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덕쿵덕 떡 찧는 소리, 구수한 방앗간>- 김0철(남, 83) 2021.3.16.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이야기에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중심 대사가 나온다. 당숲에 있는 마을정자에서 김0철 씨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꼭 그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분위기 때문이었을 게다. 성황당이 있는 숲, 그 숲에 있는 정자, 그 정자에 홀로 앉아 있는 어르신, 그리고 우항의 전설이 있는 소세바위가 있는 분위기는 옛날이야기를 생각하고도 남았다.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마을을 돌고 쉬는 참이었다. 하얀 모자를 쓰시고, 파란색 옷에 녹색 등산조끼를 걸치고 계셨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쓰시고 있었는데, 살아온 이야기를 묻자 아주 진지하게 말씀해 주셨다.
“애 둘 낳고 군에 다녀와서 둘을 더 낳아 4남매를 낳았는데, 공부를 가르쳐야 되잖아. 먹여 살려야 되고. 농사만 지어가지곤 도저히 안 되겠어. 돈을 벌겠다는 욕심으로 차렸죠.”
김0철 씨가 동갑내기 부인 정0숙 씨와 방앗간을 차린 이유이다. 19살에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군에 갔다. 군대에 갔다 와서 아이 둘을 더 낳았는데 농사지어서는 밥 먹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돈 되는 일을 생각하다가 방앗간을 하게 되었다. 화학기지창에서 군 생활을 한 것이 기계를 만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방앗간은 1962년도부터 1972년까지 정확히 10년 동안 하였다. 그 당시 공전이 200원이었다. 쌀을 가져오면 그 쌀로 떡을 했다. 방앗간을 하면서도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다가 손님이오면 쫓아와서 방아를 돌렸다. 명절 때는 밥을 굶어가면서 떡을 했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김0철 씨는 7살 때 아버지가 보국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둔내 소사리에 잠시 갔다 온 것 빼고는 우항리에서만 살았다. 아버지는 광복이 된 후 6.25때 청방(청년방위대)에서 활동을 했는데, 대구에서 훈련 중 돌아가셨다. 갈 때는 멀쩡하던 분이 돌아올 때는 사망날짜와 도민증과 도장과 유골함에 담긴 작은 유골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이 서러워 인정하지 않으려 하셨다. 그래서 나라에서 주는 돈을 끝내 신청하지도 받지도 않으셨다.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돈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게다. 그렇게 어머니는 꼿꼿하게 돌아가시면서
“절대적으로 나라의 돈을 받지 마라.”
고 유언하시었다.
김0철 씨가 돈을 더 벌려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방앗간을 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 된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자식들까지 줄줄이 딸렸던 탓이다.
방앗간은 참 잘 되었다. 당시는 디딜방아로 쌀을 찧고 떡을 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었다. 게다가 명절이나 잔치가 있을 때는 많은 떡을 해야 했다. 사람들은 쉽게 떡을 하고 싶어서 방앗간을 찾아서 떡을 했다. 처음 5마력짜리 발동기를 돌리다가 16마력짜리 발동기를 구입할 정도로 방앗간에는 손님이 많았다. 기름도 짜고, 고춧가루도 빻고, 떡도 하였다. 그리고 기계가 돌아가니 그 힘으로 솜도 틀었다. 방아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방앗간 밖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방앗간을 한 보람이 뭐였냐고 묻자,
“보람이야, 돈 버는 재미지.”
라고 곧바로 대답을 했다. 돈을 벌어서 자식들 학비를 대면서 참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애쓴 덕분에 자식들 대학까지 다 보냈다. 돈 벌어서 다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방앗간 해서 번 돈은 아이들 학비로 다 썼지.”
라 했다. 방앗간은 그렇게 10년을 했다. 10년을 하고 나니, 자식들이 학교를 마쳤다.
마침 나이 어린 당숙이 있었는데, 방앗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곧바로 방앗간을 당숙에게 넘겼다. 당숙은 방앗간을 하다가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도 방앗간은 잘 되고 있다.
김0철 씨가 방앗간을 할 때는 석유로 발동기를 돌려서 석유 사러 가는 것도 일이었다. 석유 사러 손수레를 끌고 가서 한 드럼씩 사오곤 했다. 지금은 전기로 하니 무척 편하다며, 이야기 도중에 눈을 살짝 감고 그 날을 회상했다.
방앗간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을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방앗간고사 이야기를 했다. 방앗간고사는 1년에 두 번 했다. 1월과 7~8월쯤 좋은 날을 받아서 행했다. 제물로는 돼지머리와 과일 등을 올렸다. 그렇게 진설을 해놓고는 빌었다.
“그저 무사히 잘 되게 해달라고, 사고 없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고 절하는 거지 뭐.”
그렇게 고사를 지낸 탓인지, 방앗간을 하면서 큰 사고는 하나도 없었다. 고사를 지낸 날은 가까운 이웃에 떡을 돌렸다. 특히 노인들 계신 집에는 좀 멀어도 떡을 갖고 갔다. 사람들이 뭔 떡이냐고 물으면,
“우리 고사 지냈어요.”
라고 대답했다. 떡을 이웃과 나누는 뜻은 성황당제사 지내고 나서 떡을 나누는 유습을 따랐다. 김영철 씨는 고사떡도 이웃과 나눠 먹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