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들으니까 약하게 태어난 것도 복이다. 내가 약한 줄 알기 때문에 복수할 마음을 가지지 못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헤치지 않으니까 내가 복수할 일이 없었다. 한번은 병을 앓아서 집안에 있는데, 가까운 친구 몇 사람이 병문안을 한다고 왔다가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한 사람이 좀 성질이 고약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아픈 사람을 놓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새끼가 뭐 어쩐다고 했다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 가만히 있겠는가? 힘이 있으면 어떻게 참고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지금 힘이 있는가? 피를 토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훌륭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열심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용을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속에 뭐가 남아 있었던지 40년 만에 그곳을 가면서 제일 먼저 그 사람이 생각났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데, 그때 나한테 그렇게 말하던 그 친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맨 먼저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간암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좀 허탈하고 허무하였다. 술을 좋아하고 힘도 좋으니까 멸시하는 것을 취미로 생각했다. 그래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때 힘이 있었으면 가만히 있었겠는가? 내 최대의 약점은 약하게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그럴 때는 감사한 일이다. 내가 거기서 주먹을 쥐고 싸웠으면 어찌 되겠는가? 뭐든지 적당하게 주신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힘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힘을 주시지 않은 것 같다.
또 지식도 그렇다. 그냥 겨우 앞가림할 정도만 알고 있다. 좀 더 깊이 공부를 하려고 했더니 딱딱 막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두 번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만일 내가 지식을 많이 얻는 길로 갔으면, 형통했으면 그 길로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부를 했으면 지금 여기 없다. 엉뚱한 길로 다른 데로 빠져서 모기 앞다리 연구하다가 일생을 마칠 뻔 했다.
생물학자에게 뭘 연구하느냐고 물으니까 곤충의 앞다리를 연구한다고 한다. 논문이 곤충의 앞다리를 연구한 것이다. 지식을 좋아하다보면 그렇게 간다. 끝없이 밀려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성경을 볼 때, 그런 사람들의 노선이 보인다. 그 노선이 나에게 잡혔다. 그전에는 내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를 했어도 내가 가는 길이 따로 없었다. 남이 하니까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했지 이것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100살이 되어서 아들을 못 낳게 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알고 나서 여기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아무데나 가서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삼각산에서 기도하면 찾는 줄 알고 삼각산에도 가보았다. 부흥회도 가보고 가보았다. 그러나 아무데나 가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면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도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모르면 엄청나게 수고하고 엄청나게 충성을 다하고 그런 분이 엄청나게 많다. 많아도 헛길로 가버리고 딴 길로 가버린다.
이 노선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어느 노선에 부름 받았느냐가 너무 중요하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안 되어서 끝인데, 찾아오신 하나님이 있더라는 말이다. 나중에 보니까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같은 길이다. 예수님이 가신 길도 같은 길이다.
내가 이런 길에 부름 받았구나 싶으니까 너무 감사하다. 내가 아무리 잘했더라도 다른 길에 부름 받았으면 나는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부름을 그리로 받았으면 어쩔 수 없는데, 내게 딱 맞는 길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성취하는 길이 우리 노력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똑똑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참 공평하다. 하나님이 길을 마련해 놓고 그리 오라고 해 놓았다. 누구든지 그 길로만 가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간다. 팔팔할 때 아들 낳고 싶지 구구 백백 할 때 누가 아들을 낳고 싶겠는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 길이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하나님이 가신 길이 참 놀랍다.
절대 우리의 어떠함을 가지고 자꾸 잘하니 못하니 할 것도 없다. 내 어떠함을 가지고 맹세할 것도 없다. 나는 절대로 안한다든가 절대로 이렇다든가 이런 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할 일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뒤로 부끄러워진다. 나는 절대로 이렇다는 사람은 뒤로 가면 허황해진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그것이 우리에게 정답이다. 그것밖에는 정답이 없다. “심령(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 하나님이 나를 가난하게 해주셔서 내가 그 길을 보게 한 것이고, 보게 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불평을 하려면 불평할 것이 많다. 내가 한 번도 힘이 남아 본 적이 없다. 남은 힘이라는 것이 없었다. 힘이 없으니까 딸딸 긁어서 썼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힘이 넘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참 부럽다. 나도 한번 저래 봤으면 좋겠다. 밥을 두 그릇을 먹고도 모자라서 또 먹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한 번도 두 그릇을 먹어 본 적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나한테는 그것이 맞다. 나 같은 사람에게 힘을 주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겨우 앞가림 할 정도로만 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에게 지식을 많이 주었더라면 휘두르고 다닐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세상만 시끄럽게 한다. 지식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나 같은 사람은 안 될 사람이니까 앞가림 할 정도만 준 것이다.
여러분도 혹시 모자라거든 그것이 복인 줄 알면 된다. 그 모자라는 부분이 아주 복이다. 가장 모자란 부분이 가장 복된 것이다. 하나님이 안 줄만 하니까 안준 것이지 줄 것 같으면 안 주었겠는가? 저 사람은 주면 안 되겠다 싶으니까 안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배열해 주신 것이 모두 다 감사하고, 너무 은혜롭다. 사람에 대한 축복이 성경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런 사람의 노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또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하여간 이래저래 복 받은 것 같다. 이래저래 복 받아서 혹시 좀 미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 같은 사람이 평생 그 미움을 짊어지고 살 수도 없다. 미워하면 내가 괴로운데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을 미워하면 내가 못 견딘다.
평생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못 한다. 지쳐버린다. 힘이 없기 때문에 조금 미워하다가 한 30분 미워하면 끝나버린다. 더 이상 미워할 수가 없다.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좋은 말을 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굳이 남에게 속상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가? 굳이 남 기분 나쁘게 해서 내가 국회의원이 될 것인가? 뭐가 될 것인가?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좋은 말을 하자. 서로 좋은 말을 하면 얼마나 우리가 사는 사회가 행복해지겠는가! 대구지방에 아주 좋은 말이 하나 있다. 남의 말 좋게 합시다. 남의 말 좋게 하자는 것이 정치적인 데서 나온 말인데, 그 말도 좋은 말이다. 또 천주교에서 한참 나온 말이 ‘내 탓이로소이다.’이다. 차에 붙이고 다녔다. 자기의 어떤 것을 부족함을 발견하면 복이 되는 것 같다. 남의 부족을 발견하면 복이 안 되는데, 자기 부족을 발견하면 복이 된다.
남의 흠을 잡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남의 흠만 잡으려고 쫒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 눈을 뒤집고 쫒아 다니면서 남의 허물만 뒤집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괴로운 일이다. 우리 같으면 못하는데 어찌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말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언제 좋은 말을 다 하겠는가? 그런데 언제 또 나쁜 말까지 할 시간이 있겠는가? 남이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덕 볼 것이 뭐가 있는가? 남이 싫다는 이야기는 안 하면 된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남이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얻어먹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옆에 사람이 끊어져 버린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을 보면 옆 사람이 자기에게 하지 않아도 저 사람은 나에게도 저러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꾸 멀어진다. 떨어져버린다. 그런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나한테도 저러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따라 붙게 된다.
사람이 사는 것이 쉬운 것인데, 너무나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건들면 그 쪽도 꿈틀거리는 것이다. 내가 건드리는데 꿈틀거리지 않을 지렁이가 있겠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죽을 지경이 되지 않으면 남의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죽을 지경이 되면 할 수 없이 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런데 죽을 지경이 아니거든 좋은 말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매일 해보라. 좋은 말을 할 때가 행복한지, 남이 싫은 말을 할 때가 행복한지 자기가 해보면 알 것이 아니겠는가? 손해 볼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나만 손해지 누가 그렇다고 알아주는가? 나는 장사하는 사람이라서 손익 계산을 잘한다. 내가 해서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한다. 내가 해서 이익이 안 될 바에는 안한다. 이익이 안 되는 것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우리 교회는 모두 다 터놓고 말하는 세계니까 터놓고 한다. 그런데 터놓고 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아무것이나 다 터놓으면 안 된다. 터놓을 것을 터놓아야지 무조건 다 터놓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이 안 좋은 것을 터놓아도 감싸서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교회 특색이다. 그런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순모임 할 때도 가능하면 좋은 이야기 많이 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부정이 사라진다.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이야기하면 내가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런데 별것을 아닌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옆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부정이 막 커진다. 2배 3배로 커진다.
부정을 만지지 말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가까이 하면 불어나 버린다. 나는 내가 억울하다는 것을 누구에게 가서 하소연을 했다. 그런다고 그것이 없어지는가? 오히려 그 쪽에서 뭔가 하나를 얻어가지고 온다.
성경에 있는 말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가난할 때는 친구에게 가지 말라고 한다. 내가 해보니 그렇다. 내가 옹색해 있을 때 친구를 찾아가면 친구가 부담스럽게 대한다. 자기가 돈을 주자니 돈을 줄 수 없고, 그냥 보내자니 아주 민망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가난하다고 남의 집을 찾아가면 안 된다. 내가 넉넉해야 남을 찾아가지 내가 가난하다고 남에게 가난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내가 빚쟁이라고 남에게 빚쟁이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도와줄 수 없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말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할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나 이러저러해서 빚이 있다고 말하면 뭐하겠는가? 서로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하든지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할 일이지 남에게 가서 할 이야기가 못된다.
나는 이웃집이 있는 곳에 살았지만 바로 가까운 이웃에게도 내가 이러 이러저러한 형편이라고 한 마디도 말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말해보았자 그 사람이 나에게 돈을 주겠는가? 뭘 하겠는가? 못 줄 것이다.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어도 못 줄 것이다. 말하면 둘이 서로 곤란해지기만 하는데,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말을 해보지 못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이런 사정에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내가 그 소리를 뭣하러 하겠는가?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이야기이다. 나올 때도 그랬다. 그분들에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나왔다. 이러저러해서 간다는 말도 못하고 나왔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도망치다시피 나왔다.
좋지 않은 것은 자기 혼자 가지고 있고, 자기 혼자 삭혀야 된다. 안되면 병원에 가서 약 먹는 것이 낫지 터트려 놓으면 안 된다. 내 좋은 것만 드러내도 일생이 부족하다.
지금 생각하니까 조금 더, 더 많이 좋은 것을 내 놓을 것을, 더 많이 좋은 것을 주었더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기쁜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해줄 것을 죽으면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죽으면 못한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 인생을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
좋은 것만 가져도 충분하고 골라잡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좋은 것만 골라잡을 수 있다. 굳이 똥 같은 것을 먹을 필요가 없다. 좋은 것만 먹으면 된다. 뷔페식당에 가면 입맛대로 먹으라고 해놓았다. 입맛에 맞는 것만 먹으면 된다. 굳이 입에 안 맞는 것까지 먹고 배탈 날 필요가 없다. 뷔페식당은 다 먹으라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입맛에 맞는 것만 먹으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먹고 오면 된다. 뷔페식당이라고 일일이 10가지 20가지 다 먹을 필요가 없다.
인생도 그렇다. 자기 입맛에 맞으면 그것을 먹으면 되지 굳이 안 좋은 음식을 먹어서 배탈이 나서 배탈 났다고 할 필요는 없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와서 배탈 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질 나겠는가? 나는 먹지도 못했는데....
교회 생활 안에서라도 좋은 말하고 살기를 바란다. 가난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사람대로의 약점이 다 있다. 하나씩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다. 그 약점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일부러 들쑤실 필요도 없다. 충고해주려고 말하면 확 일어나 버린다. 그것만 고치면 되는데, 이 사람은 이것만 고치면 되는데, 이런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체 한다. 해봐도 소용이 없으니까 모른 체 한다.
하여간 남의 말을 좋게 하고 잘 살자. 하루라도 행복하게 살아야지 굳이 앓으면서 살 필요도 없다. 건강하게 잘 살자. 정신건강도 좋아야 된다. 밥만 건강하게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정신건강도 좋아야 된다. 혹시 교회를 안다니더라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더군다나 교회 다니는데 건강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좋지 않은 것은 접어버리면 된다.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나는 저녁이면 안 좋은 것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그래서 안 좋은 것이 생각나면 아주 골치 아프다. 그래서 저녁이면 혹시 안 좋은 소식을 들을까봐 될 수 있으면 전화를 안 받으려고 한다. 저녁에는 긴급전화가 아니면 나에게 할 필요 없다. 해도 안 받는다. 왜냐하면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건강한 이웃집 이*택형제에게 하면 된다. 이*택형제도 긴급 상황이 아니면 아침에 가져와야지 저녁에 가져오면 안 된다. 나는 잠을 못 잔다. 좋은 생각하고 자도 꿈자리가 사나울 때가 있는데,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자면 잠을 제대로 자겠는가? 이 머리가 식지 않으면 거실에 나가서 TV에서 킥 복싱 하는 것을 본다. 치고 박는 것을 보면 생각이 다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잔다.
좋지 않은 생각은 전혀 하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하면 나는 못산다. 내 몸이 못 견디기 때문에 살지를 못한다. 그것도 알고 보면 복이다. 내가 힘이 있으면 계속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생각할 것인데, 힘이 없으니까 뭐든지 포기하는 것이 내가 편하다.
교회생활이니까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오늘 순모임부터 즐겁고 풍성한 순모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