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8 주일설교
이제 울지 않아도 됩니다
(마 2:16~18)
1. 인생의 슬픔
여러분은 살면서 여러 가지로 힘들고 슬픈 일도 많으셨죠?
저는 학창 시절에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으나 성적은 잘 오르지 않았어요. 어쩌다 성적이 좀 올라도 잠깐의 기쁨 후에는 다음 시험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이란 잠깐의 즐거움과 긴 고생의 반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처럼 인생이란 수고와 슬픔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120세까지 산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업을 실패하거나 직장을 잃었을 때 슬픕니다.
다치거나 큰 병에 걸렸을 때 참 힘듭니다.
오해를 받거나 억울한 비난을 들었을 때 죽도록 괴롭습니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슬픈 일은 가족의 죽음입니다.
특히 자식이 먼저 죽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옛날에 인생의 문제를 고민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대 인도 사카족의 왕자 싯달타는 인간의 생노병사 문제를 고민하여 29살에 집을 나가서 수도하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습니다. 사카족 말로 성자를 무니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싯달타를 사카족의 무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카무니가 중국어로 옮겨지면서 석가모니가 되었습니다.
사카 무니,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노병사, 즉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법이므로 그런 잡념을 버리면 평안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잡념과 고통, 자신까지 잊어버리는 무아지경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싯달타의 제자 중에 해탈한 사람은 몇 명일까요? 한 불교 학자가 말했는데 한 명도 없답니다. 그러므로 싯달타의 깨달음이란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못 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이런 고민을 해결할 길은 없을까요?
인생의 슬픔과 허무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2. 초대교회 신자들의 슬픔
1세기 초대교회 신자들의 문제도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도 힘들고 박해와 핍박 때문에 더 힘든데 예수님은 빨리 재림하지 않아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재림하기도 전에 가족이 죽고 동료 신자가 죽자 멘붕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 믿음이 흔들리는 이 문제를 과연 무슨 말로 위로해 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을 위로할 방법이 있다면 여러분의 문제와 슬픔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죠? 초대교회 성도들과 여러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태는 예수님이 아기일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들어 보세요.
3. 위로를 거절한 엄마들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고 나서 베들레헴에는 너무나 슬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가지 않고 고향으로 가 버리자 헤롯은 군대를 보내어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아기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여자가 15세에 결혼해서 40세까지 아기를 낳았습니다. 인구가 희박했던 당시에는 아기 낳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30세가 넘으면 딸도 아기를 낳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집집마다 아기가 있었는데 헤롯은 2살 아래 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려고 탄생하셨는데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하고 베들레헴 아기들은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혼자 피신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 아기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자가 맞을까요? 그런데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태는 그 사건을 통해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말한 그 선지자는 누구이며 그 선지자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마태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4. 예레미야의 예언
마태가 말한 그 선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타락하고 범죄한 유다에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면서도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31:15에서는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너무 슬픈 이야기를 했는데 마태복음 2:18에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라마’는 베들레헴 북쪽 8키로 지점인데 거기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부인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머니입니다.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라마에 있는 라헬의 무덤 곁으로 지나갈 때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헬은 무덤 속에서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슬펐을까요? 이스라엘의 어머니의 라헬의 슬픔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자녀를 돌아오게 하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31:17절에서는 포로로 끌려간 자녀가 돌아오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이 예언을 인용한 것은 지금은 슬프지만, 곧 회복과 소망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5. 아기 엄마들의 소망
다시 아기를 잃은 엄마들의 슬픔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고 대신 베들레헴에 있던 아기들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피신시키고 다른 아기들은 죽든지 말든지 무관심한 이기적인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마태는 무슨 뜻으로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했을까요?
자,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만일 그때 아기 예수님이 헤롯에게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아기 때는 애굽으로 피신하셨지만 결국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기 때에 죽었다면 그것은 대속의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는 시기와 장소와 방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기 때에 죽었다면 베들레헴 다른 아기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기 때 죽어버리면 온 인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아기 때 죽었다면 다른 아기들은 죽지 않았겠지만 그 아기들은 나이들어서 죽을 것이고 그 후에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영원한 죽음은 바로 지옥의 형벌입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나중에 대속의 죽음을 죽을 것이기에 지금 다른 아기들이 죽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갈 때 1000년 전에 죽은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헬이 통곡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이 말은 아기들의 죽어서 부모가 슬프고 고통받을 때 하나님도 슬퍼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아기를 잃고 아무 말도 위로가 되지 않던 엄마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슬퍼하신다는 사실이 유일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6.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도 예수님도 슬퍼하시고 우실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슬픔에 함께 우셨고 우리에게도 함께 울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신 이야기를 좀 알아보겠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나 지났을 때 예수님이 와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함께 울었습니다.
(요 11:35) “예수님이 우셨다”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지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그따위 일로 울고 난리냐? 너 아직도 나를 못 믿느냐?”
지금도 우리가 힘들고 지치고 슬퍼할 대 하나님은 여러분의 슬픔에 하나님이 함께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너만 실패했니? 세상에서 너희 가족만 죽었니? 마지막에 다 천국에 갈 것인데 믿음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 뚝 그지지 못할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7. 하나님의 위로와 해결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습니다. 사업 실패, 건강 잃음, 억울한 말 들음, 가족의 죽음. 여러분의 인생에도 슬픈 일이 많으셨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세상의 슬픔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슬픔과 고통에 빠진 자녀들과 함께 고통하며 함께 우십니다. 아기를 빼앗기고 절망에 빠진 엄마들에게 이것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을 위해서도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며 우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슬퍼하신다는 사실로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대책없이 울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 예수님의 해결책이 우리 생각과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시기도 방법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좀 다를 때도 있지만 예수님의 해결은 궁극적인 해결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배를 낫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배를 갈라서 수술을 하자고 합니다. 우리는 기겁하겠죠. 그러나 그게 궁극적 해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배도 가르고 예수님의 배도 갈라서 예수님의 간을 떼어 우리에게 봉합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그의 죽음, 대속의 죽음입니다.
8. 이제 울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대책 없이 울지 않아도 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울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슬퍼하고 우는 대신에 그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539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첫댓글 https://youtu.be/SqOQTrzmz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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