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있었던 태동고전연구소의 학술심포지움에 다녀왔다.
이 심포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작년부터 추진하는 지역별 거점번역사업에 참여하게 된
태동고전연구소의 <省齋集> 번역사업과 관련하여 그 연구소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행사였다.
필자는 습재연구소에서 <습재집>을 번역하고 있고 또 전에도 이 학술행사의 구성과
관련하여 태동고전연구소의 선생들에게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기에 김정기 회원과 함께
참여하였다. 김정기 회원은 <성재집>번역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및
<임원경제지> 번역팀에서도 왕성한 번역을 진행중이기에 관심이 깊었다.
이런 학술행사가 춘천이 아닌 서울에서 열린 것은 전부터 태동고전연구소의 학술행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해온 관행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올해로 10번째였다.
박물관 강당은 극장식으로 넓었으나 청중은 주로 태동고전연구소의 지곡서당 학생들이었고
이동준 교수가 참여했었다.
엄연석 선생의 사회로 먼저 김만희 소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주제별 발표가 이어졌다.
<발표자/주제/토론자>
-김근호(한국국학진흥원), <면암 최익현의 리학적 경세관>/ 박성순(단국대) 토론
-함영대(단국대학교), <'우주문답'과 유인석의 문명의식>/ 장승구(세명대) 토론
-엄찬호(강원대학교), <습재 이소응의 경세론과 의병항쟁/ 유성선(강원대) 토론
*토론사회는 별도로 오영섭(연세대)이 진행하였으며 미리 발표논문집(토론요지 포함)이
배포되었다.
발표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 심포를 듣고난 전반적인 생각만 간략히 언급해보도록 한다.
김근호와 함영대의 발표는 너무 소략하고 성급한 연구였다. 엄찬호의 경우 개괄적 소개에 그쳤고
경세론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였다.
아직 화서학파에 대한 연구가 일부 인물을 제외하고 그리 깊이 확산되지 못한 학술계에서
그나마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사학계와 철학계에서 논문이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연구자들의 학술논문에선 독서폭이 좁고 원전 텍스트를 대하는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폐단이 돋보였다. 박성순의 토론요지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기본적인 학술적 요건마저
갖추지 못하는 경박함은 이런 공개적 학술행사에서는 배제되어야 할 모습이다.
현재와는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던 조선말기의 학자들이기에, 그리고 격변하는 현실 속에서
목숨을 바쳐 의병활동에 나섰던 분들이었기에, 우선 문집을 대하는 부담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발표자들 모두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논리전개에 숨겨져 있다고 보였고, 이런
느낌은 용어사용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개념적 이해가 너무 단순한 데 그쳤던 나머지 당시
인물들의 사상적 폭과 깊이를 제대로 담아내며 자기논리를 전개하지 못하였다고 보였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의 역사관, 이른바 발전사관과 근대역사학의 분석틀을 가지고 조선말
격동기의 사고를 성급히 재단한다면 그 사고의 진정한 의미와 역동성은 제대로 드러나 보이기
어렵다.
발표자들은 모두 '민족주의'라는 말을 평가의 주요 잣대로 삼았으나 면암, 의암, 습재 어느
누구도 '민족'이란 말을 쓴 적이 없는 분들이다. 아마 나중 잣대를 들이댄 가장 큰 범주의 문제일
터인데 토론자들도 거기까지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더구나 면암을 두고 '복벽주의'라는 말을 쓴 것은 시기적으로나 그 말의 뜻으로나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복벽'이란 <서경>에 나오는 말로 임금을 다시 그 자리에 회복시킨다는 말이다.
의병에 나섰던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고 독립운동으로 전환할 때 과거의 의병활동에 포함되었던 이념
이나 목적 및 방법과 관련하여 새로운 모색을 하던 인사들이 기성의 보수적인 인사들을 복벽론이라
규정한 데서부터 이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말을 쓰기에 앞서 당사자별로 그들이 지향하던 정치
체제 문제를 면밀히 살펴야 하고 그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피며 전제해야 했던 것이다. 화서학파의
선비들에게서는, 면암의 경우 보호조약 후 이미 순절하였지만 당시 우리가 일제에게 빼앗긴 것이
과연 뭐라고 생각했던가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망한 것은 나라이긴 하였으나 '국가'도 대한제국도 아니고 바로 '조선'이었으니, 근대적
의미의 국가라는 사고는 아직 비집고 들어설 계제도 아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습재선생 같은
분은 처음으로 '민주'라는 말을 글로 남기지만 이때도 그는 '군주'여야지 '민주'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분들더러 계급관이 봉건적이라고 따진다거나 복고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말이란, 비유컨대
먼 훗날 지구 환경이 극도로 악화된 나머지 당신더러 왜 그때 여전히 자가용을 타면서 매연가스를
배출하는 습관을 당장 고치지 못했느냐고 따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개화론 위주의
근대화론이라는 좁은 논리와 그 틀에 갇힌 사고가 문제다.
의암의 경우 <우주문답>은 중국인에게 보이려고 쓴 글이지만 너무 실망스럽다는 발표였다.
하지만 의암선생이 여기서 종합하여 전개한 사고는 우리가 몸담아온 '문명'이란 것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며 나름으로 장래의 지향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당시 문명관으로 개화
파의 '문명개화'론적 사고가 판을 치던 상황에서 그 반대의 처지에서 기존에 우리가 알아온 문명이란
것의 의미를 재정리하였다는 데 큰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 개화파는 서구적 사고인 사회진화론을 전격
받아들이며 서양의 가치척도를 수용하여 자기문명을 하루속히 야만에서 진보된 서구적 문명상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 삶의 토대였던 자기 '문명'을 훨훨 벗어던지지 않았던가.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서 열등한 제 모습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증 속에 바로 상대인 제국주의적
사고가 밑바탕으로 깔려 있던 줄은 그들 자신도 몰랐다. 의암의 문명론은 이런 때 끝까지 주체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그나마 희망적 입지를 찾으려고 그런 저술을 남긴 것이다. 토론자인 장교수의 말대로
그 논의는 "우리 문화의 도덕성에 대한 확신과 유교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점은 토론사회를 맡은 오영섭의 말들이었다. 그는 한림대에서 화서학파 연구로
학위를 받을 때 논문 때문에 법정소송까지 불러있으킨 장본인이었다. 전주이씨와 고흥유씨 종중에서
논문을 단락별로 반박하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까지 하면서 버스를 대절하여 총장을 면담하며
학위를 취소하라고 요청한 사건이었다. 지도교수는 유영익으로 하버드에서 개화파 연구를 한 사람
이었다.
발표자들보다 선학으로서 그가 설사 할 말이 많았겠다고는 보이나, 뭣보다도 태동고전연구소의 창립
인이고 스승인 청명 임창순 선생이 화서학파를 싫어했다는 둥의 발언을 여담으로나마 공개석상에서
거론한 점은 매우 부적절해 보였다. 나중에 연구소의 최광현 선생한테 확인한 바로는 청명선생님도
화서나 의암 유적지를 여러 번 다니신 적이 있었고, 싫어한 것은 오영섭 선생의 논문주제나 자세였지
화서학파 학자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첫댓글 어려운 부분들을 알기 쉽게 지적해 주니 이해가 잘 됩니다.
마치 가재를 잡기 위해 도랑의 돌을 하나 하나 들추어 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