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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능력. / 十字架の力。(2023년 5월 7일 주일예배)
본문; 고린도전서 1:18-25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18. 十字架の言葉は、滅んでいく者にとっては愚かなものですが、わたしたち救われる者には神の力です。19. それは、こう書いてあるからです。「わたしは知恵ある者の知恵を滅ぼし、/賢い者の賢さを意味のないものにする。」20. 知恵のある人はどこにいる。学者はどこにいる。この世の論客はどこにいる。神は世の知恵を愚かなものにされたではないか。21. 世は自分の知恵で神を知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それは神の知恵にかなっています。そこで神は、宣教という愚かな手段によって信じる者を救おうと、お考えになったのです。22. ユダヤ人はしるしを求め、ギリシア人は知恵を探しますが、23. わたしたち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を宣べ伝えています。すなわち、ユダヤ人にはつまずかせるもの、異邦人には愚かなものですが、24. ユダヤ人であろうがギリシア人であろうが、召された者には、神の力、神の知恵であるキリストを宣べ伝えているのです。25.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지난 주일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148번의 메시지를 통해 사도들의 활동과 그들과 임재하시며 인도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나누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에 순종하였던 자신들의 일지와 기록을 남겨 두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사도행전은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의 예수동행일기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우며 그 전통을 이어가는 우리들도 각자의 사도행전을 남길 수 있습니다. 바로 동행일기를 통해 저와 여러분은 하루에 하루만큼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활동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부터 시작하는 예수동행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보다 분명히 주님과 동행하며, 그 삶의 간증들을 차곡차곡 쌓아 가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동행 메시지 시리즈의 첫번째 주일인 오늘은 하나님의 능력이신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 1:1,3)
그리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친히 손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곧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창 1:28a)
이 모든 약속과 축복이 성경의 가장 첫 번째 책인 창세기 첫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는 인간인 우리들이 얼마나 놀라운 복을 타고 태어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단지 창세기만 우리의 귀중함과 소중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상식에 속하는 과학에서도 인간 존재의 신비함과 놀라움을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모든 진화의 최종적인 꼭대기에 인간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요.
뇌과학에서도 인간의 뇌가 가장 발달한 뇌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진화의 축복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뇌는 진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피조물로 창조하시고 이 창조세계를 그 아름다움에 가장 합당하게 관리할 사명과 소명을 위해 창조해 주셨다고 믿는 것인데요. 저는 이론으로서의 창조론이 아닌 신비로운 역사인 창조 그 자체를 믿습니다.
그런 사명과 소명 가운데 온전히 살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다 특별한 세 가지 놀라운 영적인 복을 추가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결핍이나 갈증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 생활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지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예수님께 속한 사람, 즉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거듭나서 영생을 누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예수님께 속하였다고 말하는데요. 예수의 제자이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특별한 관계로 맺어진 사람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하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세속적인 부족함도 육신적인 갈망도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불평과 불만이 입에서 여전히 떠나지 않고 항상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주변을 평가하려고 한다면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진지하게 돌이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7-38)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주변의 이웃과 친구 가족들에게 생수와 같은 영향력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생수와 같은 영향력이란, 주변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고, 생기와 활력을 얻는다는 뜻인데요.
물론 이런 고차원적인 모습이 아니라도, 성격이 활발한 사람은 쉽게 주변사람들에게 긍정에너지를 발산하지요. 하지만, 성격이 활달한 것과의 여부를 떠나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기쁨과 흐뭇함을 느끼게 해 주는 내면적인 에너지가 흘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한 태도로 늘 주변에 상처를 주고, 악영향만 끼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지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려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승리하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여기서 승리한다는 것은 어떤 현실적인 시련이나 고난을 만나더라도 능히 견디는 힘을 갖는다는 뜻인데요.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하여 제자들이 누리는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5-37)
여기서 넉넉히 이긴다는 표현이 있는데요. 어떤 외적인 시련이나 고난, 그리고 내적인 풍랑이 휘몰아쳐도 그 일에 자신의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의 방향, 살아야 할 이유가 꺾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살아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어떤 큰 문제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시련과 시험을 만났을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시험이 오는 족족 걸려넘어지고 실패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시험의 걸림돌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디딤돌을 삼아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 20세기 초 필리핀 선교사인 프랭크 루박 선교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친 사람입니다. 세계문쟁퇴치선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미국 우표에 등재된 유리한 개신교 선교사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친밀함을 24시간 느낄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매 분(every minute)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도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그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일 분에 한 번씩 마음에 하나님을 떠올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저와 여러분도 프랭크 루박 선교사님과 같은 놀라운 삶의 증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놀라운 삶의 증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인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그리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프랭크 루박 선교사의 본을 따라서 말이지요.
오늘 본문 중에 첫 절인 18절의 후반부를 보시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이지요. 십자가의 말씀, 즉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주 하나님을 함께 믿는 유대인들에게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요. 유대인은 십자가를 저주받은 것으로 알기에 거리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이방인들은 미련한 것, 즉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니 이방인의 관점으로 보며, 이해하려고 하겠지요.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일상을 살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중에 우리를 현혹하는 것이 바로 실력과 능력에 대한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미 임재하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켜 줄 하나님의 기적만을 갈구하며, 그 실력과 실적을 체감하지 못하면 낙심하고 절망하여, 심지어 믿음의 길이 흔들리기까지 합니다.
말 그대로 ‘실력’이란 어떤 힘으로 일한 결과를 뜻합니다. 그런데 능력이란 그 힘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를 뜻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실력을 구하기에 큰 길을 찾으려고 하고,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큰 길인,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3)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다수 지식과 조언은 넓은 문으로 가는 것이 지혜롭다 하고, 이해하기 쉽고, 납득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실력자가 되기를 구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크고 넓은 문입니다.
하지만, 좁은 문은 실력자 아닌 능력자가 만들어 놓으신 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십자가의 복음으로 열어 놓으신 좁은 문입니다. 그 문으로 통과하려면 머리를 숙이고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사진_예수탄생교회 입구]
하나님은 자기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 애쓰고 몸부림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저 종교생활에 열심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어떤 실력을 보여주며, 자기의 종교심이나 행위만을 자랑하려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노력을 믿기보다 먼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가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로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가 능력 그 자체임을 믿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저서에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보는 사람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는 사람의 태도의 차이를 이렇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십자가의 말씀, 복음)가 왜 능력인지 모릅니다. 그저 십자가를 볼 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기가 예배당인 모양이구나... 교회인가 보다... 하고 느낄 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은 알지 못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교회만 다니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쓰시는 사람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십자가의 도(말씀, 약속)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상식적인 입장에서 실력을 쌓기 위해, 혹은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서 사는 삶에 맹목적으로 쫓겨 살기 보다, 십자가의 능력을 발견하는 지혜가 충만하시길 소망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만족하는 삶에서 한 단계 나아가, 예수를 믿고 아름답게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받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나누셨던 만찬을 기념하는 성례입니다. 그 성례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몸이 찢기시고, 그 보혈을 흘리실 것을 말씀하시며 성찬의 떡과 포도즙의 잔을 나누셨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곧 십자가에 있음을 상징하는 성찬성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성찬을 통해서 주님의 임재하심과 동시에 십자가의 능력에 다시금 눈뜨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삶이 펼쳐집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의 말과 몸짓에서 생수의 강과 같은 선한 영향력이 흘러나와 주변을 생기있고, 활기차게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는 그 어떤 시련과 시험이 와도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마침내 승리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믿는 마음과 믿음으로 나의 이기적 자아는 죽고, 예수의 사랑으로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고, 그 놀라운 증거들을 하루에 하루만큼 기록함으로 주님 앞에 삶을 쌓으며 지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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