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한시감상
「무어별」 임제
[ 無語別 林悌 ]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열다섯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남부끄러워 말없이 이별했네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돌아와 겹문을 닫아걸고
泣向梨花月(읍향리화월) 배꽃 같은 달을 보며 우네
〈감상〉
이 시는 임제의 대표작으로, 왕사정(王士禎)이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수록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진 시이다.
열다섯 살 된 아리따운 아가씨가 길을 가다 마음에 두었던 사내를 만났지만, 남들 눈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혹시라도 남이 알까 봐 겹문을 닫아걸고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려 한다.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未練)을 하소연할 곳은 달밖에 없어 배꽃 같은 달을 향해 눈물짓고 있다.
허균은 “유정(有情)하다.” 하였고, 중국 시선집인 『명시별재(明詩別裁)』에 이 시가 실려 있는데 “여독최국보소시(如讀崔國輔小詩)”라는 평이 있어 당시(唐詩)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제가 살던 16세기는 송풍(宋風)에서 당풍(唐風)으로 변환되는 시기로, 임제는 최경창·백광훈·이달·이수광과 함께 당(唐)을 표방한 우수한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주석〉
〖越溪(월계)〗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빨래했다는 곳. 〖掩〗 닫다 엄, 〖重門(중문)〗 겹겹이 설치된 문.
각주
1 임제(林悌, 1549, 명종 4~1587, 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린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인 이이(李珥)·허균(許筠)·양사언(楊士彦)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 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적(肉談的)인 시를 지어 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朴彭年)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漢詩)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敍情詩)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송이평사」 임제
[ 送李評事 林悌 ]
朔雪龍荒道(삭설룡황도) 오랑캐 땅에 북방 눈보라 치고
陰風渤澥涯(음풍발해애) 발해 바닷가에 찬바람이 분다
元戎掌書記(원융장서기) 대장군의 서기를 맡은 이는
一代美男兒(일대미남아) 한 시대의 미남아로다
匣有干星劍(갑유간성검)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 있고
囊留泣鬼詩(낭유읍귀시)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어 있네
邊沙暗金甲(변사암금갑) 변방 먼지는 창칼에 어두워지고
關月照紅旗(관월조홍기) 관문 위의 달은 붉은 깃발을 비추리
玉塞行應遍(옥새행응편) 변방을 응당 두루 돌아다닐 터이니
雲臺畫未遲(운대화미지) 공신각에 화상 그려질 날도 머지않으리
相看豎壯髮(상간수장발) 바라보니, 머리카락 곤두세우고
不作遠遊悲(부작원유비) 먼 길 떠남도 슬퍼하지 않는구나
〈감상〉
이 시는 북평사(北評事)로 가는 이영(李瑩)을 전송하면서 지어준 시이다.
1, 2구는 지명을 사용하여 임지의 스산한 분위기를 묘사하였고, 3, 4구는 이영의 인물을 칭송하고, 5, 6구는 문무(文武)를 겸하고 있음을 칭송하고 있다. 7, 8구는 변방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9, 10구는 곧 공을 세울 것이라 말하고 있으며, 11, 12구에서는 서로를 위안하고 있다.
허균(許筠)은 『성소부부고』에서 이 시에 대해 “시격(詩格)이 양영천(楊盈川, 당(唐)의 양형(楊炯))과 매우 비슷하다(절사양영천(絶似楊盈川)).”라 하였다. 주지하듯이 초당사걸(初唐四傑)인 양형(楊炯)은 왕발(王勃), 노조린(盧照隣)과 함께 당시의 궁정시풍(宮廷詩風)을 반대하고 강건한 시풍(詩風)을 주장하여 변새시(邊塞詩)에 뛰어난 시인이다. 그리고 『성수시화』에서는, “임자순(林子順)은 시명(詩名)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林子順有詩名(임자순유시명) 吾二兄嘗推許之(오이형상추허지) 其朔雪龍荒道一章(기삭설룡황도일장) 可肩盛唐云(가견성당운)).”, “기세가 호방하고 시어가 뛰어나다(기호어준(氣豪語儁)).”라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을 보여 주는 일화가 『연암집』 「종북소선(鍾北小選)」에 실려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백호 임제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林白湖將乘馬(임백호장승마) 僕夫進曰(복부진왈) 夫子醉矣(부자취의) 隻履鞾鞋(척리화혜) 白湖叱曰(백호질왈) 由道而右者(유도이우자) 謂我履鞾(위아리화) 由道而左者(유도이좌자) 謂我履鞋(위아리혜) 我何病哉(아하병재) 由是論之(유시론지) 天下之易見者莫如足(천하지역견자막여족) 而所見者不同(이소견자부동) 則鞾鞋難辨矣(칙화혜난변의)).”
〈주석〉
〖朔〗 북방 삭, 〖龍荒(룡황)〗 막북(漠北, 룡(龍) 지흉노제천처룡성(指匈奴祭天處龍城) 황(荒) 위황복(謂荒服)). 〖涯〗 물가 애, 〖元戎(원융)〗 =주장(主將), 〖匣〗 작은 상자 갑, 〖干〗 범하다 간, 〖囊〗 주머니 낭,
〖金甲(금갑)〗 =병사(兵事), 〖玉塞(옥새)〗 옥문관(玉門關)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변방을 의미함.
〖雲臺(운대)〗 한(漢)나라 궁(宮)에 있는 대(臺)의 이름.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앞 시대의 공신(功臣)을 추념(追念)하기 위해 28명을 그림. 후에 공신(功臣)이나 명장(名將)을 기념하기 위한 곳으로 널리 쓰임. 〖豎〗 세우다 수
각주
1 임제(林悌, 1549, 명종 4~1587, 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린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인 이이(李珥)·허균(許筠)·양사언(楊士彦)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 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적(肉談的)인 시를 지어 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朴彭年)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漢詩)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敍情詩)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이노행」 정약용
[ 貍奴行 丁若鏞 ]
南山村翁養貍奴(남산촌옹양리노) 남산골 늙은이 고양이를 기르는데
歲久妖兇學老狐(세구요흉학노호) 해가 묵자 요사하고 흉악하기 늙은 여우로세
夜夜草堂盜宿肉(야야초당도숙육) 밤마다 초당에서 두었던 고기 훔쳐 먹고
翻瓨覆瓿連觴壺(번강복부연상호) 항아리 단지 뒤집고 잔과 술병까지 뒤진다네
〈주석〉
〖貍奴(리노)〗 고양이(狸=貍). 〖兇〗 흉악하다 흉, 〖翻〗 뒤집다 번, 〖瓨〗 항아리 강, 〖瓿〗 작은 항아리 부, 〖壺〗 병 호
乘時陰黑逞狡獪(승시음흑령교회) 어둠 타고 살금살금 교활한 짓 제멋대로 다 하다가
推戶大喝形影無(추호대갈형영무) 문 열고 소리치면 형체 없이 사라지네
呼燈照見穢跡徧(호등조견예적편) 등불을 켜고 비춰 보면 더러운 자국 널려 있고
汁滓狼藉齒入膚(즙재낭자치입부) 이빨자국 나 있는 찌꺼기만 낭자하네
〈주석〉
〖逞〗 왕성하다 령, 〖狡〗 교활하다 교, 〖獪〗 교활하다 회, 〖喝〗 외치다 갈, 〖穢〗 더럽다 예, 〖跡〗 자취 적, 〖徧〗 두루 미치다 편, 〖汁〗 국물 즙, 〖滓〗 찌끼 재
老夫失睡筋力短(노부실수근력단) 늙은 주인 잠 못 이뤄 근력은 줄어가고
百慮皎皎徒長吁(백려교교도장우) 백방으로 생각해도 긴 한숨만 나오네
念此貍奴罪惡極(염차리노죄악극) 이것을 생각하니 고양이 죄 극악하여
直欲奮劍行天誅(직욕분검행천주) 곧 칼을 뽑아 천벌을 내리고 싶네
〈주석〉
〖睡〗 잠 수, 〖筋〗 힘줄 근, 〖皎皎(교교)〗 분명한 모양. 〖吁〗 탄식하다 우, 〖直〗 곧 직
皇天生汝本何用(황천생여본하용) 하늘이 너를 낼 때 본래 무엇에 쓰렸더냐?
令汝捕鼠除民痡(영여포서제민부) 너에게 쥐를 잡아 백성 피해 없애랬지
田鼠穴田蓄穉穧(전서혈전축치재) 들쥐는 들에 구멍 파서 벼를 쌓아두고
家鼠百物靡不偸(가서백물미불투) 집쥐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 가져가네
〈주석〉
〖痡〗 병 부, 〖穉〗 작은 벼 치, 〖穧〗 볏단 재, 〖偸〗 훔치다 투
民被鼠割日憔悴(민피서할일초췌) 백성들 쥐 피해 입어 나날이 초췌하고
膏焦血涸皮骨枯(고초혈학피골고) 기름과 피가 말라 피골이 상접했네
是以遣汝爲鼠帥(시이견여위서수) 그래서 너를 보내 쥐잡이 대장 삼았으니
賜汝權力恣磔刳(사여권력자책고) 너에게 권력 주어 마음대로 찢어 죽이게 했네
〈주석〉
〖割〗 빼앗다 할, 〖憔〗 수척하다 초, 〖悴〗 파리하다 췌, 〖焦〗 타다 초, 〖涸〗 마르다 학, 〖磔〗 찢다 책,
〖刳〗 도려내다 고
賜汝一雙熒煌黃金眼(사여일쌍형황황금안) 너에게 한 쌍의 반짝이는 황금 눈을 주어
漆夜撮蚤如梟雛(칠야촬조여효추) 칠흑 같은 밤에도 올빼미처럼 벼룩도 잡게 했지
賜汝鐵爪如秋隼(사여철조여추준) 너에게 보라매같이 쇠발톱도 주었고
賜汝鋸齒如於菟(사여거치여오토) 너에게 호랑이 같은 톱날 이빨도 주었네
〈주석〉
〖熒〗 빛나다 형, 〖煌〗 빛나다 황, 〖漆〗 검다 칠, 〖撮〗 취하다 촬, 〖蚤〗 벼룩 조, 〖梟〗 올빼미 효,
〖雛〗 병아리 추, 〖隼〗 새매 준, 〖鋸〗 톱 거, 〖於菟(오토)〗 호랑이의 별칭.
賜汝飛騰博擊驍勇氣(사여비등박격효용기) 너에게 펄펄 날고 내리치는 날쌘 용기까지 주어
鼠一見之凌兢俯伏恭獻軀(서일견지릉긍부복공헌구) 쥐가 너를 한번 보면 벌벌 떨며 엎드려서 공손하게 제 몸을 바쳤다네
日殺百鼠誰禁止(일살백서수금지) 날마다 백 마리 쥐 잡은들 누가 말리랴
但得觀者嘖嘖稱汝毛骨殊(단득관자책책칭여모골수) 보는 사람 네 털과 골격 뛰어나다 큰소리로 칭찬할 텐데
〈주석〉
〖騰〗 오르다 등, 〖驍〗 날래다 효, 〖凌兢(릉긍)〗 두려워 떠는 모양. 〖嘖〗 외치다 책
所以八蜡之祭崇報汝(소이팔사지제숭보여) 그래서 너의 공로 보답하는 팔사제에도
黃冠酌酒用大觚(황관작주용대고) 누런 갓 쓰고 큰 술잔에 술을 부어 제사지냈네
汝今一鼠不曾捕(여금일서부증포) 그런데 너는 지금 쥐 한 마리 잡지 않고
顧乃自犯爲穿窬(고내자범위천유) 도리어 이에 스스로 도둑질을 하는구나
〈주석〉
〖八蜡之祭(팔사지제)〗 매년 농사가 끝나고 농사에 관계되는 여덟 신(신농씨(神農氏), 후직(后稷), 농(農), 우표철[郵表畷, 권농관이 백성을 독려하기 위해 밭 사이에 지었다는 집], 고양이, 제방, 도랑, 곤충)에게 지내는 제사.
〖觚〗 술잔 고, 〖穿窬(천유)〗 훔치는 행위.
鼠本小盜其害小(서본소도기해소) 쥐는 원래 좀도둑이라 그 피해도 적지마는
汝今力雄勢高心計麤(여금력웅세고심계추) 너는 지금 힘도 세고 권세도 높고 마음까지 거칠어
鼠所不能汝唯意(서소불능여유의) 쥐들이 못 하는 짓 너는 맘대로 하니
攀檐撤蓋頹墍塗(반첨철개퇴기도) 처마 타고 뚜껑 열고 담장까지 무너뜨리네
〈주석〉
〖麤〗 거칠다 추, 〖檐〗 처마 첨, 〖撤〗 거두다 철, 〖頹〗 무너뜨리다 퇴, 〖墍塗(기도)〗 담장.
自今群鼠無忌憚(자금군서무기탄) 이로부터 쥐떼들이 꺼릴 것 없어
出穴大笑掀其鬚(출혈대소흔기수) 구멍을 나와서 껄껄대고 수염을 쓰다듬네
聚其盜物重賂汝(취기도물중뢰여) 훔친 물건 모아다가 너에게 많은 뇌물 주고
泰然與汝行相俱(태연여여행상구) 태연히 너와 함께 돌아다니네
〈주석〉
〖憚〗 꺼리다 탄, 〖掀〗 치켜들다 흔, 〖賂〗 뇌물주다 뢰
好事往往亦貌汝(호사왕왕역모여) 호사자들 때때로 너를 그리는데
群鼠擁護如騶徒(군서옹호여추도) 많은 쥐떼들이 하인처럼 떠받들고
吹螺擊鼓爲法部(취라격고위법부) 나팔 불고 북치고 떼를 지어서는
樹纛立旗爲先驅(수독립기위선구) 깃발 휘날리며 앞장서 가네
〈주석〉
〖貌〗 모양을 그리다 모, 〖擁〗 안다 옹, 〖騶徒(추도)〗 말 모는 사람. 〖螺〗 소라로 만든 악기 라,
〖法部(법부)〗 일명 법곡(法曲)으로, 당(唐) 현종(玄宗)때 제정한 악곡 이름. 〖纛〗 기 독
汝乘大轎色夭矯(여승대교색요교) 너는 큰가마 타고 거만을 부리면서
但喜群鼠爭奔趨(단희군서쟁분추) 다만 쥐떼들 떠받듦만 좋아하고 있구나
我今彤弓大箭手射汝(아금동궁대전수사여) 내 이제 붉은활에 큰 화살 메워 네놈 직접 쏴 죽이리
若鼠橫行寧嗾盧(약서횡행녕수로) 만약 쥐들이 행패부리면 차라리 사냥개 부르리라
〈주석〉
〖轎〗 가마 교, 〖夭矯(요교)〗 방자한 모양. 〖彤〗 붉다 동, 〖嗾〗 선동하다 수(주),
〖盧〗 개이름(한(韓)나라의 명견(名犬)) 로
〈감상〉
이 시는 1810년에 지은 고양이를 노래한 것으로, 다산의 대표적인 우화시(寓話詩)이며, 남산골 늙은이는 일반 백성, 쥐는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는 수령과 아전, 고양이는 감사(監司)에 각각 비유하여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가하고 있다. 표현상의 특징으로 보자면, 고양이를 묘사한 부분, 예컨대 밤에도 잘 보이는 눈, 날카로운 발톱, 톱날 같은 이빨 등 묘사의 사실성(寫實性)이 뛰어나다 하겠다.
다산은 「감사론(監司論)」에서, “토호와 간사한 아전들이 인장(印章)을 새겨 거짓 문서로 법을 농간하는 자가 있어도 ‘이것은 연못의 고기이니 살필 것이 못 된다.’ 하여 덮어두고,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으며 그 아내를 박대하고 음탕한 짓으로 인륜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어도 ‘이는 말을 전하는 자가 지나친 것이다.’ 하여 빙긋 웃고는 모르는 척 넘겨 버리며, 부신 주머니를 차고 인끈을 늘어뜨린 자인 수령이 조곡을 팔아먹고 부세를 도적질하기를 자기가 한 것과 같으면 용서하여 그냥 두며 고과(考課)를 제일로 매겨 임금을 속이니, 이와 같은 자가 어찌 큰 도적이 아니리요. 큰 도적이다.
이 도적은 야경꾼도 감히 심문하지 못하고, 집금오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며, 어사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도 감히 성토하는 말을 하지 못하며, 횡포한 짓을 제멋대로 해도 감히 힐책하지 못하며, 엄청난 전토를 차지하여 종신토록 편안함을 누려도 감히 나무라는 논의를 못 하니, 이와 같은 자가 어찌 큰 도적이 아니리요. 큰 도적이다(有土豪姦吏(유토호간리) 刻章僞書(각장위서) 舞文弄法者(무문롱법자) 曰(왈) 是淵魚(시연어) 不足察(부족찰) 則掩匿之(칙엄닉지) 有不孝不弟(유불효부제) 薄其妻(박기처) 淫黷亂倫者(음독란륜자) 曰(왈) 是傳之者過也(시전지자과야) 褎然爲不知也者而過之(유연위부지야자이과지) 厥有佩符囊嚲印綬者(궐유패부낭타인수자) 販穀糶(판곡조) 竊賦稅(절부세) 如己所爲(여기소위)
則恕而存之(칙서이존지) 課居最(과거최) 以欺人主(이기인주) 若是者庸詎非大盜也與哉(약시자용거비대도야여재) 大盜也已(대도야이) 是盜也(시도야) 干掫不敢問(간추불감문) 執金吾不敢捕(집금오불감포) 御史不敢擊(어사불감격) 宰相不敢言勦討(재상불감언초토) 橫行暴戾(횡행폭려) 而莫之敢誰何(이막지감수하) 置田墅連阡陌(치전서련천맥) 終身逸樂(종신일락) 而莫之敢訾議(이막지감자의) 若是者庸詎非大盜也與哉(약시자용거비대도야여재) 大盜也已(대도야이)).”라 하여, 감사(監司)가 당시 행하고 있는 범법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각주
1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 38~1836, 헌종 2):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 근기(近畿) 남인(南人) 가문 출신으로,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위인부령화」 박제가
[ 爲人賦嶺花 朴齊家 ]
毋將一紅字(무장일홍자) ‘홍(紅)’자 한 글자만을 가지고
泛稱滿眼華(범칭만안화) 널리 눈에 가득 찬 꽃을 일컫지 말라
華鬚有多少(화수유다소) 꽃 수염도 많고 적음이 있으니
細心一看過(세심일간과) 세심하게 하나하나 살펴보게나
〈감상〉
이 시는 사람들을 위해 고갯마루의 꽃을 시로 지은 것이다.
꽃이라고 하면 ‘붉다’는 생각만 가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꽃들을 판단하지 마라. 꽃에는 다양한 빛깔의 꽃이 있고, 또한 꽃에서 잘 보이지 않는 섬세한 부분의 꽃 수염 경우에는 꽃 수염이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다. 그러니 꽃 수염들부터 세심하게 살펴보라.
이 시는 꽃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확대 해석하면 세상만사와 만물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통념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주석〉
〖泛〗 넓다 범, 〖鬚〗 수염 수
각주
1 박제가(朴齊家, 1750, 영조 26~?):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승지 평(坪)의 서자이다. 11세에 아버지를 잃은 뒤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 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북학파들과 사귀면서 학문의 본령을 경제지지(經濟之志)에 두고 활동했다. 이러한 뜻은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당시 중국은 건륭제(乾隆帝)가 통치하던 문화의 전성기로 기균(紀畇)·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편·외편을 썼다. 이 무렵 정조가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86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에 걸려 규제를 받기에 이르렀다. 정조의 후원 아래 1790년 5월 2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1798년 부여현감이 되었으며, 1794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영평현령으로 옮겼다. 1801년(순조 1) 이덕무와 함께 4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동남성문 흉서사건의 주모자인 사돈 윤가기(尹可基) 사건에 휘말려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그가 죽은 연대에 관해서는 1805년과 1815년 설이 있다.
「절명시」 사수 황현
[ 絶命詩 四首 黃玹 ]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 亂離滾到白頭年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 幾合捐生却未然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 되니 / 今日眞成無可奈
바람 앞 촛불만 밝게 하늘을 비추네 / 輝輝風燭照蒼天
요기가 자욱하여 황제의 별 옮겨 가니 / 妖氛晻翳帝星移
침침한 궁궐에는 낮이 더디 흐르네 / 九闕沉沉晝漏遲
조칙은 앞으로 더 이상 없으리니 / 詔勅從今無復有
종이 한 장 채우는 데 천 줄기 눈물이라 / 琳琅一紙淚千絲
其三(기삼)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세계가 이미 망했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의 역사를 회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을 아는 인간의 구실이 어렵구나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 / 曾無支厦半椽功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라네 / 只是成仁不是忠
결국 겨우 윤곡이나 따르고 마는 것을 / 止竟僅能追尹穀
부끄럽네, 왜 그때 진동처럼 못했던고 / 當時愧不躡陳東
〈감상〉
이 작품은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지은 시이다. 이러한 절명(絶命)은 ‘사(士)’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니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운다. 나라가 망한 마당에 책을 읽는다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덮고 천고의 오랜 역사를 회고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글을 아는 선비의 구실을 하려고 하니 참으로 어렵다.
「황현전(黃玹傳)」에, “융희 4년 7월 일본이 드디어 대한을 병합하였다. 8월 황현이 그것을 듣고 비통해하며 마시거나 먹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절명시」 4수를 쓰고, 또 자제에게 글을 남기며 말하기를, ‘나는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 년 동안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난리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위로는 황천의 떳떳한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책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조용히 죽는 것이 정말 통쾌한 일임을 깨달았으니, 너희들은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隆煕四年七月(융희사년칠월) 日本遂倂韓(일본수병한) 八月(팔월) 玹聞之悲痛(현문지비통) 不能飮食(불능음식) 一夕作絶命詩四章(일석작절명시사장) 又爲遺子弟書曰(우위유자제서왈) 吾無可死之義(오무가사지의) 但國家養士五百年(단국가양사오백년) 國亡之日(국망지일) 無一人死難者(무일인사난자) 寧不痛哉(영불통재) 吾上不負皇天秉彝之懿(오상불부황천병이지의) 下不負平日所讀之書(하불부평일소독지서) 冥然長寢(명연장침) 良覺痛快(양각통쾌) 汝曹勿過悲(여조물과비)).”라 하여, 조선에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결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듯이, 황현의 절명(絶命)은 충(忠)이라는 이유로 자결한 것이 아니라 사(士)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주석〉
〖嚬〗 찡그리다 빈, 〖淪〗 잠기다 륜
각주
1 황현(黃玹, 1855, 철종 6~191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황현은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과 함께 한말(韓末) 사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성이 있었으며, 특히 시와 문장에 능통하여 17세 때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 응시하여 문명을 떨쳤다. 1875년(고종 12)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정만조(鄭萬朝) 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특히 이건창·김택영과는 그 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1883년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그가 시골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내려놓자 회시(會試)·전시(殿試)를 보지 않고 귀향했다. 그 뒤 구례군 만수동(萬壽洞)으로 옮겨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88년에 성균관 회시에 응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관계진출을 완전히 단념하고 1890년에 다시 귀향했다. 이후 만수산에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3,000여 권의 서적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실상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보고, 중국 회남(淮南) 지방에 있던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