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날 있었던 일
구름(김병우)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해묵은 잡동사니 서류뭉치 속에서 줄이 터진 손목시계가 눈에 띄었다. 결혼식 예물로 아내와 서로 주고받았던 한 쌍의 시계 중 내 것이다. 30년도 더 된 시계를 찾았다.
그 손목시계는 말단 공무원으로 시보 딱지도 떼기 전에 결혼식 날을 잡다 보니, 없는 돈에 큰맘 먹고 장만했었던 예물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예물이라는 게 기껏해야 금가락지와 손목시계가 대종을 이뤘지만 벌어 놓은 것이 없었던 가난한 청년에게는 그것도 큰 부담이었다. 신랑이 서른을 넘긴 노총각이라 이십 대 중반 혼기가 꽉 찬 처녀를 둔 처가에서 마음을 졸였다. 바삐 날을 잡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요즘 세태에서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주변의 친구들이 대부분 서른 전에 장가를 갔었고 여자는 이십 대 중반만 넘겨도 노처녀 딱지가 붙었던 시절이었다.
시계를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신혼살림을 부엌을 밟아서 들어가는 도심 변두리 지역 허름한 단칸방에서 시작했었다. 신혼 초 어느 날 밤, 탄불을 갈려고 번개탄 위에 연탄을 올려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 꿈결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짓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하며 내 이름을 불러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창호지 문틈으로 연탄가스가 들어와 방안이 연기로 자욱했다. 일어나려고 제아무리 용을 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맥없이 꼬꾸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문 앞에 누운 아내를 보니 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옆방 벽 쪽으로 간신히 갔다. 벽을 젖 먹던 힘들 다하여 두드리고 손톱으로 끌기를 수 없이 하다가 급기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꿈결에 웅성거리는 소리와 냉기가 온몸을 엄습해 눈을 떴다. 차가운 길바닥 위에 누운 자신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옆에는 아내가 누워있다.
“남자는 깨어난 것 같다…, 남자는 살았다!”
우리 부부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들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살 운명이었던지 옆방에 살던 남자가 잠결에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연탄가스 사고라 판단하여 맨발로 달려왔다.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였으니 그의 판단력이 우리 부부를 살렸다.
그 청년이 우리 둘을 번갈아 둘러업고는 전봇대 가로등 불빛 아래로 옮겨 시멘트 바닥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가구 주택이라 한밤중에 일어난 소동에 놀라 여기저기서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쯧쯧, 가엽기도 해라. 신혼인가 본데 여자는 죽었나 봐, 기척도 안 하네”
모여든 구경꾼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옆에 누워있는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달려왔다.
아내는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오르고 나는 울부짖으며 그 옆에 앉았다. 산소마스크를 한 아내의 손을 잡고 죽으면 안 된다고 절규했다. 병원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왼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았다. ‘月, 1’이라는 숫자가 눈물 자국으로 흐릿하다. 시계 표면 한가운데에 요일과 일자가 표기되는 결혼 예물로 받은 바로 그 세이코 손목시계다. 평소에 잘 때는 벗어놓고 자는데 그날은 손목에 차고 있었다. 병원에서 응급치료 후 기적같이 살아난 아내는 지금도 그날 일이 악몽 같다고 한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건만 그날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아내는 요즘에도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때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는 것인가?
3월 말에서 4월 1일 자로 날짜가 변경되어 넘어간 만우절 새벽 1시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였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34년 전 만우절 날 있었던 일을 새삼 떠올려 본다. (2019.4.3.)
첫댓글 읽으면서 너무 놀라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두분 부디 건강하십시요.
신혼초 만우절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을 읽으며 저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만우절 거짓말이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도 총각시절 연탄까스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경험이 있습니다. 신혼초 액땜을 했으니, 한 평생 건강과 행복은 보장될것 같군요. 만우절에 격은 가슴두근 거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혼초에 일어났던 만우절 연탄가스 중독사고는 평생 잊지못할 일이었겠습니다. 저도 숙직을 하면서 방으로 연탄가스가 들어와 정신없이 머리가 어지러웠던 일이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좋지 않은 일을 겪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하실것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큰일 날 뻔하셨네요. 저도 자취하던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아 집에 가보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있던 학생을 발견한적이 있었어요. 가스중독사건이 두분 애정을 더 돈독히게 해주신건 같습니다. 잊지못할 만우절 사건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생각도 하기 싫은 불의의 사고, 그래도 별 일 없이 지나갔으니 그런 다행이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 그런 절박한 상황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만우절에 큰 사고를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만우절에 일어난 사고는 더 원망스러웠습니다. 만우절인데, 왜 이 사고는 만우절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원망이 들기도 하고.. 해서.. 인가 봅니다. 잊을 수 없는 만우절에 있었던 사건을 실감나게 그려 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마조마했습니다. 만우절이어서 기억되는 일이 아니라 그런 큰 사고가 4월 1일에 있었으니 어쩌면 만우절의 트라우마가 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려운시절 만우절에 큰일 날뻔한 일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놀랬을까?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을 일입니다. 대다수 가정에 연탄을 사용했던 그 시절에는 겨울철이면 신문에 심심찮게 실렸던 일입니다.조상이 돌봤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께서 손자를 사랑하는 맘이 꿈에 나타나셨어 구해 주셨네요. 이런 꿈을 과학적으로는 어떻게 증명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너무 큰 일을 당해서 평생에 한번 놀랄일을 당했으니 평생 그런 큰 일은 없을 겁니다.
할머니께서 선몽을 하셔서 두 분이 살아나셨네요.
옆방에 계시던 분의 만우절과 연관짓지 않은 판단이 천만다행입니다.
만우절의 선물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만우절에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테고. 당시에 연탄까스 중독 사고가 많았습니다.천만 다행이란 이런 때 적합한 말입니다. 실감나는 얘기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