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 노트 / 신영미
탁자 위에 스프링 노트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중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 청록색 스프링 노트를 집어 들었다. 집에 가져온 후 침대 옆 협탁에 며칠 놓아 두었고 용도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갑자기 첫 장을 개시하게 되었다. 밤새 감정을 쏟아내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당신을 원해요’로 가득 채웠다.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이다. 후련했다.
그 해 여름 방학에는 보충 수업을 준비하느라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는 쉬는 시간에 저널, 잡지, 올 해의 책이 꽂혀있는 곳으로 간다. 『좋은 생각』을 펴들고 작가의 글, 일반인들의 글과 사진들을 본다. 잊고 싶지 않은 좋은 글귀를 노트에 기록하기도 한다.
보충 수업이 끝나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기 시작했다. 과학자들과 우주 이론, 행성들에 대한 내용이라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나갔다. 그 때부터 오른손엔 텀블러, 왼손엔 스프링 노트와 코스모스 책을 들고 도서관에서 여유로운 방학을 만끽하였다. 카페에서 일을 하거나 책을 볼 때는 아메리카노를 옆에 놓고 할 수 있어서 좋은데, 도서관은 커피를 들고 들어갈 수가 없으니 텀블러가 필요했다. 집에서 원두커피를 내려 두 잔들이 분홍색 텀블러에 담아가 책을 보면서 홀짝거리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화성의 하늘이 우리에게 익숙한 푸른색이 아니라 연분홍색이라니 화성이 지구와 닮기를 바랐던 나는 책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연수가 있기 전까지 대부분의 날들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거기서는 공부하고 있는 제자들을 가끔 만난다. 길다란 키에 유난히 얼굴이 희고 예의 바른 학생이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더욱 과학책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수업 시간에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창가에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이왕이면 독서대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 책을 본다.
하루는 인사하고 지나가던 O군이 저만큼 창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날이 더웠고 복장이 너무 자유롭나 싶어 끈 나시에 짧은 반바지가 신경이 좀 씌였다. 에어팟으로 옛날 음악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를 들었다. ‘그녀는 너무나 눈부신 모습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죠.’ 옛날 노래는 시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가사들이 많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가, 안락한 휴식이 설탕이 없는 커피를 달콤하게 했다. 도서관 마치는 종이 울리자 공손히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방학 내내 도서관에서 문 닫는 시간까지 공부하고 매일 아버지가 와서 데리고 가는 일상을 반복하는 듯했다. 또보면 저녁을 먹을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창가에 자리를 잡아 책을 내려놓고 『좋은 생각』을 먼저 찾았다. “만남은 가장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다름의 경계선에서 서로를 이해합니다.” 노트에 적다가 전화가 와서 통화하느라 나갔다가 들어왔다. 어머나, 내 옆에 O군이 앉아 있었다. 너무 반가워 내가 옆 자리임을 알려주고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근데 하필 그날은 주말이어서 일찍 닫는단다. 저녁을 먹지는 못하지만 나란히 앉아 나는 코스모스를 읽고 그는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했다.
에라토스테네스 평가가 나를 흥분시켰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면서 지구의 둘레를 잰 과학자다. 그를 시기하고 경쟁 상대로 여겼던 사람들이 그를 '베타'라고 불렀다. 베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여지없이 세계에서 둘째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손을 댄 분야는 거의 모두 ‘베타’가 아니라 아주 확실한 ‘알파’였다. 천문학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철학자, 시인, 연극 평론가로 활약했다. 내가 지도하는 동아리가 ‘베타’라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하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날의 날짜와 함께 노트에 적은 후 신선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주변의 그런 반응에 에라토스테네스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하다. 그 시대에도 야유 족들이 존재했다니 씁쓸하다.
한참 후 자리로 돌아왔는데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굳이 미소는 띠지 않고 Y형이 두 개 사놓고 갔단다. 그는 대학생으로 우리 학교 졸업생이다. 여름방학이어서 집에 내려왔나 보다. 얼굴은 못 봤지만 제자가 음료수를 놓고 갔다니 흐뭇했다. 우리는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포카리스웨트를 마셨다.
다음 날은 O군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없는듯했다. 나는 그 시기에 Pale Blue Dot(지구)과 씨름하였고 좀 심심한 채로 혼자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나올 때는 마주쳐서 인사를 하였다. 어딘가 있긴 있구나. 이튿날 과일로 도시락을 준비해 와서 먹으러 3층에 올라갔더니 휴게실에서 검은 면티를 입고 공부하고 있었다. “왜 여기서 공부하니?” “ 이 곳이 편해요.” 2층 내 옆에서 공부할 때 책보는 나는 편안했었는데...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