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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칠국의 난
BC154년, 한나라 제6대 황제 경제(景帝, 재위 BC157∼BC140) 때, 오(吳)나라 왕 유비(劉濞)와 초(楚)나라의 왕 유무(劉戊)가 5개의 제후국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르러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이라고 하는데, 중앙의 힘이 강화되었던 한나라의 정치제도 아래서 어떻게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이 반란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상당히 복잡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오나라의 왕 유비가 있었고, 그 배경에는 조조(鼂錯)란 인물이 있었다.
오왕 비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
그러니까 유방의 친조카이다.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 경포(黥布)라고도 함)의 반란을 평정한 한고조 유방은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유비를 오왕에 책봉했다.
그 지역의 백성들이 날래고 사납기 때문에 장년(壯年)의 왕이 아니면 통솔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조는 원래는 자기 아들들 중에 하나를 보내고 싶었지만, 아들들이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나이도 적합하고 반란 평정에 공도 있는 조카 유비를 오왕으로 임명한 것이다.
한고조 유방은 비를 오왕으로 책봉한 후에 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너의 얼굴에는 모반의 상(相)이 있구나.”
한고조 유방은 유비를 왕으로 책봉한 것을 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임명을 한 뒤였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던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리며 타일렀다.
“한조(漢朝)에서 앞으로 50년 사이에 동남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네가 될 것 같다.
천하는 같은 유(劉)씨로 한집안을 이루었다.
조심하여 반역을 꾀하는 일이 없게 하라.”
속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오왕 비는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말은 이렇게 길지만 중국어로는 ‘不敢(bù gǎn)’, 이렇게 간단하다.
이 말의 본뜻은 ‘어떤 일을 저지를 만한 담량이 없다.(沒有胆量做某事)’, 즉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담량이 있겠습니까.’이지만, 풍기는 뉘앙스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대답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다르므로, 이 당시 오왕 비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대답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감히 단정하기 어렵다.
그 후, 여러 대에 걸치는 기간 동안 천하가 안정을 찾아 군국(郡國)의 제후들도 각자 자기 영내의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리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오나라는 다른 지역과 달리 구리와 소금이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재정이 튼튼했다.
오왕 비는 천하의 망명객들을 불러 모으고, 멋대로 사전(私錢)을 만들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일이 없어도 나라의 재정이 풍부했던 것이다.
중앙정부에서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를 채택한 것이 무제(武帝) 때부터였으니까 당시 사전을 만들고 소금을 끓이는 것은 아직은 불법이 아니었지만 중앙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오왕 비의 마음에 반역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제5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BC180∼BC157) 때에 오왕 비의 마음에 있던 반역의 씨를 싹트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나라의 태자, 그러니까 오왕 비의 아들이 조회를 와서 천자를 뵌 다음, 황태자(후의 경제)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쌍륙(雙六,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차례로 주사위 둘을 던져서 나는 사위대로 판에 말을 써서 먼저 궁에 들여보내는 놀이)을 치며 즐기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교만하고 건방진 태자의 태도에 격분한 황태자는 태자에게 쌍륙판을 내던졌는데, 불행하게도 태자가 맞아 죽고 말았다.
오왕 비는 이 사건으로 인해 차츰 변방을 지키는 신하의 도리를 잃어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이로 인해 오왕 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오왕 비는 겁이 나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대하고 마음이 너그러운 문제는 오왕 비가 처벌이 두려워 살기 위해 역모를 꾸미는 것이므로 차라리 모든 것을 용서하고 서로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변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왕 비에게 궤장(几杖)을 내리고, 오왕 비가 나이가 많으므로 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궤장을 내린다는 것은 안석과 지팡이를 늙은 대신에게 내리는 파격적인 예우를 말한다.
오왕 비도 음모를 중지하였다.
오왕 비는 천혜의 환경을 잘 이용하여 무려 40여 년 동안 평온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한 인물의 등장으로 풍파가 일게 된다.
황태자의 가령(家令, 권문세가에서 집안의 고용인들을 지휘 · 감독하고 집안일을 두루 살펴 관리하던 사람)으로 황태자의 총애를 받던 조조(鼂錯)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형명학(刑名學)을 배웠고, 그 위에 유가의 《상서(尙書)》를 전수받았다.
형명학이란 요즘으로 치면 정치와 법학이다.
당시에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의 여파로 민간에 전해진 유가의 서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마침 《상서》를 외우고 있는 진시황 때의 박사였던 복생(伏生)이란 사람을 찾아냈다.
하지만 나이가 이미 90이 넘어 궁중으로 초빙해 올 수가 없었다.
하여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복생의 집에 가서 《상서》를 배우게 했는데, 그때 선발된 사람이 바로 조조였다.
(조조는 복생의 딸의 도움을 받아 복생이 읽어 주는 내용을 당시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하여 《상서》를 복원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문상서(今文尙書)》이다.) 하여 조조는 법가 사상과 유가 사상을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됨이 몰인정할 정도로 강직하고 준엄했지만 뛰어난 구변과 지식으로 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태자궁 안에서 지낭(지혜 주머니)이라 불리었다.
조조는 평소 제후들의 영지를 줄여 중앙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 때 자주 글을 올려 제후들의 봉읍을 깎아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관대하고 노련한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또한 권농(勸農)을 강조했는데, 그가 문제에게 올린, ‘농업 생산을 장려하고, 농업 발전을 촉진하며, 상인들의 투기와 모리(謀利)를 억제함으로써 부국의 정책을 구현하자는 견해를 개진’한 주의문(奏議文)인 〈논귀속소(論貴粟疏)〉는 농업 생산을 자극하고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6대 경제(景帝, 재위 BC157∼BC140)가 즉위하자 조조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조는 황제의 지지하에 죄를 범한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고 많은 법령을 개정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제후들 사이에서는 조조를 미워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 갔다.
조조의 아버지는 아들이 걱정이 되어 고향에서 올라와 조조를 타일렀다.
“금상폐하께서 즉위하신 처음부터 너는 정사를 자기 멋대로 하며, 제후들의 영토를 깎아 남의 골육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었다.
세상에서는 툭하면 너를 욕한다.
대관절 왜 그러는 거냐?”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는 존엄해질 수 없고, 종묘는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유(劉)씨는 편안해지지만 조(鼂)씨는 위험해진다.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조조의 아버지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나는 화가 내 몸에 미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열흘 남짓해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다.
그들이 명분으로 삼은 것은 바로 조조의 아버지가 우려했던 조조의 주살이었다.
조조는 평소 경제에게 제후들의 영토 삭감을 줄기차게 건의했다.
그런 와중에 초왕(楚王) 무(戊)가 태후의 상을 입은 상황에서 몰래 간음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조는 초왕 무에게 벌을 내릴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경제는 벌로 초나라의 동해군 38현을 삭감했다.
이어 조(趙)나라 왕과 교서(膠西)의 왕이 죄를 범하자 각각 18현과 6현을 삭감했다.
경제는 이처럼 조조의 건의를 그대로 다 받아들여 죄를 범한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했고, 조정의 대신들은 오나라 영토의 삭감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소금의 생산지인 회계군과 구리의 생산지인 예장군을 중앙에 바치도록 조치했다.
오왕 비는 계속 영토가 깎이다 보면 끝내는 자기 몸이 위험할까 봐 두려워하다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천하를 빼앗아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의 제후들이 조조를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반란에 비교적 쉽게 가담시킬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오나라와 초나라를 위시하여 조, 교서,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 등 총 7개의 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두태후(竇太后)의 소생인 경제의 동생 양(梁)왕 무(武)는 포섭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경제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왕 비의 나이는 62세였다. 오왕 비는 황제를 칭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먼저 양(梁)나라를 공격했다.
양나라는 산동의 서남 지역과 하남의 동부와 남부에 걸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반란 소식을 들은 황제는 태위인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36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오와 초를 치게 했다.
또 곡주후(曲周侯) 역기(酈奇)에게는 조나라를, 장군 난포(欒布)에게는 제(齊)나라를 치게 하고, 장군 두영(竇嬰)에게는 형양(滎陽)에 주둔하여 제나라와 조나라 군사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장군 두영은 출병하기 전, 그 전에 오나라의 재상이었던 원앙(袁盎)이란 인물을 황제에게 추천했다.
원앙은 문제 시대의 중신으로 중랑장과 제나라 · 오나라의 승상을 역임한 인물로, 역시 제후들의 세력 약화를 주장한 사람이다.
원앙과 조조는 서로 자리를 피하고 얼굴을 맞대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조는 원앙에게 오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삭탈관직해 버렸다.
원앙은 은퇴를 당해 집에 있다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마침 조조와 함께 반란군에 대한 대응책을 세우고 있었다.
황제는 먼저 원앙에게 향후 정세에 대해 물었다.
원앙은 반란군이 곧 진압될 것이라며, 별로 걱정할 바가 못 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오왕은 산에서 사전(私錢)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하의 호걸들을 불러 모은 다음, 백발이 된 지금에 이 같은 반란을 일으켰다.
계책이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반란을 일으켰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그리 대단치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나라에 구리와 소금의 이익이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호걸을 끌어들이겠습니까?
설령 호걸을 끌어들였다 하더라도 (호걸들은) 왕을 보좌하고 의에 따를 뿐이지, 반란 따위에 가담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오왕 곁에 모인 패들은 모두 무뢰배들로서 망명자나 동전을 주조하는 간특한 무리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느리고 모반을 일으킨 것입니다.”
조조 역시 원앙의 의견에 동의했다.
황제는 다시 원앙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원앙은 황제에게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기를 청했다.
황제는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으나 조조만은 그대로 남게 했다.
원앙이 황제에게 거듭 말했다.
“신이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들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황제는 조조까지도 물러가게 했다.
조조는 마음속으로 원앙을 원망하면서 물러났다.
원앙이 입을 열었다.
“오 · 초가 서로 주고받은 문서에는 ‘고제(高帝)는 자제를 왕으로 봉해 각각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적신(賊臣) 조조는 제 마음대로 제후들의 죄를 책하며 그 땅을 삭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반란의 명분으로 삼아 서쪽으로 나아가 함께 조조를 무찌르고 옛 땅을 다시 찾은 다음 일을 끝내자.’고 되어 있습니다.
목전의 계책으로는 조조를 참하고, 사신을 오와 초 등 7국에 보내어 죄를 용서하고 삭탈한 그들의 땅을 회복시켜 주면 군사들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잠자코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한 사람을 아끼지 않고 천하에 사과를 해야 하는가?”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것밖에 달리 좋은 계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원앙을 태상(太常)에 임명하고, 오왕의 동생의 아들인 덕후(德侯)를 종정(宗正)에 임명했다.
종정이란 황족 집안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을 말한다.
10여 일이 지나 황제는 중위(中尉)를 시켜 조조를 부르게 했다.
중위는 조조를 속여 수레에 태운 다음 동쪽 저자로 데려갔다.
조조는 예복을 입은 채로 동쪽 저자에서 참형을 당했다.
한때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렸던 한 인물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도 어이없고 허망한 최후였다.
다음으로는 원앙의 계책에 따라 원앙과 종정이 오나라에 파견되었다.
원앙은 종묘의 뜻을 받들어 설득하고, 종정은 친척의 입장에서 깨우쳐 준다는 것이 계책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나라에 도착해 보니, 오와 초의 군사는 벌써 양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종정은 친척의 신분으로 먼저 오왕을 만나 오왕을 타일러 조칙을 받들도록 하려고 했다.
오왕은 원앙도 함께 왔다는 말을 듣자, 자기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동제(東帝)가 되었다. 이제 누구에게 머리를 숙이겠는가?”
오왕은 원앙과 만나기를 거절했다.
그러고는 원앙을 군중에 머무르게 하고, 그를 협박해서 오나라 장수로 만들려고 했다.
원앙이 거절하자 그를 가두어 놓고 죽이려고 했다.
원앙은 밤을 타 탈출하여 양나라 군영으로 도망쳤다가, 마침내는 장안으로 돌아와 황제에게 보고했다.
장군으로 임명받은 태위 주아부는 오나라의 정예부대를 주축으로 하는 반란군과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식량을 차단하면 적이 자연히 궤멸할 것이고, 양나라에 대한 포위도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아부는 병마를 이끌고 형양으로 달려갔다.
형양은 왼쪽에는 식량, 오른쪽에는 무기고가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주아부는 부하 장수를 시켜 형양을 수비하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창읍(昌邑)으로 물러나 굳게 지키는 한편, 군사를 보내 오나라의 보급로를 끊게 했다.
이로써 오나라와 초나라의 식량 수송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오왕 유비와 초왕 유무는 양나라의 수도를 맹공격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양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주아부와 한판 대결을 위해 군사를 몰아 창읍으로 진격했다.
이미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린 주아부는 공격에 대응하지 않고 진지를 굳게 지키기만 했다.
양쪽 군대가 여러 날 동안 대치하는 상황에서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주릴 지경이었으므로 조급한 생각에서 자주 싸움을 걸었다가 결국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오나라 병졸 가운데 많은 이가 굶어서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왕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오왕은 휘하의 장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 도주하여 동월(東越)에 몸을 의탁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동월에 사람을 보내 이익을 미끼로 동월을 끌어들였다.
동월에서는 오왕을 속여 창으로 찔러 죽이고 그 머리를 그릇에 담아 한나라에 보냈다.
오나라 군사는 주아부의 군대와 양나라 군대에 투항했다.
초왕 융(戎)도 싸움에 패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교서 · 교동 · 치천의 세 왕은 제나라 임치(臨菑, 산동성(山東省) 치박시(淄博市) 동북, 임치의 북쪽)를 포위했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공격해 온 한나라 군대에 패하고 말았다.
세 왕은 각각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나라 중앙 정부의 준엄한 문책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곡주후 역기에게 공격을 당했던 조나라는 열 달 만에 항복을 하였고, 조왕 역시 자살하고 말았다.
다만 제남왕(濟南王)은 협박을 받아 반란의 맹약에 참여한 것뿐이었으므로, 처형을 당하지 않고 자리를 옮겨 치천왕(菑川王)이 되었다.
오왕이 주도한 수십만의 반란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자멸했고, 반란은 석 달 만에 평정되었다.
반란군의 왕들은 모두 자살을 했거나 죽임을 당했고, 이들의 영지는 모두 한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여러 제후의 권력은 약해지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중앙의 황권이 강화된 상황하에서 중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걸출한 황제인 무제(武帝)가 뒤를 이어 집권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시대에 한나라는 막강한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 시대의 영욕과 성쇠에는 다 그만한 배경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옛말에 ‘예로부터 내려오던 법을 바꾸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자는 죽음을 당하거나 몸을 망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조조의 경우를 가리킨 말이었던가!」(《사기(史記)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옛말에 ‘권모(權謀)의 주창자가 되지 말라. 그러면 도리어 죄를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조조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일까?」(《사기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사마천(司馬遷)의 조조에 대한 평가이다.
조조는 원래는 한나라의 왕실을 위해 원대한 생각을 했으나 도리어 화가 그 몸에 미치게 되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옳을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목숨을 거는 경우도 있다는데, 조조의 잘못은 비록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제후들의 밥그릇에 과도하게 손을 댔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그는 밥보다 더 중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 이전에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의 문제가,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먹는’ 문제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일국의 왕이 된 자들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생존의 문제가 달린 가련한 백성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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