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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음, 빈 주머니 / 암 7:12-17, 막 6:7-13
사람은 먹어야 사는 존재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모든 생명체 또한 먹어야만 살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고 또 일상적인 것이다. 하루 세번씩 음식을 대하게 마련인 인간들, 사람마다 그 개성과 모습이 다르듯이 음식을 대하는 자세 또한 천태만상일 수밖에 없다. 그 모습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잇을 것이다. 하나는 ‘또 음식이냐?’라고 짜증스러워 하는 경우이고, 다음은 무덤덤하고 의례적인 자세를 지니는 사람이며, 마지막은 주어진 음식에 감사하고 감격적인 자세로 음식을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 가운데는 자기에게 주어진 음식의 궁극적인 제공자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아울러 이것을 자기에게 마련해 주기 위하여 수고한 분들이 있는 줄도 알아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진정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이들이 있다.
미국의 이사인 존 자웻이라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상대로 연구한 결과, 그들에게서는 여느 사라들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세가지의 특이한 분비물이 나오더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첫째 분비물은 연구자인 존 자웻도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한 백신인데, 그것은 모든 질병을 에방해 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주장은 결코 그만의 것이 아니다. 이 ‘기도백신’이 질병을 예방하고 인간의 면역기능을 항진시킨다는 연구보고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도 후엔 항독소라는 물질도 분비된다. 이것은 항체 역할을 담당하여 각종 질병의 진행을 억제시켜 주고 병균의 침입을 막으며 살균을 해주기 때문에 질병의 예방과 아울러 치료에까지 도움을 준다고 한다. 셋째는 안티셉틴이라는 물질인데 이것은 방부제 구실을 한다. 이 방부제는 위장 내에서 음식물이 이상발효하거나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소화흡수를 도와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작용을 한다. 누구나 먹는 음식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할 때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들의 수고에 감격하는 것, 아울러 자기 자신도 이 음식물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기쁨으로 식사에 임하는 것 이상으로 멋진 약이 없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신앙 때문에 갖고 있는 일종의 선입관으로 인해 성서를 진솔하게 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이런 점이 매우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어느새 성서를 읽는 데 있어서 매우 ‘편리한’ 몇가지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요령 때문에 성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진솔하게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요령 가운데 하나가 성서를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눈 딱 감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성서의 말씀은 진리라는 확신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여야 한다는,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도 또한 같이 갖고 있다. 그런데 성서를 읽다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또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그것은 ‘성서는 진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 충돌은 우리 신앙인들이 때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흔히 겪는 경험일 것이다. 이럴 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신의 의심을 ‘성서는 진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굴복시키고 만다. 그야말로 ‘눈 딱 감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두 번째 요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그 당시 사회상이나 여러 다른 구절들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하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 예로, 한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급진적인 선언이나 요구를 다른 복음서들이나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 ‘순치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의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의 ‘마음이 가나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비추어 ‘가난’을 ‘마음의 가난’, ‘정신적인 가난’, 곧 ‘겸손’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받아들이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를 성서에서 만나게 되면 ‘전적으러, 그러나 슬며시 무시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극단적인 윤리적 요구를 하실 때, 또는 극단적인 가난을 요구하실 때 그런 요구들을 그냥 ‘접어두고’ 지나가 버리기 일쑤이다. 사실 그런 요구들을 직면하기가 쉽지 않다. 그 요구들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가감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으로 인해 무척 무거운 마음이 된다. 엄청난 부담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런 요구가 예수님의 사도들이나 오늘날의 목사들에게만 적용되는 윤리로 국한시키든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소위 ‘급진적인’ 요구들이 오늘날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급진적인 요구 가운데 하나이다. 복음서 곳곳에는 예수님 자신이 급진적인 분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속적인 가치들에 결코 타협시키려 하지 않았다. 재물과 하나님은 결코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루는 예수님은 문 밖에서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은 어떤 요구를 하실 때 절제나 중용의 덕을 지키지 않았다. 용서를 하려면 ‘일곱번씩 일흔번’을 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자기의 원수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이방인들과 마찬가지 존재가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급진적인 요구들은 이러한 예수님 자신의 급진적인 태도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더러운 악령을 제거하는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 내보내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말씀이다. 8-9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이 말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비켜가는 방법도 또한 잘 알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이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도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풀이한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굳이 이 말씀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사도들이, 현대의 목사들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대상일뿐, 일반 성도들은 여기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은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않은 해석들일 뿐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일반 성도와 사도들 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아무 구별이 없다. 이런 말씀을 듣고 파송받은 사람들이 숫자가 마가는 12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에는 70명이라고 되어 있는데서도 이 말씀이 굳이 예수님의 친제자 12명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는 이 말씀과 비슷하게 엄격한 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그 말씀은 눅 9:57-62절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한 사람이 에수님께 와서 말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참으로 차갑게 대꾸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가 소위 해피앤딩이 아니라는데서 그가 불순한 생각, 곧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하여, 그걸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르려 했다고 추정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그런 암시는 없다. 그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선의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또 이번에는 예수님이 한 사람에게 말슴하셨다. ‘나를 따르라.’ 이번에는 예수님이 먼저 초청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예수님은 마치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에게 하셨듯이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권고와 명령을 하셨다. 그러자 이 사람이 대답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말은 한편으론 타당하게 보인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분초를 다투는 일은 아닐진대 가족사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초상을 먼저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우 놀라운 말씀을 그에게 던졌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물론 죽은 자 장례치르는 일과 하나님 나라 소식 전하는 일 중 어느 것이 중요하느냐라고 물으면 전자라고 대답할 사람은 적어도 기독교인 가운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하는 일은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닌 이상 긴 호흡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례치르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리 나무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여기서 ‘장례치르는 일’이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지키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얘기에서 문제의 초점은 율법준수에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아니 ‘나를 따르라’라는 소명에 응답함에 있어서 아무 것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물며 율법준수라 할지라도 ‘부르심 - 응답’ 사이에 끼어 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그는 앞의 사람들보다 헐씬 더 작은 말미를 달라고 청한 것이다. 겨우 작별인사를 나누게 해 달라고 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의 청은 사정없이 거부되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 정도의 소박한 청원이 가차없이 거부되는 것을 보고 우리들 대부분은 ‘참으로 너무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동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과 오늘의 본문 사이의 갭(gas)-또는 예수님의 요구 사이의 갭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토록 당황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 나오는 세 사람 다 예수를 따른다는데 있어서 가정, 가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첫번째 사람과 세번째 사람은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청했다. 그중에 세번째 사람은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계획과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갸륵한 자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계획이나 가능성,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게서 친히 부르셔서 되는 것이다. 자신의 계획으로나 율법의 의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자진해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 대해서는 순종과 거부 이외에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사실은 부르심과 순종 사이에 다른 아무 것도 게재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 들어서는 안된다. 두번째 사람에게는 그 사이에 율법이 끼어 들었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다른 우선순위(가족들과의 작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부르심에의 순종은 자신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것은 다 부르심에의 순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스스로 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부르심에 대한 무조건적인 응답으로서의 순종이 한 사람을 제자로 만드는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른다는 것은 예견과 예측이 가능한 곳에서 탈출하여,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우연이 지배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인간적인 보장이 있는 곳에서 나와 아무 보장이 없는 곳, 그러기에 오로지 하나님만이 보장하는 길에 서는 것을 뜻한다. 마치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갈 바를 모르고’ 떠난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그 길은 부르심에의 순종의 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결단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제자들만 타고 있던 배가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때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렇다. 그들은 물 위를 걸어온 예수님을 보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거센 풍랑이 이는 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베드로만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외쳤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하여 풍랑이 이는 물 위로 한걸음 내디뎌야 했다. 거침없이 망설이지 말고 높이 일어나는 풍랑이나 거센 바람을 보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배를 떠나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는 오래 물 위에 서 있지 못했다. 그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갔고, 예수님이 내미는 손이 필요했다. 그렇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을 배우는 것이다. 먼저 미지의 세계로 한걸음 내딛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우리는 때로는 물 속에 빠지면서,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고 떨면서, 때로는 우리 자신 속에서 피어오르는 유혹과 대결하면서 그렇게 신앙을 배우는 것이다.
저는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그런 점에서 베드로와 대조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묻는 그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를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서 초점은 재산을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다. 청년의 재산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므로 에수님은 그것을 처분할 것을 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부르심과 순종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재산이었다. 예수님은 그 방해 요소를 처분하라고 말씀했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쓸쓸히 돌아갔다. 이건 제 상상인데, 만일 그 청년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쓸슬히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의 일원이 되었더라면, 그는 결국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결단의 한 발자국’을 내딛고 그 다음에 차차 배워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수은 얘기지만, 술을 끊고 예수를 믿을 수는 없어도 예수 믿고 술을 끊을 수는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는 빈 마음, 빈 주머니로 가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가난의 유리함이라든가, 빈 손의 유리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권능과 보장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프로그램에도 의존하지 않는 철저한 순종과 신뢰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인간적인 것도 자랑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한 일은 단지 순종하고 신뢰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1995-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