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방편문
2)일상삼매 일행삼매
「보리방편문」은 벽산이 선정 중에 깨달음을 얻어, 증득한 '보리'를 깨닫는 방편문이다. 서두에, "「보리방편문」은 성품을 보고 진리를 깨닫는 방편이다.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하고, 마음을 한 대상에 머무는 신묘한 비결이다. 익숙하도록 읽고 뜻을 깨달은 후, 고요한 곳에서 제1절만 서사(書寫)하여 앉아(서 마주) 보이는 벽에 붙인다." 그리고 "관찰하고 염하되 관찰의 일상삼매로 성품을 보고, 염하는 일행삼매로 진리를 깨친다."고 되어 있다.
이상 서두의 내용은 세 가지 과정을 실행하게 된다. 첫째는 내용을 읽고 분명하게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先悟] 둘째는 방편문을 적어서 정좌(正坐)하는 벽면에 부착한다. 셋째는 「보리방편문」을 한결같이 관찰하고 염하는 수행[後修]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즉, 지혜의 관찰은 일상삼매(一相三昧)이고 선정의 염은 일행삼매(一行三昧)이며, 지관쌍수(止觀雙修)의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空)‧성(性)‧상(相)과 법신‧보신‧화신을 차례로 따로 관하고 염(念)하다가, 세 가지가 하나로 합해져서 아미타불을 관하고 염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태양의 본체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고, 광명은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며, 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라 할 수 있다. 또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텅 비어있는 공(空)이고, 공 가운데 존재를 일으키는 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하니 성(性)이며, 여기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의 일체 현상이 나오므로 상(相)이라 한다.
이 삼신은 아미타의 '타(陀)'를 법신에 배당하고, '미(彌)'를 보신에 대응시키며, '아(阿)'를 화신에 배대하고 있다. 또 공(空) 가운데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性)과 상(相)이 다 들어있는 이른바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다. 삼신도 법신‧보신‧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처이며, 셋으로 나누지 않고 삼신일불의 아미타불이라 한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있지만, 방편을 떠나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는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이다. 아래에서「보리방편문」의 원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한 조각 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 같은 마음 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러한 허공 같은 마음 세계에 해와 달을 초월하는 금색 광명을 띤 한없이 맑은 물이 충만한 바다와 같은 성품 바다를 관찰하면서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을 생각하며,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과 밖으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 삼라만상의 뜻이 없는 중생과 또는 사람과 축생과 꿈틀거리는 뜻이 있는 중생 등의 모든 중생들을 금빛 성품 바다에 바람 없이 금빛 파도가 스스로 뛰노는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천백억화신인 석가모니불을 생각한다.
위와 같이 차례로 허공 같은 마음 세계를 관찰하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염한다. 맑은 물이 충만한 바다 같은 성품 바다를 관찰하며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염한다. 모든 중생을 금빛 성품 바다에 바람 없이 금빛 파도가 뛰노는 거품으로 관찰하며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염한다. 관찰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물을 보듯이 관하며, 허공‧바다‧거품을 보며 마음‧성품‧중생과 다르지 않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어서 세 가지를 삼신에 배대하여 각기 법신불‧보신불‧화신불 등으로 염한다. 이때의 염(念)은 관상과 칭명을 포함하는 행법이며, 입체적인 수행으로 훨씬 더 효과가 좋을 수 있다. 아래에서 당대 가재(迦才)의 법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염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심념(心念)이고 둘은 구념(口念)이다. 심념은 다시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타의 색신(色身)을 염하는 것이고… 둘은 불타의 지신(智身)인 아미타불의 대자대비력과 무외력(無畏力) 등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이 있음을 염하는 것이다. 둘째, 구념이란 마음의 힘이 없을 경우 마땅히 구념을 보조로 하여, 심념을 끌어내어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인용문에는 염불을 마음으로 하는 것과 입으로 하는 것의 두 가지를 설한다. 심념은 다시 색신을 염하는 것과 지신(智身)을 염하는 것인데, 후자는 공덕을 염하는 관상염불의 형태이다. 그런데 구념의 칭명염불은 심념의 관상염불을 보조하는 수단이 된다. 즉, 마음이 산란할 때 먼저 칭명염불로 안정시키고, 다음에 관상염불로 확대되는 단계를 말한다. 불타의 색신과 공덕을 염하기 위해, 칭명염불을 먼저 실행하여 마음이 집중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칭명과 관상은 상호 보완적인 요소로 작용하며, 칭명이 제대로 된다면 관상도 바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칭명과 관상은 염불의 두 가지 요소인 것이다. 다시「보리방편문」의 내용이다.
다시 저 한량 없고 끝없이 맑은 마음 세계와 청정하고 충만한 성품 바다와 물거품 같은 중생들을 공(空)과 성품[性]과 현상[相]이 본래 다르지 않는 한결같다고 관찰하면서 법신‧보신‧화신의 삼신이 원래 한 부처인 아미타불을 항시 생각하면서 안팎으로 일어나고 없어지는 모든 현상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들을 마음이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 모습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인용문은 삼관(三觀)과 삼념(三念)을 합쳐 하나로 관하고 염하여 들어가는 부분이다. 즉, 무량하고 맑은 마음인 공(空)의 세계와 청정하고 충만한 바다의 성품과 물거품 같은 중생의 현상이 본래 다르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또 법신‧보신‧화신의 삼신이 원래 한 부처인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염하게 된다. 이처럼 삼관과 삼념이 하나로 통합되어 아미타불을 관(觀)하고 염(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넓은 의미로 지혜를 관하고 염하는 부분이라면, 다음은 자비를 관하고 염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현상과 중생의 덧없는 행동을 마음이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관찰하라고 설한다. 이렇게 온갖 현상과 중생의 갖가지 행동을 아미타불의 일대행상으로 관찰함은 일체중생‧일체만물이 부처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것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을 공경하고 예배하며, 공양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보리방편문」을 요약하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다.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자각하며, 관찰과 염념의 실천수행법으로 설한 것이다. 가령 끝없는 허공에 맑은 물이 가득한데, 일체는 거품이라 관찰함은 일상삼매이며 생각함은 일행삼매이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을 미타의 위대한 모습이라 관찰함은 일상삼매이며, 생각함은 일행삼매인 것이다. 즉, 분명하게 관찰하여 이치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일상삼매이고, 그러한 도리를 흔들림 없이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은 일행삼매이다.
다시 말해 일체 만유(萬有)와 불성(佛性)이 둘이 아닌 원리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의 측면이고 일상삼매이다. 즉, 천지 우주를 부처로 보는 것은 일상삼매로, 지혜이고 관이 되는 것이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지혜 경계를 놓치지 않고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해 가는 것이다. 또 지혜를 삼매 분상에서는 일상삼매라 하고 선정은 일행삼매라 하는데, 두 가지를 함께 닦아야만 정혜균등(定慧均等)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기신론(起信論)』을 비롯한 경론에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며, 『금강심론』에만 특이하게 두 가지를 지관(止觀)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한다. 무주도 마찬가지로 관찰과 선정의 두 가지 측면으로 비유하여 설한다. 즉, 일상삼매는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찰나도 곁눈질 않는 여묘포서(如猫捕鼠)에 비유하며, 조금도 방심 없이 그 자리만 관조하고 참구하는 것이다. 또 일행삼매는 닭이 알을 품듯이 오랫동안 앉아 있는 여계포란(如鷄抱卵)에 비유하고, 쉼 없이 품고 있는 어미 닭처럼 참을성 있게 굳건히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비유는 벽산이나 무주가 깨달음의 방법론을 구체화하여, 적극적으로 수행에 임하게 하려는 노파심의 발로인 것이다.
벽산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거쳐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오직 가행(加行) 공덕으로 가관적(假觀的) 일상삼매에서 견성적(見性的) 실상삼매로, 염수적(念修的) 일행삼매에서 증도적(證道的) 보현삼매를 성취한다. 이 같은 관찰과 생각에서 실증(實證)으로 사유하고 닦아 증득한다. 이처럼 몸으로 증득하고 마음으로 깨달으므로, 정각(正覺)의 초보인 신인(信忍)을 성취하고 순인(順忍)으로 금강유정(金剛喩定)에 머문다. 수행자의 원력에 따라 수분각(隨分覺)으로 무생인(無生忍)을 거쳐, 적멸인(寂滅忍)의 구경각(究竟覺)에 도달함이 본각 경지인 열반안(涅槃岸)에 이르는 첩경이다.
위와 같이 가관의 일상삼매가 구경에 이르면 견성의 실상삼매가 되고, 염념의 일행삼매도 진리를 증득하는 보현삼매를 성취한다고 설한다. 여기서 성품을 보는 것은 실상삼매이고, 진리를 증득함은 보현삼매라고 한다. 즉, 관찰과 생각의 수행에서 실증의 증득이므로,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 된다. 또 수도의 과정을 『인왕경』의 오인(五忍)으로 구경각에 도달함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벽산은 공과 불공의 측면으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아래와 같이 설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제법공(諸法空)의 실상을 증득함에 일상삼매로써 하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무애심(無碍心)의 무상행(無常行)을 증득함에 일행삼매로 한다. 제법을 청(錆)에 비유하고, 실상을 철(鐵)에 비유함은 일상삼매를 닦는 일례다. 무애심을 마니보주(摩尼寶珠)에 비유하고, 무상행을 무량보광에 비유함은 일행삼매를 닦는 일례다.
인용문에는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각기 공(空)‧불공(不空), 출세간‧세간 등으로 배대하여 닦는다고 설한다. 또 녹과 철의 비유는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고, 허깨비 같은 몸이 결국은 법신임을 설한다. 이것은 「보리방편문」마지막에 "모든 현상과 무상제행을 미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관찰하라."는 것과도 통한다. 즉, '생사즉열반', '번뇌즉보리'의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일상은 출세간적으로 일행은 세간적으로 닦지만, 결국 두 가지는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다.
무주는, "제법이 공(空)한 자리인 반야 지혜를 여의지 않고,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의 하나로 귀일시키는 것이 일상삼매이다. 또 일상삼매를 확신하는 순수한 마음을 여의지 않고, 행주좌와에 본체를 여의지 않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하는 것이 일행삼매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금강심론』의 수행론을 계승한 무주의 사상과 선법이 드러나는 내용으로, 원통불법이고 실상염불선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칭명염불뿐만 아니라 어떤 사상도 배제하지 않고, 단지 실상염불로 나아가는 염불선이면 바른 길이다. 염불선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자증법(自證法)이며, 동시에 중생이 부처로 사는 수행법인 것이다. 또 일체 중생과 우주 만물이 무량광명의 한 생명이므로, 우주적 감성과 타인과 공감하는 자비가 발현되는 수행법이다. 이것은 현생에 구경성취를 못하더라도, 수행 자체로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삶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심리인 지(知)‧정(情)‧의(意)를 갖추어, 조화를 구하는 선법, 즉 염불선을 권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천태‧화엄‧정토‧밀교 등의 제종융합(諸宗融合)이며, 그 근본은 동일하다는 사상이다. 즉, 선교일치를 주창한 수행자들에 의해 제교일원(諸敎一元)이 주장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선정쌍수와 겸수를 일치‧회통하여 대중의 공감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유심소현(唯心所現)의 측면에서는 법성(法性)정토의 구현이 가능하며, 정토 원류와 서로 통하고 제종이 원융하게 포섭된다. 따라서 실천수행면에서도 염불과 선(禪)이 구경에 실현하려는 목적이나 취지에 부합하고, 한국불교 대중화의 수행방편으로서도 염불선이 적합하다고 보는 것이다.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