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1 주일설교
중립이 불가능한 두 가지 이유
마태복음 12:38~45
온 세상은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만드셨고 지금도 가장 선하게 운행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부터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섭리와 운행을 멈추시면 세상은 즉시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인류의 참된 행복인데 이것을 거부하고 내 맘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사건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하와는 마음으로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존재이다.”
이 말을 더 줄이면 “나는 나다.”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다.”라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אֶהְיֶה אֲשֶׁר אֶהְיֶה(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이 말을 한글성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했는데 영어로는 I am that I am 더 줄이면 “나는 나다.”입니다. 온 우주에서 “나는 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면 하나님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그것이 참 행복이라고 가르쳐 준 것은 사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인권을 되찾아준 것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준 마약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동서고금(東西古今) 언제나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상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숭배한 것입니다.
모든 우상의 공통점은 사람이 자기 행복을 위해 고안했다는 사실입니다. 우상을 고안한 사람들은 우상이 사람에게 복 주는 방법도 스스로 정했습니다. 중국산 플라스틱 부처에 3000번 절하면 복을 준다고 부처가 약속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많은 선지자가 예언했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함량 미달이라는 것이죠.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 그것은 우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면서 메시아인지 아닌지 헷갈렸습니다. 예수님께 질문도 해 보고 따져보면서 메시아 검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12장에서 중간 평가의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은 중립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복음 앞에 중립을 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로 나오는 사람과 예수님과 천국을 믿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립이 있습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중립에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립, 이것 참 편리한 선택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자기는 중립이었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고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잘라서 말합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것도 아니고 반대편에 서는 것도 아닌 중간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립은 악한 것입니다. 중립이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립이 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자 군중이 이분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립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메시아가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잘라서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 세계에도 질서가 있는데 대왕 마귀가 졸개 마귀를 내쫓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서서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에게 바리새인들은 가장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명인이고 어떤 자격증은 없지만 하시는 일을 볼 때 꼭 메시아 같습니다. 예수님이 왕족 출신은 아니지만 어쩌면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아니라고 하니 백성들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쉬운 선택이 일단은 중립에 서는 것입니다.
“나는 믿지도 않고 안 믿지도 않고 그냥 중간에 있을거야.”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나는 오직 나만 믿을 거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하시는지 좀 들어보세요.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명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께서 메시아라는 좀 확실하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좀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들에게 보여줄 증거는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보여줄 것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은 너희들은 내가 죽었다 사흥만에 부활해야 믿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39절에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음란하다고 했을까요?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 문란한 성관계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조가 없다는 뜻입니다.
남자가 자기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 여자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면 그게 음란한 것입니다. 여자가 한번 결혼했으면 남편만 사랑해야 하는데 나는 중립에 서서 이 남자도 사랑하고 저 남자도 사랑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톨레랑스가 아닙니다. 그 여자는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음란한 여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으면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과 바리새인 중간에 서겠다고 하면 그게 음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악한 것과 음란한 것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중간에 서서 이쪽저쪽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듯이 마태가 복음을 전할 때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태의 설교도 일리가 있고 유대인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 목사님의 성도들 가운데 자꾸만 중립에 서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사람에게 중립이 있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립이란 톨레랑스가 아닙니다. 중립은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중립은 음란한 것입니다. 중립은 이중 스파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중립에 서면 안 됩니다.
이어서 41절에서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과 스바 여왕 이야기를 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했습니다. 또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그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와 솔로몬을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그 놀라운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을까, 바리새인의 말을 믿을까,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가,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있으니 그들은 구제불능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세요.
중립은 똘레랑스가 아닙니다. 중립은 사랑이 아닙니다.
중립은 음란한 것입니다. 중립은 구제불능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중립에 설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사람이 중립에 머물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세상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43절, 귀신이 사람에게 나가서 물 없는 곳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여기서 물 없는 곳은 광야를 말하는데 광야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원래 귀신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그 사람을 괴롭히며 살아야 하는데 광야에는 사람이 없어서 정착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귀신이 전에 머물던 사람에게 가 보았더니 그 사람이 멀쩡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가서 그 사람 속에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귀신들렸다가 깨끗하게 된 사람이 방금 귀신들렸다가 나은 그 사람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는데 좀 있다가 그 사람에게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더 형편이 나빠진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아 주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귀신들렸다가 깨끗하게 된 사람은 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기간을 지나면서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하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다시 변질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역하는 모습이 바로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온 것처럼 구제 불능 상태가 된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그분을 메시아로 알고 기뻐하며 따라다녔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소리를 듣자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다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도 못 믿겠고 바리새인도 못 믿겠고 그래서 중립 상태에 머물겠다는 것은 빈집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안 믿은 것도 아니고 중립 상태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마귀가 빈집을 그냥 버려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빈집은 언제든지 마귀에게 점령당합니다. 중립에 머무는 것은 사실은 마귀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중립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시대나 마태가 목회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중립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믿어도 너무 푹 빠지지 말고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세상 가치관을 너무 배척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우상도 사랑하고 일부다처도 인정하고 일처다부도 인정하고 남편도 사랑하고 이웃집 아저씨도 사랑하고 남성동성커플 건보료 피부양자 자격도 인정하고 그것은 사랑이 많은 것이 아니라 악하고 음란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화론도 반대하고 낙태도 반대하고 안락사도 반대하고 동성애와 차별금지법도 반대하고 성경비평학과도 싸우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WCC도 반대하고 각종 이단과도 싸우고 XY염색체 가진 복싱선수가 여성 경기에 출전하는 것도 반대합니다. 이러면 우리가 무슨 싸움꾼 같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믿는다고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 말고 조금씩 양보하여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하면 그것이 똘레랑스일까요? 아닙니다. 중립에 선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도 틀렸고 마귀도 늘렸다고 하는 양비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는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립에 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 편, 예수님 편, 성경 편에만 굳게 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