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 당신은 유치한 어린애예요! 스스로를 돌아봐요. 남자라고 할 만한 구석이 도대체 있는지!
아내를 사랑해서 끊임없이 말을 거는 프랭크와 조용히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에이프릴은 너무나도 안 맞는 부부였다. 프랭크는 처음엔 침착하고 다정하게 에이프릴에게 말을 건네지만, 끊임없이 말하는 그를 참지 못하고 에이프릴이 발끈하는 순간, 프랭크는 돌변한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그녀에게 모진 말을 퍼붓고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 속 시원하게 화를 내고 난 후에, 프랭크는 항상 후회를 하며 울먹이는 눈으로 에이프릴을 살핀다. 첫눈에 반했던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았다.
에이프릴의 “I hate you.”라는 말에 긁힌 프랭크는 폭주했다. “내가 싫다면서 왜 나랑 사는 거야? 왜 나랑 결혼했어?” 이런 말을 하는 그는 화를 내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서럽게 소리치며 “애 떼길 나도 바랐어!”라는 폭력적인 말을 내뱉기까지 한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선반 위의 물건들을 쓸어버리고 씩씩거렸다. 그의 눈빛엔 아내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다. 하지만 에이프릴이 숲 속으로 뛰어가자, 그는 애타게 그녀를 부르며 쫓아갔다. 제발 말 좀 하지 말라는 에이프릴의 외침에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놔 주었다. 그녀에게서 멀어질 때 그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 돌아와서 술을 마실 때도 그의 시선은 숲 속에 있는 에이프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숲에서 걸어 나오자, 그는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프랭크는 “어린애”라는 결론이 나온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에이프릴이 프랭크에게 어린애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해가 안 됐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서 다시 초반 부분을 보니, 어린애라는 단어만큼 프랭크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싸우는 장면은, 마치 엄마와 아들이 싸우는 장면 같았다. 조금만 기분이 상하면 못된 말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 나를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고, 싸운 다음 후회하고 자신을 떠날까봐 불안해하는 모습. 아내가 화가 풀렸다고, 사랑한다고 하면 금세 헤벌쭉 웃는 모습은 몸만 큰 ‘어른아이’였다.
◎ 에이프릴의 마지막 희망
에이프릴은 파리에 가서 자신은 국제기구의 비서로 일하고 프랭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으며 ‘의미 있게 살자’고 말한다. 그녀의 파리 이주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이다.’라고 비판했다. 파리에서 에이프릴이 비서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낯선 땅으로 간다는 말인가. 그녀는 ‘당신 같이 멋진 남자가 이곳에서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프랭크를 설득했다. 프랭크도 처음엔 파리에 갈 생각이 굳건했지만, 승진과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집요하게 파리로 가자고 요구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프랭크의 입장은 이해가 되었지만, 에이프릴의 행동은 점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왜 그렇게 파리를 고집했을까. 이곳에서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생겼는데.
에이프릴이 말한 “우리의 마지막 기회”는 사실 “나의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 아닐까. 한때 자신이 원하던 일(배우)을 하며 살았으나, 재능이 없어 전업주부가 된 그녀는 집안일을 할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재미도 희망도 없는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팠던 에이프릴에게 ‘파리’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녀에게만큼은 파리로의 이주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파리에서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프랭크의 몫이 된다. 그녀는 이것까지 계획에 포함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토록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녀의 절망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치 않은 임신, 좌절된 꿈,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상이 모여 그녀의 희망을 앗아갔다. 숲 속에서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에이프릴의 눈동자는 공허하기도 결연하기도 했다.
◎ 결핍과 히스테리
프랭크는 비정상적으로 에이프릴에게 자신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이는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불안정한 인격을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년기의 프랭크는 아버지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그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는데, 어릴 적에 그를 두고 떠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이런 가정에서 그는 애정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직 사랑받을 만한 남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신입사원과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에이프릴의 사랑이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히스테리증자의 욕망은 결핍 자제로 구성된다.’(p.111) 그의 결핍은 사랑에 집착하는 히스테리로 발현되었다. 그리고 그는 ‘남자인지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야.’라는 존의 말을 듣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You are a man.”이라는 아내의 말에 감격하기도 한다. 남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그의 또 다른 히스테리인 것이다.
히스테리가 다채로운 형태로 드러나는 만큼(p.101), 에이프릴에게도 히스테리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생각한 에이프릴의 히스테리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프랭크를 처음 봤을 때도 “관심사가 뭐냐고요.”라고 할 만큼, 직업이 아니라 정말로 원하는 일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이런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남편도 자신과 똑같은 처지인 것을 보면서, 그녀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는 이곳만 아니면 된다면서 파리로 가는 것을 고집하는 것으로 자신의 히스테리를 보여준 것 같다.
◎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
친한 언니와 함께 이 영화를 감상했다. 보면서 우리 둘 다 부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언니가 “난 프랭크가 아이 같다고 느꼈어.”라고 한 말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걸 한 단어로 정리해주니,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를 못한 장면을 다시 보는데, 에이프릴이 “당신은 유치한 어린애예요!”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오자, 둘 다 소름이 돋았고 대박이라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리고 셰프가 왜 에이프릴을 사랑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우리 둘은, 연극의 커튼콜 장면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퍼즐이 딱 맞춰지는 짜릿함을 느꼈다.
연출이 정말 훌륭한 영화였다. ①숲 속에서 싸우고 집으로 돌아갈 때 프랭크는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아침에 아내에게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언덕을 내려갈 때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과 애정 결핍을 동시에 드러낸 장면이라 생각한다. ②초반에 프랭크가 회사에 출근하러 갈 땐 에이프릴이 마중 나오지 않았지만, 싸우고 난 다음 날 아침엔 문 앞까지 마중을 나간 장면도 대비된다. ③어두운 방 안에 드리워진 창문의 그림자는 프랭크가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는 초반의 프랭크의 대사 “널 덫에 가둬? 맙소사 그럼 난 어떤데?”를 떠올리게 했으며, 사실 프랭크야 말로 에이프릴에게 꼼짝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④연극이 끝나고 두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멀찍이 떨어져서 복도를 쭉 걸어오는 장면은, 둘이 말이 통하지 않아서 결코 이어질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⑤낙태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배우의 표정과 분위기로 시청자가 짐작하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한 것도 훌륭했다. ⑥피를 흘리는 에이프릴과 창 밖에 눈부신 풍경의 대비는 그녀를 더욱 비참해 보이게 만들었다. ⑦에이프릴과 프랭크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기나긴 마차 행렬. 한 여인이 타고 있네. 그녀는 집시. 미래를 점친다네. 모든 근심을 쫓아준다네.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그녀의 말만 믿으면...그댄 딴 사람과 키스하고 있었지. 하지만 난 또 찾아가리. 이 마음을 믿어주오. 집시 여인이여. 내 사랑은 진실하다오. 그댄 언젠가 돌아올 거야.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주인공은 에이프릴, 프랭크 부부이지만 주목할 만한 부부가 또 있다. 셰프와 밀리는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상대의 모습을 존중함으로써 부부의 관계를 유지한다. 밀리가 갑자기 울어도 일단은 안아주며 다독이고, 셰프가 휠러 부부 얘기를 그만하자고 하니까 멈칫하다가 알겠다고 하는 밀리의 모습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기빙스 부부도 주목할 만하다. 한때 휠러 부부를 칭찬하던 기빙스 부인이 그 부부를 험담하자, 남편은 보청기의 소리를 줄여 아예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다. 에이프릴과 비슷한 성향으로 보이며, 에이프릴이 프랭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고 하여 갈등을 심화했다면, 기빙스는 갈등을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남편의 회피 덕분에 이 부부는 유지되고 있다.
◎ 너도? 나도! 야 나두~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주기가 있다. 그동안은 내가 자존감이 낮다고만 생각했으나, ‘히스테리증자의 세계에는 예쁜 사람과 못생긴 사람이 있을 뿐이다.’를 통해 나 또한 히스테리증자임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남들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이상적 아버지의 이미지는 신경증자의 환상이다.’(p.108) 나는 나의 아버지가 말을 다정하게 하는 분이길 바랐다. 아버지가 장난스레 툭툭 던지는 말이 내 신경을 긁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난 그동안 내가 신경증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환상 속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꿈꾸는 누구든지 결핍을 지닌 신경증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모두가 히스테리증자인 사회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선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묻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원하는 일에 도전할 것이냐,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안정을 추구할 것이냐. 둘 중 어떤 삶이 행복한 것인지 논의해보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정신병자로 취급된 존 기빙스가 사실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을지, 그가 한 말을 되새기며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깊은 욕망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다.
첫댓글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 1,2,3,....7 " 영화 장면을 눈에 보이는 글로 정리를 잘 해 주셨서, 글을 읽고 맞아 맞아 맞장구치며 읽었습니다. "너도? 나도! 야 나두~" 영화 소감 제목부터 남다르시네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나눠보고 싶은 이야기 수업시간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