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페의 모든 게시물은 복사ㆍ절취(캡쳐 포함)ㆍ이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게시물의 내용은 필자의 판단에 따라 언제라도 수정ㆍ보완ㆍ변경ㆍ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족보를 편간(編刊)하는 목적에는 "씨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반남박씨 사람들 중에는 "반남박씨가 (조선시대) 5대(6대?)국반(國班)"이라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반남박씨가 "5대(6대?) 국반"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것을 "씨족의 우수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다.
인간의 "우수성"은 기본적으로 유전(遺傳)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외모를 비롯한 신체적 특성은 물론 지능(知能)과 성격을 포함한 정신적 특성도 기본적으로 부모로부터 유전 받는다. 물론 개인의 후천적 환경과 교육이 신체와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전적 요인이 그 중심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또는 어머니)가 우수한 신체와 지능을 가졌다고 해서 그 자녀도 똑 같이 우수한 신체와 지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식간에는 대략 유전자의 50%(절반)를 공유한다고 보면 된다. 말을 바꾸면, 아버지(또는 어머니)와 자식은 1/2, 손자와 할아버지(또는 할머니)는 그 제곱인 1/4, 증조부와는 세제곱인 1/8을 공유할 뿐이다. 생각보다 공유하는 정도가 크지 않다. 고조부와는 1/16, 5대조와는 1/32, 6대조와는 1/64, 7대조와는 1/128, . . . . . 대수가 올라 가면 유전학적으로는 사실상 남남과 다를 바 없다. 나아가서, 이러한 상황은 아버지쪽뿐만 아니라 어머니쪽, 남성, 여성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된다(다만, <아버지-아들>로 유전되는 Y-염색체, 그리고 <어머니-딸>로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는 그대로이다).
"동고조팔촌(同高祖八寸)"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를 중심으로 고조ㆍ증조ㆍ할아버지ㆍ아버지까지 4대, 아들ㆍ손자ㆍ증손ㆍ현손까지의 직계와 방계친으로 4대손 되는 형제(2촌)ㆍ종형제(4촌)ㆍ재종형제(6촌)ㆍ삼종형제(8촌)를 포함하는 동종(同宗)의 친족(親族)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성 계보에 국한하여 이르는 말일 뿐이다. 8촌형제(삼종형제)는 '친족'으로 생각하면서도 (예를 들어) 다같이 8촌인 증대고모(曾大姑母: 증조부의 여형제)의 증손은 그야말로 이름도 성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유전학적인 거리(距離)는 '친족'으로 생각하는 삼종형제와 다를 바 없다.
"씨족의 우수성"에서 말하는 "씨족(氏族)"은 가부장적(家父長的) 부계(父系) 중심의 성(姓)과 본(本)이 같은 집단을 의미한다. 여성은 완전히 배제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반남박씨"는 하나의 "씨족"이 된다. 반남박씨가 "국반(國班)"이라고 해서 반남박씨 시조 호장공(휘 應珠)의 모든 후손(남성)들이 "우수한 씨족"에 속할까?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평도공(휘 訔: 반남박씨 6世)께서 우수한 인재이셨다고 그 후손들이 모두 "우수한 씨족"이 될까? 역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진정한 혈손(血孫)이라 하더라도 Y-염색체만 유전되었을 뿐 "우수성"이 그대로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Y 염색체는 남성과 관련된 일부 특성, 특히 남성의 생식 기능에 관련된 유전적 정보(예를 들어, 남성 호르몬 수용체와 관련된 유전적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한다. Y 염색체가 성(性) 결정과 남성의 생식 기능과 관련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X 염색체에 비해 유전 정보의 다양성이 적고, 유전적 다양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제한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반남박씨라고 해서 모두가 "우수한 씨족" 운운하는 것은 무지하고 비과학적인 객론(客論)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국반" 운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직계 선조 계보(부계)에서 조선시대 끝날 때까지 연속해서 끊임없이 대학자와 고관대작을 배출했다면 "우수한 씨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 그런 경우는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씨족의 우수성"이라기보다는 성장 환경(시대적/사회적 배경 포함), 교육, 그리고 부인(아내)들을 잘 들인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터이다.
끝으로 한 마디 첨언한다. 걸핏하면 "명문(名門)"이니,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니, "국반(國班)"이니 하는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말잔치를 벌일 것이 아니라, 21세기 자유ㆍ민주ㆍ평등사회에 걸맞는 올곧은 언행(言行)을 보여 주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게다가 혹시라도 족보를 조작하고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르면서 "명문(名門)" 운운한다면 이야말로 얼마나 웃기는(아니, 슬픈) 일인가!
주(註):
1. 삼한갑족(三韓甲族): 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 三韓은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나라 중남부에 있었던 세 나라 마한ㆍ진한ㆍ변한을 이르는 말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여기에 '가문이나 문벌이 아주 훌륭한 집안'이라는 뜻을 가진 甲族을 붙여 만든 말이다. 즉 우리나라 최고급의 명문이라는 뜻이다.
2. 환부역조(換父易祖): 아버지를 갈고 할아버지를 바꾼다는 뜻으로 자신이 명문의 후손임을 보여주려고 조상을 바꿔치기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패륜(悖倫) 행위에 해당한다.
3. 국반(國班): 위의 삼한갑족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인데 국어 사전에는 등록되지 않은 어휘이다. 추측컨대, 현대에 와서 만든 조어(造語)인 것 같다. 국가적으로 인정하는 양반, 또는 양반 중의 양반(전국구 양반?)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위키백과>에 "문묘 종사 대현과 종묘배향공신을 동시에 배출한 여섯 가문을 6대 국반(國班)" 운운하는 말이 나오는데 원(原) 출처가 어디(무엇)인지 알 수 없고 매우 자의적(恣意的)이다. 반남박씨 15세(世) 현석공(玄石公) 휘 세채(世采: 1631~1695) 한 분으로 인해 반남박씨가 '국반'이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