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구약성경 인용)
마태복음 7장 16-20절『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좋은 나무는 생명나무이고, 못된 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나무는 부활생명의 열매를 맺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율법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부활생명이 아름다운 열매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열매는 죄를 깨닫게 해 주지만, 영생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그들의 열매는 부활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가, 또는 부활을 믿지만, 율법도 지키려고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부활생명을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신도들은 현재 부활생명이 없는 자들이다. 장차 부활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므로 육체에 매달리는 자들이고, 영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율법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영적 간음에 해당되므로, 이들도 부활생명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부활생명과 율법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이고,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다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악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자를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표현한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가 스스로 의를 이루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율법을 반드시 지켜서 의를 이루어 보겠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그 대표적인 자들이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못된 나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나무이시다. 그래서 자신에게 와서 부활생명을 먹으라고 하신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다. 비록 육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지만, 영의 몸으로 살 것이라고 하며, 그 사는 몸은 영생의 몸이라는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열매는 같은 나무에서 나온다.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나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4-8절『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부활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성도가 복음을 깨닫고 부활생명을 얻으면, 다시 다른 신도들에게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 신도는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는 부활생명을 가지는 자이고, 그 부활생명을 전해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부활은 영생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영생으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지만, 결코 부활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이 의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죄인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의인은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부활생명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죄를 대속하는 의미가 있지만, 구원의 목표가 아니라, 구원의 여정 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마지막 여정은 부활생명을 얻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살아있을 때 얻지 못하면 영생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신도들의 대부분 모습은 부활생명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부활생명을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육체가 살아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 있던 육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몸으로 전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몸은 반드시 죽고 사라져야 하고, 하늘로부터 다시 영생의 몸이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되지만, 헬라어 성경은 하늘로 부터 난다고 되어 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겐네데)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겐네데는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다.
물은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잘 설명된다.『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그래서 세례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세례의식은 물에서 육적인 것이 죽고,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위에서 태어난 자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불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으면, 불심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상태인 부활생명으로 나가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