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30 / 서남산의 계곡(상)
서남산의 계곡은 남남산과 경계를 이루는 천룡골에서 시작해 북서쪽 왕정골까지 계곡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사람들이 기록하고 있는 이름이 지어진 계곡과 이름이 없는 계곡까지 합하면 백개도 넘을 것이다. 특히 천룡골과 용장골은 바로 고개 하나를 두고 이웃해 있으면서 일반 사가들의 기록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이 120점을 웃돌아 발길 옮기는 곳마다 문화재가 밟힌다. 이번 호에서는 남산에서도, 문화재 측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천룡골과 용장골을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 중심으로 소개한다. 틈수골이라고도 불리는 천룡골과 용장골은 천룡사와 용장사라는 절이 있었기에 계곡이름이 그렇게 불려진다.
◆울음바위와 찢어진 계곡
천룡골은 틈수곡으로도 불린다. 천룡사가 있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돌틈을 통해 항상 마르지 않고 계속 흐른다고해서 ‘틈수곡’ 혹은 ‘수동’, ‘극수동’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천룡골은 남남산의 백운암에서 서쪽으로 한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계곡으로 서남산의 첫 번째 계곡이 되는 셈이다. 천룡골은 고위산 정상에서 시작해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인데 와룡계곡과 틈수골의 개울물을 합하여 기린내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수리산 정상 조금 아래에 천룡사터가 있고 35번 국도에서 용장3리 마을을 조금 지나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지금의 와룡사가 있다. 마을이 서남산 깊은 곳까지 들어와 형성돼 와룡사도 제법 깊은 계곡에 위치해 있다.
틈수골은 천룡골로도 불리는 천룡골의 하류 계곡으로 천룡계의 입구에 해당한다. 틈수골은 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산 깊은 곳으로 이어지지만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아담한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 둑에서 마을을 보며 바라보는 낙조는 일품이다. 틈수골에서 천룡골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가파르다. 가파른 등산길을 오르다 왼쪽편으로 조금만 시선을 준다면 이상하게 형성된 계곡을 볼 수 있다. 긴 세월 물이 흘러 만들어진 일반 계곡과는 달리 어떤 인위적인 힘이 가해져 산을 찢어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계곡이 길게 이어져 있다. 나무뿌리가 너덜하게 그냥 드러나고 더러는 계곡을 잇듯이 가로지르는 굵은 뿌리도 보인다. 계곡의 바닥에도 물길이 지나간 흔적도 오래된 것 같지 않아 지진으로 인해 갈라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지질학자들의 정밀한 탐사가 어떤 지각변동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또 천룡사에 이르기 전 길 옆에 기이한 청석바위가 있다. 남북으로 형성된 길쭉한 바위가 탁자모양으로 형성돼 있는데 오른쪽 아래 부분은 하얗게 말라 있지만 윗부분의 바위가 건조한 날이든 장마철이든 눈물처럼 물방울을 한방울씩 떨어뜨리며 항상 젖어 있다. 관심 있는 탐방객들에게 울음바위로 불리고 있다.
◆용바위와 천룡사지 불적들
천룡골을 따라 남산의 내부로 오르다 등성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시야가 확 트인 깜짝 놀랄 정도로 넓은 부지를 만나게 된다. “깊은 산 속에 이렇게 넓고 평지같은 땅이 있다니...”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대부분의 탐방객들이 놀라며 하는 말이다.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까지 큰 사찰이 있었던 곳이다.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대거 거주했지만 지금은 인가 2~3가구가 남산의 최고봉 고위산으로 연기를 뿜어 올릴 뿐이다.
이곳 천룡사지에 서면 넓은 터에 놀라고 50여그루의 고목이 된 감나무가 지금도 경작이 되는 일부 토지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서 있는 모습에 감탄사를 발하게 된다. 천룡사터에서 고위봉을 향해 조금만 발길을 더 옮기면 지금도 천룡사라는 이름의 절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온다. 천룡사 뒤편에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서는 굽이치는 용의 모습으로 산줄기가 내려꽂히다가 머리를 치켜드는 형상의 용바위가 있다. 용두암 또는 천룡암으로 불린다. 옆에서 보면 큰 배가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 운도암이라고도 불린다.
천룡사는 수리사라고도 불렸다. 남산의 많은 절터 중에서 이름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세 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때 당나라 사신 악붕귀가 천룡사를 보고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이 신라말기에 허물어진 것을 고려초기에 최제안이 다시 지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최제안의 딸 천녀와 용녀를 위해 지은 절이라 천룡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신라시대 수리사로 불리던 절을 고려시대 정종대에 천룡사로 이름을 고쳐 부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천룡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천룡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해 신라시대와 고려,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불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금은 거의 묻혀 알아보기 어려운 크고 작은 석조와 드러나 있는 석조, 특이하게 생긴 목이 떨어진 귀부, 석등과 주춧돌, 맷돌, 불상대좌 및 주춧돌, 양련과 복련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는 연화대좌 등의 부재들이 걸음마다 쉽게 보인다.
◆산정호수와 바위계곡
천룡사에서 동서쪽으로 수평길을 10여분만 걸으면 급한 경사로 낭떠러지로 내리꽂히듯한 고개길이 나타난다. 용장골의 유명한 신라처녀 전설이 서린 열반골이다. 신라 재상의 딸이 화려한 세상사를 뒤로하고 열반골로 접어들며 열반에 들게된 이야기는 미리 소개해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용장골은 고위산과 금오산 두 봉우리 사이로 흐르는 큰 계곡이다. 고위산 동면으로 흐르는 물과 칠불암 산정인 봉수대 부근에서 흐르는 물을 시발점으로 해서 금오산 남면과 고위산 북면으로 흘러내리는 여러 골짜기의 물들을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장 마을을 지나 기린내로 들어가는 계곡이다. 약 3km 되는 골짜기의 길이로 보나 지역의 넓이로 보나 남산에서 첫손을 꼽는 이 골짜기에는 흘러드는 지류가 많아 곳곳에 장엄한 바위산이 있고 아늑한 명당터가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절터만 하여도 10여개소가 되고, 석탑과 불상도 10개가 넘는 등 많은 불적들이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 삼륜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골짜기에 남아있는 18개소나 되는 절터들은 용장사터를 제외하고는 절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용장리에서 시작해 용장골로 오르다 열반골로 이어지는 오른편의 길을 버리고 왼편으로 접어들면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는 절골을 지난다.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다는 은적암이 있는 은적골도 지나고 김시습의 법명을 따 지어진 설잠교를 따라 오르면 용장사지와 세 개의 보물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설잠교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 이영재골 방향으로 길을 잡아도 절경은 이어진다. 이영재골로 한참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물을 가둔 제방이 길게 누워있다. 남산의 턱에 이르는 높은 산중에 호수가 넘실거리며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있다. 산자락에는 용처럼 고목이 물속으로 몸을 길게 누이고 있다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도 신비롭다. 산 정상부위에 있는 호수라 산정호수로 불린다.
용장계곡을 오르는 길이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어 계곡을 따라 걸으면 남산이 바위산이란 것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물이 흐르는 바닥이 대부분 물걸레질한 마룻바닥처럼 매끈한 바위로 형성되어 있다. 잡을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본 것 같아 새삼 발길을 멈추어 본다.
◆절골과 은적골, 탑상골
고위봉과 금오봉 사이에서 시작해 여러 지류가 용장골로 합해 기린내를 통해 형산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용장골로 모여드는 계곡은 열반골, 은적골, 이영재골, 탑상골, 절골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절터와 목이 달아난 불상이 남아 있는 절골과 매월당 김시습이 숨어 살았던 터가 있는 은적골, 용장사 역사가 존재했던 탑상골을 흔적만 더듬어 본다.
열반골 입구에서 용장골의 본류를 따라 약 200m 들어가면 북에서 남으로 흘러오는 계곡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절터가 발견된 골이라 절골이라 부른다. 절골은 길이 300m 가량 밖에 안되는 작은 골짜기로 중턱에 절터가 있다. 계곡은 좁은데 경사는 급하므로 큰 돌축대로 절터를 형성했다. 유물로는 불상과 탑재가 남아 있다. 바위들이 듬성듬성 솟아 있는 산등상이에 둘러 싸여 다소 어둡지만 명당의 조건을 갖춘 터로 손꼽힌다. 현재까지도 허물어지지 않고 비교적 잘 남아있는 축대가 4단계로 이어지며 축조돼 있다. 축대밑으로 여울물이 삼단의 폭포로 흘러내리는 운치있는 법당터다. 축대 위의 법당터 중앙에의 본존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 목이 없어진 채 앉아 있다.
절골에서 나와 다시 용장골의 본류를 따라 들어가면 남쪽에서 흘러드는 큰 지류가 나타난다. 고위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흘러오는 길이 700m 가량의 계곡인데 은적골로 불린다. 조선조 단종 임금 때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숨어있었다고 불려진 이름이다. 은적골 어귀에 한 절터가 있다. 여울물이 고여 있는 소를 정원으로 삼아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암자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주춧돌 몇 개가 남아 있다.
은적골 어귀에서 150m쯤 본류를 따라 들어가면 용장사가 있는 탑상골이 나타난다. 탑상골에 형성된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탄생했다. 탑상골 가파른 계곡을 따라 오르면 웅장한 역사의 그 용장사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탑상골에서 산마루로 오르면 넓은 시야가 확보되면서 멀리 경주시가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라벌의 벌판을 가로지르는 긴 강줄기를 따라 김유신 장군이 높이 칼을 빼들고 달려가는 천년의 역사를 조망하게 되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2014년 4월)
첫댓글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찢어진 계곡
이제는 보물이 된 못골 안의 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