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생활이 어려운 것은 음식과 환경만이 아니다. 나는 오랜 유학 생활을 통해 난 다른 문화에 살면서 어떻게 적응하며 생존하는 지를 배웠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됐다. 신자가 됐다고 하면서, 아니 신자라면서도 그리스도도교 신앙생활이 어렵거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국화 만드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해석하여 나름대로 적용하려는 자기 해석의 의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내가 자란 배경이 부산이지만 이북 부모를 뒀기에 그기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난 부산의 의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탐구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나에게 준 좋은 유산이 있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다. 좋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 구별하는 의식을 갖고 싶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지닐 것은 언제나 보존해야 한다는 심정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최선의 길이 유학이었다.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지 2,000년 이상 된 서양문화에서 생존하고 싶었다. 물론 모든 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문화에 젖힌 습관과 관행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책에서만, 아니 도서관 지식만 지닌 나는 이것을 깨뜨리고 싶었다.
신대원 3학년 졸업 논문으로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연대,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족보에 따른 연대가 등장한 데 계산해보면, 4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난 그 이유를 풀고 싶었고 난 풀었다. 연대기 계산법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북이스라엘을 한국처럼 새 해가 되면 1년으로 계산하고, 남유다는 서양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1년으로 계산한다. 전자는 이전에 한국 사회가 택한 것이고, 후자는 올해부터 택한 것이다. 어느 방식이 옳은지는 모르지만 국제 사회에서 항상 혼선이 빚어지기에 한국 문화 자체도 수정한 것으로 여긴다.
두 방식의 옳고 그른 것의 차이는 없지만 의식의 차이이다. 전자는 새 해를 맞이하면서 1년, 즉 한 살을 먹은 자세로 살라는 것이고, 후자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이기에 그것을 향해 살라는 것이다. 근데 차이점에서 전자는 이미 입학한 것으로 여기고 책임 있게 살라는 것이고, 후자는 입학했을 뿐이기에 늘 긴장을 늦추지 말며 살라는 것이다. 이런 두 차이는 삶의 현장에서 쉽게 드러난다. 신자로 등록한 후에 이미 천국을 초유한 것으로 여기는 전자와 미확전된 확신으로 늘 긴장하며 살라는 후자의 신앙이 다르다. 글쎄? 어느 것이 옳을까? 문제는 그 방식의 차이 장점을 살리지 않고 단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보다 후자의 장점이 더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반만년 동안 채택한 나이 계산 법을 수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그것에 적합한 태도와 의식을 지니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국을 소유한 것처럼 여기다보니 긴장을 풀어서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심, 방황, 방탕하게 이른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전자의 사고 의식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간다. 실제로 새 해가 되면, 한 살 먹었다고 좌절하거나 입학하여 졸업한 것처럼 설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졸업하겠지만, 새 해를 맞이했지만 마무리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쉽게 인식하고 쉽게 풀고 쉽게 답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공부 방식에도 드러나서 답안을 원하는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다. 계산기로 답을 알 수 있지만 어떻게 그 답에 이른 지를 찾아야 한다. 이 방식은 서양식이다. 이런 방식은 곧 그리스도교에 따른 것이다. 이런 삶의 의식이 수정되고 보완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이 매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