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5)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과 원리원본 집필
⑨ 이봉운(李鳳雲) 장로 가족의 입교와 수정동 교회 증축
이봉운 장로(1906~1982)는 1906년 황해도 신천읍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승호 장로와 강승선 여사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24년 19세에 박정진 여사(1905~1992)를 맞아 결혼하였다. 21세 때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해 수학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고향에서 가업과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교회와 신앙을 통한 봉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북한의 공산 적화로 부모 일가친척과 이별하고 1948년 3월 1일 직계 가족 전원 11명이 남하의 길에 나섰다. 천신만고의 사경을 넘어 3월 20일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서대문 교북동에 자리를 잡고 집에서 교회 설립 예배를 시작으로 연희전문의 원한경 박사의 협조를 받아 현재 큰 교회가 된 서대문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교인이 100여 명이 모일 때 6·25가 발발했다. 다시 가족 6명을 끌고 수원, 전주, 순천, 마산, 부산으로 전전하며 피란길에 올라 최종적으로 제주도에 도착(1951.3.20)하였다. 제주에서는 피란민들과 더불어 지내며 신앙 위주로 생활하던 중 이웃에 와 있던 이요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신앙적으로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가 이요한 목사님이 부산으로 먼저 나가서 아버님을 만나게 되자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버님께 이봉운 장로에 관한 보고를 드리니 부산으로 나오라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과 아버님의 가르침인 성약경의 일부라 하며 아담, 노아, 아브라함의 40일 노정 약도와 간단한 설명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를 받고 전 가족이 합심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속히 나가라.’는 답을 받았다. 1953년 4월 11일에 거주하던 서귀포 법환리를 떠나 제주읍에 도착하여 부산행 배에 몸을 싣고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53년 4월 14일이었다. 이날 가족(이봉운 48세, 박정진 49세, 수경 20세, 문경 16세, 무경 13세, 현경 7세) 일행은 부산시 동구 수정 5동 437번지의 아버님 거처로 가서 첫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 후 며칠 있다가 출가하여 따로 살고 있었던 장남 이선경 씨와 장녀 이주경 씨도 찾아와 아버님을 뵙고 입교하게 되니 북한에서 함께 남하했던 전 가족이 아버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아버님은 이봉운 장로의 전 가족 입교를 ‘노아 가족이 들어왔다.’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그때 수정동 437번지의 집은 범일동 움막집에 계시던 아버님이 1953년 1월에 수정동 첫 번째 셋집, 2월에 수정동 두 번째 셋집을 거쳐 수정동 세 번째 집으로 3월에 매입하고 이사 오신 집이고, 그 후 1개월가량 되어서 이봉운 장로 가족 6인이 입교하여 들어온 곳이다. 그러나 식구 수에 비해 너무나 협소한 집이었다.
얼마 후 아버님에게 이봉운 장로가 증축할 것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승낙하시어 40일간 이봉운 장로와 이수경 씨가 설계도를 그리고 두 부자가 꼬박 매달려 목수 노릇을 했다. 그 결과, 방을 한 칸 더 들여 아버님 공부방과 집회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하고 화장실과 울타리도 갖추고 대문도 달게 되어 낙성식을 겸하여 노래 대회를 하게 되었다. 그 날짜는 정확하게 기록으로 확인이 안 되지만, 아마도 1953년 7월 중순경이 될 것이다. (이상은 이봉운 장로님의 자서전 『지족자상낙(知足者常樂)』(성화사)에 근거하여 요약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