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문학관
유배제도는 참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많이 남겼다. 사대부 유교문화를 사대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로까지 전파시킨 것이 그 중요한 것이다. 특히 제주도의 유교문화는 그 영향이 크다. 유배객들은 서울 사대부문화를 가져오고, 유배지 지방문화를 서울로 타지방으로 가져가서 전국이 하나의 문화권이 되는 데 기여했다. 절해고도에 유배온 그들이 이를 위해 어떻게 기능했는지 살펴본다. 경기 충청권에는 있을 수 없는 유배문학관의 존재가 여러 모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유배문학관
위치 :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해대로 2745
입장료 : 2,000원
방문일 : 202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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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남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80여 명에 이르는 유배객이 거쳐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유배문학관은 2009년 5월 기공식을 가지고 2010년 11월 1일 개관했다.
남해유배문학관은 부지 37,469㎡, 건물면적 2,416㎡에 향토역사실,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남해유배문학실, 김만중 특별실, 다목적홀과 야외공원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향토역사실에는 1/65 비율로 축소된 남해대교와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과 팔만대장경 판각지였던 남해의 역사, 민요 직접 듣기 코너,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 전시, 그림자 감응을 통해 멸치를 잡는 체험코너 등이 갖춰져 있다.
유배문학실에는 유배시 전시, 옛날 형벌, 세계의 유배 이야기, 유배문학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배체험실에서는 관람객이 유배객이 되어 어명을 받아 유형을 떠나 유배지에 도착하기까지 과정을 소달구지 함거에 갇힌 채 3D입체영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밖에도 전자상소문 쓰기 체험, 삽화로 된 유배이야기 영상 등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남해 유배문학실에는 남해로 유배 온 김구·남구만·김만중·이이염·류의양·김용의 생애와 그들의 문학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류의양의 〈남해문견록〉과 김만중의 〈구운몽〉 애니메이션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남해유배문학관의 야외공원은 유배객이 살았던 초옥, 사씨남정기 이야기 패널, 십장생 조형물, 남해바다를 형상화한 수변공원 등으로 꾸며져 있다. (다음백과 전재)
서포 김만중상. 입구에는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유명인사들의 동상이 시비와 함께 서 있다.
일점 선도 남해
6.25와 월남전 참전유공자 유물전도 입구에서 열리고 있다.
유배문학관 전시는 남해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남해 특산물은 마늘, 한우, 멸치, 전복, 유자, 시금치, 고사리 등등이다.
유럽은 사회정치적인 여건상 유배가 아닌 추방을 주된 형벌로 사용하였다는 설파 선생님의 연구가 있다. 유배문화와 추방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검토한 바 있다.
*김만중 생애
김만중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1637년(인조 15)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까닭에,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으며,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소학』·『사략(史略)』·『당률(唐律)』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家統)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인 1650년(효종 1)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인 1652년(효종 3)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1665년(현종 6)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666년(현종 7)에는 정언(正言)을, 1667년(현종 8)에는 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 9)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교리(校理)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암행어사로 신정(申晸)·이계(李稽)·조위봉(趙威鳳)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현종 15)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에서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김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禮訟)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 남인의 허적(許積)과 윤휴(尹鑴) 등이 사사(賜死)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숙종 5)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숙종 9)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 : 직무가 바뀜)되었다. 3년 뒤인 1686년(숙종 12)에는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숙종 13)에 다시 장숙의(張淑儀)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 : 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난 1688년(숙종 14) 11월에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3개월 뒤인 1689년(숙종 15) 2월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와 관련된 앙화(殃禍)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숙종 18)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숙종 24)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06년(숙종 32)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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