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인, 원초적인, 근본적인, 기초적인, 궁극적인
철학의 용어들 중에는 유사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엄연히 그 뜻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분명한 의미를 혼동할 때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도 있다. 왜냐하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질 때 나머지 단추들이 다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근원적인, 원초적인, 근본적인, 기초적인, 궁극적인 ... 이러한 말들은 보통 형이상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하나의 인간 현상이나 세계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용어들로서 다른 모든 설명들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러한 개념들을 혼동하여 사용하게 될 때, 나머지 모든 개념들이나 용어들이 뒤죽박죽하게 되어 결국 오류의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용어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만 있어도 철학적 작업에 있어서 매우 도움을 줄 것이다.
• 근원적인 = 어떤 것이 ‘근원적(primitif)’이라는 것은 그것이 발생한 기원 혹은 존재의 지반을 이루는 것과 관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가령 “크리스천과 이슬람인은 ‘근원적으로’ 같은 민족이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그 동일한 기원을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체들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라고 할 때도 그 기원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발생의 기원보다는 “현재 존재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어떤 것”을 말할 때도 있는데, 가령 “모든 식물들은 근원적으로 태양 빛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세계의 존재가 근원적으로 신적인 존재에 의존 한다”고 할 때 이는 자신들의 존재하는 지반 혹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어떤 힘(에너지)을 말하는 것이다.
• 원초적인 = 원초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의 발생이나 기원과 관련하여 ‘최초의(primordiale)’ 혹은 ‘애초에’라는 ‘시간적 우선성’을 부각시키는 개념이다. 가령 “백인이나 흑인은 원초적으로 다르지 않다”라거나 “맹수나 가축은 원초적으로 동일한 동물이다”라거나 할 때, 최초의 출발점에 있어서는 이러한 존재들이 하나의 동일한 존재에서 출발하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나의 자아(동일성)’는 교육을 통해 획득한 다른 모든 자아들(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자아)과는 원초적으로 구분된다고 할 때, 이때 이 원초적인 자아란 최초에 혹은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의 동일성’ 즉 ‘내가 누구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초적인 자아’는 순수하게 경험주의적 시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원초적인 자아’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이후 교육이나 배움을 통해서 수용하여 나의 자아로 만들어 가는 ‘주체로서의 나의 자아’를 긍정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즉 원초적인 나의 자아를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자아’라는 것이 오직 외부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주입되고 만들려 진 것으로서, ‘나의 자아’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매우 탁월한 인공지능 사이의 차이는 이러한 원초적인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 근본적인 = 어떤 것이 근본적(substentiel)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의 ‘본질(ressentia)' 혹은 본성(natura)에 있어서 적합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두발로 걷거나 아닌 것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구분이다. 왜냐하면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유를 통해 행위 하지만, 동물은 본능을 통해 행위 한다”거나 혹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동물은 생존을 추구한다”는 등이 될 것이다. 예컨대, ‘보다 근본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의 본질 속성 혹은 특성에 준하여 이러한 특성에 보다 근접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직업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거나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는 다 같이 근본적으로는 인간적인 삶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기초적인 = ‘기초적(élémentaire)’이라는 말은 어떤 물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것의 총체에 있어서 가장 최초의 것 혹은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태권도를 할 때, 가장 우선되는 조건(체력, 유연성 등)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동작들(지르기 발차기 등)이 기초적인 동작들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데생을 하거나 스케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작업을 소홀이 하게 되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훌륭한 작품을 산출하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기초적인 것’이란 ‘의, 식, 주’일 것이다. 누구도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의미 있는 삶이나 행복한 삶 혹은 인간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기초적인 것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을 말한다. 이 경우 동물이나 사람이나 기초적인 것은 다 같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초적인 것이라고 하여 가장 중요하다거나 가장 우선시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초적인 것들은 보다 가치 있는 것 혹은 보다 질적으로 높은 것을 위한 도구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을 위해서 이러한 기초적인 것들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 궁극적인 = 보다 '궁극적(finale)'이라는 말은 ‘목적의 계열에서 보다 뒤에 오는 것’을 말한다. 가령 공부를 하는 목적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것이며, 좋은 대학을 가는 목적은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한 것이며, 좋은 직업을 가지는 목적은 좋은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대학을 가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며, 직업을 가지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가정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단적으로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코 돈을 많이 버는 것이거나, 훌륭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가 어떠한 ‘세계관’ 혹은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무-반성적으로 하는 말들이 왜 잘못 되었는지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가령 “게임은 일단 재미있고 봐야 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수업은 일단 재미있고 봐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수업의 원초적인 목적이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수업은 재미있기 전에 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사는 일단 돈을 많이 벌면 그게 다인 것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장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것 혹은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 말한 것이다. 의식주는 다만 ‘기초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 근본적인 것이나, 궁극적인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나 환경은 필수 이지만 예술이나 문화, 철학 등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오직 기초적인 것에서만 필수이지 보다 근본적이거나 부다 궁극적인 것에서는 다른 것이 필수가 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