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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고옥집(古玉集)
조선 중기의 문인 정작의 시집
조선 중기의 문인 정작(鄭碏)의 시집. 2권 1책. 목판본. 1930년 채형준(蔡亨俊)에 의하여, 형의 시집 ≪북창집 北窓集≫과 함께 합간되었다.
≪고옥집≫ 권1에 시 118수, 권2에 시 121수로 구성되어 있다. 장유(張維)의 서문과 오숙(吳0xC138)의 발문이 있다. 이 가운데 〈문적시 聞笛詩〉에서는 형을 따라 신선술을 익히던 저자의 방외인적(方外人的) 삶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송금사이수종 送琴師李壽鍾〉은 평양에서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것이다.
≪고옥집≫의 〈곡백씨 哭伯氏〉는 스승처럼 따르던 형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그 슬픈 마음을 하늘에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형은 세상이 싫어 신선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서 형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우이도중 牛耳道中〉에서는 푸른나무 숲에 있는 무덤가에 서 있으려니, 뼈꾸기는 무심하게 밭갈이를 재촉한다는 내용이다., 인생무상의 감회가 구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고옥집≫의 〈이명 耳鳴〉에서는 “학을 탄 신선이 구릉가에서 피리부는가 의심하였더니, 다시 창밖 수나무의 노래인 줄로 여겼다.”라고 하며, 이명이라고 하는 병리적 현상에 대하여 다분히 선가(仙家)의 신비주의적 안목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고옥집≫에는 인생의 번뇌를 초월적으로 노래한 〈야좌유회 夜坐有懷〉, 정월 초하룻날 늘그막의 감회를 읊은 〈원일 元日〉, 국화를 마주하여 탁주를 마신다면 9월의 어느 달이 중양일(重陽日)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중양절에 친구와의 재회를 그리며 지은 〈중구기원길 重九寄元吉〉, 그리고 〈우후즉경 雨後卽景〉·〈금촌문유감 金村門有感〉 등이 대표적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들은 대개 호탕(豪宕)한 것으로 정평이 났다. 지금의 안목에서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신선세계에의 동경과 화합을 추구하는 선가적인 시정이 더욱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고옥집≫은 당시에 주류를 이루던 유가풍의 견지에서 보면은 이단적 색채가 뚜렷하여 호탕한 면모만이 칭도되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서와 갈등을 물외에서 해소하려고 하던 당시의 방외인적 문인의 의식세계와 지향성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고옥집≫은 198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이조명현집≫ 4권에 영인하고 수록되었다.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고운문집(孤雲文集)
신라 후기의 학자 최치원의 시문집
신라 후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집. 현재 몇 종이 전하고 있으나 1926년 후손 국술(國述) 등이 3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최치원의 저술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수가 인멸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몇 종이며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20권을 진헌(進獻)하면서 아울러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등 4종 8권의 서목(書目)을 열기(列記)한 바 있다.
이 밖에도 ≪사륙집 四六集≫ 1권, ≪고운문집 孤雲文集≫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1권이 있었던 만큼, 적어도 60권을 상회(上廻)하는 거질(巨帙)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은 ≪계원필경집≫ 20권만이 온전하게 전하고, 문집 약간 권과 금석문(金石文) 몇 편이 전하고 있을 뿐 대부분 인멸되고 말았다.
≪고운문집≫은 고려시대 이후 역대로 누차 간행되었으나 고판본(古板本)은 한결같이 전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방간(坊間:항간)에 전하는 ‘고운문집’은 모두 1926년 이후에 나온 것들이며, 실린 글들 역시 ≪계원필경집≫과 ≪동문선 東文選≫, 불교관계 자료집, 금석문 등에 산재(散在)한 것을 한데 모아 엮은 것에 불과하다.
현재 기본 텍스트 구실을 하는 것은 바로 1972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에서 영인, 간행한 ≪최문창후전집 崔文昌侯全集≫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치원의 유문(遺文)을 거의 모두 수집(蒐輯)한 것으로, 그 내용은 크게 시문집, ≪사산비명 四山碑銘≫,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과 ≪계원필경집≫으로 나누어진다. 이 ≪최문창후전집≫의 간행으로 최치원 연구에 새 전기(轉機)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운문집≫은 최치원의 저술 중에서 ≪계원필경집≫과 ≪사산비명≫을 제외한 시문 모두를 모은 것으로 사실상 습유(拾遺)의 성격을 띤다. 최치원은 평생 엄청난 분량의 시문을 이룩했지만, 오늘에 전하는 것은 실로 초라한 형색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시는 현재 ≪계원필경집≫에 60수, 그 밖의 여러 문헌에 56수가 전한다.
그는 한국 한문학사상 금체시(今體詩)와 칠언시(七言詩)를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만당기(晩唐期)에 활동했던 탓인지 성당(盛唐) 때의 시풍(詩風)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으며, 시격(詩格)도 그다지 높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 당시 문인으로 활동함에 있어 ‘부(賦)’에 능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현재는 단 1편의 부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은 ‘문장보국(文章輔國)’을 학자 문인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만큼, 사대문서(事大文書) 및 공용문(公用文)을 작성하는 데 무척 유념하였다. 이에 관계된 글로는 현재 표(表) 7편, 장(狀) 6편, 계(啓) 1편이 전하고 있는데, 모두 다 변려문(騈儷文)의 절정이자 실용문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문장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지는 것을 늘 의식하였고, 또 보편적 가치 기준과 개념을 이끌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당시의 국제무대인 중국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의 대외관계(對外關係) 글은 한마디로 ‘국제화’라는 목표를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최치원은 ≪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 ≪법장화상전≫, ≪석순응전 釋順應傳≫, ≪석이정전 釋利貞傳≫, ≪보덕화상전 普德和尙傳≫ 등 수종의 승전(僧傳)을 이룩하여 불교홍통(佛敎弘通)을 위한 삶을 살았던 고승(高僧)들의 경행(景行:훌륭한 행실)을 기림과 아울러, 이를 전기문학(傳記文學) 내지 역사 서술로까지 끌어올렸다.
이 가운데 ≪법장화상전≫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第三祖)인 법장대사(法藏大師) 현수(賢首)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 자료로, 독특한 구성과 상세한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법장의 인간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점이라든지 법장의 영험성(靈驗性)과 신이성(神異性)을 통해 새로운 법장관(法藏觀)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실로 전무후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장화상전≫은 최치원의 역사서술 방식 내지 역사의식을 살피는 데도 중요하다. 특히 법장의 생애를 십과(十科)로 나누어 서술하면서,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입각하여 생애 전체를 통찰력 있게 조망(眺望)하고, 아울러 각 부분 상호간의 구분 및 인과관계, 연관성을 명확히 하여 서술함으로써 불교이론을 역사 서술에 훌륭하게 반영시켰다. 뒷날 고려 때 혁련정(赫連挺)의 균여전(均如傳)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이 밖에도 ≪유설경학대장 類說經學隊仗≫ 3권 1책이 최치원의 저작으로 전해 오고 있으나, 이는 중국인 주경원(朱景元)의 저술로, 문체도 최치원의 문체가 아니고 내용면서도 송대(宋代)의 학설이 들어 있어 그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참고문헌>>崔文昌侯全集(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72)
<<참고문헌>>국역고운선생문집(崔濬玉 편, 學藝社, 1973)
<<참고문헌>>崔致遠全集 1
<<참고문헌>>2(崔英成 譯註, 亞細亞文化社, 1998∼1999)
<<참고문헌>>崔致遠의 著作(金重烈, 漢城語文學 1, 漢城大學校, 1982)
고은유고(皐隱遺稿)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안지의 문집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안지(安止)의 시문집. 3권 1책. 목활자본. 1772년(영조 48) 후손 병희(炳喜)가 편집, 간행한 것을 방후손(傍後孫) 만곤(晩坤)이 중간하였다. 권두에 장승택(張升澤)의 서문과 권말에 이중구(李中久)·만곤의 발문이 있다.
권수에 세계도 1편, 권1·2에 시 10수, 발 2편, 묘지명 1편, 묘갈문 1편, 전(箋) 2편, 권3은 부록으로 시 2편, 습유(拾遺) 1편, 조곡서원창건기(早谷書院創建記) 및 봉안문 각 1편, 충현사제액후소지(忠顯祠題額後小識)·신도비문·행장·실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품격이 고절(高絶)하며 기상이 청일(淸逸)하다. 그 가운데 〈제압구정 題狎鷗亭〉과 〈문주팔경도영 雯州八景圖詠〉이 대표작이다.
발 가운데 〈권매헌선생집발 權梅軒先生集跋〉은 스승 권우(權遇)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그 출간경위와 스승의 행적 및 교육하는 방법 등을 설명한 것이다. 전 중 〈용비어천가전〉은 〈용비어천가〉의 초안 125장을 필사하여 올리면서 쓴 것이다.
이 밖에 변계량(卞季良)의 문집을 간행할 때 그 소감을 밝힌 〈변춘정계량집발 卞春亭季良集跋〉과 병조판서 정연(鄭淵)의 묘지명, 예조판서 이이기(李二錡)의 묘갈문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재문집(顧齋文集)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만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만(李槾)의 시문집. 10권 5책. 목판본. 서문과 발문은 없고, 그의 증손 우계(宇啓) 등에 의해 편집되어 순조 연간에 간행되었다. 서·발 등, 간행경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권1에 시 27수, 서(書) 22편, 권2~7에 서 134편, 잡저 7편, 권8에 축문 1편, 제문 10편, 애사 8편, 지갈(誌碣) 2편 등이 있고, 권9는 습유(拾遺)로 시 7수, 서 29편, 잡저 4편, 제문 6편, 애사 2편, 권10은 부록으로 행장·묘갈명·묘지명이 각 1편씩 있고, 만사 21수, 제문 8편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 중에서 〈답족질복환 答族姪復煥〉 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자세히 분석하였다. 〈여조택인 與趙宅仁〉 및 〈답권사안문목 答權士安問目〉 등은 여러 경전의 난해한 구절에 대해, 특히 ≪중용≫ 중에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을 풀이해 밝힌 것으로, ‘계구’는 동(動)과 정(靜)을 겸하고 있지만, ‘신독’은 오로지 동만을 뜻하고 있음을 서로 문답하여 설명한 것이다.
〈답족질인환문목 答族姪寅煥問目〉 및 〈답족질언환문목 答族姪彦煥問目〉과 이재(李栽)에게 올린 별지 등은 세유 (世儒)들의 의장(儀章)과 도수(度數)의 끄트머리에만 급급한 예론을 배척하고, 여러 예서를 참고해 상례에서의 제반 절차, 특히 복제(服制)와 제례의 잘못된 점 등을 상세히 논변한 글이다.
잡저 중에서 〈경행잡록 京行雜錄〉은 비록 벼슬을 하지 못한 신분이지만, 경국(經國)에 관한 소견을 기록한 잡록이다. 1714년(숙종 40) 가을에 몇몇 벗들과 더불어 과거로 상경할 때에 죽령을 지나면서 죽령과 조령이 국방의 요처이니 차라리 각 군영을 없애고, 여기에다 진영을 두고 병농(兵農)의 임무를 함께 맡겨 평시와 전시를 동시에 대비함이 더욱 능률적이라는 의견을 기술하고 있다.
그 밖에 왜란과 호란의 격전지를 둘러보고 전법의 옳고 그름을 일일이 지적했는데, 이는 당시 국방문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이황(李滉)·이현일(李玄逸)·이재·이상정(李象靖) 등 영남학파의 학문 분위기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풍부하다. 동국대학교·경북대학교·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고재집(顧齋集(하경현))
조선 후기의 학자 하경현의 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하경현(河景賢)의 시문집. 4권 2책. 연활자본. 현손 여해(汝海)에 의하여 편집되고, 곽종석(郭鍾錫)에 의하여 교정된 것을, 1959년 5대손 회근(晦根)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황(金榥)의 서문과 권말에 회근의 발문이 있다.
권수에 목록이 있고, 이어서 권1에 시 244수, 권2에 서(書) 19편, 권3에 잡저 2편, 기 3편, 명 1편, 봉안문 5편, 제문 7편, 상량문 1편, 통문(通文) 1편, 행장 2편, 묘갈명 3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제문·장초(狀草)·행장·묘갈명·비지명(碑誌銘)·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독서 후의 감회를 읊은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독논어 讀論語〉에서는 독서를 농사짓는 일에 비유하였고, 〈관서유감 觀書有感〉은 ≪대학≫·≪중용≫을 읽은 뒤 성(誠)·경(敬)의 심오한 뜻에 찬탄하는 내용이다. 〈종국 種菊〉은 도잠(陶潛)의 의경(意境)을 흠모하는 내용이다.
시어가 평이하고 은둔·자락의 정서가 담겨 있다. 서(書)의 〈상입재정선생 上立齋鄭先生〉 별지(別紙)에서는 4단(四端)과 7정(七情)의 분대(分對)·상관관계 등에 대한 의문을 ≪중용≫의 장구 해석에 국한시켜 제기하고 있다.
잡저의 〈입재설사지 立齋說私識)는 정종로의 호에 관한 견해를 기록한 것이며, 〈반매설 盤梅說〉은 매화나무를 집안에 기르면서 터득한 재배기술과 마음가짐을 설명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주집(孤舟集)
조선 후기의 학자 정운희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정운희(丁運熙)의 시문집. 2권 2책. 활자본. 현손 덕주(德輈)가 편집하여 1786년(정조 10)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황경원(黃景源)과 황윤석(黃胤錫)의 서문이 있다.
권수에 본인의 행장, 권1에 시 173수, 권2에 시 124수, 격문(檄文)·서(書)·상량문·잡저 각 1편, 부록으로 서(書)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체로 자연시가 많으며, 학문에 대한 감회를 읊은 것도 더러 있다. 격문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그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서의 〈상황지휘사서 上黃指揮使書〉는 1612년(광해군 4) 명나라의 절강총병(浙江總兵)이 조선과 일본이 내통, 명나라를 칠 계획이라고 무주(誣奏)하여 신종(神宗)이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 황응양(黃應暘)에게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여 우리나라에 오자 그에게 보낸 서찰로, 해명하는 내용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죽집(孤竹集)
조선 중기의 시인 최경창의 시집
조선 중기의 시인 최경창(崔慶昌)의 시집. 1책(87장). 목판본. 1683년(숙종 9) 손자 진해(振海)가 수집하고 증손 석영(碩英)이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송시열(宋時烈)의 서(序)가 있다. 그 뒤에 권을 나무지 않은 시가 실려 있다. 모두 245수로 오언절구 33수, 칠언절구 105수, 오언율시 42수, 칠언율시 30수, 3·5·7언 2수, 오언고시 28수, 칠언고시 5수이다.
권말에는 부록으로, 최립(崔岦)의 〈정옥봉고죽집합간불가설 訂玉峯孤竹集合刊不可說〉, 이호민(李好閔)의 〈정조사주행촌소첩 呈詔使朱杏村小帖〉, 송한필(宋翰弼)의 〈제최종성문 祭崔鍾城文〉, 신흠(申欽)의 〈옥봉전고서략 玉峯全稿序略〉, 박세채(朴世采)의 〈고죽시집후서 孤竹詩集後敍〉 등이 있고 끝에 이민서(李敏敍)의 발문이 붙어 있다.
≪고죽집≫에는 최경창의 손자이며 이 책을 편집한 진해(振海)의 시집인 ≪늑촌유고 櫟村遺稿≫가 함께 실려 있다. ≪늑촌유고≫에는 오언절구 15수, 칠언절구 47수, 칠언율시 7수 등 모두 69수의 시와 남구만(南九萬)의 발문이 들어 있다. 즉, ≪고죽집≫은 ≪고죽유고 孤竹遺稿≫와 ≪늑촌유고≫의 합책한 것이다.
최경창은 조선 중기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당시풍(唐詩風)을 진작에 하였다. 그리고 최경창은 ‘팔문장(八文章)’에 들 정도로 문장과 학문에서도 일가를 이룬 문인이다. 이이(李珥)는 그의 시를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가(宋時烈의 고죽유고 서문)하였고 허균(許筠)은 ‘청경(淸勁)’하다고 평가(許筠의 鶴山樵談)하였다.
이이와 허균의 평어들은 최경창 시의 신선하고도 활달한 면모를 지적한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될 수 있는 특징이다. 한편으로 그의 시는 차분한 필치로 붕당기(朋黨期)에 처한 지식인의 고민과 불만을 토로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피폐한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최경창의 〈이소부사 李少婦詞〉와 같은 작품은 조선조 여인의 한(恨)을 전형적으로 표출시켜놓았고, 〈번방곡 飜方曲〉은 사랑하는 여인의 정감의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최경창의 시가 당시(唐詩)의 풍격에 상당히 접근된 것으로 평가된 것 같다.
≪고죽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서문을 비롯하여, 수 편의 부록문장들이 모두 서인(西人)측 인사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경창이 서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문집인 ≪고죽집≫은 서인 집권기인 17세기 말엽에 이루어진 것 같다.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참고문헌>>蓀谷李達과 三唐詩(李鍾虎, 成均館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80)
<<참고문헌>>孤竹崔慶昌論(崔明煥, 東岳語文論集 17, 東國大學校, 1983)
<<참고문헌>>崔慶昌의 詩世界와 삶의 安定性에 대한 懷疑(安炳鶴, 泰東古典硏究 2, 1986)
고청유고(孤靑遺稿)
조선 중기의 학자 서기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서기(徐起)의 시문집. 2권 1책. 고활자본. 홍계희(洪啓禧)가 편찬하였으나 간행연대는 미상이다. 원래 서기의 저술이 별로 없는데다 임진왜란 이후로 대부분이 유실되었는데, 충청도관찰사 홍계희가 제가의 문집 속에서 서기의 글을 발췌하여 편찬, 간행한 것이다.
송병준(宋炳俊)의 서문이 있고, 권 상에는 영오동(詠梧桐)·제죽병(題竹屛)·탄시(歎時)·계후학(戒後學) 등 14수의 시와 유사, 부록으로 묘갈명·행장·제문·발문 등 13편이 실려 있다. 발문은 5대손 행원(行遠)과 후학 홍계희가 쓴 것이다. 권 하에는 21편의 문(文)이 실려 있다.
조한영(曺漢英)이 쓴 배선생묘(拜先生墓)를 비롯하여 정존중(鄭存中)이 쓴 장선생수찰(粧先生手札), 그 밖에 과고청선생묘유감(過孤靑先生墓有感)·기문(記聞), 홍계희의 고고청선생묘문(告孤靑先生墓文)·청포증장(請褒贈狀), 성담(性潭)의 회암영정개모사실서(晦庵影幀改摹事實序), 정존중이 쓴 충현서원중수기(忠賢書院重修記)·사우록(師友錄) 등이 있어 부피에 비하여 알차다. 발문은 11세손 주택(周澤)과 주덕(周德)이 썼다.
<<참고문헌>>宣祖實錄
<<참고문헌>>屛溪集
<<참고문헌>>國朝人物考
고촌집(孤村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배정휘의 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배정휘(裵正徽)의 시문집. 6권 3책. 석판본. 1940년 그의 8세손 정환(貞煥)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허전(許傳)의 서문과 권말에 이의국(李義國)과 정환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317수, 만사 57수, 권3에 부(賦) 2편, 소 10편, 서(書) 8편, 잡저 29조, 권4에 상량문 2편, 서(序) 7편, 발 4편, 기 4편, 잠 6편, 설 5편, 변(辨) 2편, 축문 9편, 권5에 제문 16편, 묘갈명 6편, 전(傳) 2편, 통문(通文) 2편, 행장 6편, 권6은 부록으로 만사·제문·유사·행장·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소의 〈소흥의소 紹興擬疏〉에는 병자호란 때의 치욕, 거듭된 흉년으로 인한 민생고, 하부관리들의 농간 등을 들어서 구제대책과 부조리 근절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잡저에는 입지(立志)·수심(收心)·지경(持敬)·동정(動靜)·심성(心性)·상수(象數)·율려(律呂) 등 29조를 문답식으로 그의 견해를 설파하였다.
설 중 〈문설 文說〉은 문(文)은 이(理)로 주재를 삼는다는 논설인데, 이는 체(體)요 기(氣)는 용(用)임을 밝히고, 문을 하려면 이치에서 구하고 이치를 밝히려면 성경현전(聖經賢傳)에서 구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性齋集(許傳)
고헌유고(顧軒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선익흠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선익흠(宣翼欽)의 시문집. 2권 1책. 석인본. 손자 창래(敞來)가 편집하고 백일인(白鎰寅)이 교정하여, 1975년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백순(李柏淳)의 서문과 권말에 백일인의 발문이 있다.
권1에 고체(古體) 8편, 시 122수, 서(書) 4편, 권2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고헌기(顧軒記)·고헌시첩발·만사·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체 가운데 〈가풍십장 家風十章〉은 존명사상(尊明思想)이 전통적 가통임을 천명한 내용이다.
서는 김평묵·송근수·송병순·송치승(宋致承) 등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그 중 〈여송치승 與宋致承〉은 선친의 행장을 부탁한 것이다. 부록의 〈고헌시첩발〉은 김평묵, 〈고헌기〉는 최익현(崔益鉉), 〈묘갈명〉은 기우만(奇宇萬)이 각각 썼다.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