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길 / 출 14:15-20, 요 8:31-40
오늘은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로 지키면서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통일이 되기를 소원한다.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어 있은지 40여년 만에 다시 통일이 되었다. 토일을 위하여 독일은 오랫동안 대화를 하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서독의 교회는 동독의 교회를 위하여 수십년 동안 아무 조건없이 재정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독일교회는 2차 대전 후에 전쟁 도발과 유대인 학살의 죄악을 고백하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우리 민족도 다함께 마음을 모아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흘린 죄, 상호 비방하고 불신하여 서로가 가장 흉악한 원수로 단정했던 과거의 역사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손보다 강대국의 정치력이나 세상 권력에 의존했던 우리의 마음을 회개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통일을 위한 우리의 준비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시 관습이나 법대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 그분이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고 했다. 또한 그분은 진리이시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구약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대로 믿고 따를 때에 애굽의 압박에서 해방되리라고 한다. 두 본문은 모두 자유라는 길을 제시히며, 자유에는 분명 해방이 전제됨을 암시해 준다. 우리는 해방된지 51년이 되었으면서도 진정한 해방은 요원하고, 자주독립국가도 아니며, 국가는 양분되어 더욱 살벌한 갈등을 빚고 있다. 8.15 해방을 맞을 당시 우리는 완전한 해방이 된 줄 알았고, ‘자유다, 해방이다’를 외치면서 감격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었으며, 국토는 양분되어 동족끼리 총부리를 맞대는 비극을 경험해야 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해방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할 수 있는 존재일까? 그토록 민족적으로 영원하는 자주 독립은 왜 멀기만 할까? 우리는 때로 너무 허황되고 경솔하게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자유에 대하여 잘못 취급해 오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도 값싸고 환상적인 해방을 갈망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의 시각에서 풀이한 것이 신약성서이다. 구원이란 원어는 ‘쏘테리아’인데 이 말은 구원이란 뜻 이외에도 ‘건강하게 한다, 위험에서 건져준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내용은 ‘해방’ 또는 ‘자유하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해방과 자유는 기독교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알맹이 내용인 것을 알지 못한다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과연 자유가 가능하단 말인가? 자유를 갈망함이 없는 자는 차라리 생을 포기한 자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반드시 자유하는 마음을 넣어 주셨을 것으로 믿는다. 인간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도 이 자유 때문인줄 믿는다. 그러나 자유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자유는 없고 제한된 자유밖에는 향유할 수 없음도 아울러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시작이 있는 존재요, 끝이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 말은 우리의 자유도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황인종으로 태어났으면 황인종으로 살아야지, 백인종이 되려면 더 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흑인이 얼굴에 분가루를 발라본들 뭣하겠나? 우리가 완전히 자유하다면 태어날 때부터 거주지 산택을 할 수 있어서 적어도 지상낙원이란 유럽 정도에라도 태어났을 것이다. 결국 이 말들은 우리의 자유는 제한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의 자유 이상을 누릴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무조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자유인 것이다. 누구나 오래 살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지만 1백세를 살기 힘든 것이 우리이다. 아무리 자유롭게 오래 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을 넘어설 수 없다. 제아무리 자유가 생명일지라도 남자가 여자될 수 없고, 여자가 남자될 도리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하다는 것은 무한하게 절대적인 자유를 갖겠다고 만용을 부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궤도에 잘 진입하고 적응하는 길이 자유의 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궤도를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 곧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신다. 그러면 그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너무 막연하지 않나?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으며, 그분을 믿는 것이 자유의 길이요, 그분이 가신 길과 그분의 삶의 자세 등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자유하는 길인 것을 제시하신다.
그 다음 물을 것은 해방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해방받아야 하며, 해방받는 사람들이 가야할 목표는 어디인가? 과연 우리는 해방받았는가? 또 누가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면서도 여전히 자유하지 못했고, 굶주렸고, 말을 못했고, 나라는 두 동강이라서 내 땅 내 고향을 뻔히 보면서도 가지 못한다. 외국에는 잘 다니면서 내 땅인 북한에는 철의 장막이란 말로 표현이 되고, 같은 동포, 같은 형제자매가 지옥과 천국의 거리만큼이나 먼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면 완전히 해방되는 줄 알았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비극으로 만들고 구속하였나? 8.15는 우리들에게 너무 의외의 기적적인 해방이었다. 그래서 무슨 자유를 위한 아무런 준비단계를 가지지 못했다. 그저 경솔하고 감상적인 해방을 맞았다. 이러는 동안 국제정세의 이상한 기류와 대내적으로 지도자들의 갈등, 그리고 민중들의 무식함으로 인하여 모처럼 주어진 해방과 자유를 수용 발전시키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것을 옳게 수용 못하는데서 혼란과 비극의 요인이 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민족일 때에 자유와 해방이 주어져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식이란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참으로 해방시켜 준 자가 누구냐는 것을 옳게 의식하란 말씀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 온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을 알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출애굽기는 중동의 어느 작은 민족이 해방받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의 관점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 해방시켰다고 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너무 횡적인 역사관에 그칠 때가 많다. 횡적이라 함은 인간적인 축면만을 본다는 뜻이다. 그 본보기가 남한과 북한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다른 것 같으나 똑같이 서로 갈라놓기 위한 근거로 볼 때에는 똑같다. 역사에 대하여 횡적인 것으로만 보았지 수직적인 면을 볼 수 없었다는 데에 양편의 비극의 깊이가 커 가고 있다. 우리는 일제하에서 해방되었다고 연합군에게 무조건 감사했고, 더군다나 미국은 우리의 큰아버지 정도나 되는 줄 알았다. 북한도 역시 붉은 군대 소련을 하나님 정도나 되는 줄 안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나라를 두 동강이로 만들고 38선을 만든 자들이 누구인가? 우리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릴 여유없이 분명히 미국과 소련이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수직적인 입장에서 보는 역사관은 모든 것을 수렴할 수 있고 화해와 협력관계, 그리고 개방적이고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이런 해방과 자유는 결국 주어지는 것임을 알 때에 하나님께서만 완전하시고 절대적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심을 해방절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절대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완전함이 통할 수 없다. 역사를 파괴시키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오만이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필연이 아니고 자유의 영역임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성서가 보여주는 가장 무서운 파괴력은 자신의 주장과 자기 의를 절대화하는 것이다. 자유를 향한 길을 가려는 우리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절대화이다. 우리는 피차 잘못일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고치고 보완해야겠다는 겸손과 자제력이 요구될 뿐이다.
모세는 불안과 증오로 혼란 속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보라고 호소하였다. 신약에 와서는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내려다 보신 세계는 그야말로 증오와 교만으로 분열된 비참한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호소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라고 기도하신다. 내 잘못을 먼저 깨닫고 용서와 화해의 질서로 방향을 잡는 것이 참된 해방절을 맞는 길이다. 제 주장만 옳다는 곳에는 자연히 싸움뿐이요, 거기에는 꼴사나운 이권다툼이라는 졸장부들의 놀음밖에 없을 것이다. 횡적인 역사관이 아니고 수직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우리의 성숙한 신앙만이 참으로 광복을 성취받는 길일 것이다. 자유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리스도의 길을 사는 자에게만 온다는 것도 아울러서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 곧 사랑의 길이다. 해방절을 맞는 이 민족, 그중에서도 교회와 성도들이 더 한층 깊은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성도들은 이 민족을 위한 사명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