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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가을 대한제국의 황제는 폐위 되었고 군대는 해산되었다. 하지만 지방 곳곳 산중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군대는 해산되었지만, 손에서 총을 놓지 않고 일본군과 맞서 맹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을 만나보기로 결심하였다.---------카메라와 펜을 들고 길을 나섰다. 사진을 좀 찍자----------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주막집, 구조를 요청하는 적십자기,
매켄지: 아, 드디어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국의 종군기자 매킨지 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간단하게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의병: 좋소, 외국인이 이 산속 깊은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매킨지: 별 말씀요.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일본군에 비해서 지나치게 낡고 초라해 보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의병: 이기기 힘들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우린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매킨지: 아, 예, 말씀하십시오. 가능한 일이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의병: 우리 의병들은 용감하지만 보시는 것처럼 무기가 없습니다. 총은 낡아 쓸모가 없고 화약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당신은 원하면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이니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십시오. 돈은 필요한 대로 드리겠습니다.
매킨지: 정말 죄송합니다. 그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종군기자입니다. 어느 한쪽에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기자윤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의병: 괜찮습니다. 대신 당신이 본 것을 세계에 전하여 우리의 현실을 꼭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매킨지: 네, 그건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사진을 한장만 찍겠습니다. 포즈를 좀 잡아 주십시오. 찍습니다. 하나~둘~셋~
꺼지지 않는 대한의 불꽃 ‘의병’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이 200회를 맞았습니다. 모두가 시청자 여러분들의 관심 덕분에 저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여러분들 고생 많으셨어요.
일동: 축하합니다. 짝~짝~짝~
이윤석/방송인: 역사저널 그날이 역사적인 그날을 맞이했다. 최원정 아나운서가 중심에 있었어요.
최원정: 별 말씀을~
류근/시인: 감격에 겨울뿐입니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앞으로 300회 400회 더 가야지 하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최원정: 오늘 200회를 맞아서 대한민국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의병 이야기로 200회를 꾸며 보도록 하겠습니다.
류근: 저 사진은 최근에 드라마 Mr.Sunshine에 나오면서 큰 잇슈가 됐던 사진이잖아요. 이기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싸우다 죽는다는 것도 알지만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싸우겠다 그런 비장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진짜 몰랐습니다.
심용환/역사작가:이게 매킨지가 직접 의병을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F.A.McKenzie(1869~1931)는 대한제국에 와서 직접 보고듣고 경험한 것들을 본인이 [대한제국의 비극] (Tragedy of Korea)이란 책으로 엮어내게 돼요. 그 기록에 들어가 있는 내용입니다.
최원정: 그런데 의병들을 섭외하지는 않았을꺼 아녜요. 전부다 숨어사는 사람들이니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익주: 그 당시 의병이 어디 있는가 하는 건 일본군도 모르는 비밀이잖아요. 그래서 매킨지가 무작정 서울을 떠나서 의병을 찾아 다녀요. 그러다가 경기도 양평에서 어렵게 의병을 만나서 실제로 인터뷰를 하고 저 사진을 찍어서 우리에게 남겨놓은 겁니다.
김헌주/상명대학교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일본 당국이 방해공작까지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여행증을 매킨지에게 발급해 주지 않고요. 만약에 허가를 받지 많고 여행을 다닌다면 처벌을 하겠다 이런 식의 협박을 합니다. 그런데도 매킨지는 떠나고요. 또 주변의 친구들도 만약에 네가 양복을 입고 떠나면 의병이 일본군으로 착각해서 사격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데도 매킨지는 의병을 찾기 위해서 떠나게 됩니다.
최원정: 협박하고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떠난 건데 왜 이렇게 위험한 취재에 나선걸까요?
이윤석: 물론 기자정신도 투철했겠지만 의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매킨지에게는 결국 신기하다고 할까요. 뉴스거리라고 생각을 했을 것 같애요. 이미 정세가 기울어져 있는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해서 싸우고 있는 거잖아요.
심용환: 서양인에게는 낯선 현상으로 느껴졌을 것 같구요. 그게 사실 우리에게 의병은 워낙 유명한 주제고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은 가장 유명한 일화를 남겼고 병자호란 당시에도 의병이 있었고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고 누구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했을 때 도망가거나 숨거나 앞잡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무력투쟁을 해서 나라를 지킨다 라는 의지니까 오랜 기간 우리가 쌓아온 멋진 전통 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애요.
이익주: 지금 조선의 임진왜란, 병자호란 말씀하셨지만 여기서 이제 고려를 고려하라.
이윤석: 오랜만에 고려하시네요.
류근: 고려부심
김헌주: 이제 매킨지 한테는 의병의 존재 자체가 신기하기도 했을 겁니다. 이때 일본만 해도 엄청난 큰 대단한 나라였던 거죠. 왜냐하면 동아시아 최대 강대국이었던 청나라를 청일전쟁(1894년)때 이겼던 국가였고 러일전쟁(1904년)때도 러시아를 이긴 국가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 온갖 한국의 사람들이 일본에게 저항을 해서 전투를 하는 모습이 더구나 일본군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수비대를 공격하고 이런 소문들을 듣기 시작해요. 그래서 매켄지는 더 더욱 이 의병들이 이렇게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이걸 찾을려고 노력을 했던 것이죠.
최원정: 이렇게 대단한 분들인데 의병에 대해서는 우리가 역사학계에서 소홀이 다뤘던 부분이 있는 거죠?
이익주: 역사학계에서 좀 도 분발해야 될~
최원정: 김헌주 박사님은 젊으신데 의병을 전공하신 분이예요.
이윤석: 아, 사학계의 의병이 오셨군요~ 평민의병 느낌~
일동: 웃음,
최원정: 연구하시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러죠?
김헌주: 그런 측면이 있죠.
최원정: 이런 배경설명을 듣고 다시~ 저 분들을 보니까 얼굴이 달리 보여요~
이윤석: 의병으로서의 자부심 같은 게 눈빛으로 보이고~ 사실은 평범한 백성이었다가 저분들이 싸움에 나선 거잖아요 그러고 보면 각자들 사연이 있을 거 같애요. 결혼을 앞두고 온분들도 있을 것이고 편찮은 부모님을 두고 온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누가 봐도 너무나 어려 보이는 소년병은 정말 한참 펜을 들고 공부해야 할 나이인데 어쩌다가 총을 들게 되었을까 궁금증도 생기고~
류근: 특히 저기 가운데 군복 입으신 분 말예요. 저분의 사연은 한눈에 탁 봐도 뭐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당시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 되잖아요. 그때 해산된 군인 중 한 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최원정: 대대장께서 자결로써 군대해산에 항의를 하셨어요.
이윤석: 적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기 전에 내 삶을 스스로 무장해제 하겠다 라는 이런 뜻인데 안타까운 것은 살아서 좀 지휘를 했으면 어땠을까?
류근: 대대장이 자결하고 나니까 군인들이 결집했다 잖아요.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그게 크게 동기 부여가 된 게 아닐까요?
최원정: 약간 의도도 하셨을 것도 있구요, 그렇죠? 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 보겠다.
이익주: 이때 해산된 저 군대는 대한제국의 시위대입니다. 황제를 호위하는 핵심부대예요. 이 부대를 일본이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하니까 박승환이 그때 대대장이고~ 지금 계급으로 소령 정도~계급에 있는 사람인데 군인으로서 망국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치욕적이다 해 가지고 죽음으로서 치욕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죠. 우리가 보통 富國强兵 이라고 말하는데 富國과 强兵이 그만큼 떼어놀래야 떼어놀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거잖아요. 군대라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힘인데 그런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군대해산은 결국 망국을 뜻하는 건데 제가 지금 들어도 이렇게 참담한데 당시의 군인들 심정이 오죽 했겠습니까?
김헌주: 그래서 당시 군인들은 좀 약간 자포자기를 하구요. 무기를 반납하고 군대해산 식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들어가는데 갑자기 참령 박승환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무기를 회수하고 제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가 다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죠.
류근: 그러면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김헌주: 당시에 2개 대대인데요. 1개 대대 규모를 보통 590명 정도 이니까 합치면 약 1200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류근: 결국 대대장의 죽음으로 저항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게 맞네요.
이윤석: 대한제국군이 일본에 맞서서 어떻게 싸우나 궁금해서 미리 조금 공부를 해봤어요.
류근: 정말 나날이 공부가 되네요.
이윤석: 정말 치열하고 격렬했거든요. 자, 1907년 8월 1일 서울 시가전 브리핑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아침 9시에 대한제국의 군인들이 무기를 회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두개 중대 그리고 공병대를 투입을 합니다. 자, 그래서 첫번째 교전이 9시10분에 벌어져요. 이쪽이 일본군이고 요쪽이 대한제국군인데 제2연대 쪽으로 침투할려고 하고 제10중대 일본군이 우리 제2연대 쪽으로 침투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제국군이 여기 그림 보시면(現중구 소공동) 담벼락에 총알 날아가는 거 보이시죠. 담벼락 뒤에 서 가지고 맹열히 사격을 하는 것입니다.
류근: 이게 총알이었어요?
이윤석: 총알입니다. 섬세하죠? 그리고 건물 안에 들어가서 창문쪽에서 쐈다가 들어갔다 쐈다가 들어갔다 열심히 대응 사격을 하는거죠. 일본군이 접근을 못해요. 9시 30분에 일본군이 추가로 대기병력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옆쪽으로 출입을 해요. 그런데 제1연대 1대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쪽으로 지나갈려고 하는데 또 한번 담벼락과 창문쪽에서 맹렬히 사격을 가하죠. 지나갈려고 하다가 못지나가요. 옆구리에 총 맞는데 어떻게 지나가겠어요 또 실패를 합니다. 여기서 일본군이 10시 이러다가 지는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일본군이 묘한 작전을 하나 씁니다. 대한제국의 병영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어떤 장소로 이동을 해서 기관총 두정을 설치를 합니다. 그 장소가 어딘지 아세요? 그 장소가 바로 숭례문입니다. 남대문, 남대문입니다.
최원정: 저기 올라가서 싹 내려다 보겠네요.
이윤석: 지금 저기 사진 보이시죠.
류근: 승례문에서 바로 지근 거리네요.
이윤석: 대한제국 병영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것입니다. 내 집에서 마당이 내려다 보이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기관총으로 그냥 내리갈깁니다. 집중사격, 집중포화, 피할데가 없어요. 감당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오전 10시 20분 승기를 굳힌 일본군이 두개 중대를 추가로 투입을 합니다. 맹렬히 맞섰지만 제2연대 1대대가 점령을 당하고 게다가 제1연대 1대대의 총알은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11시 50분 1연대 1대대도 점령을 당하면서 대한제국군의 공식적인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는 패배로 끝나고 맙니다.
최원정: 아, 긴박하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이윤석: 처음에는 분위기 좋았는데, 숭례문 작전이~
류근: 대한제국군의 전의가 더 드높았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위치선점과 화력의 차이가 판결했던 거죠.
심용환: 일본군의 전사자 수가 4명 그리고 부상자는 21명 정도이고 그리고 대한제국 군인들의 경우는 전사자가 70여명, 부상자가 104명 정도 되고 포로도 약 600명 정도로 추정이 돼요.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에 의한 감정적 고양으로 촉발된 사건이니까 어떻게 보면 준비된 작전은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의거에 비해서 결과가 참담하니까 많이 속상하지요.
김헌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들이 나중에 의병이 일어나는 큰 불씨가 됩니다. 조선폭도토벌지에 보면 이렇게 해서 경성(서울) 시가는 곧 평정으로 돌아갔으나 해산한 군인의 대부분은 지방으로 도망쳐서 폭도의 무리에게 투신하여 화근의 불길이 종식되지 않은 불씨가 되었다.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최원정: 일본의 입장에서는 화근의 불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항일투쟁의 소중한 불씨가 된 거잖아요.
김헌주: 북청 지역 이라든가 평양, 해주, 원주, 수원, 청주 등등에 대한제국의 진위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鎭衞隊-1895년(고종 32년) 지방의 질서유지와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군대), 그런데 모두 해산이 되어 버리니까 이 진위대에 있던 병사들이 각 지역의 의병으로 합류하게 되었죠. 근대적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이제 의병 항쟁에 투입되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을미, 을사의병보다 훨씬 더 바로 이 시기의 의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윤석: 을미의병(1895년)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때문이고 그리고 을사의병(1905년)은 을사늑약에 저항해서 그런데 두 의병은 유생들이 아마 중심이 된 거로 볼 수 있고 지금 정미의병(1907년)은 해산된 군인들이 거기에 합류를 한 거 잖아요.
이익주: 그 전에 의병이 일어나면 대한제국군이 진압을 하러가요. 그런데 이제 그런 상황이 없어지니까 의병이 이제 홀가분하게 싸울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최원정: 좀 전선이 선명해 젔네요.
이익주: 전선이 단일화 된 거죠.
이윤석: 그러면 아까 사진 속에서 군복입고 있었던 의병은 류근 시인이 처음에 짐작한대로 해산된 군인이 맞는 거 같애요. 일본은 군대해산을 내렸는데 우리 한테는 의병 소집령이 된 거에요.
류근: 우리가 백성을 민초라고 부르잖아요. 시인 김수영의 시에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밟으면 밟을수록 강하게 저항하는 존재 거든요. 지금 군대는 비록 해산되었지만 그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민초들의 항일의식은 더 더욱 강화되었다는 겁니다.
최원정: 의병들 구성을 보면 군인들은 이해가 같고 일반 백성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의 합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단순한 애국심 이상의 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심용환: 1907년 시기가 되면서부터 실제적으로 일본 식민지화가 되어가는 과정이 되어가니까 일제 농촌수탈이라 할 수 있겠죠. 일본의 경제정책에 의해서 피해가 벌어지게 되면서 그동안 축적되었던 민중들의 민족의식이 저항의식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헌주: 대표적으로 농민 의병장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서 신돌석 의병장의 경우에 사실상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모든 의병투쟁에서 싸웠던 인물이 신돌석이라고 보고 있구요. 전남 보성지역에 안규홍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머슴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료 머슴들하고 농민들을 취합을 해서 전남 보성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게 됩니다. 화적들도 의병에 합류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1910년에 의병장 맹학조 격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전에는 활빈당이라고 칭하였으나 지금은 깊은 고민 끝에 義로써 나와서 간사하고 흉악한 이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왜놈의 우두머리를 진멸하겠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활빈당이 뭐냐하면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화적조직이었거든요. 단순히 도적이 아니라 나름대로 강령도 있었구요. 부자들한테 재물을 빼앗아 가지고 가난한 사람한테 나누어준 기록도 나옵니다. 의적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사람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는 그러니까 이 시기의 의병을 보면 군인도 있고 농민도 있고 화적 조직들까지 의병에 합류하는 이런 사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류근: 왕의 나라가 아닌 우리 나라!
이윤석: 평민들이 이제는 어디든 내 나라 내 땅인 거예요. 들고 일어나도 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심용환: 데이터 라도 확인해 볼 수가 있는데요. 조선말기에 의병들은 이제 어떤 항쟁상황을 분석한 일본보고서가 있는데 폭도사편집자료~
류근: 걔네는 끝까지 의병을 폭도라고 우기는 군요.
심용환: 의병에 참여했던 주체가 시국을 분개한 우국지사(유생), 군대해산에 봉기한 군인, 부랑자 등의 무뢰도식배, 야소교도 이게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얘기하는 거고, 화적집단, 포수, 직접 참여하지 않으나 의병에 협력하는 지방의 재력가 등 이런 다양한 계층의 의병별로 모이거나 지원했다는 걸 일본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거죠.
류근: 가만히 들어보니까 왕족과 을사오적을 빼고는 다 참여한 거 같은데요.
김헌주: 전 민족적인 항쟁이라는 식이죠.
이윤석: 거의 전~ 민족적~
김헌주: 의병장의 계층도 다양하게 됩니다. 보시는 것 처럼 유생 24.7%가 되면서 단일 계층으로는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농업 19.2%, 사병 13.7%, 무직 및 화적 11.7%~ 군수 면장까지 다양한 계층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특히 의병 주도층이 확대되었다는 의병항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류근: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까 서울은 일본군이 거의 점령한 상태잖아요. 지방에서는 의병의 수가 늘어나면서 계층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걱정이 좀 되는게 승냥이 같은 일본군대가 그걸 그대로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요?
최원정: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텐데~당시 상황을 사료남을 통해서 한번 알아볼까요
----------------사료남: 1907년 9월 2일자 Korea Daily News 기사 내용입니다-지난주 토요일 오후, 한국군으로 있었던 2명의 한국인이 수원에서 일본 군인에 의해 사살되었다. 지휘 장교는 칼을 빼들고 죽어가는 사람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냈다. 토요일 저녁 용산에서는 한 한국인 부부가 아이를 업고 조용히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복부가 관통된 부인은 즉사했고 등에 업혀 있던 아이의 손가락은 날아갔다.
최원정: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렇게 잔혹한게~
김헌주: 의병에게 협력한 마을은 지역 전체를 불태워 버리고, 임산부가 죽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류근: 전쟁 중에도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인 아이들을 살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 거든요. 그냥 범죄예요.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총격을 가했다 정말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이익주: 야만적인 행위죠. 이 만행이 우리 국민들을 움츠러들게 하지를 않고 오히려 더 뭉치게 합니다. 그래서 일본군의 학살소식이 민중들에게 전해지고 여기에 분노한 일반 국민들이 더 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최원정: 늘어난 숫자만큼이나 굉장히 의병전쟁도 격렬해 졌겠네요.
김헌주: 네, 실제로 일제 통계에 따르면 1907년 8월 1일부터 12월까지 일본군과 의병의 접전이 약 323회 정도가 진행 되었다고 말합니다. 의병의 활동도 좀 더 발전적으로 진행되는데요. 그래서 연합의병까지 만들어지는 단계가 되게 됩니다.
최원정: 연합의병이라는 것은 지역 간의 연결이 되는 건가요?
김헌주: 연결이 돼서 지도부가 생겼던 것이죠.
이잇주: 전국의병이 하나로 뭉치는 겁니다. 그래서 13도 창의군이란 이름으로 일제에 점령 당한 서울로 진격하자 이걸 실제로 추진을 합니다.
류근: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윤석: 상상만 해도 멋진 것 같애요. 전국에서 의병들이 몰려들면서 가자~ 서울로~ 오라~의병으로~ 서울진격~ 통감타격~ 짝짝짝 짝짝짝~ 대한의병 이러면서~
최원정: 몰래 몰래 갔겠지~ 대놓고가면 어떻게 해요
류근: 이쯤되면 대놓고 가야돼요.
김헌주: 대단한 기세였어요. 당시 13도 창의군의 병력은 약 1만명 정도로 보고 있는데요. 근데 서울로 진격하기 이전에 각국 영사관에 공문을 보내게 돼요. 일본이 대한제국을 무단 침범하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호소문을 보내고 이건 곧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런 움직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죠.
류근: 확실히 다르네요. 조직적이예요. 그러니까 본인들이 무장폭력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면서 자기들의 무력행사를 정당화 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윤석: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심용환: 의병장 이인영이 이와 동시에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라는 걸 보내게 돼요. 그리고~
최원정: 어머 영어다
이윤석: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입니다. 정말 명문입니다. 류근 시인에게 이 영광스러운 기회를 한번 드릴게요.
류근: 제가 대한제국 때 영어를 배우지 못해 가지고~
이윤석: (심용환 작가에게) 그러면 한글로 된 건 없습니까? 뒤쪽에, 아, 뒤쪽에 한글로 된 격문이~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단결하여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 땅을 지키고 독립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 대하여 야만적인 일본인들의 크나큰 잘못과 잔악함을 호소해야만 합니다.
----저들의 야만적인 군대를 척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류근: 그야말로 격문 이네요.
최원정: 우리 민족은 왜 그렇게 격문을 잘 써요?
이윤석: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던데 동포들이 이걸 보면 진짜 가슴이 뛰었을 거 같애요.
최원정: 모든 민족의 연합군이 다 모이는 기분이예요.
최원정: 굉장히 대단한 기세로 서울로 가던 중에 갑자기 작전이 멈춰섰어요. 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류근: 그런데 갑자기 건강 같은게 악화돼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요?
이윤석: 아니면은 싸워서 이기기가 힘들다 라고 판단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최원정: 작전상 후퇴?
이윤석: 전세 차이가 너무 나고 또 우리 의병들이 공연히 피해를 보면 안되니까 일단은 후퇴를 했다가 후일을 도모하자~조금 정비를 해보자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심용환: 왜 그랬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본인만 알고 있을 것 같구요. 다만 표면적인 이유는 부모님의 부고소식이 알려지게 되면서 불효는 불충이다 얘기하면서 급하게 본가로 내려갔던 거죠.
최원정: 부모라면 아버지?
심용환: 네, 아버지~
최원정: 부친상, 부친상 때문에 내려 갔다구?
심용환: 사실 그게 좀 고민이 되는 부분이예요. 孝냐 忠이냐 개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거지요. 부모님이 중요하냐 나라가 더 중요하냐 (이윤석씨를 향하여) 어떤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이 순간 내가 이인영 이라면?
최원정: 어려운 문제다, 충과 효가 충돌할 때~
이윤석: 글쎄 누가 저를 의병장으로 뽑아줄까요?
심용환: 슬그머니 빠져 나가요?
이윤석: 제가 만약 의병장이고 싸움을 할려고 나섰다면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한을 실어서 아버님의 원수 생각하고 좀 더 싸울려고 하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최원정: 저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가요. 왜 작전까지 중지시키는지~그냥 조용히 내려갔다 오시지~
김헌주: 그 이유는 의병은 기본적으로 사상적으로 성리학적 이론을 기반에 깔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19세기 후반에 위정척사 이론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군인이라든가 평민층이 많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부들은 유력 양반들이 많았어요. 이인영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성리학적 이론의 가치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나라에 불충하는 것은 부모에 불효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 불효하는 것은 나라에 불충하는 것과 같다. 그 ‘도’는 하나며 둘이 아닌 것이니 나는 국풍을 지켜 3년 상을 마친 후 재기하겠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1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씨의 약사), 이런 말을 남기에 됩니다.
최원정: 3년상을 다 치루시겠다고~그렇게 고향에 내려가면 위험한게 아녜요, 사실?
김헌주: 그렇죠, 그래서 결국은 치루지 못하고 체포되어서 1909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이윤석: 그러면 결국 일본은 효도 다 하지 못하게 한 거예요. 3년상을 못마치게 했으면~
심용환: 저는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는게 이런 유교윤리에 의해서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게 그만큼 사회가 너무 기계적인 세계관에 빠진거고~
이익주: 이인영의 이런 행동이 현재 우리들이 정말 이해하지 못할 그런 행동이죠. 하지만 이 당시 양반출신 의병장들이 지켜보려고 한 것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인 가치, 바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대한제국 이것을 지킬려고 했다는 사회, 이것이 이제 지나간 세대에 이 봉건사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는 거고 1907년을 기점으로 해서 평민출신 의병장들이 일으킨 의병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 간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되는 것이죠..
최원정: 자, 이렇게 이인영 장군이 돌아간 뒤에 을미, 을사의병 처럼 자진 해산되는 건가요, 어떻게 돼요?
심용환: 허위를 중심으로 한 의병 같은 경우는 (허위 (1854~1908)-한말의 의병장 을미의병 당시의병을 소집), 임진강이 있잖아요, 한강 유역에 만나는 거점에다 본거지를 옮기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기회를 보는 거죠. 서울을 어떻게 진격해서 탈환할 수 있을까 허위 의병부대가 활약을 하니까 소식을 들은 많은 의병부대들이 합류를 하게 되는 효과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임진강 연합의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들이 멋진 전과를 이루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끊임없는 시도 자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걸 우리가 사실 확인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강력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에 의해 차단, 1908년 6월 11일, 허위가 체포되며 연합체제 해체------------------
이익주: 지금 동대문에 가면 왕산로 라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 산이 어디 있어? 묻게 되는데, 왕산이 허위의 號예요. 서울진공작전 때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의병장 허위의 호를 따서 왕산로 라고 길이름을 만들어 놓은 거죠.
이윤석: 저도 도산대로를 지나갈 때 한번씩 안창호 선생을 생각하는데 왕산로를 지나갈때는 허위를 생각하며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909년 9월, 일제는 해군 함정과 보병부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의병진압작전을 실시한다. 의병을 색풀하기 위해 온 마을을 샅샅이 뒤지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가차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류근: 저거 공개처형 하잖아요.
의병토벌을 명분으로 민간인을 탄압하고 전국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는데 이것이 바로 남한대토벌이다.
일동: 너무 잔인해! 차마 보기 힘든 장면들, 너무 화가 나는데~
최원정: 독립운동 당시 일본이 우리 민족을 학살했던 장면이 그대로~ 그대로~ 그렇게 붙인 것처럼 어떻게 역사가 이렇게 반복될까요. 너무 끔찍합니다. 그렇게 붙인 것처럼 어떻게 역사가 이렇게 반복될까요. 너무 끔찍합니다.
심용환: 맞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이 어떤 식으로 진압했는가가 재현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있겠고요. 호남지역이 집중적인 토벌의 대상이 되었구요. 화면에서 처럼 크게 3개의 구역으로 구분해서 토끼 몰이 하듯이 몰아가는 거예요. 북에서 남으로 지금 내려가고 있죠. 의병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죠. 요렇게 토벌이면 마지막으로 의병이 남을 수 있는 것은 섬으로 가거나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아예 해안 봉쇄까지 목표를 해가지고 수뢰정 4척을 파견해서 어로를 통해서 탈출하는 의병을 색출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최원정: 치밀하다.
이익주: 대토벌이라는 것이 의병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어요. 군대를 대규모로 동원해서 마을을 포위하고 그 마을에 군대가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방화하고 초토화 전술입니다.
류근: 일반 민간인들 말이죠.
이익주: 네, 당연합니다. 그래서 의병뿐만 아니라 그 지역 살고 있던 대한제국 군인들이 굉장히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정말 야만적 행위입니다.
이윤석: 호남 한 지역에서 벌어진 토벌작전인데 이렇게 많은 의병들이 죽은 거라면 전국을 통털어서 집계를 해보면 희생이 훨씬~
류근: 대한제국 군대해산 때 일본군 사망 4명에 대한제국 군인 70명이었거든요. 약 20배쯤 된다고 보면 한 2,3000명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이익주: 기록을 보면 의병의 피해상황은 사망 17,779명, 부상 3706명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류근: 20배 정도가 아니잖아요.
최원정& 이윤석: 100배가 넘는 거예요.
의병, 토벌대 피해규모 (1906~1911)
의병 전사 17,779 부상 3,706
일본토벌대 전사 136 부상 277
비율 전사 131:1 부상 13:1
류근: 보통 전쟁을 치루면 사망자 보다 부상자가 많은게 당연 하잖아요. 그런데 일본측 피해상황을 봐도 사망자보다 부상자가 많고 말이죠. 그런데 의병들 피해를 보니까 사망자가 1만7천명이 넘는데 부상자는 3천7백, 이건 전쟁이 아니라 그냥 학살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최원정: 討伐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냥 학살이라는 거잖아요. (토벌(討伐)-무력으로 반란의 무리를 쳐없앰),
김헌주: 이 사건 남한대토벌 작전은 이제 제노사이드라는 죄명으로 보고 있습니다.(제노사이드(genocide)-인종,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 구성원을 대량 학살해 절명시키려는 행위), 이 작전의 여파는 지역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게 됩니다. 남한대토벌로 공포감에 떨게 된 사람들, 황현 매천야록에 보면 당시 남한대토벌 작전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방을 그물 치듯하고 순사를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또 당시 일본기록에서는 이렇게 나와요. 폭도와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마구 난타했다. 여기서 폭도라는 것은 의병이고 양민은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얘기하는 거겠죠. 그럼으로 인해서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병에 대한 협조체제가 많이 사라지겠죠. 사실 그 이전에 지역주민들은 의병들의 보호역활을 했고, 또 일본군이 들어오면 몰래 밀정역활을 하면서 일본군의 정보를 의병에게 넘겨주기도 하구요. 이제 이런 것들이 일본의 잔악한 진압작전에 의해서 사람들이 공포를 가지게 되면서 의병에 대한 도움의 손길이 점점 줄어들게 돼요.
류근: 그걸 딱 노린 게 아닙니까
김헌주: 의병의 와해과정에 이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심용환: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잖아요. 돌아가신거죠.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말하면 이름조차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좀 의병들의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서 이름과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준비해 봤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사진이 말하는 그날: 제가 지금부터 이분들의 성함을 한명 한명씩 말씀 드리겠습니다.-----------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고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시화 나성화 성병운 신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모두 남한대토벌 당시 활약했었던 의병장 16명입니다.
류근: 좀 특이한 경우이네요. 이름이 다 기록이 되어 있나봐요.
이윤석: 뭔가 좀 뛰어난 활약을 하신분들일 수도 있고~
심용환: 여기 이름을 알 수 있는 이유 자체가 가슴이 아픕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분들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일본군들에게 체포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알 수 있어요.
류근: 저게 그럼 일본군이 찍은 사진이라는 거예요?
심용환: 그렇습니다. 이 사진은 1910년 도쿄에서 발간한 남한폭도대토벌 기념사진첩 속에 ‘폭도거괴’暴徒巨魁 라고 표기가 되어 있구요. 우리 의병이 한낱 “폭동을 일으킨 우두머리들”이 되고 마는 거죠.
이윤석: 아까 한분 한분 이름 말씀하실 때 제가 이렇게 표정들을 뵈었는데 다들 너무나 늠름하고 표정이 의연해요. 어디 출정하기 전에 모여서 단체로 기념사진 짝 찍는 거 같애요.
류근: 체포된 분들의 표정은 아녜요.
심용환: 이게 원래 사진 자체는 사실은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획돼서 찍었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눈빛이 보여진다는 건 어떤 행색이나 사진술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 같구요. 당시 일제에 희생된 의병장만 103명 정도가 됐구요. 23명이 잡히셔서 형장에서 순국하셨는데 그 중에 우리가 기록과 이름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건 16분인 거죠.
최원정: 이 분들은 형장의 이슬로 훗날 돌아가신 거잖아요.
심용환: 그렇죠, 또 한장의 다른 사진, 1915년 그러니까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지 5년이 지났던 싯점인데 한 명의 의병장이 일본군에게 잡힐 때의 모습입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의병이라고 부르는 채응언 의병장의 모습입니다.
최원정: 일본은 이때까지도 계속 의병에 대해서는 유독 집요했던 거 같애요.
류근: 그런데 얼굴이 지금 굉장히 부어있는 것 같은데 체포당할 때 몸싸움이 심했던 모양이예요.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뜻이겠죠.
이윤석: 의병장을 잡았는데 일단 가서 얘기합시다 이러지 않았을까요. 일당들 어디있냐 막 추궁하고 말 할 수 없다 이러구 몸 싸움도 하구~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류근: 눈빛만은 형용합니다.
심용환: 이렇게 체포된 채응언이 교수형을 당할 때 죄목이 뭔지 아세요? 죄목이 강도, 살인입니다.
이윤석: 잡범을 취급했네요.
류근: 그렇죠, 파렴치범~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를 강도 살인의 오명을 씌우는 법률에 불복한다. 위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슬퍼할 뿐 의로써 죽는 것에 추호도 여한이 없노라.---의병장 채응언.
심용환: 우리가 처음에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말하는 부끄럽지않은 삶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되는 사진이 말하는 그날이었습니다.
최원정: 일제는 ‘의병’ 저분들을 강도, 살인범으로 몰았지만 우리 민족에겐 영웅들입니다.
김헌주: 채응언을 마지막으로 의병이라는 이름을 걸고 싸웠던 것은 마지막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정신이나 싸움 자체는 끝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만주나 연해주, 간도 지역으로 넘어가 싸움 자체는 독립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용환: 특이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의병들 당시에 의병들 비적, 폭도 라고 이렇게 규정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류근: 일본군이 계속 그러고 있잖아요?
최원정: 일본 친일파들~?
심용환: 제가 그렇게 단순한 질문을 했을 것 같애요. 대한제국 내에서도 당시 의병활동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분명히 있었고 그게 대표적인 게 황성신문에 그런게 나옵니다.
첫째, 의병은 동포의 생명 재산에 해를 끼칠 뿐이며,
둘째, 국가의 권리를 손실할 뿐이며,
셋째, 외인의 비웃음을 받을 뿐이며,
-----------------(넷째: 생략)--------------------
다섯째, 너희 부모처자로부터 하여금 통곡하게 할 뿐이며-----(중략)----
-----------황성신문 1907년 08월 12일
이 황성신문은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유명하고, 제국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같이 민족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신문이었잖아요.
이윤석: 일본의 만행을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들었을텐데 어떻게 무슨 논리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익주: 황성신문을 비롯해서 의병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이런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해야 될 일은 우리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의병처럼 저렇게 싸우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자, 이 생각의 밑바탕에는 굉장히 중요한 생각하나가 있어요. 바로 사회진화론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인간사회도 생물처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병처럼 힘이 없는 상태에서 저렇게 싸우는 것은 무모한 행위다 따라서 의병=폭도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심용환: 한쪽은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된다고 하니까 있는 자산을 갖고 싸우는 거고 다른 한쪽은 절대 친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길 수 없으니 체계적으로 준비를 하면서 기다려야 된다는 태도니까 지금 보면 이제 둘 다 대화할 수 있겠다고 하겠지만 그때는 사실 선택의 논리 속에 있을 수도 있죠.
류근: 저는 평범한 민간인 입자에서 봤을 때 당장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언제 힘을 키우고 있느냐는 거죠. 이기지는 못해도 싸워야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너무 감상적인가요?
심용환: 내가 나의 분노를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싸워서 산산히 산화하겠지만 내 가족 내 산하 내 나라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살 일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는게 저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너무나 고귀하지만 내가 그때 여기에 섰더라면 저는 애국계몽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게 솔직한 속내였고~
이윤석: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확실한 것은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의병들의 희생만큼은 잊어서는 안된다는 건 확실한 거 같애요. 의병들의 희생은 참 숭고하다.
심용환; 무엇보다 개인적으론 뭐라고 할까요 16명의 이름을 제가 방송을 통해서 한명 한명씩 호명할 수 있었다는 기회가 너무 감사해요.
최원정: 조금 뭉쿨했었죠~
최원정: 어쩌면 우리는 이분들의 목숨 값으로 오늘날도 살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하니까 정말 다시 숙연해집니다.
------들풀처럼 저항한 ‘의병’-----당신들의 의연한 싸움 이후 우리는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름 대신 조국의 역사를 택한 당신들의 숭고한 ‘그날’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익주: 질 걸 알면서도 싸운 사람들은 아마 역사를 믿었을 거예요. 역사가 자기들의 이 행동을 기억해 줄 거라고 믿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 의병들을 기억하고 의병장의 이름을 하나씩 부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거죠. 이 사람들의 믿음에 우리는 답을 해야 됩니다.
최원정: 우리가 처음 매킨지가 기록한 사진으로 시작을 했잖아요. 그의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F.A. 매킨지, 1908,
의병들의 애국심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주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예요. 그래서 저희는 조선의 크리스마스 라는 이야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끝.(KBS 역사저널 그날 39화, ‘의병’에서 정리).
①고려 때 몽고가 침략해 왔을 때 의병이 30년간 몽골군과 싸웠다. 국난을 당했을 때 일반민이 자발적으로 나와 싸우는 이 전통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1907년부터 의병이 출현하자 멀리 유럽에서 이 소문을 듣고 영국의 한 신문사 기자가 취재와서 의병을 만나고 사진도 찍었다.
② 1907. 8. 1.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분노해 자결, 대대장이 자결했다는 소식에 모든 군인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일본군과 전면전, 일본군 800명 병력 대 시위대 1200명 전투 결과 일본군 전사자 4명, 부상자 21명, 대한제국군 전사자 70여명, 부상자 104명 그리고 약600명 포로, 부끄럽고 창피할 정도로 참담한 결과,
③ 1894년 대한제국 갑오개혁시행 신분제 폐지, 노비와 양반이 없어지고 1907년부터 민족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 이 나라는 왕의 나라가 아닌 평민들의 나라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국난을 당하여 의병에 지원, 왕족과 을사오적을 빼고는 전 민족적 항쟁,
④ 일제 통계에 따르면 1907. 8.~12. 일본군과 의병의 접전이 약 323회 정도, 의병 활동 발전하여 연합의병까지, 지역 간 연결이 돼서 지도부, 을사늑약, 정미7조약 무효화, 당시 13도 창의군조직 병력 약 1만명 정도, 각국 영사관에 일본이 대한제국 무단 침범한 공문발송 지원호소, 의병의 무력행사 정당화, 13도 창의대장 이인영 해외 동포에 격문, 허위 선발대 300명 서울 진격작전 준비,
⑤ 이인영 부친상 당하자 충과 효는 같다는 논리 문경 본가로 하향, 모든 작전 중지, 1909년 이인영 일제에 체포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이인영의 무모하고 이상한 행동은 유교윤리와 성리학은 대한제국의 봉건사회의 한계, 평민출신 의병장들의 의병전쟁 새로운 단계로, 허위가 13도 창의대장 계승, 1908.6.11.허위 300명 서울 작전중 일본군에 체포 교수형, 의병연합체제 해체
⑥ 1909.9~10 두 달간 일제 남한대토벌 작전(호남지역만), 전남경찰서 보고 사망자 420명, 1906년~1911년 일본군과 대한제국 의병 간 전투 피해상황, 일본군 사망 136명 부상 277명, 의병 사망 17,779명 부상 3,706명, 비율 전사 131:1, 부상 13:1, 부끄럽고 참담한 결과
⑦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은 그냥 학살, 제노사이드 genocide, 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 구성원을 대량 학살해 절명시키는 행위, 매천야록에 사방을 그물 치듯하고 순사를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일본기록에, 폭도와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마구 난타했다. 여기서 폭도는 의병이고 양민은 지역민을 얘기함,
⑧ 1910년 도쿄발간 사진첩 남한대토벌작전시 의병장 103명 희생 23명 생포 그중 16명 사진과 실명, 1915년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체포 일본에서 교수형, 죄목 강도, 살인, 잡범 파렴치범 취급, 의병장들의 항일투쟁은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격, 채응언은 우리 입장에서 애국자 일본은 파렴치범 취급,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일제 식민지 잊지 말고 務實力行 富國强兵에 혼신의 노력 다하도록,
⑨ 1907.8.12. 황성신문 의병을 폭도라고 주장, 우리가 일본에 침략을 당한 것은 힘이 없기 때문,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의병의 무모한 행동 사회 혼란, 사회진화론은 인간사회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세계, 의병처럼 힘이 없는데 싸우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 피해만 준다. 先실력양성이 우선.
⑩ 계몽운동도 큰 차원에서 국권회복운동, 절대 친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길 수 없으니 체계적 준비 해서 때를 기다리자, 바로 도산 안창호의 務實力行 신흥회와 흥사단,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의병전투에서 패배한 최익현(73세)은 대마도에서 단식투쟁, 이인영은 일본군 심문관에 충효 설파하다 형장의 이슬로, 義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고집은 영웅적인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