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기]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벽에 그려진 봉황도와 백학도
서울문화IN ・ 2022. 3. 29.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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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창덕궁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대청의 동쪽 벽에는 <봉황도鳳凰圖>, 서쪽 벽에는 <백학도白鶴圖>가 그려져 있다.
<봉황도>는 서화미술회 제1회 동기생으로 제작 당시 31세였던 오일영吳一英과 17세였던 이용우李用雨가 합작으로 그렸다. 10마리의 봉황과 함께 바위, 폭포, 모란, 오동나무 등이 화려하게 그려진 이 그림은 순종 황제 부부의 침전이었던 대조전의 성격상 부부사이의 금슬 또는 성군의 치세를 표현하기 위해 봉황을 주제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대조전 내부 동쪽 벽의 <봉황도鳳凰圖>
봉황도鳳凰圖 | 오일영, 이용우 | 1920년 | 비단에 채색 214.0×578.0cm | 등록문화재 제242호
봉황은 예로부터 군왕의 덕치德治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그림의 소재와 각종 의례 용품 등의 문양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대조전 대청 동쪽 상단 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산해경山海經』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도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리꽃, 청록화풍으로 표현된 바위 등이 극채색으로 함께 그려져 벽화 전체에 화려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봉황도_부분
봉황도_부분
봉황도_부분
서쪽 벽의 <백학도>는 당시 29세의 나이였던 김은호가 맡아 그렸다. 여기에는 16마리의 백학과 소나무, 달, 구름, 돌, 물, 영지靈芝 등이 함께 그려져 있어 십장생十長生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도 탐스럽고 화사하게 표현되어 왕실 여성의 생활공간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대조전 내부 서쪽 벽의 <백학도白鶴圖>
백학도白鶴圖 | 김은호 | 1920년 | 비단에 채색 214.0×578.0cm | 등록문화재 제243호
대조전 대청 서쪽 벽에 그려진 16마리의 백학이 달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향해 날아와 앉는 모습은 동쪽 벽의 <봉황도>와 대칭을 이룬다. 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학, 소나무, 영지, 바위, 물, 달 등은 모두 ‘십장생十長生’의 요소로, 황제 부부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동편의 <봉황도>에 그려진 극채색의 청록화풍 바위와 대나무, 모란 등이 함께 그려져 두 그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학도_부분
백학도_부분
백학도_부분
기록에 따르면 원래 창덕궁의 대조전은 <봉황도>와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로 장식할 계획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두 폭 모두 대칭을 잘 이루는 화려한 화조화가 소재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대조전의 두 벽화는 모두 청록산수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화려한 채색과 섬세한 필치를 특징으로 하는 왕실 장식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이전에는 같이 그려지지 않던 소재들이 함께 그려지거나, 새로운 소재가 더해져 있어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 소개
오일영吳一英
정재靜齋 오일영(1890~1960년)은 근대 초기의 화가로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1864~1953년)의 조카로 1911년 서화미술원에 입학하여 조석진과 안중식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1914년 제 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이용우와 함께 창덕궁 대조전 동쪽벽의 벽화제작에 참여하여 <봉황도>를 제작했다.
이후 서화협회의 정회원으로 1921년부터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으며,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도 한 번 작품을 출품하였지만 일제의 문화통치정책과 편파적인 전시운영 방법에 반기를 들고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는 치밀하고 장식적인 북종화풍의 산수를 잘 그렸다. 대표작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와 <만장봉萬丈峰>등이 있다
이용우李用雨
묵로墨鷺・춘전春田 이용우(1904~1952년)는 서울 출생으로 1911년 서화미술회 화과 1기생으로 입학하여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전통화법을 배웠다. 1918년에 최연소로 서화협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1920년에는 서화미술회 동기생인 오일영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봉황도>를 제작하였다.
1921년에 시작된 서화협회전람회와 1922년부터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고 1923년에는 이상범·노수현·변관식과 함께 최초의 동양화가 동인인 ‘동연사同硯社’라는 연구 모임을 조직했다.
이용우는 초기에는 시대적 표현정신을 예민하게 나타냈지만 1930년대에는 안정된 자기 양식의 심산풍경深山風景을 환상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1940년 전후부터는 다시 농촌풍경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현대적 감각의 화조화도 다수 제작하였다. 대표작으로 <봉황도>, <시골풍경> 등이 있다.
김은호金殷鎬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년)는 인천 출생으로 1912년 8월 서울의 서화미술회 화과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植으로부터 전통화법을 배웠다. 1915년에 화과를 졸업하고, 1917년에는 서과도 수료하였으며, 순종의 반신상 어용御容을 제작하여 명성을 얻어 윤덕영·윤택영 등 당시의 세도가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1918년에 서화협회가 창립되자 정회원이 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 등사판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백학도>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3년 간 일본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순종어진純宗御眞>과 태조·세조의 어진을 봉사奉寫하였다. 1933년에는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고, 1936년에는 서양화가 박광진, 조각가 김복진과 함께 조선미술원을 설립하였으며, 1939년에는 남원의 춘향사春香祠를 위하여 〈춘향상〉을 제작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미술창작과 후진양성에 끼친 공로로 1962년에 문화훈장대통령장, 1965년에 3·1문화상, 1968년에 예술원상, 1976년에는 5.16민족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김은호는 다양한 영정을 제작하였는데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 〈의기논개상義妓論介像〉,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과 〈이이상李珥像〉 등 주요 역사 인물상을 다수 제작하였다.
새로운 표현감각의 세필채색화로 부드럽고 섬세한 필선과 맑고 우아한 채색의 사실적인 미인도美人圖, 꽃, 새 등의 화제를 주로 다루었으나, 전통형식의 신선도 등에서도 독보적 경지를 펼쳤다. 대표작으로 〈백학도〉(1920), 〈춘향상〉(1960년 재제작), 〈해학海鶴〉(1965), 〈백모란白牡丹〉(1968) 등이 있다.
[출처] [문화재보기]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벽에 그려진 봉황도와 백학도|작성자 서울문화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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