 지방에서 온 요역농민에게 무리하게 많은 대립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의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遷陵役)에서부터 천릉도감에서 이 같은 대립가를 일괄적으로 거두어서 역소(役所)에서 인부를 고용하는 재원이나 공용 경비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듬해(현종 15)의 인선왕후(仁宣王后) 산릉역에서는 요역농민인 개성부(開城府)의 연군(烟軍) 한 사람에게 쌀 5말[斗]씩 징수하여, 능소(陵所) 부근의 주민을 모립(募立)토록 조치하였다. 산릉도감에서 대립가를 거두어 노동력을 구매한 것이었다. 이후 개성부 연군이 이 같은 역사에 직접 징발되는 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정기적인 요역노동을 부담하던 방식으로부터 부정기적인 물납세로 개편된 것이라 하겠다.
요역농민들의 대립은 부역노동을 고용노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임시적 성격을 갖는 대립제는 급기야 대립가를 관에서 거두고, 이로써 모립의 재원을 마련하는 새로운 관행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요역제를 동요 개편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방식의 노동력 수급체계, 곧 모립제를 성립 발전시키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는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제가 붕괴 해체되는 경로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의의
군역제는 중세의 국가권력이 신분제적 지배 질서 아래에서 농민을 지배하고, 다시 이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을 수취하는 수취제도의 한 형태였다. 군역제는 각 시기의 농업생산력, 생산관계, 수취제도, 신분제도 등 사회구조와 관련해서 그 운영의 방식이 결정되었다. 전근대사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변동의 일정한 단계에 상응하는 새로운 부역제도가 마련되는 것이었다. 보법의 실시, 대립제·방군수포제의 확산, 수포제의 공식화, 급료병제의 도입, 양역변통, 균역법, 호포제 등으로 이어지는 15세기 이래 군역제의 변동 과정은 중세사회의 부역제도가 재편성되는 과정이며, 끝내 붕괴되는 경로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윤용출, 「壬辰倭亂 시기 軍役制의 동요와 개편」, 『釜大史學』 13, 1989.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이태진, 「軍役의 變質과 納布制 實施」,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한국군사연구실, 1968.
대정(代定)
정의
군안에서 탈락한 기존의 군역자를 새로운 인원으로 채우는 일.
개설
소속 기관별·역종(役種)별로 작성되는 군안(軍案)에는 해당 군역을 지는 자들의 인적 사항이 기재되며 역종별 군액, 즉 정해진 군역의 수가 설정되어 있었다. 군역자의 결원은 나이 60세 이상으로 군역에서 면제되는 노제(老除), 군역자의 사망·도망·다른 군역으로의 이정(移定)·이거(移居) 등에 의해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결원에 대해 새롭게 군역자로 책정되는 것을 대정이라 하였다.
전임 군역자가 노제로 군역을 면제받을 경우에는 스스로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군역자를 찾아서 채워 넣어야 했다. 이것을 ‘직정(直定)’이라 하였다[『숙종실록』 37년 12월 26일]. 사망한 경우는 관서에서 그것을 확인한 후에 대신 정하고 군역자 소속 기관에 보고하였다. 이것을 ‘대정(代定)’이라 하였다[『숙종실록』 9년 7월 8일]. 도망한 경우에는 10년간의 수색 기간을 거쳐 대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경우는 도망한 군역자의 이웃이나 친족에게 도망 군역자의 군역을 전가하는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으로 귀결되곤 했다. 대정자는 대정안(代定案)이라는 별도의 장부에 기록되었다가 군안으로 옮겨서 등재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내용 및 특징 [변천]
17세기 초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하며 군역자의 다수가 전사하였다. 그에 따른 결원에 대한 대정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대정 대상인 양인 군정(軍丁)에 대한 파악이 어려워 결원이 채워지지 않았다. “나이 80인데도 대정시킬 수 없어서 아직도 노제(老除)가 안 된 자도 많다.” 할 정도였다[『인조실록』 7년 12월 23일].
군역자를 대정할 때 다양한 폐단이 발생하였다. 결원을 발생시킨 전임 군역자의 이웃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인징, 친족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족징, 군역을 부담할 나이인 15세가 되기도 전에 심지어 갓난아기에게까지 군역을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자의 처자에게 계속해서 군포를 부담시키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이 그것이다.
17세기 말 이후 양역변통 과정에서 군역 대정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군액의 부족분을 군역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 실제의 군역자로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대정 작업을 위해 호적을 새로 작성하여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양정(良丁)을 찾아내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을 반포하여 11살이 (11세가) 넘으면 군역을 담당하게 하고 5~10세의 어린이도 미리 파악해 둘 것을 명하였다[『숙종실록』 2년 6월 15일].
군역 대정을 위해 군역자가 소속된 각급 국가기관에서는 역종별 군역의 정원을 확정하기도 하였다. 각급 국가기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군역 재원을 확보하였으며, 그러한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활동의 결과 군적에는 허구의 군액이 증가하였다. 군역의 정액 사업은 이러한 액수를 제외하고 실충정(實充定)할 수 있는 액수를 고정시켜 그 액수에 결원이 생기면 바로 대정하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대대적인 대정 조치를 감당하기 위해 지방관청은 인징·족징·황구첨정·백골징포와 같은 폐단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18세기 초에는 말단 행정 구역 단위에서 스스로 공동체적 연대 책임을 지도록 유도하는 ‘이정법(里定法)’이 제안되었다. 이정법은 마을[里] 내에서 군액에 결원이 생길 경우 대정의 책임을 마을 전체가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가까운 이웃이나 친인척 일족(一族)에게 군역의 결원을 대정시키는 인징·족징과 같은 불법적인 행위를 합법화하는 방안으로 제기되었다. 동시에 이정법에서 연유하는 이징법(里徵法)은 공동체의 공동납부 형태를 이끌어 내었다. 이정법은 일시에 전국적으로 정착·실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라 주민의 자발성에 기인하는 공동납 형태로 진행되었다.
18세기 중엽에 중앙정부는 기존의 양정 수괄과 철저한 군역 충정 방식에서, 군액의 증가 억제와 군역 부담의 경감 쪽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이에 따라 소속 기관의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군역자 확보 활동을 금지하고 군역 액수를 하향 고정화하였다. 이것은 결국 균역법(均役法)으로 귀결되었다. 균역법은 실질적인 군역 부담자를 충당하는 한편, 군포 부담을 반으로 줄여 균일화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손 재원은 토지세에 부가하는 제도였다. 균역법으로 인해 대정은 예전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군액이 고정되고 또 줄어들어서 군역 부담이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역 단위로 군역의 총액을 정한 ‘군역 총액제’는 개별 군역자에 대한 대정을 지역 단위의 공동납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군역의 공동납은 자발적인 계(契)의 형태로 수행되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군역은 호(戶) 단위로 분담되거나, 토지에 부과되었으며 때로는 기금을 마련하여 군포계(軍布契)의 형식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동납은 이후 더욱 발전하여 이포(里布)·동포(洞布)·호포제(戶布制)의 단서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구완회, 「조선 후기 군역 이정의 방향과 수령」, 『조선사연구』 1, 1992.
손병규, 「18세기 양역 정책과 지방의 군역 운영」, 『군사』 39, 1999.
도고(逃故)
정의
군역을 지던 양인 장정이 도망하거나 사망하여 빈자리가 생긴 것.
개설
도고(導故)는 도망(逃亡)과 물고(物故)의 합성어이다. 물고란 우리나라의 독특한 한자어로 사망을 가리켰다. 군역 부담자가 도망하거나 사망하면 역을 부과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역이 면제되었다. 그러나 역이 저절로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시대 군역이 군총제(軍摠制)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군총제란 군현에 부과된 군역의 숫자가 인구 변동에 따라 변하지 않고 일정한 숫자가 고정적으로 배당되는 것을 말하였다. 따라서 고을 안에서 실질적으로 정(丁)의 숫자가 늘고 줄더라도 부과된 역총(役摠)은 변함이 없었다. 누군가가 역을 면제받으려면 그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채워 넣어야 했다.
내용 및 특징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대개 음력 6·7월쯤 서울의 오군영이나 지방의 병영·수영 등 군영에서 고을에 문서를 보내 도망·사망·노제로 생긴 군역의 빈자리를 채우라고 하였다. 그러면 고을 수령은 각 면의 면임(面任)에게 새로 역을 부과할 사람을 찾아내도록 지시를 내려 그 결과를 ‘도노고성책(逃老故成冊)’으로 만들어 서울과 지방의 군영에 올려 보냈다.
새로 역이 부과되는 사람은 노제되는 사람과 가까운 아들, 아우, 조카 등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친척이 없으면 대신 군역을 질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노제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노제를 받으려면 부표채(付標債)·사정채(査正債)·마감채(磨勘債)·도안채(都案債)·개안채(改案債)·노제채(老除債) 등 여러 가지 명목의 수수료가 붙어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따라서 대신 채워 넣을 사람을 구하지 못하거나 각종 수수료를 내지 못하면 계속 군역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에 따라, 죽어서도 역을 면제받지 못하고 포를 내야 했던 것이 바로 백골징포(白骨徵布)였다[『숙종실록』 4년 5월 22일].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의 동요와 군역전」, 『동방학지』 32, 1982.
송양섭, 「18·19세기 단성현의 군역 파악과 운영: 『단성호적대장』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제40집, 2002.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동포(洞布)
정의
19세기에 향촌에서 군포를 공동으로 부담하는 군역세 납부 방식.
개설
동포제는 조선후기 균역법이 호포법(戶布法)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형태였다. 집단 수취 체제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호포법과 거의 일치하였다. 동포제에 의하면, 군포는 양반·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각 읍내 민호의 대소에 따라 분배·징수되었으므로 양반도 물론 함께 납부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를 동포라는 명목으로 집단 납부하였기 때문에 반상의 구별이 전혀 없는 호포법에 비하여 양반의 반발을 크게 사지 않아서 과도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동포제의 징수액은 1정(丁)에 대하여 1년에 2냥씩이었고, 그 실시 시기는 철종 말기부터 1871년(고종 8) 호포법이 정식으로 실시되기 이전까지로 보고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군역제는 중세적인 신분제와 공동체적인 향촌사회를 바탕으로 정군(正軍)은 직접 군역에 입역(立役)하고 보인(保人)은 수포(收布)를 통해 정군을 경제적으로 돕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러 군역을 지던 일부 농민들이 군역에서 이탈하여 이 같은 제도는 서서히 동요되어 갔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농민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에서 탈피하기도 하고 각급 관아의 사모속(私募屬)에 모입(募入)되어 감으로써 중앙에서 배정한 군액(軍額)에는 빠져나가게 되었다.
공동체적인 향촌사회에서 일부 농민들의 피역(避役)은 나머지 농민들에게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피역을 한 농민은 군역제의 굴레에서 탈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지던 군액은 그대로 향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군액에 비해 군역을 질 만한 백성의 수가 적은 군다민소(軍多民少)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군역을 수행해야 할 사람이 죽거나 도망쳤을 때 그 사람의 친척이나 주변 이웃이 대신 군역을 지는 족징(族徵)과 인징(隣徵),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군역을 담당하게 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 등 군정의 폐단은 이로부터 발생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농민들의 피역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면리분징(面里分徵) 방식이 나타났다. 이것은 면리(面里) 내에서 부족한 군역을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없을 때, 그 부족액을 평균하여 면리 단위로 분배·납부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동포제는 이렇게 향촌 내부에서 관행화된 공동 부담 방식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동포제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동요하던 신분제를 배경으로 하였고, 이와 함께 반드시 면리별 군액 할당량을 채워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기존에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 계층에게도 부담을 지우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부에서도 향촌에서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동포제의 시행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
동포제는 1862년(철종 13)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중심으로 폭발한 농민 항쟁을 계기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당시 농민들의 구체적인 요구 조건 속에 동포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에서는 군액의 개인별 파악 방식인 기존의 구파법(口疤法), 즉 역을 지는 구(口)마다 용모 파기(疤記)를 통해 군액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동포제를 병행 실시할 수 있도록 수습책을 제시하였다. 결국 동포제는 확산 일로에 놓이게 되었다. 처음의 동포제는 군액 부족분에 대해서만 공동 부담하도록 하였으나, 이때의 동포제는 부족분이 아니라 전체 군역 총액을 전체 호구 수에 맞게 공동 부담하는 형태였다.
각 지역별로 정착된 동포제는 이처럼 총액제적인 부세 운영의 틀 속에서 운영되었다. 사족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계(契) 조직은 관의 부세 수취에 대응하는 기구로서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향촌 내부에서는 각 면(面)의 계를 중심으로 하여 재원을 확보하고 동포를 납부하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의 운영은 여전히 하층민에게 불리하게 운영되는 사례가 많았다.
사족 세력은 무너져 가는 자신의 향촌 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시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부세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이를 일정하게 개혁해야 했다. 결국 사족 세력도 동포제를 수용하여 군역을 담당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동포제 하에서 사족들이 부담한 것은 물납 형태의 군역이었으며, 실역 형태의 군역은 여전히 하층민들이 담당하였다. 즉, 사족들은 군역 자체를 부담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세목(稅目)으로 바뀐 군역세의 총량을 채워 내기 위한 재정적 보조를 해 준 셈이었다.
동포 부담 총액은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군액을 기준으로 관에서 파악하고 있는 호총(戶摠)에 부과되었다. 개별 부담액을 살펴보면, 사족층에 유리한 형태로 신분별로 차등 부과되고 있었지만 신분별 부담액의 격차가 점차 해소되어 가는 균세화(均稅化)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변천
동포제의 실시 과정은 신분제에 의한 특권적 부세 체제의 하나인 군역제의 해체 과정이었다. 동포제는 일반 농민들의 끊임없는 피역(避役) 저항의 산물이었으며, 농민들은 1811년과 1862년의 대규모 농민 항쟁을 통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구체화시켜나갔던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 사회가 더 이상 중세적인 방식으로 농민들을 지배해 나갈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동포제는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해 실시된 호포법으로 그 내용이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김용섭, 『(증보판)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상): 농업 개혁론·농업 정책』, 일조각, 1984.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 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둔감(屯監)
정의
둔전감관의 약칭으로, 둔전의 관리와 경영을 담당한 직임.
개설
둔감은 둔전의 실질적인 경영과 지대 수취를 담당하는 직임이었다. 양반층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둔감은 둔전 관리를 통해 적지 않은 경제적 이득을 차지하였으며, 이 때문에 정치권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둔감의 직임은 매매의 대상이었다. 이들의 일부는 둔전의 권리에 대한 일정 지분을 가지고 경영의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기까지 하였다.
담당 직무 및 변천
둔감은 둔전 경영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파종에서 추수까지 전 과정을 관할·감독함은 물론 지대를 수취하여 소속 기관에 납부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들은 감관, 둔전별장, 둔전관)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고, 경우에 따라 동일한 직임을 달리 부르기도 하였다. 대체로 군사적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경우 별장(別將)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감관으로 지칭되는 것이 통례였다.
둔감의 밑에는 실무를 맡아 볼 마름이나 둔장(屯長) 등이 배치되었다. 군문·아문은 둔전으로부터 지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실무 책임자인 둔감의 임명에 주의를 기울였다. 주로 둔전 소재 거주자와 서울 사람이 주로 맡았다. 이는 둔전 절수 대상지를 물색하기 위해서는 현지 사정에 밝아야 했고, 개간 등에 투입되는 물력을 대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감관은 대체로 경제력을 갖춘 부민(富民)으로서 서울의 유력층과도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1704년(숙종 30) 사간 최계옹(崔啓翁)은 당시 영의정 신완(申琓)이 태안·당진 일대의 목장 둔전을 장악하고 둔감의 임명을 좌지우지하였으며, 둔곡(屯穀) 관리권도 자신의 첩 소생들에게 맡겨서 사복시의 재정을 고갈시켰다고 비판하였다[『숙종실록』 30년 11월 17일]. 이 사안은 왕 숙종이 신완을 옹호함으로써 진위를 가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둔전 운영과 관련된 각종 이권이 정치권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을 보여 주었다.
둔감은 둔전의 확보나 개간 과정에 물질적인 형태의 기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로 인해 둔전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군·아문의 명목적 소유 이외에 둔감의 토지에 대한 권리가 중첩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들 둔감은 자신의 권리를 바탕으로 둔전 경영의 주도적인 위치까지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중답주(中畓主) 등으로 나타나면서 둔전의 소유권에 일정한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둔전의 경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이는 둔감의 직임이 경제적 권리로 매매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되었다.
둔감은 둔전의 관리·수취와 관련하여 경제적 이익 확보에 몰두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의 모리 행위는 종종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둔감 직임으로 얻을 수 있는 이권이 막대했던 만큼 그 직임을 따내려는 사람들은 집요하게 노력하였다. 이로써 둔감의 직임은 일종의 권리로서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경종대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된 이태화(李泰華)라는 자가 호조의 둔전별장첩(屯田別將帖)을 위조하여 철원 땅에 함부로 팔았다가 발각되어 형문(刑問)을 받고 있는 예[『경종실록』 2년 8월 5일]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둔감의 파견은 각 군문과 아문이 독자적으로 토지 재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둔감의 파견과 이로부터 불거진 문제점은 이 시기 국가 재정이 중앙의 통제하에 일관되게 운영되지 못하고 각급 기관에 의해 자의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정부의 둔전에 대한 시책도 둔감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둔군(屯軍)
정의
평상시에는 경작을 통해 군량을 공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병사.
개설
고려시대에는 북방 국경 지대인 양계에 집단적으로 경작에 종사하는 주진둔전군(州鎭屯田軍)이 존재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둔군을 둔전병(屯田兵)·둔병(屯兵)이라고도 불렀고 조선후기에 주로 둔군으로 불렀다.
조선초기에는 영전(營田)이라고 통칭되는 영(營)·진(鎭)·포(浦) 등 지방 군사 기관의 둔전(屯田)이 둔전병에 의해 경작되었다[『선조실록』 27년 11월 17일]. 여러 포의 둔전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서 영전의 둔전병은 곧 수군(水軍)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둔전병의 영전 경작은 영·진·포의 책임자인 병마·수군첨절제사와 만호(萬戶) 등에 의하여 감독되었다. 수군은 영전 외에도 국둔전(國屯田)의 둔전병으로 광범위하게 동원되었다. 수군의 수가 적은 함경도나 내륙에서는 차정군(次正軍)이나 수성군(守城軍)·잡색군(雜色軍) 등도 국둔전 둔전병으로 사역하였다.
내용 및 특징[변천]
둔군은 변방에서 사변(事變)이 없으면 경작하고 사변이 있으면 전쟁하므로 ‘경작하면서 전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427년(세종 9)에 북방 경계 지역에 주둔하게 된 둔수(屯守) 유군(遊軍)에 대해 가까운 땅의 비옥한 들판을 적당히 경작하게 하고 변고가 있으면 싸우게 하여 경작하면서 전쟁하도록 하는 계책이 건의되었다[『세종실록』 9년 9월 29일].
1466년(세조 12)에는 세조가 윤자운(尹子雲)에게 이러한 둔군을 설치하여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을 지시하였다. 둔병할 만한 곳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밀히 병력을 넓게 주둔시켜 형적(形迹)을 드러내지 말고 군사의 수효에 따라 전지(田地)를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이었다[『세조실록』 12년 12월 12일]. 1467년(세조 13)에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계기로 북방에 남겨진 4,000명의 군사에 대해 함흥(咸興) 이남의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주둔시킬 것인지 여부가 논의되었다.
17세기에는 전란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군역자를 확보하는 정책이 진행되었다. 1676년(숙종 2)에는 사복시(司僕寺)가 관리하는 목장(牧場)의 목자(牧子) 및 둔군(屯軍)을, 수군인 주사(舟師)로 만들 것을 청하는 기사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에는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가 허견(許堅)이 이천(伊川) 둔군을 동원하여 훈련하고 있는 것이 훗날 군사를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간주하고 그 죄상을 아뢰었다[『숙종실록』 6년 4월 7일].
둔군은 변방이나 해안·섬에 주둔하며 국방의 임무를 완수하는 자들이면서도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키는 단서가 될 수 있는 존재로 경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둔군은 군역자로서 국역 체계의 일환으로 전환되어 갔다.
참고문헌
송양섭, 「17세기 말~18세기 전반 둔전 이정책의 논의와 전개」, 『한국문화』 28, 2001.
송양섭, 「임진왜란기 국가의 둔전 설치와 경영」, 『한국사학보』 7, 1999.
이경식, 「조선전기 둔전의 설치와 경영」, 『한국사연구』 제21·22합집, 1978.
둔민(屯民)
정의
주로 둔전 경작에 종사하는 작인(作人)을 지칭하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둔전 내부의 지주적 존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음.
개설
둔전 경작의 노동은 군졸·승군(僧軍)·목자(牧子) 등 직역자와 유민(流民)이나 이에 상응하는 부류가 담당하였다. 둔전 경영은 부역제적 방식에 입각해 있었고 농민의 자율적 영농과는 거리가 있었다. 17세기 둔전의 상당수가 경영의 불안정과 낮은 생산성을 드러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로써 둔전 경영에 병작제(竝作制)가 채용될 수밖에 없었다. 병작제 하의 둔민들은 둔전 내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지주층(地主層)과 경작을 담당하는 작인층(作人層)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둔토 내의 실질적인 지주로서 작인과 토지를 장악하고 군아문과 지속적인 길항 관계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둔민의 대다수는 이들 중답주 등과 일정한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 경작을 담당하던 직접생산자로서의 둔전 경작민이었다. 이들 둔민은 군·아문에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수취액의 인하를 주장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둔민의 궁극적인 의도는 단순히 수취액의 인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둔전에 대한 내적 지배력을 어느 정도 구축한 상황에서 이를 법적으로 추인받아, 토지를 명실상부한 자신들의 소유지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담당 직무와 변천
둔전민의 존재 형태는 둔전의 경영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왜란·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정부는 재정 확보는 물론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을 정착시키는 적절한 방법으로 둔전 설치를 추진하였다. 전쟁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7세기 전반은 광범위한 무주진황지(無主陳荒地)와 유민의 존재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둔전의 경영도 두 가지 부류의 노동력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다. 그 하나가 군졸·승군·목자 등 예속노동력을 이용한 경영 방식이었다. 이들 예속노동력은 신역의 일환으로 둔전 경작에 투입되었다.
둔전 경영의 또 다른 형태는 유민이나 이에 상응하는 부류였다. 이들은 군량·재정의 확보와 유민의 안집이라는 두 가지 목적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되었다. 정부는 둔전을 통하여 국가의 파악에서 벗어나 각종 공적 부담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유민적 계층을 확보하여 자립도를 제고시킨 후 국역편제에 흡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숙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둔전 경영은 본질적으로 부역제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만큼 자율적인 영농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는 곧바로 생산성 저조로 이어졌다. 17세기 둔전의 상당수가 경영의 불안정과 낮은 생산성을 드러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국 둔전 경영 방식은 점차 토지를 일반 백성에게 주어 병작(竝作)케 하는 형태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둔전에서의 병작제의 확산은 17세기 농업 변동의 전반적인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부역제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둔전 경영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그 인신적 지배예속 관계를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병작제 하의 둔민들은 둔전 내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지주층과 경작을 담당하는 작인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둔토 내의 실질적인 지주로서 작인과 토지를 장악하고 군아문과 지속적인 길항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중답주(中畓主)·기주(起主)·도장(導掌) 등으로 나타나며, 개간·출자·투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성립되었다. 이들은 군·아문과 함께 작인들로부터 지대를 분취(分取)하고, 마름이나 둔장(屯長) 등의 직임을 차지하여 둔전관리에 공식적으로 둔전을 관리하는 데 간여하였다. 이들이 존재하는 둔전은 ‘군아문-중답주-전호’의 중층적 소유 구조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둔민의 대다수는 직접생산자인 둔전 경작민이었다. 둔전 경작민은 대단히 영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부담이 과중한 데 있었다. 둔전 경작민은 정해진 지대를 납부하는 것 이외에 각종 부담을 감수해야 하였고 규정 외의 자의적 수탈에도 노출되어 있었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각종 토지세는 물론 환곡의 부담도 이들의 삶을 위협하였다. 또한 이들은 종자나 수세(水稅)·둔우(屯牛) 등 둔전 경영과 관련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했다. 이는 임진왜란기나 17세기 전반의 둔전이 종자·농우 등 생산 도구 일체를 국가나 해당 기관에서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점과 비견된다.
한편 둔민은 수취액을 낮추기 위해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수취액의 기준은 민전 수준의 결세액인 조 100두나 미 23두였다. 둔민의 궁극적인 의도는 단순한 수취액 인하가 아니었다. 둔전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구축하여 이를 법적으로 인정받고, 결국에는 그 토지를 명실상부한 자신들의 소유지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군·아문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둔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수취량이 저하되어 결세 수준으로 하향 조정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군·아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항조(抗租)하는 자들은 대부분 향촌사회의 내부에 재지적 기반을 갖춘 지주층들이었다[『정조실록』 17년 10월 23일]. 이들이 작인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그 실상은 자신들을 실질적인 토지의 소유주로 자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문과 관아의 과중한 수탈이 농업경영에 곤란함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둔전제가 이는 당시 둔전제가 점차 명목적인 소유 관계를 파기하면서, 수취나 소유 구조면에서 일반 민전과 동일한 형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둔민의 저항은 지대의 점진적 저하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군문과 관아의 둔전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는 둔전 결수(結數)의 감축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둔전에 대한 수취권을 수령이 장악한 경우 그 정도는 더욱 심하였다. 둔전의 결수 감축은 향촌 내의 재지 세력과 수령·아전 등의 상호결탁 하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둔별장(屯別將)
정의
둔전 관리를 담당하는 한편 둔전민을 군대로 편성하여 훈련을 맡은 직임.
개설
둔전의 관리책임자는 감관(監官)·별장(別將) 등 여러 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둔전 농업의 전 과정을 관할하였는데 그중에 지대 수취가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둔별장은 둔전에 대한 통상적인 업무 외에도 둔전민을 부대로 편성하여 군사훈련을 병행하도록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담당 직무 및 변천
둔전의 관리와 경영은 감관이나 별장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둔전 경영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파종에서 추수까지 전 과정을 관할 감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둔별장은 둔전관리와 함께 군사적 임무를 함께 띠고 파견되는 경우를 지칭하였다.
17세기의 둔전 개설은 주로 군·영문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소속 군문의 장교로서 현지에 파견되어 둔전을 관리하거나 수취를 감독하는 것은 물론 둔민을 부대로 편성하여 군사훈련을 병행하였다. 이들에게는 급료가 규정되어 있었다. 별도의 급료를 지급받지 않는 경우 소출의 일부를 지급받았다.
이들이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1629년(인조 7) 관향사 성준구(成俊耈)는 자신의 일족인 성풍렬(成豊烈)을 둔전별장에 임명하여 군량을 관리하면서 요로에 뇌물을 쓰기도 하였다[『인조실록』 7년 2월 30일]. 숙종 초 경기도 이천(伊川) 둔전별장 강만철(姜萬鐵)·강만송(姜萬松) 형제는 집권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의 심복이었다[『숙종실록』 6년 6월 10일].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별장들의 둔전에 대한 장악력이 약화되자 군·영문은 상급 기관의 힘을 빌었다. 즉, 소속의 장교가 병조의 인신(印信)을 지급받아 임명되는 이른바 ‘봉명별장(奉命別將)’의 자격으로 파견되도록 하였다. 이들은 왕의 명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둔민들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었다.
둔별장은 직임 자체가 막대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둔별장의 직임을 따내려는 노력도 집요했다. 아울러 이러한 별장의 직임은 일종의 권리로서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둔아병(屯牙兵)
정의
조선후기 둔전을 경작하면서 군역을 담당하던 병종.
개설
양란 이후 조선 정부는 전후복구책의 일환으로 둔전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둔전을 경작하던 노동력은 대부분 유민(流民)이나 이에 준하는 계층이었다. 정부는 유민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키고 이들 가운데 일부를 선발하여 군역을 부담시켰다. 둔아병은 이들에게 부여된 역종이었다.
담당 직무
양란을 거치면서 전쟁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파탄과 농촌사회의 피폐함은 극에 달하였다. 특히 토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민의 대량 발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정부가 마련한 대책은 유민이나 이에 준하는 계층을 모집하여 둔전을 개설하고 이를 통해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둔아병은 이 시기 둔전 경작 노동력 중 대표적인 역종 중 하나였다. 원래 아병(牙兵)은 감영의 직할병력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의미가 확대되어 다른 기관에서도 정예병 확보나 각종 사역에 투입하기 위해 아병을 설치하였다. 정부는 국가의 군역 파악에서 벗어나 있는 유민 계층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키는 한편 이들 중 군졸에 적합한 자를 선발,(선발하여) 군대로 조직하고자 하였다.
둔아병의 역가는 둔전 경작과 긴밀하게 관련되었다. 수어청의 경우, 둔전을 경작하는 둔아병에 비하여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둔아병의 역가가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1703년(숙종 30) 이정청(釐整廳)의 역가를 조정하기 전 둔아병의 역가는 양인(良人)은 1냥(=미 3두), 노병(奴兵)은 5전(=미 1.5두)를 부담하였는데, 그중에서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경우에는 양인 미 12두 노병 미 4두를 부담해야 했다[『숙종실록』 30년 12월 28일].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둔전을 경작하는 아병을 중심으로 역역동원(力役動員)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둔토로부터의 지대 납부 등 부담 일체가 감안되어 그만큼 역가를 경감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거꾸로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둔아병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둔전을 경작하지 않음으로써 지지 않아도 되는 각종 역역동원이나 둔전경작으로 부담해야 하는 지대 등이 모두 역가 속에 포함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 간의 차액은 그러한 부담의 차이가 구체화된 것이었다. 이는 황폐한 토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둔전이 국역 부담이나 유민을 정착시키는 것과 관련된 생계보장책의 일환으로 경영된 사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균역법 실시 전 둔아병의 역가는 다른 군역에 비해 헐역이었다. 이 때문에 둔아병의 역종은 피역민의 투속처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송양섭, 「17~18세기 아병의 창설과 기능」, 『조선시대의 과거와 벼슬』, 집문당, 2003.
둔전군(屯田軍)
정의
둔전을 경작하는 노동력 중 한 부류.
개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정부는 전쟁 피해 복구책의 일환으로 둔전을 설치하였다. 둔전은 군·아문의 재정 확보는 물론 전쟁으로 발생한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流民)을 안집시키는 적절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둔전군은 17세기에 주로 부역제적 경영 형태 하의 둔전 경작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병작제가 둔전 경영의 일반적인 형태로 채택됨에 따라 둔전 노동력을 지칭하는 말로 둔전민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다.
담당 직무와 변천
17세기 전반 조선에는 전란의 영향으로 주인 없는 토지와 황폐해진 채 버려진 토지가 많이 생겨났고, 터전을 잃고 떠도는 유민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당시 둔전 경영도 두 가지 부류의 노동력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다.
그 하나가 군영문의 예속노동력을 이용한 둔전 경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승군(僧軍)·목자(牧子) 등의 신역(身役)을 지던 노동력이 둔전에 투입되었다. 의주 관향사 둔전[『인조실록』 3년 1월 26일]이나 통영의 둔전군[『현종실록』 3년 3월 26일]이 대표적이었다. 관둔전(官屯田)에서 일반 민인을 요역으로 징발하여 둔전에 투입하는 방식도 이 범주에 포괄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둔전은 별장(別將)·첨사(僉使) 등 군직자(軍職者)들이 관리하였고, 각종 명색의 신역을 띤 노동력이 경작에 참여하였다. 둔전군으로 지칭되는 예속노동력은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나 특히 둔아병(屯牙兵)은 둔전 경작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역종이었다. 이들 예속노동력은 신역에 긴박되고 신역의 일환으로 둔전 경작에 투입되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모민설둔(募民設屯)의 방식이었다. 유민이나 이에 상응하는 부류를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하는 형태로, 임진왜란기부터 유민안집책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모민설둔은 군량·재정의 확보와 유민의 안집이라는 둔전의 두 가지 목적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되었다. 둔전을 개설한 초기에 모민의 대상은 주로 유민적 존재들이었다. 정부는 둔전을 통하여 각종 공적 부담에서 이탈한 유민들을 포섭하여 자립도를 제고시킨 후 국역편제에 흡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두 가지 방식은 병력의 확보나 유민의 모집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병작제 방식을 채택하였다. 부역제적 둔전경영은 근본적으로 역(役)이라는 중세적 지배예속 관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둔전의 경작은 농민의 자율적인 영농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고 농업 경영의 전 과정에 관의 관할과 통제가 깊숙이 배어 있었다. 이 때문에 신역을 매개로 한 부역제적 둔전 경영 방식은 둔전군의 영농 의식을 고취하여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곧바로 생산성의 저조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 상당수의 둔전이 경영의 불안정과 낮은 생산성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둔전 경영 방식은 점차 토지를 일반 백성에게 주어 병작(竝作)케 하는 형태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전반 병작제 방식은 부역제적 방식에 비하여 부차적인 범주에 머물렀으나 이후 점차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등패(等牌)
정의
군사 편제상 한 대를 거느리는 우두머리나, 토목공사에서 일꾼 중 지휘를 맡는 사람.
내용
조선후기 토목공사에 징발된 승군 중에는 영승(領僧)·수승(首僧) 등의 소임이 있었다. 이 같은 승군 내부의 통제조직은 승군들이 자율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 승군 차출의 책임을 졌던 각 도 관찰사, 군현의 수령 등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숙종·경종대의 토목공사에 징발된 부역승군은 각 도에서 2명씩의 도영승(都領僧)이 임명되어서, 각기 좌·우도의 승도를 인솔·감독하였다. 또 영승 혹은 영승등패(領僧等牌)라 하여 소집단마다 역시 승군의 대표자가 임명되어 십장(什長)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외에도 각 읍별로 연장자들이 출신 지역의 승군을 통솔하기 위하여 수승(首僧)으로 임명되었다.
영승·수승 등은 승군을 지휘·감독할 뿐 아니라, 작업 중에 사고나, 승군 중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거나, 혹은 승군을 수용한 결막처(結幕處)에서 도망자가 발생하면 이를 신고해야 했다. 승군들은 북이나 징소리에 맞추어 또는 깃발의 신호에 맞추어, 영승등패 등이 지휘하는 바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였다.
모립제에 의해서 고용된 모군(募軍)들은 대체로 30명을 단위로 하나의 패(牌)를 형성하였다. 모군패(募軍牌)를 대표하는 모군등패(募軍等牌) 역시 십장에 해당하는 직분을 맡았다. 토목공사를 감독하는 관리들은 이러한 모군등패들을 중심으로 한 모군패들을 서로 경쟁시켜서 작업의 능률을 높이려 하였다. 실적을 올린 모군패에게는 대가로 별도의 시상을 하였다. 모군패의 작업을 독려하는 데 쓰일 징과 북·깃발 등은 군기시(軍器寺)나 지방관아에서 빌려 썼다.
용례
大臣備局諸宰入對 兵曹判書李肇言 騎步布 庚子以後未捧者 必是色吏頭目等牌等從中掩置者 臣曾請査出督捧 果有數邑收納 而今西疇有事 守令或欲停捧 今若許之 終爲積逋 不可不督捧[『경종실록』 4년 4월 15일]
참고문헌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