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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 하늘을 사랑하던 조선 사람들은 먼 나라 페르시아에서 온 코발트(cobalt) 안료에 매료되어 하얀 백자위에 푸른 꽃과 용 문양을 그리고 왕의 그릇으로 사용되며 귀하게 여겼다.
공예이자 화화이고, 그릇이자 미술품인 청화 백자는 왕실 예기(禮器)에서 부터 근대기 양구 방산 그릇에 이르기 까지 하얀 바탕에 파란 문양을 대비하여 우리의 꿈과 시대상을 담아냈다. 조선 청화 백자는 수준 높은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왕실 미의식에 기본을 두었기에 독창적이고,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인다. 조선 청화 백자는 왕실에서 문인, 일반백성으로 사용계층이 확대되어 가는데, 이러한 흐름의 변화 속에서도 그 품격은 유지되었다.
청화백자 명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청화백자 전시회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 특별전 유물중 국보급 청화백자 200여점(보물3점 포함)을 엄선하여 선보이는 국립춘천박물관 특별 순회전은 청화 백자에 포함된 한국적 미감을 일관된 흐름 속에 느낄 수 있다는 다시없는 기회로 2014.12.9∼2015.1.25까지 청화백자의 진수 명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고 직접 전시를 담당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인 임진아 박사로부터 설명들은 내용을 토대로 적어본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은 분청사기가 사용되었으나, 깨지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경질(硬質)백자는 아름다우면서도 단단하여 왕의 그릇(御器)로 사용 되었다.
시대적으로 정리해보면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었고, 1447년 백자를 왕의 그릇으로 삼았다. 1455년 세종 조까지 어기인 백자가 세조 때 와서는 채색한 청화백자와 백자를 병행 사용하였다, 이후 1466년 왕은 백자에 대해 일반 사요을 금지하고, 백토의 산지도 관리하게 되었는데,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을 설치하였다.
1469년 청화백자에 대한 일반의 사용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1638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화백자 제작이 중지되었으며, 1752년 경기 광주 분원리에 분원을 고정하고, 1754년 용준을 제외한 청화 백자의 제작을 금지하였으며, 1805년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이 재개되었고, 1884년에는 민영화 되었다.
조선 왕실의 백자는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에서 만들었는데, 임금의 수라와 대궐 안의 음식을 담당하였던, 사옹원(司饔院)은 이곳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경질 백자 의 생산은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청화백자의 탄생을 가져왔다. 청화백자는 페르시아가 원산지인 산화코발트(cobalt blue)로 중국 원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 졌는데, 얼마가지 않아 조선도 청화 백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비싼 수입 안료인 코발트로 만든 청화 백자는 매우 귀한 것이어서 일반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또한 조선청화는 왕실 도화서 화원들이 직접 광주관요에 가서 직접 무늬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란 기획 특별전이다. 청화백자의 원류인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 조선 청화백자와 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처음 공개되는 청화백자, 관련된 고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그 발전 과정은 물론, 전통 미감이 현대에 어떻게 응용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순백자에 푸른색의 코발트 안료로 각종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는 원나라 때 처음 만들어져 명나라 때는 유럽에 수출돼 큰 유행을 불렀다.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 고부가가치 상품이던 청화백자는 18세기 유럽에서도 동양의 단단하고 가벼운 경질백자를 제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국보 제219호 ‘백자청화매화대나무무늬항아리’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 최고의 “청화백자” 다 라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에는 전시되지 않았지만 설명을 위한 교육 시 PPT를 통해 본 국보 219호와 222호인 ‘백자청화매화대나무무늬항아리’는 매화와 대나무라는 문양의 소재는 같지만 색감이나 형태, 표현 기법 등이 조금 씩 맛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잠시나마 쏠쏠했다.
앞서 설명 했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조선은 15세기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청화백자를 제작했다. 하얀 순백자 위에 파란 문양이 돋보이는 조선 청화백자는 다른 백자와 달리 왕실 전용이었고 종친이나 유력한 사대부·부유층이 제한적으로 향유한 문화란 특징을 지녔다.
페르시아~중국을 거쳐 수입에 의존한 코발트 안료가 워낙 비쌌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화백자는 왕실 전용 가마인 경기 광주의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 위에 당대 최고의 화가들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림을 그렸다. 백자가 조선을 개국한 신진사대부의 성리학적 정신세계를 투영했다면, 청화백자는 왕실의 품격과 취향을 오롯이 보여주는 최고급품인 셈이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이어서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전시는 5부로 구성되어있었다.
1부는 “조선백자 그리고 청화백자에서는 운현궁 명문(銘文)이 있는 작품을 비롯해 조선 후기 왕실행사에서 사용되었던 청화 백자들을 볼 수 있다. 조선 말기 관요체제가 흔들리고 나라가 쓰러져 갈 때도 왕실에서 사용된 청화백자는 수준과 품격을 잃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청화 백자 사용계층이 부유해진 중인과 상인과 도시민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조선왕실에서 사용된 청화 백자는 일반과는 구별되는 장식과 표현으로 품위와 격조를 더했다.
18세기 영조와 정조임금이 성리학적 절제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다면, 19세기 순조 임금 때는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화려한 청화 백자를 만들지 않았는가? 현종대 무렵부터는 한글로 그릇 바닥에 명문을 쪼아 새기거나 청화 안료로 사용처를 쓴 예들이 눈에 띄는데, 관요에서 개인적인 자기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짐으로서 왕실 공납의 백자를 별도로 표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청화 안료로 사용처를 쓴 대표 예는 운현궁에서 사용하기위해 운현(雲峴)이라는 글씨를 쓴 청화 백자이다.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1820 ∼1898)의 사저로 1863년12월 그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운현(雲峴)이라는 글씨가 있는 그릇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2부에서는 ”청화백자, 왕실의 예(禮)와 권위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현존 하는 조선 최고의 청화백자인 ”백자청화흥령대부인 묘지(1456년. 보물1768호)가 전시되어있어 눈을 호강시킨다.
이어서 매화와 새가 그려진 것, 왕실 행사 때 사용된 용이 그려진 큰 항아리 등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푸른빛의 화려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줬다.
3부는 문인이 사랑한 청화백자 코너로 청화백자에 그려진 그림과 시를 볼 수 있다. 조선 청화 백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고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여조와 정조 임금 때 전성기를 맞아 문인들이 즐겨 그리고 감상했던 사군자와 산수, 풀, 꽃, 인물, 동물들의 그림과 시가 청화 백자에 장식 되었다. 이 처럼 문인이 사랑한 청화백자는 사대부의 고결하고 담백한 정신과 풍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겼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 문인 사대부와 중인들 사이에 서책과 골동품, 분재와 수석 등을 수집하고 감상, 평가하는 문화가 유행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청화백자 문방구가 만들어지고, 문인들이 애호했던 각종화초와 기물들이 청화백자에 장식되어 세려되고 아름ㅈ다운 멋을 드러냈다.
4부는 “청화백자 , 만민(萬民)의 그릇이 되다” 는 조선 전기 왕실의 전유물 이었던 청화백자의 향유 층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대폭 확대되어 그릇의 형태도 둥근 원형에서 사각, 팔각, 다면체의 형식으로 바뀌었고, 생산량도 대폭 늘어났음을 감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왕실과 사대부, 문인 ,지식 층 외에 부유한 일반 백성들 까지도 청화 백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국 연경의 시장으로부터 값싼 청화안료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청화백자를 생산하였고, 그릇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특히 민화 풍의 그림이 청화백자의 무늬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십장생, 용, 봉황, 호랑이와 박쥐 ,잉어, 복숭아, 연꽃등 장수와 복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소재들이다. 이 처럼 만민의 간절한 기원이 청화백자의 무늬에 가득 담겨 나타났는데, 이 시기 청화백자의 무늬는 궁중 도화서의 화원들이 아닌 분원에 소속된 화청장(화청장)이 그린 것으로 과감한 발상과 자유로운 구상을 보인다.
마지막 5부에서는 “강원인의 청화 백자 전시”다. 강원도 내 청화백자의 중심은 양구가 있다, 양구군 방산면 일대는 양질의 백토가 다량으로 매장되어있고, 요업에 적합한 자연적 조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불순물이 적고 그 품질이 뛰어나 고려 말부터 양구백자가 생산되었다.
분원이 성립된 이후에는 13세기에 경기분원이 설립된 후에도 양구 백토는 조선왕실 백자 제작을 위해 많은 양의 백토가 제공되었다. 근대시기 양구 방산일대의 가마터에서는 분원 전통을 잇는 청화백자가 생활용기로 만들어져 그 맥이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립춘천박물관은 2008년 11월∼ 12월, 2009년3월∼ 7월까지 양구군과 함께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88번지, 90-4번지 일대를 발굴 조사하였다.
19세기부터20세기 초까지 지방 백자 가마의 양상을 띠고 있는 칠전리 가마터에서는 양구백토로 제작된 백자들이 출토되었다. 양구백자가 다소 무른 것은 소성온도가 일반백자보다 낮기 때문이다. 청화색은 물빛 같은 하늘색부터 쪽빛의 푸른 청화, 진회색의 어두운 청화까지 다양한데 이어 제작 기술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쪽빛의 푸른빛 청화백자가 적정한 온도에서 잘 소성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19세기 후반 지규식이 저술한 “하재일기”에서 양구백자가 궁궐에 진상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듯이, 1884년 조선 관요의 민영화 이후에도 양구 칠전리 가마에서는 관요 타입의 질 좋은 백자가 생산된 것으로 발굴을 통해 화인되었다. 양구 방산 칠전리 가마터에서 발굴한 청화 백자들을 감상 할 수 있다. 양구 백자 명품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하고 격조 높은 맛을 뽐내고 있다.
이처럼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조선청화백자는 중·일과 달리 공간구성에서 여백을 강조하고 서정적·시적인 분위기이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갖는 게 특징이다. 또 우윳빛인 유백색, 새하얀 눈 같은 설백색 등 바탕색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데다 문양에 사용된 푸른색도 맑고 청량하거나 묵직하고 사색적인 분위기 등 각각 다른 멋을 드러낸다.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이 오늘 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음은 ‘청화백자 청렴결백의 그릇’이 아닌가! 오늘도 전시장을 다시 찾아 조선청화백자 “푸른빛 속으로”라 외쳐본다.
수필가 연제철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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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장문의 설명에서 청화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네요..
행간을 조금만 넓혀주고 띄어주었더라면 읽기가 편하였겠다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행과 열을 띄어도 여기에 복사해서 올리면 붙는 성격이 있네요. 읽기에 부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늘 그러려니 하다가도 연선생님처럼 계기가 제대로 마련되면 그 멋과 맛에 제대로 꽂히게 되지요!
지금은 방산에 백자박물관도 있지만, 국립춘천박물관 개관 처음부터 이성계 발원구가 방산백토로 만든 보물이라고 전시가 되었었지요! 그 뒤론 중박에서 다시 가져갔고요! 다산의 기행문에도 보면 19세기 전반에 광주로 배에 실어 나르던 백토 때문에 춘천부 아전들이 골치를 썩인다는 대목이 나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