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 / 조미숙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러 갔다. 그림에 손을 뗀 핑계를 대자면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해 끝이 없다. 열심히 수다를 떨며 어쭙잖게 그림 흉내를 내고 있는데 선생님 친구가 공방에 놀러 와서 하는 말이 아직도 졸업을 못 했냐고 묻는다. 졸업은커녕 다시 제자리다. 난 그렇다. 뭐든 열심히 안 한다. 그래서 이 <일상의 글쓰기>도 떠나지 못하고 (물론 여기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떠날 수도 없지만) 남아있다. 실력이 월등한 사람들을 보면 ‘아 난 언제나 저런 경지에 도달해서 하산하나?’ 하면서도 마음뿐이다. 아니 열정을 보이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나무늘보가 되는 것이다. 내 게으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운 여름이 쏜살같이 달려왔는데 그래도 7월 중순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해 견딜만했다. 남편은 퇴근하면 “에어컨 안 켜?”가 인사였다. 하루 종일 더운 데서 일하고 오는 남편 생각하면 시원하게 해줘야 마땅한데 남편 잔소리보다 전기세가 더 무서웠다.
그날은 아무래도 에어컨을 켜야 할 것 같았다. 큰맘 먹고 틀었는데 이상하다. 시원하지도, 온도가 내려가지도 않는다. 에어컨에 나타난 영어 약자를 찾아보니 가스가 샌 것 같다. 그날은 주말이고 여름이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서비스를 부르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도 여름이 다 가서야 수리 기사가 온 적도 있었다. 난감했다. 미리 점검하지 않는 불찰이 컸다. 우선 아는 동생에게 자기 건물에 세든 중고가전 매장 사장님께 부탁해 달라고 사정했다. 다행히 일요일인데도 와 준단다. 그날 광양에 다녀올 일이 있어 목포에 도착하면 연락한다고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갔다.
목포에 오자마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가전제품 대리점부터 찾아갔다. 에어컨 가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이젠 냉방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리고 현재 쓰는 제품은 전에 살던 집의 것을 가지고 온 거라 용량도 맞지 않았고 수리도 두어 번 했다. 사정을 얘기하고 지금 사면 언제 설치가 가능한지 물었더니 빠르면 3일쯤 걸린다고 했다.
중고가전 사장님이 와서 가스가 떨어졌다고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어디서 새는 것 같은데 부품이 있어야 수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본사에서 자기 같은 사람들에겐 부품 공급을 안 해 준다는 것이다. 다른 업체 서비스팀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고칠 수 있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가스를 넣으면 장담할 순 없지만 올 여름은 견딜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할 수 없이 십만 원에 넣었다. 그리고 딱 3주가 되자 다시 떨어졌다. 사장님이 더 미안해하며 오만 원으로 깎아줬다.
우리 집은 북향이라 12시쯤이면 직사광선이 내리쬔다. 오후부터는 사우나를 방불케 한다. 숨이 턱턱 막혀 온다. 예전에는 하루 종일 참다가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틀었는데 올해는 그 규칙을 깼다. 오후 시간이 한가해졌는데 단골로 다니던 카페가 8월 한 달 동안 문을 닫는다. 여름이면 내 피서지가 되어 주던 곳이 없어지니 힘들었다. 다른 곳은 아무래도 오래 앉아 있자면 눈치가 보인다. 손님이 없으면 더 그렇다. 할 수 없이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냥 1시나 2시가 되면 켠다. 35도가 넘는다. 언젠가는 하이(Hi)라는 문구가 떠서 무슨 말인가 찾아봤더니 실내온도가 35도가 넘으면 그렇게 표시된단다. 참을 수가 없었다. 시원한 집에서 백수인 딸과 열심히 파리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지냈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딸이 곁에 있어 나도 덩달아 본다. 저녁에는 또 프로야구가 반긴다. 덕분(?)에 책은 멀리했다.
일하려면 차를 타고 자주 이동해야 하는데 땡볕에 주차된 차 시동을 걸면 실내온도가 40도에 육박한다. 3단계에 에어컨 온도를 설정하고 달리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일 정도다. 그래도 쉽게 시원해지지 않기도 하고 또 금방 내려야 한다. 하루에 세 곳 정도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교실이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에 이미 땀에 흠뻑 젖는다. 유난히 땀이 많아 일상생활이 곤란할 지경이 되었다. 특히 운동하면 사람들은 “어휴, 저 땀 좀 봐!”하며 살 빠지겠다고 부러워하곤 하는데 난 미치겠다.
귀뚜라미 소리가 정겹게 들리는 9월이 되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졌는데 우리 집은 아직 에어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세 번 선풍기로 버텼는데 다시 더워졌다. 여름이 끝나지 않는다.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아니 이지경이 된 것은 우리 인간 때문인데 누굴 탓한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할지 걱정이 쌓인다.
여전히 게으름을 친구삼아 놀다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글을 써야지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너무 땀을 흘리며 일하다 보니 열사병 같은 증상이 있었는데 또 그런다. 머리도 아프고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 일도 안 했는데 피곤에 절어 손가락 하나 들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기에 허리까지 아팠다. 아무래도 글 쓰기가 싫은가 보다. 그렇지만 시작부터 이러면 안 된다고 겨우 컴퓨터를 켰다. 긴 여름을 버텼는데 예서 이럴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