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장 17-21절)『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장 17절『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율법주의자들은『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것은 결국 죄만 드러나는거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은『그러면,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만드는 자냐』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어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2장 18절『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에게 『네가 하는 것은 조상들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에 불과한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율법을 헐어서 다른 무엇인가를 만드는 모양인데, 결국 율법을 세우는 것이야 라는 것이다. 이 말에 사도바울은 만일 다른 율법을 세우면 자기는 그 다른 율법에 따라서 범죄인이 된다고 말한다. 즉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복음을 다른 율법 정도로 이해한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율법의 그물에서 묶여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묶여버리는 것이므로, 같은 개념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스도도 성도의 심령 안에서 호 로고스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신도 안에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고 불러도 예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2장 19절『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말미암아로 번역된 원어의 디아는 ~를 통하여 라는 의미다. 바울은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은 율법 뿐이라고 배웠으며,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율법을 통과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서 죽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길인 것이다. 사도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은 예수를 만난 그 시점이 아니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눈이 뜨여지고, 세례를 받은 그 시점이 되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법이 더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성령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으므로, 성령의 법이 적용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쉬메스타우로마어:현재완료 수동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엔 사르키)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쉬메스타우로마어는 바울이 과거 어느 시점에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계속 진행되어 이어져 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 시점에 대해서 예수님이 2000여년 전에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못박혔으며, 그것을 믿는 자는 그 믿는 자도 십자가에서 2000여년 전에 예수와 함께 못박혔다 라고 말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못을 박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힌 그 순간은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는 그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다.
세례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믿지 않고, 형식적인 행위로 여긴다면 성령으로 거듭남도 없으며, 성령세례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못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못박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죄악으로 인해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으로 들어와 연합되는 믿음을 가져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우리가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리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부활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면, 과거에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그 상황이 죽을 때까지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죄의 그물(율법)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된다. 가끔 가짜 교역자가 신도들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속에 예수님이 있으므로, 자기가 하는 행동이 예수님이 하는 행동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라는 이상한 자들이 있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하다.
『내가 육체 가운데(엔 사르키) 사는 것』에서 엔 사르키는 육체가 아니라, 육신의 종교심을 의미한다. 바울은 육신 안에서 율법을 따르는 종교심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엔 피스테이 조 테 투 휘우) 사는 것이라』여기도 『하나님 아들의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믿음이다.
종교의 핵심 쟁점은 율법 안에서 사는 것(자기가 믿는 믿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당연히 기독교는 후자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십자가에서 함께 부활하는 믿음이며, 그렇게 되면 호 로고스가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휘포모네) 이것이 구원의 길인 것이다.
2장 21절『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성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부터 휘포모네(보좌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까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