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감리회 조선연회 램부스 감독과 만주선교회
제2회 남감리회 조선연회가 1919년 9월 3일~9일까지 원산에서 개최되었다. 이 연회는 램버스 감독이 사회를 맡았다. 월터 레셀 램버스 (Walter Russell Lambuth) 감독은 1854년 11월 10일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중국 개척 선교사인 아버지 제임스 윌리암 램버스(James William Lambuth)와 어머니 매리 이사벨라 맥클렐란(Mary Isabella McClellan)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태어난 월터는 초등교육을 위해서 미국 테네시와 미시시피에 있는 친척집으로 가는 바람에 이린 시절은 미국에서 보냈다. 그의 부모는 일본 주재 남감리회 선교 사업부의 지원을 받고 중국에서 활동했다. 월터의 할아버지는 미시시피 연회 설교자였고 증조부 윌리암 램버스(William Lambuth) 목사는 1795년에 허입한 후 홀스턴 연회 설교자였다. 월터의 감리교 목회자 가문에서 성장한 것이다. 1875년에 에모리와 헨리 대학(Emory & Henry College)에서 문학을 공부하였고 졸업 후 월터는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남감리회 테네시 연회에서 정회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77년 의료선교사인 그의 부인 다이시 켈리(Daisy Kelly)와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883년 미감리교의 지원을 받아 윌리암 헥터 파크(William Hector Park)와 함께 월터 랩버스는 수초우 병원(Soochow Hospital)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업의 후원자로 있는 서(西) 일본으로 급히 파송받고 일본 서부에서는 최초로 감리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1889년에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고베의 간세이 가쿠인 대학을 설립했다. 그 외 영어학원, 여학교 등도 세웠다. 1890년 월터 랩버스는 남감리회 남감리회의 선교업무의 총책을 담당하는 선교국 부총무의 직책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4년간 총무 직을 수행하던 중 그는 1899년에 조선을 방문했다. 그 후 매해 연회 때마다 참석하여 조선과 인연을 쌓았다. 1910년 월터 러셀 램버스는 남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에 피선되었다. 곧바로 브라질 지역 관리 감독으로 파송을 받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했다. 그다음 해 램버스 감독은 아프리카에 있는 벨기에 령(領) 콩고(Congo)에 감리교 선교 사업부를 설립하여 남감리회의 선교 지평을 넓혀 나갔다. 그 이후 유럽을 순회하면서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 남감리회를 설립하여 광범위하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1919년에 램버스 감독은 극동 지역의 관리 감독으로 파송을 받고 조선과 일본에 선교 사업을 책임지었다. 특히 그가 극동 아시아 지역을 관리 감독으로 파송된 해인 1919년은 기미년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그 후유증으로 교회가 많은 상처를 입었던 때였다. 이 독립 운동의 주도자는 교회였고 특히 감리교회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 많은 감리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램버스 감독은 이들의 석방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일제 강압 통치는 조선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불꽃을 꺼트리는 일이었다. 일제의 억암을 피하여 주변 나라로 많이 흩어져 조국의 해방의 날에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가까운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남감리회는 이들을 위해서 선교 사업을 펼쳤으며 그 결과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 선교회가 조직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 일을 램버스 감독이 극동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던 재직 시기에 이루어졌다.
램버스 감독이 조선에 들어온 1919년 9월 3일에 원산에서 제2회 남감리회 조선연회가 개최되어 그는 이 연회 사회를 맡았다. 1920년 9월 15일에 개최된 제3회 남감리회 조선연회도 사회를 맡아 주관했다. 당연히 1921년 9월에 개최될 제4회 조선연회도 램버스 감독이 주재해야 했으나 이 회의는 상주 선교사가 주관하게 되었다. 남감리회는 1921년 7월 31일~8월 1일에 시베리아의 니콜스크 우스리스키(Nicolsk-Ussuriski, Siberia)에서 제1회 시베리아-만주 선교연회(Mission Annual Meeting)를 개최하여 그동안 이 지역에 선교사업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램버스 감독은 누구보다 이 일이 기뻤을 것이다.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램버스 감독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 극동지역 순회하다가 몸에 무리가 되어 그만 눕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력이 너무 허약했다. 그래서 제1회 만주선교회를 주재하고는 다음 달에 개최될 제4회 남감리회 조선연회를 계획만 세워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안타깝게도 1921년 9월 26일 향년 67세의 일기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중국 상해에 묻힌 그의 어머니 마리아 이사벨라 옆에 묻혔다. 그는 조선 감리교회를 무척 사랑했다. 별세하기 직전에 한국 은퇴교역자의 은급기금으로 500달러를 희사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4회 남감리회 조선연회는 1921년 9월 14일~19일까지 경성에서 크램(W.G.Cram) 선교사가 주관했다.
램버스 감독이 별세한 이후 그를 기념하는 사업들이 시행되었다. 먼저 매년 10월 6일은 램버스의 날로 지킨다. 이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미시시피 주 매디슨 카운티에 있는 펼강교회(Pearl River Church)에서는 행하고 있다. 또한 그의 이름으로 대학교와 교회 등도 세워졌다. 테네시 주 잭슨에 있는 램버스 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의 유나루스카(Junaluska) 호수에 있는 램버스 숙소(Lambuth Inn)가 그것이다. 램버스 기념연합감리교회(Lambuth Memorial United Methodist Church) 역시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램버스가 별세하던 그해 1921년에 설립한 교회다.
램버스 감독은 재임 시에 이룬 업적 가운데 시베리아-만주 선교회를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도 선교의 지경을 확대하였다. 만주 선교는 램버스 감독이 감독 이전부터 남감리회가 추진했다. 그 당시는 램버스 감독이 선교부 실무 책임자로 있었을 때다. 본격적으로 남감리회는 1908년에 시작하였는데 이곳에 처음 파송된 남감리교회 전도인은 이화춘이었다. 그 해 남감리회로부터 전도사 직첩(職牒)을 받고 이화춘 전도사는 곧바로 간도지역 전도인으로 지원하였다. 이화춘은 1908년 9월에 매서인 이응현, 함주익과 함께 용정(龍井)에 도착하여 열심히 전도하였다. 간도지역의 선교는 원산구역에서 담당했으므로 하원산구역장 하디의 통괄 하에 들어갔다. 영국성서공회 선교사 베시(F. C. Vesey)가 함께 이 지역 선교에 도움을 주었으며 간도지역 선교는 활기를 띠었다. 하디 선교사는 용정촌을 선교기지로 삼고 열심히 선교한 결과 그 인근 촌락 9개 예배처개 생기고 500여 명의 교인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1909년 타 교파와 선교협정을 맺은 남감리회는 간도지역을 캐나다 선교부에 이양해야 했다. 대신 강원지역 내 캐나다 선교구역을 이양 받는다는 합의를 하고 간도지역에서 철수했다.
이렇게 중단된 간도지역 선교가 다시 재개된 것은 그 후 10년이 지나서였다. 간도와 시베리아 지역에 한인 이민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남감리회의 시베리아 선교를 결정하게 된 최초의 모임은 1919년 제2회 남감리회 조선매년회 후 원산 명사십리(明沙十里)에서 모인 선교사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램버스 감독은 스톡스(M. B. Stokes, 都瑪蓮)와 양주삼(梁柱三) 목사를 위원으로 임명하고 가능성을 조사했다. 이 보고가 남감리회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받아들여졌고, 1920년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양주삼, 정재덕 목사와 크램 선교사는 만주와 시베리아지역을 전도 시찰했다. 이들의 첫 방문지는 약 한국인이 5천 명 정도 살고 있는 시베리아 니콜스크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약 1만여 명이 살고 있어서 선교의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니콜스크에 60여 명이 모이는 소그룹이 조직되어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 선교의 열매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921년 7월에 크램 선교사와 양주삼 목사는 램부스 감독을 수행하여 시베리아를 시찰했다. 이리하여 램버스 감독의 주재 아래 니콜스크에서 선교회가 개최되어 만주․시베리아 선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1921년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개최된 제1회 시베리아-만주선교회다. 이 연회의 임명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만주․시베리아 관리자는 크램, 만주․시베리아 선교사는 테일러(블라딕보스코크 주재), 만주․시베리아․러시아 사업은 젠킨스(하얼빈 주재), 백주년 총무 – 양주삼, 교역자 양성소는 (니콜스크) 테일러와 양주삼, 블라디보스토크는 테일러, 서영복, 추풍은 김덕수, (그라데보코, 하마탕, 혜림, 훈춘, 내수청. 외수청, 스밧스고 구역은 추후 충원), 북간도선교 책임자는 최수영(액목현, 화전, 신진구역은 추후 충원)이다.
이때 보고된 교세를 보자. 한국인 목사 2명, 한국인 전도인 12명, 조직된 구역 30개, 권사 1명, 속장 15명, 입교인수 224명, 유아세례인 20명, 원입인 948명, 총교인 1,264명, 지난해(1920년) 동안 세례인 11명, 지난해 동안 유아세례인 12명, 주일학교수 11개, 교사 20명, 주일학생수 630명, 학교수 남녀학교 각 1개, 총학생수 53명이다. 남감리교회가 선교 착수 1년 만에 이와 같은 놀라운 선교 실적을 보인 것은 세계선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만주․시베리아 선교는 주로 4개의 거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시베리아 만주선교는 장로교회가 먼저 시작했지만 남감리회가 완전히 선교의 주도권을 갖게 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이역만리타국에서 환란 중에 있는 고아와 같이 버려진 존재로 방황하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찾아서 복음을 통해 위로하고 새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남감리회 선교 사업은 크게 환영을 받았다. 교회는 그들에게 조국과 같았고, 교역자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모와 같았다. 교인들은 형제와 같이 사랑으로 뭉쳐 난세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선교 전선에서 최고 사령관 역할을 감당했던 램버스 감독은 중국에서 태어나 극동지역에 익숙했고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감독이 되고서는 선교회를 조직할 정도의 교세를 이룩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의 희생과 헌신의 텃밭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시베리아 만주지역의 선교 활동은 놀랍게 발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