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 (草衣禪師 1786-1866)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부친 장주팔과 모친 무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그를 잉태해 낳았다고 한다. 어릴 적 아명은 우순(宇侚), 자가 의순(意侚)이고, 성은 장씨이고 본관은 홍성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인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하신 분이다. 그래서 스님을 다성이라 부른다. 헌종으로 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1786년(정조10)에 태어난 스님은 5세 때에 영산강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문흥사에서 벽봉 민성스님을 은사로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초의는 19세에 남평에서 행자생활을 하다 절을 나와 해남 대흥사로 가던 도중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대흥사에서 완호대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당호를 얻는다. 여기서 불교의 삼장을 수학하고 대교과정을 마치게 된다. 이후 운수행각으로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정진해 경(經)∙율(律)∙론(論) 모두 다 통달하였다.
22세가 되자 잠시 화순 쌍봉사로 옮겨 금담선사로부터 선을 배우며 토굴에서 정진 수행하다가 다시 대흥사로 돌아와 연담선사께 나아간다. 이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초의는 자신보다 25세 연상인 다산에게서 유학과 시문을 배우면서 함께 월출산 백운동에 들어가 월출산의 비경을 화폭에 담아 '백운도'라고 명명하기고 했다.
30세 되던 해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와 완당 김정희를 만난다. 상경해 성밖 청량사에 머물자 장안의 명사들이 몰려들어 시회(詩會)와 다회(茶會)가 성황를 이루었다. 당시 초의가 교유한 인사들은 당대의 지식인에 속하는 정약용과 자제들, 추사 김정희와 그 형제들, 연천 홍석주의 형제, 신관호 권돈인 등과 교류하여 정신세계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특히 화가로서 초의는 한국 회화사에서 큰일을 한다. 초의는 낭암스님으로부터 탱화라고 불리는 불화를 전수 받으면서부터 그림을 시작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갔다. 현재 대흥사에 있는 탱화와 전국 곳곳에 있는 사찰의 많은 불화가 초의의 작품이거나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수준을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다.
50세가 된 초의가 일지암에 있을 때 진도에 살고 있는 소치 허유가 선사를 찾아와 그림을 배우니 초의는 몸소 가르치면서 추사에게 보내 사사케하고 당시 많은 서화 묵객들과 교유시켜 화가로서 대성을 하게 한다. 마침내 소치(小痴)는 헌종 임금께 나아가 그림을 그려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 남종화의 종주 소치는 이후 직계 자손인 미산∙남농∙임전 등으로 남종화를 뿌리내리니 초의는 실질적인 남종화의 시원인 셈이다.
선사는 언제나 제법(諸法)불이(不二)를 강조하여
그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특히 다선(茶禪)일미(一味)사상에 심취하여 차를 통해 법희선열식의 다선(茶禪)삼매(三昧) 에 들곤 하였다. 또한 스님은 범패와 원예,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향 등에까지 능하였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과 실사구시를 주창한 김정희와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은 바 있어 다방면에 능통하였던 것이다.
다성(茶聖) 초의와 서성(書聖) 추사와의 교유는 각별하여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는데 두 사람은 동갑나기로서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주는 남다른 사이였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는 대정까지 찾아가 반년동안을 함께 유배지에서 살면서 위로하였고, 한양에 있을 적에는 같이 두해를 지냈다. 이들은 항상 외롭고 한적한 곳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누었다. 당시 험난한 뱃길을 건너 세 차례나 제자 소치(小痴) 허유(許維)를 통해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글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
71세 되던 해(1856년) 추사가 홀연히 먼저 떠나니, 스님은 그의 영전에 제문 완당김공제문(玩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산사 일지암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지냈다.
그토록 좋아하던 시도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오직 깊은 선정에 들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스님의 풍채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뛰어나서 옛날 존자(尊者)의 모습과 같아 여든이 넘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봉은사에서 대교(大敎)를 간포(刊布)하는 일이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셨으나 곧 바로 암자로 돌아오셨고, 달마산 미황사에서 무량전(無量殿)을 짓는 모임에도 주선의 자리에 모셨지만, 어디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 후론 줄곧 일지암에 주석하셨는데,
하룻밤에는 몸져누우셨다가 시자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를 하시고 앉아 홀연히 입적(入寂)하시니,
세수는 81세요 법랍(法臘)은 65세로서 조선 고종 3년 8월 2일이었다.
스님이 입적하신지 오랫동안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다비를 마친 뒤에 제자 선기∙법인 등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대흥사 비전에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때가 고종 8년 신미년 4월로 입적하신지 5년째 되는 해 봄이다.
스님께서 남기신 저서로는
일생 동안 참선하는 여가에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지은 시를 모은 《일지암시고》, 일생동안 지은 소(疎) 기(記) 서(序) 발(跋) 제문(祭文) 영찬(影讚)등을 실은 《일지암문집》, 선의 요지를 밝힌 《선문염송》중에서 골자만을 가려 주석을 달아 놓은 《초의선과》, 조선후기 선 논쟁으로 백파긍선의 선론에 반대의 입장을 밝힌 《선문사변만어》, 한국의 다경(茶經)으로 불리는 《동다송(東茶頌)》, 차의 지침서인 《다신전(茶神傳)》, <이선래의(二禪來儀)> 1권, <초의시고(草衣詩藁)> 2권,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 1권, <동다송> 1권, <다신전(茶神傳)> 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