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과 예언
방언과 예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고린도교회는 이단들로 인해서 시끄러운 교회였다. 당시에 영지주의라는 것이 있었는데, 육체는 악하지만 영은 깨끗하다는 것에 그들이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온 영자주의자들은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게 오늘날 “라라라” 하고 방언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다.
교회사람들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히브리어 외에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가바도기아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서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을 말할 때, 반응이 두가지인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의 출신들인데, 어떻게 이런 외국의 말들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디아스포라 지역의 여러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신기한 마음으로 들어보니 믿음이 오는 것이다. 수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방언을 매개체로 하나님 나라를 그들에게 전해서 믿게 한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이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3절『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방언기도를 하면, 통역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이다. 바울은 방언 기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바울은 미리 14장 11-12절에서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듣는 자가 방언하는 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서로 외국인처럼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νοῦς)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ἐὰν [γὰρ] προσεύχωμαι γλώσσῃ, τὸ πνεῦμά μου προσεύχεται, ὁ δὲ νοῦς μου ἄκαρπός ἐστιν.』사도바울은 방언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내가 만일 방언 기도한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말을 한다. [γὰρ]이 가르라는 단어는 접속사(~때문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한글 개역개정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 접속사 ~때문이라는 말은 앞의 문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14장 13절에서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왜냐하면, 14장 14절의 말씀처럼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지만,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기도한다고 하는데, 마음은 따로 기도하는가? 라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영과 마음을 따로 생각하는데, 영과 마음은 하나이다. 그래서 영의 마음이라고 한다. “당신들이 마음을 영과 분리하여 생각하는데, 마음은 열매맺지 못하겠군” 이라는 바울의 비난적인 표현이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영이 죽어있으므로, 당연히 영과 마음이 따로 작동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이 살아 움직이며, 영에서 마음이 나타난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이때 마음은 영의 마음이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하나님이 영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의 마음이 믿는 것이다.
당시 방언기도는 영지주의인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라는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영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한다는 것으로 고린도교회 일부 신도들이 생각했다. 『마음은 기도하는 자의 의도를 모르지만, 알 수 없는 말로 영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도 안되는 것을 신도들이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각한 것이다.
14장 15절에서『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δὲ)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τί οὖν ἐστιν; προσεύξομαι τῷ πνεύματι, προσεύξομαι δὲ καὶ τῷ νοΐ· ψαλῶ τῷ πνεύματι, ψαλῶ δὲ καὶ τῷ νοΐ.
이 말을 다시 번역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내가 기도한다면,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할 것이고, 영으로 찬송하고, 마음으로 찬송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바울은 영과 마음이 따로 기도하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 또(데 δὲ)라고 했는데, 이는 마음으로도 기도하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영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라, 영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다 알고 있는 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4장 26-28절『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린도교회에 가짜 방언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통역하라는 것이다. 제대로 통역하지 못하면, 가짜이므로 잠잠하라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방언하는 자들이 있어서, 통역하는 자들로 세우고, 차례로 말을 해보는데, 서로 다르게 나오면 모두 가짜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가짜 방언 때문에 통역까지 세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통역은 사실상 필요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방언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고린도 지역은 많은 이방인들이 교역을 위해 왕래가 많았으며, 교회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설교를 통역하는 자들도 있었다. 외국인이 듣기에 설교는 방언이 되므로 통역이 필요한 것이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통역은 큰 은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동시에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통역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 듣기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통역자를 이상한 방언 하는데, 동원되어야 하겠느냐 라는 것이다. 바울은 말이 안되는 짓이라고 꾸짖는다.
그런데, 하나님께 하는 기도를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통역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방언 기도하는 자의 의도”를 통역까지 하면서 들어야 하는가?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하나님께 하는 방언 기도는 가짜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신비스럽게 방언기도를 해야 알아듣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14장 2절에서『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ὁ γὰρ λαλῶν γλώσσῃ οὐκ ἀνθρώποις λαλεῖ ἀλλὰ θεῷ· οὐδεὶς γὰρ ἀκούει, πνεύματι δὲ λαλεῖ μυστήρια·』
이 말은 14장 1절을 위한 설명의 말이다. 14장 1절은『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예언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언으로 혼란을 부추기므로, 그들이 하는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므로, 교회가 무슨 덕이 있는가 라고 바울이 지적하는 내용이다. 기도할 때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고, 복음에 대해서 서로 말하라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가르(γὰρ)가 있는데,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다.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개정은 번역에서 빠졌으므로 의미의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θεῷ·)께 하나니.』에서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호 데오스”이다. 관사가 없는 데오스는 그냥 신이다. 기독교인 아니더라도 자기들이 믿는 신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방언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신에게 하는 것이다.
14장 4절에서『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ὁ λαλῶν γλώσσῃ 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 ὁ δὲ προφητεύων ἐκκλησίαν οἰκοδομεῖ.』 덕이라고 번역된 오이코도메이는 교화되다, 세우다 라는 의미다. 그래서 교회의 덕에서 덕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 덕(ἑαυτὸν οἰκοδομεῖ)이라고 번역된 것은『자기를 세운다』는 것이다. 자기를 세우는 자(거짓 방언하는 자)는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다.
둘째,하나님이 오순절에 제자들로 하여금 방언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했는데, 이때 방언은 방언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에 초점이 들어있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심이 되지 못하면, 모두가 가짜 방언이고, 가짜 예언을 하는 것이다.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알아들을 수 없어서 이 사람들이 술취했는가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당시에는 다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복음이 되었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술취한 자로 취급받은 것이다.
제자들이 말한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 이며,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외국어로 들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늘날 영적으로 눈과 귀가 닫힌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들의 언어로 들어도 성경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해서 나타내게 한다. 그런데, 예언에 있어서, 예수님은 말씀을 비유적으로 하신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복음의 의미가 단순히 예수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자들은 자기들 생각대로 해석하고, 믿는다.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 왜곡되는 것이다.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전하는 자들은 신실한 자들이 보기에 외국인처럼, 방언처럼 여겨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