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항목명 | 목탁 |
한자항목명 | 木鐸 |
유형 | 개념/인물 |
출전 | 『주례(周禮)』 「천관(天官)」,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 『논어(論語)』 「팔일(八佾)」 |
<요약>
천하(天下)에 문교(文敎)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공자(孔子)를 가리킨 말.
<설명문>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유래한다. 『주례(周禮)』 「천관(天官)」,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 등에 의하면 옛날에는 조정에서 백성들에게 정교(政敎)를 주지(周知)시킬 때 문사(文事)에 관계되는 일은 목탁을 흔들어서 백성들의 이목(耳目)을 집중시켰고, 군사(軍事)에 관계되는 일은 금탁(金鐸)을 흔들어 관(官)의 지시와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원래의 의미가 세상에 문교를 행하는 사람이나 지도자(指導者)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된 것은, 『논어』 「팔일」에서 의봉인(儀封人)이 공자를 목탁에 비유한 데서부터이다. 의봉인은 공자를 만나고 난 후 공자 제자들에게 천하에 도(道)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늘이 장차 공자로써 목탁을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몽견주공(夢見周公)
한글항목명 | 몽견주공 |
한자항목명 | 夢見周公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출전 | 『논어(論語)』 「술이(述而)」 |
<요약>
주례(周禮)를 회복하고자 한 공자(孔子)의 의지가 엿보이는 말로 꿈에 주공(周公) 단(旦)을 보았다는 뜻.
<설명문>
이것은 『논어(論語)』 「술이(述而)」에서 유래한다. 공자는 하(夏)‧은(殷) 이대(二代)의 문물 제도를 집대성(集大成)하여 주나라의 제도를 완비하였다고 전해지는 주공을 이상시(理想視)하고, 항상 주공의 도(道)를 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도가 행해지지 않자, 자신의 노쇠함을 꿈에서 주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탄식하였다.
묘사(廟司)
한글항목명 | 묘사 |
한자항목명 | 廟司 |
유형 | 개념/의례 |
<요약>
제사 관련 업무를 맡은 임시 관원.
<설명문>
문묘나 종묘에 제례를 지내기 전 묘를 청소하거나 제기를 씻는 등 제사 준비를 하고 제사 절차를 감독하는 임시 관원을 말한다.
묘호(廟號)
한글항목명 | 묘호 |
한자항목명 | 廟號 |
유형 | 개념 |
한국 시대 | 삼국 시대/신라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주 |
<요약>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왕이 죽은 후 추증되는 칭호
<설명문>
①중국에서 황제가 죽은 후 태묘(太廟)에서 부제(祔祭)를 지낼 때 추증(追贈)되는 칭호. 보통 조(祖)‧종(宗)이란 문자를 붙여 세조(世祖)‧고종(高宗) 등과 같이 칭하였다. 주대(周代)에 처음 기록이 보이는데, 왕조의 창시자를 태조(太祖) 또는 고조(高祖)라 하고 그에 버금가는 공로자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특정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대(漢代)에는 묘호를 가진 황제는 적었으나 당대(唐代) 이후의 황제에게는 일반화되어 대개 묘호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②우리나라에서 임금의 시호(諡號)를 이르는 말. 선왕(先王)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였다. 514년(신라 法興王1)에 법흥왕의 부왕이 승하하자 ‘지증(智證)’이라는 시호를 붙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묘호의 효시이다. 고려‧조선조에 와서는 중국을 모방하여 모조(某祖)‧모종(某宗) 등의 묘호를 붙였다.
무극(無極)
한글항목명 | 무극 |
한자항목명 | 無極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출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4년조,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28장, 『장자(莊子)』 「재유편(在宥篇)」 |
<요약>
성리학(性理學)의 우주론에서 만물의 본질인 궁극자의 무형적(無形的) 측면을 지칭하는 용어.
<설명문>
무극이라는 말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4년조의 “여자의 덕은 한이 없다.(女德無極)”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28장의 “무극에 돌아간다.(復歸于無極)”, 『장자(莊子)』 「재유편(在宥篇)」의 “무궁의 문에 들어가 무극의 들에 노닌다.(入無窮之門 以遊無極之野)” 등에 보인다. 노자에서는 극(極)이 한계, 즉 끝이 있는 유한(有限)을 의미하므로, ‘무극’은 한계 의식의 파괴와 무한 개방을 의미함으로써 인간의 구분 의식을 거부하고 무한에로의 환원을 염원하는 도가적(道家的) 이상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고, 장자에서는 구체적으로 무한 공간의 개념을 포함하기도 하면서 결국 존재 이전을 가리키는 궁극자의 의미로 쓰였다.
이것이 유교에서 철학적 의미로 크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송대(宋代)의 주돈이(周敦頤)부터다. 주돈이는 우주의 생성과 발전 및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역할 등을 서술한 『태극도설(太極圖說)』 첫머리에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고 하여 궁극자로서의 태극(太極)의 성격을 무극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이 『송사(宋史)』 「염계전(濂溪傳)」에는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된다.(自無極而爲太極)”라고 하여 태극이 무극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었음을 보여준다. ‘무극’은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의 논변에서 큰 문제로 등장한다.
육구연은, 주돈이의 다른 저서인 『통서(通書)』에는 태극은 있으나 ‘무극’은 없으며, 역대 성인들의 말씀에도 ‘무극’이 없으므로 태극만으로도 우주 변화의 근본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희는 ‘무극’이 도가사상의 영향이 아닌 주돈이의 창작이며, 태극만을 말하면 사람들이 구체적인 실물의 존재로 이해할까 염려하여 ‘무극’을 말한 것으로, ‘무극’은 곧 태극의 무형상성(無形象性)을 표현한 것이며 무극과 태극이 한 궁극자의 양면성을 나타낸 것이라 하였다.
이 문제는 조선시대 이언적(李彦迪)과 조한보(曺漢輔)의 논변을 통해 재조명 되었다. 조한보는 무극의 초월성을 강조하여 노장이나 불교에 가까운 이해를 주장하였고, 이언적은 철저히 주희의 논지를 계승하여 무성(無聲)‧무취(無臭)한 무한의 무형상의 의미임을 강조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극’은 노장의 궁극자를 표현하는 용어였으나 성리학에서 본원자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의미로 쓰이면서 유학의 철학화 과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참조항목>
무극이태극, 태극, 태극도설
무자기(毋自欺)
한글항목명 | 무자기 |
한자항목명 | 毋自欺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출전 | 『대학(大學)』 제6장 |
<요약>
성의(誠意)의 구체적 실천 방법.
<설명문>
『대학(大學)』 제6장에 나오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라는 뜻이다. 주희(朱熹)는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이 선(善)을 행하고 악(惡)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자기는 악취(惡臭)를 싫어하고 호색(好色)을 좋아하는 것처럼 인간의 자연한 본성에 입각하여 선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쾌족한 상태, 곧 자겸(自謙)을 이루는 것이다. 곧 양심에 의해 인식되어진 내용을 사욕(私欲)으로 인해 왜곡시킴이 없이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무자기인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무자기의 차이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이 아는 은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자기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독(愼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학(大學)』에서는 이 무자기를 성의의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제시하고 신독을 그것의 요체로 설정하였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한글항목명 | 문일지십 |
한자항목명 | 聞一知十 |
유형 | 개념 |
출전 |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
<요약>
어떤 일의 한 부분을 들으면 곧 그 전체를 아는 뛰어난 재능, 또는 그런 사람.
<설명문>
이 말은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서 단목사(端木賜)가 안회(顔回)를 가리켜 “회(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回也 聞一以知十)”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공자는 언변이 좋고 부유하며 평소 자긍심(自矜心)이 대단했던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인 단목사에게, 가난하지만 도(道)를 즐기고 가장 깊이가 있던 안회와 그의 자질(資質)을 비교해 보게함으로써 스스로 반성하게 한 것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
한글항목명 | 문질빈빈 |
한자항목명 | 文質彬彬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출전 | 『논어(論語)』 「옹야(雍也)」‧「안연(顔淵)」, 『의례(儀禮)』 「빙례(聘禮)」, 『한비자(韓非子)』 「난언(難言)」 |
<요약>
형식과 실질의 조화를 강조한 공자(孔子)의 말.
<설명문>
이것은 『논어(論語)』 「옹야(雍也)」의 “질이 문을 능가하면 비천해지고 문이 질을 능가하면 부화(浮華)해진다. 문과 질이 균형을 이루어야 군자(君子)라 할 수 있다.”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는데, 문(文)은 문식(文飾)‧형식을 뜻하고 질(質)은 질박(質朴)‧실질을 뜻하며 빈빈(彬彬)은 잘 융화된 상태를 뜻한다. 문과 질의 균형‧조화를 강조한 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 자공(子貢)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는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자공은 질을 강조한 극자성(棘子成)의 주장에 대하여 “문도 질만큼 중요하고 질도 문만큼 중요하다.
(질만 강조한다면) 호표(虎豹)의 털 뽑힌 가죽이 견양(犬羊)의 털 뽑힌 가죽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의례(儀禮)』 「빙례(聘禮)」의 “말이 너무 많으면 부화하고 말이 너무 적으면 뜻을 전달할 수 없다.”라는 것이나, 『한비자(韓非子)』 「난언(難言)」의 “문채(文采)가 번다하면 부화하게 된다.”라는 것 등에서도 같은 어조로 강조되었다.
<참조항목>
문질, 문질삼통
문치(文治)
한글항목명 | 문치 |
한자항목명 | 文治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출전 | 『예기(禮記)』 「제법(祭法)」, 『한서(漢書)』 「육가전(陸賈傳)」,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
<요약>
문교(文敎)를 위주로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
<설명문>
『예기(禮記)』 「제법(祭法)」에서는, 문왕(文王)은 문치에 의해, 무왕(武王)은 무공(武功)에 의해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였다고 하여, 문치를 무공과 대응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서(漢書)』 「육가전(陸賈傳)」,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등에 의하면, 역대의 통치자들은 문치와 무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많은 고심을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각 시대의 상황에 따라 난을 평정할 때는 무공을, 수성(守成)할 때는 문치를 위주로 하였다. 역대왕조에 있어 문치의 주된 사상은 유교의 정치 이념에 바탕을 두었다. 그 구체적 조치는 인정(仁政)을 베풀고 학교를 세우며, 과거(科擧)를 실시하고 숨은 현자를 등용하며, 절의(節義)를 표창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며, 문헌을 정비하고 사서(史書)를 편찬하며,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 등이 있다.
문행충신(文行忠信)
한글항목명 | 문행충신 |
한자항목명 | 文行忠信 |
유형 | 개념 |
<요약>
공문(孔門) 교육의 네 가지 대강(大綱).
<설명문>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공자는 네 가지를 가르쳤는데 문‧행‧충‧신이 그것이다.(子以四敎 文行忠信也)”라는 기사에서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의 ‘문’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가리킨다. 또한 『중응(中庸)』 의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도 ‘문’의 류에 속한다. ‘행’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의미하고, ‘충’은 자신의 본심을 다하는 것이며, ‘신’은 마음속에 항상됨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는 교육의 대강이다.
<참조항목>
신, 충
미언대의(微言大義)
한글항목명 | 미언대의 |
한자항목명 | 微言大義 |
유형 | 개념/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요약>
『춘추(春秋)』의 표현 양식.
<설명문>
공자가 『춘추』를 필삭(筆削)함에 있어 간단 명료한 언급[微言]을 통해 원대한 정치적 주장[大義]을 드러내는 방법을 취했다고 보는 관점으로, 특히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기본적 관념이다.
<참조항목>
삼과구지설, 춘추삼체
민귀군경(民貴君輕)
한글항목명 | 민귀군경 |
한자항목명 | 民貴君輕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출전 |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 |
<요약>
맹자(孟子)의 민본주의(民本主義)적 사고를 보여주는 명제로서 국가 구성 요소에 있어 백성이 중요하고 군주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
<설명문>
이것은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의 “인민이 중요하며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는 데서 유래한다. 이것은 천자가 되기 위하여는 초야에 있는 아주 미천한 신분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민심(民心)의 지지를 얻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으로, 민의(民意)의 절대적 필연성을 천명함과 동시에 임금이 인민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근거를 설명한 것이다. 맹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유교의 민본사상을 논하는 주요한 전거가 되었는데, 송대(宋代)의 주희(朱熹)는 『맹자』의 이 기록에 대하여 임금의 지위는 더없이 높은 것이긴 하지만 그는 인민과 사직이라는 두 대상의 존망여하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매여져 있기 때문에 그 경중(輕重)이 이와 같이 가벼운 것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하였다.
<참조항목>
민본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