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자녀라 하시네
2026. 7. 26(주일낮예배) 마가복음 15:33-34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No.9 크로이처 라는 곡이 있다. 일반적인 소나타는 4악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크로이처는 3악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런데 시간은 다른 소나타곡보다 긴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이렇게 긴 크로이처는 베토벤이 쓴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곡으로 평가를 받는다. 크로이처에 대한 평가 글을 들어보기 바란다.
바이올린은 불을 뿜는 듯한 스타카토와 강렬한 악센트를 선보이며 피아노와 접전을 벌인다.
크로이처 곡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푸른 들판을 걷는 것과 같은 평온함을 준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렬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주된다. 그래서 크로이처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곡인데, 아이러니 한 것은 베토벤이 이 곡을 크로이처에게 헌정하였는데, 크로이처도 이 곡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누가 크로이처를 이해하여 연주할 수 있겠는가? 베토벤이 크로이처를 작곡하기 1년 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다. 음악가로서 청력을 잃어가던 베토벤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절망을 한다. 그래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음악을 하고 싶은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랬던 베토벤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과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교차하면서 크로이처라는 곡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크로이처를 잘 연주한다는 것은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얼마나 고뇌하고, 또 절망과 열정 사이에서 고통하였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말씀 한구절 한구절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느끼면서 표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부부싸움을 할 때 제일 답답한 남편은 내가 바람을 피웠나? 내가 월급을 제때 가져다 주지 않았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당신은 불만이 그렇게도 많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월급 제 때가져다 주는 남자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남편과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을 때가 없는가? 창세기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천지만물을 지으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세상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제일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실 때 성도들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화답한다. 그렇게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고대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성경은 은혜를 선포하면서 성경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성경의 시작은 품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기록하고, 마지막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은혜가 충만한가?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하신 일곱마디 말씀 중에 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과 절박함 가운데 하나님을 불렀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가?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를 만나서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라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박해한다. 그때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5장 18절이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그들이 죽이려 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이다. 아니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아니 성경은 모든 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절박함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가? 이기현 목사님은 장인을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데 장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이기현 목사님은 장인은 아버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인과 의견 차이가 있었고 속이 상했던 이기현 목사님은 장인을 아버님이라 불렀는데, 그때 장인은 이기현 목사와 의견이 달랐던 것보다 이기현 목사가 아버님이라 부른 것에 더 속이 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화해할 때 장인은 다시는 아버님이라 부르지 말라 고 말씀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를 때 하나님의 마음도 크게 상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 불렀겠는가? 성경주석학자인 윌리엄 핸드릭슨은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한다.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께 임하였고,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였다.
윌리엄 핸드릭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은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로마서 8장 15절에 기록됨과 같이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의 종인가? 아들인가?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르다가 영접한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였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다. 그때 준비할 일이 많았던 마르다는 분주한 마음에 마리아에게 명하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하고 말한다. 그렇게 분주한 마음에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마리아를 명하여 언니를 도우라고 말해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10장 41-42절이다. 누가복음 10장 41-42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눅 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좋은 편이 무엇인가? 어떤 목사님은 이 좋은 편은 말씀듣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고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말씀을 듣고, 또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현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 예수님이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은 말씀을 듣는 것은 좋은 것이고, 봉사는 덜 좋은 것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마리아가 이 좋은 것을 택하였다는 것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녀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마르다는 종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마르다는 많은 일을 해서 칭찬을 받으려는 분주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는 존재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고, 종은 주인이 원하는 선한 일을 해야 사랑을 받는 자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날 자녀라 하시네 라고 하는 찬양이 있다.
자격없는 날 왕께서 반기시네
잃어버린 날 찾으신 오 그 사랑. 오 그 사랑
독생자 예수 자유케 하네 주의 자녀라 하시네
(Who the Son sets free Oh, is free indeed
I`m a child of God Yes, I am)
아버지 집에 거할 곳 있네 주의 자녀라 하시네
(In My Father`s house There`s a place for me
I`m a child of God Yes, I am)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그의 소유 삼으시고 날 자녀라 하시네
원곡은 주의 자녀라 하시네를 I`m a child of God Yes, I am이라고 표현한다.
저는 이 곡을 처음대하고 이 부분을 듣다가 눈물이 울컥하였다. 하나님은 자격없는 날 반기시고, 잃어버린 날 찾아오셔서 나를 자녀라 부르시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예수님이 늘 불렀던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는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종의 영을 받아 분주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이제 주 예수의 은혜가 있을찌어다는 성경의 마지막 말씀이 자녀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게 은혜베푸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오심을 고대하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