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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몸을 내맡기고... 恵みにゆだねられて… (2021년 8월 1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14:24~28
24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서 밤빌리아 지방에 이르렀다. 25 그들은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뒤에,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향하여 갔다.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27 그 곳에 이르러서 그들은 교회 회중을 불러 모으고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냈다.
24. それから、二人はピシディア州を通り、パンフィリア州に至り、25. ペルゲで御言葉を語った後、アタリアに下り、26. そこからアンティオキアへ向かって船出した。そこは、二人が今成し遂げた働きのために神の恵みにゆだねられて送り出された所である。27. 到着するとすぐ教会の人々を集めて、神が自分たちと共にいて行われたすべてのことと、異邦人に信仰の門を開いてくださったことを報告した。28. そして、しばらくの間、弟子たちと共に過ごした。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마음을 굳세게 하여 믿음을 지키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함께 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을 통해 그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반드시 힘을 주시고, 상급도 주시고, 굳센 팔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이 마무리되는 구절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사도 바울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여행길을 선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전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성도들의 마음과 믿음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밤빌리아 지방에 속한 버가라는 도시에 도착을 하지요. 그 곳에서도 역시 바울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버가는 바로 이 곳인데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크레타 섬의 파포스(바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내렸던 곳이지요. 이 곳 역시 전도여행 중에 들렀던 도시입니다. 행 13장 13절을 반추하여 보면 이 버가에서 마가(요한)가 선교팀을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정 가운데에서 매우 큰 위기를 경험한 곳이며,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다고도 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지요. 물론 처음 버가를 방문했을 때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행 13장에서는 버가를 지나서 안디옥으로 갔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전했던 일보다 마가(요한)와의 이별과 이탈이 바울 일행에게 있어서 더 큰 사건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게 된 버가에서 마가(요한)와의 이별의 아쉬움과 아픔을 경험한 채 선교를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였던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렀던 버가에서는 말씀을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가’에서 어떤 열매를 얻었는지, 또한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는데요. 어쩌면 이전에 있었던 선교팀의 갈등 상황에서 복음을 순조롭게 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버가에서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지만, 큰 의미가 없다 여겨집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주 짧은 표현을 통해 생각해본다면 바울과 바나바는 아무런 열매나 놀라운 증거가 없었어도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전에 마가(요한)가 바울 일행에서 이탈하는 아픈 경험을 하였던 좋지 않은 추억이 있던 장소에서도 여전히 말씀 전하는 사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바울의 일행이 겪은 일을 보고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고 수군거렸을지도 모르지요. 또한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사역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며 회의감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적으로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버가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로 인한 열매가 어떻게 맺혔는지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이상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된 적은 없습니다. 성경 기록 이후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버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지요. 그리하여 현재의 터키지역에 이슬람이 주류종교로 자리 잡기 전에 한 때 터키 남부지역에서 기독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화: 호주의 전도자 프랭크 제너의 이야기]
실례합니다. 선생님은 구원받으셨습니까? 만약 오늘 밤 선생님께서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 말은 호주 시드니 조지가에서 무명의 전도자로 40년간 노방전도를 하신 프랭크 제너가 전한 전도 복음이다.
이 노인은 젊은날 주님께 서원한 대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전도를 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당신을 통해 주님을 영접했어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노인이 된 그는 자신의 삶을 “열매 없는 열심이었노라”회상한다. 노인이 탄 세월의 열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영국 런던에 사는 한 목사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몇 년 전 영국 런던에 위치한 한 침례교회 목사가 오전 예배를 맞추려 할 때 뒤에서 낯선 사람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잠깐 간증을 나눠도 될까요?” 목사님은 3분 안에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친척을 만나려 들린 시드니’ 조지가를 걷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저에게 다가와 말했어요. “실례합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오늘밤 죽으면 천국에 가십니까?” ‘저는 그 말이 계속 신경 쓰였고, 영국에 오자마자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했답니다.’
은혜로운 간증에 목사님은 진심으로 그 성도를 축복하고 환영했습니다. 그후 그 목사님은 “엘에이'와 '퍼스'에서 초청 설교를 하던 중, 이와 똑 같은 간증을 두 번 더 듣게 된다. 이 목사님은 다시 영국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 4명의 노인이 그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우리도 각각, 25년, 35년 전에 시드니에 갔다가 그 노인에게 같은 질문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 목사님은 캐러비안 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이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3명의 선교사가 와서 우리도 각각 15년, 25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미국 조지아로 가서 해군 군종 목사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곳에서도 마지막 날 군종목사로부터 ‘조지가의 노인’ 간증을 듣게 된 목사님 6개월 후, 이 목사님은 인도에 가서 5,000명의 인도 선교사 집회에 참석합니다. 집회가 끝나고 식사 하던 중, 그가 한 인도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습니까?’ 인도인이 말하길..“제가 시드니 외교관으로 있었을 때, 아이들을 위해서 장난감과 선물을 사려고 조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의 바론 백발노인이 저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실례합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오늘밤 죽으면 천국에 가십니까?”
8개월 후 드디어 호주 시드니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그 목사님은 ‘혹시 조지가에서 전도 하시는 노인을 아십니까?’ “네, 그분은 ‘제너’라는 분인데 지금은 연세가 많아 더 이상 전도하지 않습니다. 그의 아파트로 찾아가 ‘제너’를 만난 목사님은 3년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주었다.
제너는 젊은 날, 방탕한 해병 생활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하루 10명에게 전도 하리라 다짐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열매 없이 주님 뵐 생각에 가슴 아파하던 이때 듣게 된 기적 같은 말씀,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감사했다. 그는 이 만남이 있은 지 2 주 후 기쁘게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 목사님이 3년간 확인한 결과 146,000명이 전도되었다는 사실.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너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유명한 분이셨을 겁니다. 반드시 열매 맺게 하실 주님을 믿으며 낙담하지 않고, 전도하는 우리는 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 품에 안기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전도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직접 어떤 열매나 만족할만한 결과에 대하여 알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의 순종을 사용하셨습니다. 바울 이후로도 수도 없이 많은 무명의 전도자와 사명자와 성도들을 주님께서 사용하셨고, 사용하고 계시고,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두 그런 무명의 사명자로 인하여 이 자리에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전도’와 ‘사명’과 ‘삶의 자리’가 비록 아무런 열매가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옛날 바울과 바나바처럼 권능이 있는 설교와 기적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저 프랭크 제너와 같은 우리의 이 소박하고 순박한 한 마디 말의 전도(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 당신은 오늘 죽으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를 쓰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역사를 완성해 나아가실 것을 믿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앗달리아’로 가서 배를 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일행은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그들이 전도했던 크레타 섬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수리아 안디옥으로, 즉 제1차 전도여행의 사명을 시작하였던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하여 제자들과 함께 보고하고 나누는 모임을 갖고 전도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저자인 누가는 안디옥에 돌아가면서 안디옥에서의 출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 안디옥이었다고 말이지요.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 선교 활동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각자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곧 사명의 자리인 것이지요. 그 사명의 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거울로 삼아 복음의 빛을 온전히 반사하여 이웃들에게 비춰주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믿는 성도로서의 태도와 자세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동시에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사명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그 사명까지도 얼마든지 맡겨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지켜 나갈 때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은혜가 절대적인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접적으로는 내가 지켜야 할 사명이지만, 그 사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명에 대하여 완전한 책임을 져 주신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하여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 10:9-10)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사는 사명을 위해서 모든 일상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필요한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일상생활의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보고 열매를 주신다는 조건부의 말씀이 아닌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인되신 사명의 일꾼이 하나님께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우리가 우리의 삶과 의식주를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구하라고 하셨지요? 왜냐하면 이렇게 약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알아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은혜에 몸을 내어 맡기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일행은 그 어려운 난관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고, 또한 그 여정 자체를 또한 은혜로 여기고 돌아온 여행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여 보고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자기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를 자랑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대단한 기적을 나타내었는지도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업적과 성과를 내었는지도 자랑하는 것도 여행의 초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과 기적과 업적과 성과는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행하신 일의 결과였다는 것이 여행의 초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면서도.. 운이 좋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은근히 자신의 실력과 환경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실력을 주목해 주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주목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 그리고 꼭 기록에 남겨야 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행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이지요.
좋은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우리가 사명을 위해서 경험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는 손길인 것을 믿습니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 모두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심지어 사람과 짐승도 그러합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증언하지요.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19)
그렇기에 인생 그 자체만 보면 매우 허무하고 부조리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헛된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붙들고 사용하시면 작품이 되며, 역사가 되고, 기적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 9:3)
인생에 장애가 생기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이 아무리 형통하고 성공적으로 살더라도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저 허무하게 짐승과 같은 운명에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인생보다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 부활소망과 영새의 은혜로 내면과 외면이 채워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명의 열매는 바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명을 통해 결국은 아직 주님의 나라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 즉 불신자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손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쓰시고, 우리의 발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또한 예언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3)
따라서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일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비록 육신의 가치관으로 사는 이방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금방 허무해질 이 땅에서의 주목을 받지 못해도,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하나님 나라에서 주목하고 기억하시는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그 손바닥에 새기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6)
나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나의 존재를 새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매고 맡기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복음의 빛이 빛나는 반사체로 살아가는 사람... 이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은 없을 것을 믿습니다.
일상생활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실은 우리로서 가장 보람이 있는 사명이고, 가장 힘이 나는 인생인 것을 믿습니다.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데로 전도합니다. 병이 들었으면 병을 치료하는 과정, 그리고 병과 싸우는 삶으로 전도합니다. 실패하고 좌절할 일이 생기면 있는 그대로 전도합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출 수 있는 최적의 전제조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일한 전제조건입니다. 내가 모범적인 신앙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훌륭한 크리스천 가문에 태어나지 아니하였어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전도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전도자, 그리고 사명자인 바울도 실패와 상처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증거의 열매가 맺히는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일본 안에서 소수자인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혹은 남들보다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자랑꺼리가 없기 때문에 등등... 주님의 사명을 지켜내는데 디딤돌보다는 걸림돌이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가족을, 우리의 친구들을, 우리의 이웃들을 그 믿음의 문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직 주님의 은혜에 몸을 내어 맡기고 주님과 함께 안심하며 유쾌한 마음으로 참된 평강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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