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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集政法集第十七卷○牧民心書 卷二 / 律己六條 第二 ○淸心 律己第二條
故自古以來。凡智深之士。無不以廉爲訓。以貪爲戒。
裵俠曰。淸者。莅官之本。儉者。持身之基。
律己箴曰。
惟士之廉。猶女之潔。苟一毫之點汚。爲終身之玷缺。
毋謂黯室。昭昭四知。汝不自愛。心之神明其可欺。黃金五六駄。胡椒八百斛。生不足以爲榮。千載之後有餘戮。彼美君子。一鶴一琴。望之凜然。淸風古今。
包孝肅公家訓云。後世子孫。仕宦有犯贓濫者。不得放歸本家。亡沒之後。不得葬於大塋之中。不從吾志。非吾子孫。其下押字。仰珙刻石於堂屋東壁。以詔後世。
羅景倫曰。士大夫若愛一文。不値一文。〇陳簡齋詩云。從來有名士。不用無名錢。〇楊伯子曰。士大夫淸廉。便是七分人了。
馮猶龍曰。天下無窮不肖事。皆從捨不得錢而起。天下無窮好事。皆從捨得錢而做。
鄭瑄曰。貪得者無厭。總是一念好奢所致。若是恬淡知足。要世間財利何用。淸風明月不用錢。竹籬茅舍不費錢。讀書談道不求錢。潔己愛民不要錢。濟人利物不餘錢。如是存省。則世味脫然。貪心又何自而生乎。鄭瑄曰。侈輦載於鄕閭。盛誇稽古之力。詢地產於海曲。冀克宦橐之資。間有飮泉不貪。敝車羸馬者。則嗤之曰惡用是拙官爲哉。好官不過多得錢爾。噫。吾亦見多得錢者矣。沒不數年。而子孫以爭奪敗。又不再世。子孫以淫蕩廢。其尤惑者。志在溫飽。術工攘剝。聞人稱其有十乘之富。則艴然怒。聞人譽其無甔石之儲。則欣然喜。其子孫求人狀其祖父之行也。詆之以委孫,陶朱之儔。亦艴然怒。等之於公儀,伯起之列。亦欣然喜。是明知多錢之可醜。而拙淸之足貴也。乃所志非所貴。所貴多所醜。獨何哉。
鄭瑄曰。近世士大夫有外釣功名。內營產業。廣厦千間。膏田萬頃。僮僕如螘。婢妾如雲。而開口高談性命。自負淸虛。雖復舌吐五色寶蓮。吾不信也。〇又曰。搢紳一登仕籍。轉眄富盛。利厚官高。則是能品。寒儉有官。猶免姍笑。公廉骯髒。官與利兩喪。則稱大拙。妻孥尤之。親朋笑之。殆無以自託於鄕里。自非天挺高標。鮮不從風而靡矣。
宋蓋巨源爲縣令。因買羅於公廳上。手自拓量。其侍婢。從屛間見之。惡曰。不意今日却事一羅絹牙郞。因求去。不可留。〇近一縣令於政堂中。手自尺布。何代無賢。
石璞歷官四十餘年。淸介如一日。鄕人有爲典史歸者。璞往省之。几上陳銀器列金杯十餘。璞問曰。汝宦幾年。曰。未滿考。曰。胡歸乎。曰。刁民訟吾貪奪職。璞曰。嗟夫。使我治汝。汝安得歸哉。拂衣去。
福建廉使陶垕仲。劾方伯薛大方貪暴。大方誣訐。垕仲至京事白。大方得罪。詔垕仲還官。閩人迎拜語曰。陶使再來天有眼。薛公不去地無皮。宋節度使米信。儉嗇聚斂。積聚百萬緡。其子豪侈浪蕩。以信故不敢自專。但於富室。厚利貸錢自用。謂之老倒還。其詞以爲若父死。鍾聲纔絶。本利齊還也。於是私募僕夫。飾鞍服。置於宅門。左右俟出門。卽擁掖去。其黨則京師搖脣舌獵炮炙之徒也。信甫卒。縱蕩殆盡。至假獄卒搖鈴子夜軍之力以糊口。
목민심서 율기(律己) 6조 / 제2조 청심(淸心)
그러므로 예로부터 무릇 지혜가 깊은 선비는 청렴을 교훈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배협(裵俠)이 이렇게 말하였다.
“청렴은 벼슬살이하는 근본이요, 검약은 몸가짐의 바탕이다.”
율기잠(律己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선비의 청렴은 여자의 순결과도 같아서 진실로 털끝만한 더러운 점도 평생의 흠이 되는 것이다.
어두운 방이라 말하지 말라. 환하게 넷이 알고 있다〔四知〕 네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의 신명(神明)을 속일수 있으랴. 황금 5~6 바리와 호초(胡椒) 8백 곡(斛)이 살아서는 영화(榮華)가 되지 못할 것이요, 천 년 후에도 남은 죄가 있다. 저 아름다운 군자여! 학(鶴) 한 마리 거문고 하나, 바라보매 늠연(凜然)하여 만고(萬古)의 청풍(淸風)이다.”
포 효숙공(包孝肅公)의 가훈(家訓)에,
“후세 자손에 벼슬살다가 장람(贓濫)한 죄를 범한 자는 본가로 돌아올 수도 없거니와, 그가 죽은 후에도 선영(先塋)에 장사할 수 없다. 내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
하고, 그 밑에 화압(花押) - 서명(署名) - 하고 이것을 집의 동쪽 벽돌에 새겨 후세에 교훈하였다.
나경륜(羅景綸)이 이렇게 말하였다.
“사대부가 만약 돈 한 푼을 좋아하면 그 인품은 한 푼 값어치도 못 된다.”
진간재(陳簡齋)의 시에,
종래 이름있는 선비는 / 從來有名士
이름없는 돈은 안 쓰누나 / 不用無名錢
하였다.
양백자(楊伯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대부(士大夫)가 청렴하면 7분 정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풍유룡(馮猶龍)은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한없이 좋지 못한 일은 모두 돈을 버리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고, 천하의 끝없이 좋은 일은 모두 돈을 버리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얻기를 탐내는 자는 만족함이 없으니, 모두가 사치를 좋아하는 일념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담담하여 만족할 줄 알면 세상 재물을 구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청풍명월(淸風明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대울타리 띳집도 돈 쓸 일이 없고, 책을 읽고 도(道)를 이야기하는 데 돈이 요구되지 않으며, 자신을 깨끗이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돈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성찰(省察)하면 세상 맛에서 초탈(超脫)하게 될 것이니 탐심이 또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시골에 사치스러운 수레를 몰고 가서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성대히 과시하고, 해변에 무슨 토산물이 나는가를 물어서 벼슬 살 동안 자기 주머니에 채우려고 재물을 바라는 자는, 간혹 샘물을 마시고도 탐내지 않고, 헌 수레와 여윈 말을 타는 벼슬아치가 있으면 비웃기를 ‘어찌 이런 못난 벼슬아치가 되겠는가. 좋은 벼슬이란 많은 돈이 생기는 데 불과하다.’ 하니, 슬프다. 나도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보았지만 죽은 지 몇 년도 못 가서 자손들이 재산 싸움을 하다가 집안이 망하기도 하고, 또 2대(代)도 못 가서 자손들이 음탕해서 패가(敗家)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더욱 미혹된 자는 등 따뜻하고 배부른 데 뜻을 두고, 빼앗고 긁어먹는 데 교묘한 재주가 있으면서도 남들이 그를 십승(十乘)의 부(富)가 있다고 일컫는 말을 들으면 성을 발끈 내고, 항아리나 섬에 차는 저축도 없다고 추켜 주는 말을 들으면 흔연히 좋아한다. 그 자손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는 글을 남에게 청하여 받을 적에 계손(季孫)이나 도주(陶朱)와 같은 사람이라고 헐뜯으면 또한 성을 발끈 내고, 공의휴(公儀休)나 백기(伯起)와 같은 반열에 넣어 주면 또한 흔연히 기뻐한다. 이는 돈이 많은 것은 추한 것이요, 질박과 청렴이 귀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뜻하는 바는 귀한 것이 아니요, 귀하게 여기는 바는 추하게 여기는 것이 많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근세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밖으로는 공명(功名)을 낚고 안으로는 가산(家產)을 경영하여, 천 간(間)이나 되는 큰 집채에 기름진 토지가 만 경(頃)이나 되고, 동복(僮僕)은 개미떼 같고 비첩(婢妾)은 구름 같으면서도 입으로는 성명(性命)을 고상하게 담론하고 청허(淸虛)함을 자부하니, 비록 혀로 오색보련(五色寶蓮)을 토한다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정선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진신(搢紳)이 한번 사적(仕籍)에 오르면 잠깐 사이에 부귀해져서 이익이 후해지고 벼슬이 높아지면 이는 유능한 사람이다 하고, 청빈하고 검소하면서도 벼슬이나 있으면 그래도 남의 비웃음을 면한다. 공평하고 청렴하며 곧게 처신하다가 벼슬과 이득을 다 잃으면 크게 졸렬하다는 말을 듣게 되어, 처자들도 허물하고 친구들도 비웃으니 향리에 몸을 의탁할 수도 없다. 스스로 하늘이 낸 높은 인품이 아니면 세태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송(宋)나라 갑거원(蓋巨源)이 현령(縣令)이 되어 공청(公廳)에서 비단을 사는데, 손수 자로 재니 시비(侍婢)가 병풍 사이로 엿보고 미워하여,
“뜻하지 않게도 오늘날 비단 흥정하는 상전을 섬기게 되었구나.”
하고는, 떠나가기를 청하였는데, 만류해도 듣지 많았다.
요즈음 한 현령이 정당(政堂)에서 손수 베를 자로 재었다 하니, 어느 시대인들 갑거원 같은 자가 없겠는가.
석박(石璞)이 관직을 역임한 지 40여 년이나 되었지만 청렴하고 개결(介潔)함이 한결같았다. 하루는 고향 사람 중에 전사(典史)로 있다가 돌아온 자가 있어서 석박이 인사를 갔더니, 그 집 책상 위에 은그릇과 10여 개의 금술잔이 진열되어 있었다. 석박이,
“네가 벼슬한 지 몇 년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고적(考績)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돌아왔는가?”
하니,
“고약한 백성이 나의 탐욕을 고발하여 직책을 빼앗겼습니다.”
하므로 석박이,
“슬프다. 내가 네 죄를 다스렸다면 네 어찌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하면서 옷자락을 떨치고 나와 버렸다.
복건염사(福建廉使) 도후중(陶垕仲)이 방백(方伯) 설대방(薛大方)의 탐포(貪暴)를 탄핵하였더니, 설대방이 도후중을 무고(誣告)하였다. 도후중이 경사(京師)에 이르러 일이 밝혀져서, 설대방은 죄를 얻고 도후중은 조칙(詔勅)으로 복관(復官)시켰다. 민(閩) 땅 사람들이 환영하기를,
“도사(陶使)가 다시 오니 하늘에도 눈이 있구나. 설공(薛公)이 떠나가지 않았더라면 땅에는 껍데기도 안 남았으리라.”
하였다.
송나라 절도사(節度使) 미신(米信)이 인색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아 백만 꾸러미나 되는 돈을 쌓았다. 그의 아들은 호사하고 방탕하였는데, 아버지 때문에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고 다만 부자들에게 비싼 이자돈을 빌어쓰면서 ‘노도환(老倒還)’이라 하였다. 그 말은 ‘아버지가 죽어서 상여(喪輿) 소리가 끝나자마자 본전과 이자를 몽땅 갚아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사사로이 하인들을 모집하여 말안장과 복장을 호사스럽게 꾸며서 집 문 좌우에 세워 두고 그가 문 안에서 나오는 즉시 옹위하여 부축하게 하였으니, 그 도당들은 서울에서 입술과 혀를 놀려 먹을 것을 낚는 무리들이었다. 미신이 죽자마자 그는 방탕으로 가산을 거의 없애고 옥졸과 요령 흔드는 야경꾼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다.
[주-C001] 청심(淸心) : 맑은 마음가짐. 여기서는 수령이 청렴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주-D001] 배협(裵俠) : 북조(北朝) 북주(北周) 사람으로 자는 숭화(嵩和), 시호는 정(貞)이다. 처음 북위 효무제(北魏孝武帝) 때 청하현백(淸河縣伯)을, 서위(西魏) 문제(文帝) 때 하북 군수(河北郡守)ㆍ영주 자사(郢州刺史)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천하에 제일이었다. 북주(北周) 효민제(孝閔帝) 때 공(公)에 오르고 공부중대부(工部中大夫)에 이르렀다. 《周書 卷35 裵俠列傳》 《北史 卷38 裵俠列傳》[주-D002] 율기잠(律己箴) : 몸을 단속하기 위한 경계잠(警戒箴)이다.[주-D003] 넷이 알고 있다〔四知〕 : 후한(後漢)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옮겨 갈 적에 창읍령(昌邑令) 왕밀(王密)이 금 10근(斤)을 주면서 “어두운 밤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 하므로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귀신이 알고〔神知〕 내가 알고〔我知〕 그대가 안다.〔子知〕 어찌 앎이 없다고 하는가?” 하고 받지 않았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왕밀은 양진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적에 천거한 사람이다.[주-D004] 황금 …… 곡(斛) : 당(唐)나라 대종(代宗) 때의 간신(姦臣) 원재(元載)의 고사. 원재가 죽은 뒤에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니, 종유(鍾乳) 5백 냥(兩)과 호초(胡椒) 8백 석이 나왔고 다른 보물도 그와 맞먹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한다. 《唐書 卷145 元載列傳》[주-D005] 학(鶴) …… 하나 :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의 재상 조변(趙抃)이 성도지부(成都知府)가 되어 촉(蜀) 지방으로 부임할 때에 필마(匹馬)로 거문고 하나, 학 한 마리만 대동하고 갔다. 조변은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주-D006] 포 효숙공(包孝肅公)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이름은 증(拯), 자는 희인(希仁), 시호가 효숙(孝肅)이다. 벼슬은 개봉지부(開封知府) 등을 거쳐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다. 청렴강직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염라포로(閻羅包老)라는 별칭이 있었다. 《宋史 卷316 包拯列傳》[주-D007] 나경륜(羅景綸) : 송(宋)나라 여릉(廬陵) 사람으로 이름은 대경(大經), 경륜(景綸)은 그의 자(字)이다. 벼슬은 용주법조연(容州法曹掾)을 지냈다. 저서에는 《학림옥로(鶴林玉露)》가 있다. 원문의 ‘景倫’에서 ‘倫’은 ‘綸’의 잘못이므로 고쳤다.[주-D008] 진간재(陳簡齋) :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 문신(文臣) 진여의(陳與義)를 말한다. 자는 거비(去非), 호는 간재(簡齋)ㆍ주주(主住)이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시에 능하여 진간재체(陳簡齋體)가 있다. 저서에는 《간재집(簡齋集)》ㆍ《무주사(無住詞)》가 있다. 《宋史 卷445 文苑列傳 陳與義》[주-D009] 양백자(楊伯子) : 송(宋)나라 영종(寧宗)ㆍ이종(理宗) 때의 문신 양장유(楊長孺)를 말한다. 양만리(楊萬里)의 장자(長子)로 자는 백대(伯大), 호는 동산(東山),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벼슬은 광동경략(廣東經略)ㆍ복건안무사(福建按撫使)를 지냈다. 《宋元學案 卷44》[주-D010] 풍유룡(馮猶龍) : 명(明)나라 의종(毅宗) 때 사람 풍몽룡(馮夢龍)이다. 자가 유룡(猶龍), 호는 고소사노(姑蘇詞奴)ㆍ묵감재(墨憨齋)ㆍ용자유(龍子猶), 시호는 장무(壯武)이다. 벼슬은 수령지현(壽寧知縣)을 지냈다. 시문(詩文)을 잘하고 경학(經學)에 특히 깊었다. 저서에는 《춘추형고(春秋衡庫)》ㆍ《별본춘추대전(別本春秋大全)》ㆍ《지낭(知囊)》 등이 있다.[주-D011] 정선(鄭瑄) : 명(明)나라 의종(毅宗) 때 민현(閩縣) 사람으로 자는 한봉(漢奉), 호는 작비거사(昨非居士)이다. 숭정(崇禎) 신미년(1631)에 진사(進士)를 하여 벼슬이 응천순무(應天巡撫)에 이르렀다. 편서(編書)에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이 있다. 《작비암일찬》은 20류(類)로 나뉘었고, 옛사람의 격언(格言)과 의행(懿行)을 기록하고 있다. 《四庫全書 總目提要 卷132 子部 42 雜家類存目 9 昨非菴日纂》 이 《작비암일찬》을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에서, ‘鄭瑄曰’ 또는 ‘鄭漢奉曰’ 등 그의 이름이나 자를 밝혀서 인용하기도 하고, 또는 《작비암일찬》에서 인용한 사람의 고사를 그대로 혹은 중략(中略) 또는 하략(下略)하여 인용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주-D012] 샘물을 …… 않고 : 고사의 주인공은 오은지(吳隱之)이다. 오은지는 진(晉)나라 효무제(孝武帝)ㆍ안제(安帝) 때 사람으로 자는 처묵(處默)이다. 벼슬은 광주 자사(廣州刺史)ㆍ탁지상서(度支尙書)ㆍ태상(太常)을 지냈다.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진 효무제(晉孝武帝) 때 오은지(吳隱之)가 광주 자사(廣州刺史)가 되었을 때 탐천(貪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는데, 그 샘물을 마시는 자는 한없는 욕심을 품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바로 가서 떠 마셨다. 그러고는 맑은 절조를 더욱 힘써 갈려 돌아올 때에 가진 재물이 전혀 없었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吳隱之》[주-D013] 계손(季孫)이나 도주(陶朱) : 계손(季孫)은 춘추(春秋) 때 노(魯)의 권신(權臣)으로, 처음 봉후(封侯)된 주공(周公)보다 부유하였으며, 도주(陶朱)는 역시 춘추(春秋) 때 월(越)의 범려(范蠡)인데 화식(貨殖)에 능하였다.[주-D014] 공의휴(公儀休)나 백기(伯起) : 공의휴(公儀休)는 전국(戰國) 때 노목공(魯穆公)의 정승으로 청렴하였다. 백기(伯起)는 후한(後漢)의 안제(安帝) 때 문신 양진(楊震)의 자(字)로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주-D015] 성명(性命) : 인성(人性)과 천리(天理)이다.[주-D016] 오색보련(五色寶蓮) : 오색의 연꽃.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설법(說法)할 때 그의 말이 장중 화려한 것이 마치 오색 연꽃을 토해내는 것 같다고 예찬하였다.[주-D017] 진신(搢紳) : 홀(笏)을 큰 띠에 꽂는 것인데 벼슬아치의 총칭.[주-D018] 갑거원(蓋巨源) : 미상이다.[주-D019] 석박(石璞) : 명(明)나라 영종(英宗)ㆍ경제(景帝) 때 사람으로 자는 중옥(仲玉)이다. 벼슬은 공부(工部)ㆍ병부(兵部)의 상서(尙書)와 남경좌도어사(南京左都御史)를 역임하였다. 《明史 卷160 石璞列傳》[주-D020] 전사(典史) : 지현(知縣)의 속관으로, 문서의 출납(出納)을 맡아보고, 현승(縣丞)이나 주부(主簿)가 없으면 현승이나 주부의 직무를 나누어 맡아본다. 《明史 卷75 職官志4 縣》[주-D021] 고적(考績) : 관리의 공적을 고찰(考察)하는 것이다. 명(明)나라 때에는 9년이 만기인데, 3년은 초고(初考), 6년은 재고(再考), 9년은 통고(通考)라 한다. 고만(考滿)과 고찰(考察)에 의해 승진ㆍ강등 또는 파면한다. 《明史 卷71 選擧志 3 考滿》[주-D022] 도후중(陶垕仲) : 명(明)나라 태조(太祖) 때 사람으로 이름은 주(鑄), 후중은 그의 자(字)이다. 벼슬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복건안찰사사(福建按察司使)에 이르렀는데, 청렴 강직하였다. 원문의 염사(廉使)는 안찰사(按察使)의 이칭(異稱)이다. 《明史 卷140 陶垕仲列傳》[주-D023] 방백(方伯) : 여기서는 포정사(布政使)를 말한다.[주-D024] 미신(米信) : 송(宋)나라 태조(太祖)ㆍ태종(太宗) 때의 무장(武將)으로. 구명(舊名)은 해진(解進)이다. 벼슬은 창화군(彰化軍)ㆍ창무군(彰武軍)의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宋史 卷260 米信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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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廉 惟士之廉 猶女之潔 一朝點污 終身玷缺 毋謂暗室 昭昭四知 汝不自愛 神明可欺 黃金五十駝 楜椒八百斛 生不足為榮
?卜夕?? 死 且有餘戮 彼美君子 一鶴一琴 望之凜然 清風古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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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1月10日 是故女及日。乎闺门之内,不百里而奔丧。有三年之嵌,则越境。事无擅为,行无独成。叅参知而后动,可验而后言。书不游庭,夜行以火。所以正妇德也。 女有五不取: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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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宦遊日記
薦所徐榜著後學趙紹祖
繩祖同校
○秉公
厚姻婭近小人尹氏所以不平于秉鈞開誠心布公道武侯所以獨優于王佐故曰本心日月私欲蝕之大道康莊偏見窒之聽信偏則枉直而惠奸喜怒偏則賞僣而刑濫惟公生明偏則生暗
○保民
古者于民飢溺猶已飢溺心誠求之若保赤子于戲入室咲語飲醲嚙肥出則敲朴痛痒不知人心不仁一至于斯淑問之澤百世猶祀酷吏之後今其餘幾誰甘小人而不為君子
○訓廉
惟士之廉猶女之潔一朝點污終身玷缺毋謂暗室昭昭四知汝不自愛神明可欺黃金五十駝楜椒八百斛生不足為榮?卜夕??死且有餘戮彼美君子一鶴一琴望之凜然清風古今
○訓勤
爾服之華爾饌之豊縷絲顆粒孰非正供居焉而曠厥官食焉而怠其事稍有人心胡不自愧昔者君子靡素其餐炎汗浹背白不辭難警枕計功夜不遑安誰為我師一范一韓
○儉有四益
凡人貪淫之過未有不生於奢侈者儉則不貪不淫可以飬德一益也人之受用自有劑量省嗇淡泊有長久之理可以養壽二益也醉濃飽鮮昏人神智若蔬食菜羹則腸胃清虛無滓無穢可以養神三益也奢則妄取苟求志氣卑辱一從儉約則於人無求於己無愧可以養氣四益也
○勤有三益
民生在勤勤則不匱一夫不耕必受其饑一婦不蠶必受其寒是勤可以免饑寒一益也農民晝則力作夜則頹然甘寢非心淫念無從而生昔公父文伯之母曰瘠土之民莫不向義勞也淵明詩曰田家豈不苦弗獲辭此難四體誠乃疲而無異患千是勤可以遠淫僻二益也戶樞不蠹流水不腐周公論三宗文王之壽必歸之無逸呂成公釋之曰主靜則悠遠博厚自強則堅寔精明操存則血氣循軌而不亂收歛則精明內守而不浮是勤可以致壽考三益也
○自在箴
筭計有益吾亦筭計煩惱有益吾亦煩惱奈筭計無用煩惱徒勞何如隨緣隨分以咏以陶度有限之年樂孔孟之道
聖人之心隨寓而安以無所係也設有一所係則前有牽後有曳欲隨寓而安得乎
○十三哨戒諭
營壘當壯士卒當恤器械當整武藝當練偵探當勤遊巡當慎救援當速追捕當嚴設伏當密堵截當勇毋剋剝士餉毋輕許苗粮毋虗裁兵數毋混冐首功毋幸鄰灾毋匿盜情毋偷安而忘備毋輕敵以僨師毋以小利而失同事之好毋以小勝而長怠傲之志
○勸勉
世情宜淡立志貴剛剛則欲不能屈淡則欲念不起私喜私怒皆足以害事而怒之為害尤甚故制之最要除之最難
下學便是為已寔功行慕高遠畢竟近名之心未忘欲念易逞者其機順也欲動難制者其習久也故學貴及時功當勇决
耕堯田者有水慮耕湯田者有旱憂耕心田者無慮無憂日日豊耳
楚師伐宋師人多寒楚子拊而勉之三軍之士皆如挾纊楚子不能使人皆挾纊而三軍之煖煖其言也楚人有饋簞醪者楚莊王投之於河令軍士迎流飲之三軍皆醉楚莊王不能使河為醪三軍之醉醉其賜也
養子如芝蘭既積學以培植之又積善以滋潤之子弟之賢不肖係諸人而世人不以其不肖為可憂子弟之貧富繫情慾之路嗜好之府也目愛采色命曰伐性之斤耳聽淫聲命曰攻性之鼓口貪滋味命曰腐腸之藥鼻悅芳馨命曰燻喉之烟身安輿駟命曰召蹙之機此五者所以養生亦以傷生諸天而世人乃憂其貧賤多為不義之事以富之貴之得非倒見耶
聲色在前而不知好是稿其心者也聲色已過而不能化是蕩其心者也不稿不蕩惟從事於心學者自得之
凡觀人之術無它但作事神氣足者不富貴即壽考其次莫若觀其所受此最切要升不容斗不覆即毀物理之不可移者
以歲之凶穰而荒其稼穡者非良農也以利之盈縮而棄其資貨者非良賈也以行之禍福而改其善行者非良士也
蘇黃門云人生逐日胸次須出一好議論若飽食煖衣惟利欲是念何以自別於禽獸
張飽帆於大江驟駿馬於平陸天下之至快反思則憂處不爭之地乘獨後之馬人或我口??樂莫大焉飽肥甘衣輕煖不知節者損福廣積聚驕富貴不知止者殺身飽藜藿者鄙膏梁樂貧賤者薄富貴安義命者輕死生遠是非者忘臧否
居軒冕之間當有山林之氣處塵埃之內不可有市井之習
未雨而雷雨必不成未行而言行必不成古人所以恥躬之不逮
山鷄自愛其毛終日影水目眩則溺人亦有溺於自愛者芙蓉山有異鳥其名曰鵓愛形顧影不自藏為羅者所得士之罹於世網皆由其不肯自藏故爾夜蛾撲繞燈燭驅去復來弗至焦爛弗止利祿聲色之在人往往甘其心而死之何以異於是哉
關中隱士樂道耕常言修養之士當書月令置坐左右夏至宜節嗜欲冬至宜禁嗜欲葢一陽初生其氣微矣如草木萌生易於傷伐故當禁之不特節也
馬永卿曰唐柳公度年八十有強力人問其術對曰吾平生未嘗以脾胃熟生物暖冷物以元氣佐喜怒此亦當為座右銘也
此宦遊日記前明徐方伯薦所公歷官時之所自課在當時或不止此後人掇其餘而刻之者也內十三哨戒諭當是備兵辰沅時所作今按武陵姚季問作公辰沅道生祠記云諸苗為梗公如沅州按視十衛十三哨獎猛勸良策駑磨鈍三年間縛生擒而犁其庭者八百口衝擊電掃破八九塞苗穴則公之武功可見又按公集中有谷戰圖說小序自云拜命入疆苗醜竊發巡歷鎮筸觀風五靖無非崇山峻嶺懸崖淵谷退而歎曰地勢如此無怪乎新息武侯不能盡得志乃取諸名將陣圖有當於谷戰之法者編為十圖且為之說以頒示諸將領為訓練式夫苗民之匪用靈而為今
聖世之所當遏絕亟矣惜乎其圖不傳其說亦不可得而見也興懷及此遠想慨然嘉慶五年六月後學趙紹祖識
宦遊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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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家必用事类全集》[元]无名氏编撰
臞轩王公云:名迈。字君实。兴化人也。惟士之廉。犹女之洁。苟一毫之点污。为终身之玷缺。母谓暗室。昭昭四知。汝不自爱。心之神明。其可欺。黄金五六驼。胡椒八百斛。生不足以为荣。千载之后。有余戮。彼美君子。一鹤一琴。望之凛然。清风古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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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事箴
律巳以廉
西山真公云:名德秀。字景先。建宁人也。
万分廉洁。止是小善。一点贪污。便为大恶。不廉之吏。如蒙不洁。虽有他美。莫能自赎。故以此为四事之首。
臞轩王公云:名迈。字君实。兴化人也。惟士之廉。犹女之洁。苟一毫之点污。为终身之玷缺。母谓暗室。昭昭四知。汝不自爱。心之神明。其可欺。黄金五六驼。胡椒八百斛。生不足以为荣。千载之后。有余戮。彼美君子。一鹤一琴。望之凛然。清风古今。
中丞刘公云:名宣。字伯宣。大原人也。
条画。官吏犯赃。罪者。断罪除名。永不叙用。读至于此、宁不寒心。不惟自身污辱。日后累及子孙。人目曰。赃吏某之后。可以深戒。
抚民以仁
西山云:为政者。当体天地生万物之心、与父母保赤子之心。有一毫之惨刻、非仁也。有一毫之忿疾。亦非仁也。
臞轩云:古者。于民饥溺。犹巳饥溺。心诚求之。若保赤子。于戏。入室笑语。饮醲啮肥。出则敲扑。曾痛痒之不知。人心不仁。一至于斯。淑问之泽。百世犹祀。酷吏之后。令其余几。惟甘小人。而不为君子。
中丞云:国家设官。本以抚字庶民。既居民上。则民仰之如父兄。官之视民、亦当爱之如子弟。苟此心不存。而又因缘蠹害。明不畏公法。幽不念神明。必遭横逆、虽悔何追。
存心以公
西山云:传曰、公生明。私意一萌、则是非易位。欲事之当理。不可得也。
臞轩云:厚姻娅。近小民、尹氏所以不平于秉钧。开诚心。布公道。武侯所以独优于王佐。故曰、本心日月、利欲蚀之。大道康庄。偏见窒之。听信偏、则枉直而惠奸。喜怒偏则赏僣而刑滥。惟公生明。偏则生闇。
中丞云:公者。天理也。私者。人欲也。当官处事。常思天理。一以至公处之。上下无不悦服。若畏惧权豪。徇情亲旧。私意缠绕。以曲作直。将是为非。有罪得免。无辜受殃。自欺己心。难掩人口。以兹采访。宁不招愆。
莅事以勤
西山云:当官者。一日不勤、下必有受其弊者。古之圣贤。犹且日昃不食。坐以待旦。况其余乎。今之世。有勤于吏事者。反以鄙俗目之。而诗酒游宴。则谓之风流、闲雅。此政之所以疵。民之所以受害也。
臞轩箴:尔服之华。尔馔之丰。凡缕丝与颗粟。皆民力乎尔供、居焉而旷厥官。食焉而怠其事。稍有人心。胡、不自愧。昔者君子。靡素其餐。炎汗浃背。日不辞难。警枕计功。夜不遑安、谁为我师、一范、一韩、
中丞云:大舜谓克勤为贤。夫子以无倦为政、况食禄于官、州县事重。日加勤勉。尚有狱讼淹延。案牍堆积。为民上者、赋役浩繁。民之利病、靡不关心。傥或从事。宴游围猎。博奕双陆。悞事伤农。费财害巳。郡县之事。付之吏曹。安得公当。可不深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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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害箴
断狱不公
西山云:狱者、民之大命。岂可小有私曲。
中丞云:刑狱之事。暧昧未明。情态千变。苟不以至公无私之心详察其间、差之毫厘。人命死生系焉。公心议狱。尚有不周、如或畏权势而变乱是非。徇亲故而交通贿赂。好恶喜怒、私意一萌、断无平允。明有官刑。阴遭谴责、可不慎欤。
听讼不审
西山云:讼有实有虚、听之不审、则实者反虚。虚者反实矣。
中丞云:孔子曰、听讼吾犹人也。必也使无讼乎。江南珥笔之俗。最为不法。有一等豪猾税户。罢吏。乡老。把柄官府。乡曲少有忤巳者。使人饰、词陈诉、及两讼在庭、辩口利舌其被诬者往往愚懦、讷不能言。或引人强证。是非颠倒、不可不详、切须受状之时、再三引审。先责诬告反坐之状、然后施行。其间或有懦善之民。含冤赴诉、畏怕官司。不能尽情者。宜温言询问、庶得真情。若事不干巳而诉者、屏绝不受、如此自然讼简。
淹禁囚系
西山云:一夫在囚。举室废业。囹圄之苦。度日如岁。可久淹乎。
中丞云:谚云、画地为牢。誓不可入、狱中苦楚、与死为邻、且囚初到官。昼时公厅研问。所犯大情、验轻重收系。千照无事者。责保随衙。供定招欵。引审无差、轻者量情处断、重者结案待报。无得专委吏曹、推鞠、变乱是非。蔓引平民。为巧取之地。又囚人在禁。寒暑切身。饮食不时。人气充牣。多生疾疫。医药饭食、常加省视。死于非命。咎将谁归。公吏承人不禀官长、擅监系者、尤当禁绝、仍加惩戒。
惨酷用刑
西山云:刑者、不获巳而用、人之体肤、即巳之体肤也。何忍以惨酷加之乎。今为吏者、好以喜怒用刑、甚者或以关节用刑、殊不思刑者。国之典。所以代天紏罪。岂官吏逞忿行私者乎、
中丞云:书曰、钦哉、钦哉、惟刑之恤哉、盖刑者、国之典宪。安容自巳酷虐。残人肢体。损人肌肤。以为能吏。近日王侍郎、绳索膝跪、跨骑棘剌、灰汁秽水、灌人口鼻。悉皆禁绝。以见朝省二政宽恤。可不体乎。若纵吏推勘、法外绷吊、大棒拷讯、如此违犯、明有常刑
泛滥追呼
西山云:一夫被追。举家遑扰、有持引之需。有出官之费。贫者不免举债。甚者至于破家。其可滥乎。
中丞云:讼者。元竞本一二人、初又词、类攀竞人兄弟。父子亲邻、动辄数十。甚至与夫相殴。而攀其妻、与妇相争、而引其女、意在牵联、凌辱妇女、若官不详究。点紧关人三二名而追问、一付吏手。视为奇货。必据状悉追。无一人得免。走卒之执判在手。引带恶少、赫取无巳。未至官府。其家已破。故必量事之缓急。如杀人劫盗。必须差人掩捕。余如婚。田。鬪殴。钱谷。交关之讼、止令告人自赍。判状信牌、责付乡都保正勾解庶免民害。
招引告讦
西山云:告讦。乃败俗乱化之源、一有所犯。自当痛惩。何可勾引。今官司有受人实封状、与出榜召人告首阴私罪犯。皆系非法。
中丞云:珥笔徤讼之徒、官司当取具籍姓名、如遇诉讼到官。少有无理。比之常人。痛加惩治。若有卑幼诉尊长、奴婢告主人、自非谋反大逆之事。不得受理、宜加惩戒、此厚风俗之一端也、
赋役不均
西山云:科罚取财、今无此事。代以赋役不均。
中丞云:甚哉。赋役不均之弊。深为害民之事。切谓租税科敷。奸狡税家。将己产税苗。折作诡名。挟户岂止十百。如遇科役、倒在小户。潜匿茍免。又豪户买田。不行过割、只令业主。代输苗税。交结县道。知而不问、靠损淳良、役谓差设、乡都保正役等。县道多凭猾吏乡司。接受货贿。放富差贫、定一卖百、弊幸无穷。充役者。以被县吏生事追呼。愚善之人。畏避不敢出官、阴纳货财、百色追求、数月破产、为人上者、柰何不矜。其有编排义役。已定去处。不许无故紊乱成规。
重迭催科
西山云:税出于田、一岁一收。可使一岁。至再税乎。有税而不输。民户之罪也。输已而复责以输。是谁之罪乎。今之州县。盖有已纳而钞不给。或钞虽给而籍不销。再追至官。呈钞乃免。不胜其扰矣。甚至有钞不理。重纳而后已破家荡产。鬻妻卖子。往往由之。切宜深戒。
中丞云:吕舍人云、当官处事。常思有以及人、如科率之际。既不能免、便就其间。求所以便民省力、不使重为民害。真格言也。合将本县税户等第。置簿开写。某乡都保花名。租税数目。于县厅、置匮收藏、另置各乡都销簿。将纳户官钞。每日朱销。县官点检。不销簿书。不给户钞。重并追催者惩戒吏人、坐厅追问。欠多顽户。对众科决。余户自畏、依限可办、何必官吏引带人众下乡。恣其需索。比之官租费用数倍、此今日之通病、一犯到官、决无轻恕。
吏辈下乡
西山云:乡村小民。畏吏如虎纵吏下乡。犹纵虎出柙也。弓手土军。尤当禁戢。
中丞云:今之为民害者。莫甚于遣人下乡。比来官员多带人从过呼总领。提控。令史。奏差首领之类。既无本业又无请给。纵令于案分根趁催科。勾摄文帖。路家者、下县追锁吏人。乡都执事。县家者、下乡追扰税户。引帖到手。重若天符。南方本土吏人、凶险尤甚。多引承人。弓手。寨兵。恶少之徒、势如狼虎。所过鸡犬一空、酒食无筭。动辄锁索。打逼钱物。乞取不满、枝蔓乡邻。往往破产、犯者。痛治、柰何不悛、府县官僚。苟有爱民革弊之人。用心究治、庶得肃清
低价买物
西山云:物同。则价同、岂有公私之异。今州县。凡官司敷买、视市直。每减十之二三、或不即还。甚至白着。民户何以堪此。
中丞云:上司行移。收买军需诸物、须要照依时直、无致损民、今府州司县官吏。不体所行、不问有无、一槩科买、甚者。减损价直、又不画时给价、动辄经年、及入主典之手。恣意破除。虚作领状、虽为和买、过于白夺。败获者。岂胜追断。又有官吏。差人于乡都。收买布疋木绵。苎麻之类、妄作威福。损价害民、及传言于大家税户。收籴米谷。名为给价。实作馈送。取之奸巧。民畏气势。不敢告言。此等之事。速宜改革。一朝败露何异受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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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迈(1184~1248) ,南宋诗人,字贯元,自号耀轩居士。是南宋诗人、文学家,著有《腥轩集》二十七卷。今仙游县郊尾镇伍狮村人。 [2]嘉定十年(1217)进士,经历南外睦宗院教授、漳州通判等职。为人刚直敢言,刘克庄曾以"策好人争诵,名高士责全"诗句相赠。后来他由于应诏直言,被台官弹劾而降职。淳祐中,主持邵武军事务,死后追封为司农少卿。
人物简介播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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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迈有《臞轩集》16卷,1至11卷为文,12卷以后为诗词。共有文171篇,诗443首,词 5首。他的诗泼辣尖锐,酷似其人,表现出他"刚肠似石那能拗"(《西征□舟清州投宿》)的性格和"忧国怀家睫不交"(《离家》)的思想感情。
诸如《元宵观灯》、《感叹时事》、《读渡江诸将传》、《观猎行》、《二月阅邸报》等诗,都很能代表他诗歌内容的特色。王迈的诗清朗俊伟,无论写景抒情或叙事议论都颇真切感人。如为人所传诵的《飞云楼》:"亭前一望水东流,更有雄楼在上头。燕子飞来春漠漠,鸱夷仙去水悠悠。神交故国三千里,目断中原四百州。日暮片云栖古树,昔人留与后人愁。"就眼前景物寄怀古伤今的情绪,耐人寻味。王迈很推尊杨万里的诗,谓"万首七言千绝句,九州四海一诚斋"(《山中读诚斋诗》),但自己的诗风却受江湖派影响较大。他主张"文亦有活法,先使意气张","学丰敷为文,如富出所藏",强调个人情操、修养对诗歌创作的影响,认为诗人当有磊落的"襟期"(《别永福张景山》)。
王迈所作《□轩集》有《四库全书》本,是据《永乐大典》所载,兼采他书所引编成。另有《□轩先生四六》 1卷,皆启□骈偶之作,乃从集中抄出别行的,有《四家四六》本。《□轩诗余》1卷、补遗1卷,有《□村丛书》本,《校辑宋金元人词》本。
人物生平播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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宁宗嘉定十年(1217),迈入京应试,擢吴潜榜进士甲科第四人,授潭州观察推官,廉谨靖恭,以爱人为主,诚信不欺,抚民以仁。
理宗绍定六年(1233)十月,郑清之拜右丞相兼枢密使,慨然以天下为己任,召回任用了真德秀、魏了翁、崔与之等一批旧臣,时号“小元祐”。德秀立朝建言,尤极言庆元党禁之非,倡正心诚意之学。学崇朱熹,慨然以斯文自任。且力请外任,再守泉州,所至有政声。迈竭忠以裨郡政,召赴都堂审察,丞相郑清之曰:“学官掌故,不足浼(沾染)吾实之。”清之嘱德秀知贡举(德秀时已得疾,乃拜参知政事同编修),迈为初考,德秀以迈读快见快,予升降多咨焉!
端平二年(1235)六月,乔行简拜右丞相。七月壬戌朔,秘书省正字王迈,言并命二相,宜钧责任。理宗曰:“朕当戒谕二相,使之同心协力,共济国事。”迈曰:“若不戒饬,恐成朋党之风。”理宗曰:“朕任清之甚专,但以天下多事,非一相所可理,故以行简辅之。行简之用,断自朕心。”
端平三年(1236)九月,有事于明堂,大雷雨,行简与清之因天象免去宰相职务。十一月,行简继清之任右丞相,或传史嵩之(字子申)复用,迈上封事曰:“天下之相不与天下共谋之,是必冥冥之中有为之地者。且旧相奸憸刻薄,天下所知,复用,则君子空于一网矣。”又言吴知古、陈洵益挠政。轮对,言“人主不可欺天,人臣不可欺君。陛下亦尝自省;恶旨酒果如禹乎?不迩声色果如汤乎?戚里果皆阴兴乎?北司果皆吕强乎?抑犹未也,非欺天欤?”又言“陛下厚权臣之恩,而恝然于同气之念,此欺天之大者。”迈由疏远见理宗,空忆无隐,理宗为之改容,恕斥其为“狂生”,言者劾迈论边事过实,改通判漳州。
嘉熙元年(1237)五月,克庄改知袁州,坐先言济王事,为御史蒋岘所劾,与邑人方大琮、王迈同罢。枢密院编修徐鹿卿赠以诗,言者并劾之,出知建昌军。淳祐改元(1241),迈通判吉州,行前,刘克庄尝邀王迈赴家宴,席间,酒酣,迈谑克庄云:“大编修,小编修,同赴编修之会。”(时克庄官枢密院编修,从弟希仁亦官编修),克庄讥曰:“前通判,后通判,但闻通判之名。”遂成文坛佳话。其时右正言江万里袖疏榻前曰:“迈之才可惜,不即召将有不及用之叹。”理宗曰:“当以为文学官”。有尼之者,遂止。迈通判吉州,时岁荒,尝作《劝粜歌》,人称其贤。后来王迈知邵武军。在郡,诏以亢旱求言,迈驿奏七事。而以撒龙翔立故王。
淳祐七年(1247),郑清之拜太傅、右丞相兼枢密使,召迈任左曹郎官,力辞;以直秘阁提点广东刑狱,亦辞。迈曰:“吾老矣,安能酌贪泉,犯瘴雾乎!”再辞,改侍右郎官,未行,以谏官焦炳炎论罢,予祠。先庐既毁,迈借居城中传舍处之。里居期间,夷然曰:“与诸生故人,登临乐饮。”王迈为南宋中后期福建著名诗人,著有《臞轩集》存世。明王圻(字元翰)撰《续文献通考》亦有《臞轩集》二十卷。今以《永乐大典》所载,兼采他书所引附益之,厘为十六卷(卷一至卷十一为文,卷十二以后为诗词),收入《四库全书珍本初集》。刘克庄誉其为“天下隽人也,其文字脍炙人口,其论谏雷霆一世。”
王迈里居之时,身体犹健,克庄尝作《满江红》词四首并和实之。第一首颂扬王迈为官直言敢谏;第二首回忆王迈多次遭贬斥;第三首总写王迈之一生;第四首总结评价王迈。
俗云:“男子千年志,吾生未有涯。”王迈居官“三生不改冰霜操,万死常留社稷身。”其生平事迹可见《宋史》列传一百八十二、《后村大全集》卷一五二《臞轩王少卿墓志铭》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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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意 府縣官箴
세조실록 > 세조 5년 기묘 > 4월 20일 > 최종정보
세조 5년 기묘(1459) 4월 20일(신미)
05-04-20[01] 전 지중추원사 정척이 《부현관잠》을 신료들에게 습독시킬 것을 청하다
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척(鄭陟)이 상서(上書)하기를,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원(元)나라 중승(中丞) 유의(劉意)가 송(宋)나라의 유학자(儒學者)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의 동료(同僚)를 타이른 사사 십해(四事十害)를 채택(採擇)하며 그 구문(舊文)을 기재하였는데, 시사(時事)를 부록(附錄)하고 절(節)마다 의론(議論)하였으며, 구헌(瞿軒) 왕매(王邁)의 사사잠(四事箴)까지 기록하여 《부현관잠(府縣官箴)》이라 이름하였으니, 진실로 수령(守令)된 자의 좋은 모범입니다. 그러나 서산(西山)의 설(說) 아래에 중승(中丞)의 설(說)을 연해 붙여 놓았으므로 서로 뒤섞여져서 분별하기가 어렵고 또 글자도 틀린 것이 많았는데, 신(臣)이 거가장(居家章)을 참고하면서 반드시 전서(全書)를 사용하여 분석(分析) 교정(校正)하였습니다. 등사(謄寫)해서 바치니, 엎드려 빌건대, 예람(睿覽)하시고 주자소(鑄字所)에 내리어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대소 신료(大小臣僚)들로 하여금 습독(習讀) 면려(勉勵)하게 하여, 각기 자기 몸을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다하도록 한다면, 염치가 일어나서 풍속(風俗)이 아름다와지고 교화(敎化)가 행해져서 치도(治道)가 융성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원전】 7 집 323 면
【분류】 출판-인쇄(印刷) / 출판-서책(書冊)
[주-D001] 중승(中丞) : 유의(劉意).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재호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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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官道”
官箴与古代官僚阶层的自我规约
:2020-10-30 : 乾元国学公众号 :官箴与古代官僚阶层的自我
很荣幸给乾元国学教室的同学们做一次讲座。我要讲的是古代的官箴,也许有的同学有所了解,也许有的同学觉得新鲜。其实我也不是这方面的专家,只是在研究其他方面的时候涉及过这个问题。之所以想讲这个题目,是想拓展同学们的视野,如果能引起大家的兴趣,能从中吸取一些有益的东西,那当然就更好了。官箴也是中国传统文化的一个重要遗产,它既涉及古代的思想,又涉及古代的历史,现实性比较强。
一、官箴在儒家政治文化中的地位
说到官箴,我们首先要简单地了解什么是官箴,官箴有怎样的一个传统。
所谓官箴,就是关于官的箴,箴是一种古代文体,以规劝、警示为主要内容,官箴就是用来规劝和警示官僚的格言或者文章,后来也包括总结为官作吏的经验教训的书。官箴有各种形式,有些精炼的名言警句,可以刻在石碑上,或者写在匾额、楹联上,比如从宋代开始,州县衙门很多都书写着十六个字:“尔奉尔禄,民膏民脂,下民易虐,上天难欺。”有些官箴则是写成了专门的文章或者著作。
要追溯官箴的历史传统,要分几种情况,第一种情况,是上对下,君对臣的教训,这样的文献早就有了,比如说《尚书》中周公告诫康叔的《康诰》、《酒诰》、《梓材》等等,就有官箴的意思,后来这个传统仍然持续,比如著名的武则天的《臣轨》,就是专门教导臣下的。第二种情况,是官僚阶层自己对自己的要求,所谓“自我规约”,通常把秦代的《为吏之道》看作是官箴之首,这部书非常重要,是在湖北云梦睡虎地秦墓中发现的,是当时的某位官员对于怎么做官吏的经验总结。
还有一部书也被看作是较早的官箴,就是托名汉代马融的《忠经》,这部书不是讲为官经验的,而是讲作为道德的“忠”。不过,这本书很可能是唐代伪造的,这本书除了马融的正文,还有郑玄的注,且正文和注如出一手,那么显然是有意伪造的,之所以被造出来,是为了和《孝经》并列,凸显“忠”、“孝”两大道德。唐代重视《孝经》,于是有人伪造一本《忠经》出来。关于这本书《四库总目》和清代学者已经辨明,所以不能再说是汉代的书。
后世大量官箴都是这种,也就是官僚阶层自我教育、自我规约的官箴。第三种情况,广义的官箴还可以包括臣对君的规劝,比如《尚书》中就有周公告诫成王的,宋代范祖禹有一部《帝范》,则是以皇帝老师的身份告诉皇帝应该如何做君主的。不过,后世通常说的官箴,主要是君告诫臣,或者官僚阶层自我告诫的那两种。
官箴虽然其源很早,主要是宋代以后开始增多。历代比较著名的官箴,从秦代《为吏之道》算起,唐代有武则天《臣轨》,有假马融所作的《忠经》,宋代有吕本中的《官箴》,元代有张养浩的《牧民忠告》,明代有薛瑄的《从政名言》,吕坤的《明职》,清代的官箴书最多,比较著名的有陈宏谋的《学仕遗规》、汪辉祖的《佐治要言》,他们编纂的很多官箴书,特别是汪辉祖,讲的不是当主官,还有作吏,当幕僚应该怎么做。上述只是简单举例,黄山书社出版了刘俊文主编的《官箴书集成》有十大册,收集了一百零一种官箴书,其中唐代一种,宋代五种,元代两种,明代十七种,清代七十三种,民国三种。这一百零一种也只是选本,还有很多没有收录。
初步明白了什么是官箴,以及官箴的传统、官箴的文献之后,我们再确立官箴在儒家政治文化中的地位。以往讲官箴,多说是为官者的道德与行为规范和从政的经验教训,不能在儒家政治文化中给予明确的定位。著名史学家陈寅恪曾经说:“二千年来华夏民族所受儒家学说之影响,最深最鉅者,实在制度、法律、公私生活方面,而关于学说思想之当面,或转有不如佛道二教者。”儒家在制度、法律方面的贡献姑且不论,其在公私生活方面到底有些什么贡献呢?
我们按照陈先生的思路,具体说明一下儒家道德思想的基本构成:
儒家道德思想分公、私两大方面,私的方面又可以分两个小方面,一是个人修养,一是家族伦理。大家都知道《大学》的八条目:致知、诚意、正心、修身、齐家、治国、平天下。致知、诚意、正心、修身,都是个人修养;齐家则涉及到家庭内的人与人关系,需要一大套家族伦理和仪式。
由修身、齐家到治国、平天下,就从私的方面扩展到了公的方面。儒家道德的公的方面,也可以分两个小的方面,一是政治理想,一是为官之道。首先是政治理想,比如《礼记·礼运》中说的大同理想,或者孟子说的王道、仁政,都是儒家一贯的政治理想;其次就是为官之道,儒家讲究学而优则仕,所以做官是顺理成章的一步。儒家讲内圣外王,内圣是个体的修养,外王则是治国、平天下。
通过这样的分析,我们就可以为官箴找到一个定位:官箴应该隶属于儒家道德中公的方面,在公的道德中主要是为官之道,它既可以构成独立的系统,同时也可以说,私的道德,以及公的道德中的政治理想等等,都是它的基础,会交错地影响过来,从而使官箴的内容非常复杂。我们做这样的一个定位,是要简要地说明官箴在儒家政治文化中的独特地位,尽管它一定会受其它方面的广泛影响。
二、清、慎、勤——官箴的三大核心观念
为了使大家对官箴有一个简明扼要的把握,我重点讲一讲官箴的最核心的观念——清、慎、勤。清、慎、勤三字,是宋代吕本中在《官箴》中提出的:“当官之法,唯有三事,曰清,曰慎,曰勤,知此三者,可以保禄位,可以远耻辱。”朱子在《小学》中也引用了,后来明清皇帝都推崇这则官箴,康熙御书“清慎勤”三字,赐给京师与各地的衙门,悬挂在州县衙门的大堂。梁启超《新民说·论公德》中说:“近世官箴,最脍炙人口者三字,曰清、慎、勤。”我就结合官箴材料,结合我的理解,为大家讲讲这三个字。
首先讲“清”。
我把“清”这个字,分解为三个词:清廉,清明,清白。
说到“清”,首先是清廉,清廉是为官者最基本的品德要求,历来最受重视。那么,什么是清?清是清高,有节操,有气节。什么是廉?廉,隅也,四边,就是方正,古人以廉、贪相对,并说廉洁,所以廉意思也是不贪污。《管子·牧民篇》中说,国有四维,四维不张,国乃灭亡。何谓四维﹖一曰礼、二曰义、三曰廉、四曰耻。这些都是最基本的道德。
南宋理学家真德秀曾说:“凡名士大夫者,万分廉洁,止是小善一点,贪污便为大恶。不廉之吏,如蒙不洁,虽有它美,莫能自赎。”
清廉是为官的基本道德,属于公德的范畴,在私人的家里不分彼此,不涉公共利益和他人利益,所以一般家里没有清廉的问题。清廉虽然是为官的基本道德,仅就道德而言,这是起码的道德,你一生清廉也只是小善,那为什么要持守呢?一方面说,虽是小善,却能阻遏大恶,一夫当关,万夫莫开,这个大恶就是贪污。而古人对这个问题看得恨透,清尹会一《四事箴》引王迈说:“惟士之廉,犹女之洁,苟一毫之点污,为终身之玷缺。”这话说的虽然有点封建,但是有一层意思是对的,没有贪污过,持守起来并不是很困难,一旦贪污过,在想洗手不干很难。另一方面,更为重要的,之所以要清廉,关键在于清廉才能执政,或者说,才有行使权力的合法性。明初理学家曹端曾对他将要为官的学生讲说为政之道,他说:“其公、廉乎!公则民不敢慢,廉则吏不敢欺。”这句话后来被改造成一句著名的官箴:“吏不畏吾严,而畏吾廉;民不服吾能,而服吾公。公则民不敢慢,廉则吏不敢欺。公生明,廉生威。”并被雕刻在石碑上,广为流行。
再讲清明,清明是说为官者要念清、神清、心清,也就是说要头脑清明,而不是做胡涂官。首先一层意思是指要能分得清公与私,不以自家妻子为念,不好名,不逐利,还有一层意思,就是在你排除了私利、名利的干扰之后,你应该有一个清楚明白,有理性的头脑,能明辨公事中的是非曲直,兴利除弊。有些当官的之所以糊涂,未必是他智商低,更多的情况下是利欲熏心,利欲熏心,心就不清,所以就会处事不公,就会成糊涂官,所以必须要排除利欲。但是有些人可能没有太多的利欲之心,可就是当不好官,这就是聪明才干问题了。古人说清官,不仅指清廉不贪污的官,还指清明能断的官。古人说清正廉明,也是不仅指不腐败,还要断事清明公正。关于如何断事,官箴书中有很多具体的经验教训。
再讲清白,清白是说一个人的清白名声,当官的不要好名,但要惜名,不要让自己的名声沾上污浊的事情,弄脏了自己的名声。汉太尉杨秉为人,清白寡欲,尝称:“我有三不惑:酒、色、财也。”沾上这三样,难保清白。这里还有个很重要的地方,就是不要什么人都交往,什么事都掺和。吕本中《官箴》说,“当官者,凡异色人皆不宜与之相接。巫祝尼媪之类,尤宜疏绝,要以清心省事为主。”异色人,就是没有正当职业,或者职业特殊、阶层低下的人,或者到一些不好的场所,以免造成瓜田李下。那些江湖上的歌舞艺妓、奇技淫巧,有特异功能,能算命的人,都要敬而远之。不是歧视他们,他们有冤屈也要为他们做主,但是和他们产生私人交往,很容易损坏清白之名。
其次讲“慎”。
我把“慎”字也分解为三个词:慎言,慎行,慎权。
慎言、慎行,都好理解,说话办事要小心谨慎。官箴书里有很多经验之谈,比如言语之慎,薛瑄说,当官的“一字不可轻与人,一言不可轻许人”,郑端《政学录》说,“言者,吉凶荣辱之枢机,为官常默为妙”,等等。行为之慎,如薛瑄说:“处事最当熟思缓处,熟思则得其情,缓处则得其当。”熟思和缓处,都是慎行。更关键的是要“制怒”,吕本中《官箴》说:“当官者,先以急躁发怒为戒。事有不可,当详处之,必无不中。若先暴怒,只能自害,岂能害人?”当官的人,日常遇到的事情,十有八九是不满意的事,如果动辄发怒,是不会当好官的。慎言、慎行还有一个方面,是慎密,就是什么事能保守机密,这在武则天《臣轨》中就说,“人臣不慎密者,多有终身之悔,故言易泄者,召祸之媒也。”
慎权是说在行使权力时要格外谨慎,这是个大问题。首先说,权力是谁赋予的?毫无疑问是皇帝,权力都是自上而下赋予的。我们今天说,权力是人民赋予的,在非民主的体制下,这是一句空话。既然权力是上面赋予的,行使权力就要对上面负责。这在封建社会是理所当然的,比如《忠经》上说:“为臣事君,忠之本也。”忠君是做臣的根本,这是毋庸置疑的。如果行使权力不谨慎,就会被皇帝或者上司剥夺。
而在另外一方面,儒家更强调行使权力也要对下面,也就是权力执行的对象负责,主要是权力会关乎百姓生死,人死不能复生,所以一定要慎重。儒家主张在行使权力的时候要想对待自己的亲人一样,有仁爱、慈爱的精神。这种思想来自孟子的仁政,《孟子?公孙丑》曰:“人皆有不忍人之心。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矣。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治天下可运之掌上。”张载《西铭》说,民吾同胞,所以为官者对待自己的百姓,不能看作是对立面,即便是罪犯,也像是自己的兄弟犯了罪一样。薛瑄主张为官要秉承文王“视民如伤”(参见《孟子·离娄下》)的仁爱精神,人民都是如伤弱而待保护者,指出:“治狱有四要:公、慈、明、刚。公则不偏,慈则不刻,明则能照,刚则能断。”其中“慈”就是仁爱精神的体现。薛瑄说:“慎动当先慎其几于心,次当慎言、慎行、慎作事。”
最后讲“勤”。
我把“勤”字分解为三个词:勤政,勤察,勤和。
首先勤政很好理解,似乎很好解释,就是勤于执政,不懈怠,不荒政。但是官箴常强调的另一个方面我们不一定注意到,就是说勤政不光是说勤勉,而且要想给自己家办事一样,“治官如治家”。吕本中《官箴》说:“事君如事亲,事官如事兄,与同僚如家人,待群吏如奴仆,爱百姓如妻子,处官如处家事,然后能尽吾之心。”
过去的州县官,称为“父母官”,现在不这么叫了,叫“人民公仆”。其实你要真正理解“父母官”这一称谓中包含的儒家政治文化的涵义,就知道“父母官”比“人民公仆”更好。为什么叫“父母官”呢?《牧令须知》说:“牧令(州县官)民称父母,何也?盖因其有教养之责,与民休戚相关,故称其父母。使其顾名思义,常存惠爱之心。为牧令者,当以目前之赤子,如膝下之儿孙。民之所好者好之,民之所恶者恶之……”父母教养儿女,嘘寒问暖,是主动的,不是谁要求你这么做才这么做,父母和儿女是休戚相关的,不是利益的对立方,把政府和老百姓对立起来的官员,肯定不知道什么是“父母官”。“父母官”一是主动的关心,主动做事,私心和公心是一致的,二是像对待家人一样对待百姓,像办理家事一样办理政事。如果说公仆,虽然听起来挺谦卑的,但一者说,仆人是被动的,被指使的;再者说,仆人毕竟是外人,不是家人。当然,古代的州县官们真能做好,当得起“父母官”三字的很少,有人讽刺“父母官”:“爱民犹子,金子银子,皆吾子也;执法如山,钱山靠山,其为山乎。”所以说,自古至今,这也就是一种难以实现的理想而已。
其次是勤察,就是勤于反省和视察,反省自己是不是有过失,对于自己的职责和治下的基本情况要能做到了如指掌。勤察,首先是指为官者对于所要处理的政事要有清楚准确的了解,对于自己治理下的民情要有及时准确的了解,对于自己治下可能发生的灾害、动乱要防微杜渐,等等,这些方面大家都容易理解。
还有一些特别的地方,比如要勤察自己的属下和家人,是不是蒙骗自己,吕本中说:“后生少年乍到官守,多为猾吏所饵。”宋代以后的官和吏是分开的,官是流动的,吏是不动的,官是管拿主意的,吏是专职办事的。过去的官都是靠科举出身的,初当官时,不知道该怎么做,于是为手下的猾吏所挟制,或者蒙骗。官员自己的家人,也有可能背着自己,收受贿赂,搞不正当的东西。官员被下属和家人所欺骗,是很常见的,所以必须及时省察。
勤察还有一层意思,也可以算在慎行的方面,就是提防小人,吕本中说:“当官既自廉洁,又须关防小人,如文字历引之类,皆须明白,以防中伤,不可不至慎,不可不详知也。”小人可能来自自己的手下,也可能来自同僚。中国古代有很完善的御史监察制度,当官的说不定哪一天就被御史上本弹劾了,所以也要对于自己的所作所为有自我详察,知道自己是不是被冤屈,或者确实有疏漏的地方。有时必须要辩白,有时则要宽厚任谤。
第三是勤和,就是勤于上下沟通,搞好关系,涉及如何跟上司、同僚及下属打交道。孔子说:“礼之用,和为贵,先王之道斯为美。”“和”就是搞好上下关系,敬上谦下,使权力的秩序能够和谐,运转流畅。对待上级官长,要以恭敬有礼为主。宋胡太初《昼帘绪论》说:“令之待台幕郡僚者,宁过于勤,毋失之怠;宁过于恭,毋失之简;宁过于委曲,毋失之率意而径行。”但对上级官长的礼敬要有限度,一是不可阿谀奉承,就像薛瑄说的“恭而不近于谀”;二是该表明自己的见解还是要说,就像叶镇《作吏要言》说的,“事上贵诚敬,言貌亦不可苟。然至辩论公事,如自己见到十分,正当委婉力陈,未可将顺。”对待同级的官员,则以道相交,以道相勉,和衷共济。对待下级官吏,则以谦和宽厚为主。在官场上搞好关系的重要性是不言而喻的,关键是它有正反两反面,需要掌握分寸,有利于政事。这不是一个大道理问题,官箴书中有很多具体的要求,很多经验与技巧。
三、官箴与官僚阶层的自我规约
清、慎、勤三大观念还是抽象的观念,官箴书的优异之处是有很多具体的为官的指导,这些指导就像官场的规则,我使用了“官僚阶层的自我规约”这个词,就是说明官僚们知道,这么做是最适合他们的集团利益的,也是为了维护自身利益必须这么做的。马克斯?韦伯说,中国古代有三个权力阶层,是相互制约,相互斗争的,就是皇权、氏族(或者说宗族)、官僚。皇权的力量自不必说了,氏族的力量也是非常强大的,不管是皇亲国戚,还是高门大姓,往往是既有政治力量,又有经济力量,甚至有武装力量。在唐代之前,皇权与氏族之间,关系紧张,隋唐之后,在皇权与氏族之间插入了官僚阶层,在二者之间起到缓冲、调和的作用。官僚是自古就有的,但是隋唐以后的官僚阶层是指通过科举上来的这批人,他们大多数没有背景,没有后台,没有经济、武力的支持,形象的说,他们没有根,像浮萍一样,他们如果要避免散乱,要想凝聚为一种独立的整体的力量,怎么办?只有互相纠结在一起,所以就搞什么门生、弟子、同年,以便形成自己的利益集团。对于这种情况,顾炎武在《日知录》中曾经做过批判,他说现在所谓的师生弟子,其实不是过去的意思,不是真正的师生关系。你参加科举考试,录取你的考官,就是你的门师,其实他根本没有教过你;同样,你这一届的考生,相互之间都是同学,其实你们之间根本不认识。之所以搞这一套,无非是结成一个联盟,将来在官场上互相照应。清代有个大学者叫钱大昕,有人要拜他为师,他坚决拒绝,他说现在当老师,要能提携学生,帮学生找工作,帮学生发文章,帮学生出名,可是我这些都不在行,所以我不当你的老师。如果是学问上的切磋,我们平辈论交足矣。
除了结成集团,另一方面,这些科举上来的官员们要想升迁,或者保住自己的官位,就要小心谨慎,做出点成绩来,因为他们不可能像早期的世族门阀那样,仅凭高贵的出身就可以高枕无忧。
总而言之,官僚阶层必须约束好自己,一方面不要让自己的队伍中出现蛀虫,出现不守官场规则的人,破坏了整体利益;另一方面也要让自己的队伍干出成绩,从而使地位更加稳固。这样说官僚阶层,似乎都是负面的,当然也有正面的意义,因为这些通过科举上来的人,毕竟读过圣贤书,都是受过正统儒家教育的人,所以相对来说,他们是最有理想、最有道德、最有见识的一批人。如果他们真的把他们所学的,实施于社会,对社会是大有贡献的,换句话说,这些人的理想目的就是要把所学施行于社会。陈宏谋在《学仕遗规》的序言中就说,“士大夫处而家居则为学,进而莅官则为仕,学者所以学为人,即以讲求乎仕之理也,仕者所以治民事君,即以实践乎学之事也。事理本属相资,体用原归一致,世之学者每歧而二之,于古人嘉言善行不能切己体验,书自书,而我自我,遂至学自学,而仕自仕。……闲有学似纯正,而迄乎出仕,顿忘平日所学者,更有视出仕为应酬窃禄之快捷方式,而显悖乎平日所学者,未仕己仕若出两人,夫岂孔孟所云求志达道、幼学壮行之训乎?”所以说,学和仕应该统一。当然,这样的儒家政治理想,是很难彻底实现的,陈氏所说,也是在针砭时弊。
但是,还有另外的一方面问题,就是沿科举制上来的人,他们所受的教育,主要是四书五经,再加上诗词歌赋,用今天的话说,都是通识教育,不是专业教育,他们没有当官的专业知识,这是一个重大的疏漏。当然,他们可以借助于懂得专业知识的幕僚和胥吏,就像包公身边离不开公孙策,但是他们也要补上这一课,怎么补,主要是实践中学习积累,官箴书也是一个重要的学习材料,是自我学习、自我教育的必备读本。所以,官箴书中除了讲道德操守之外,还有很多怎么处理钱粮问题,怎么断案,怎么赈灾,怎么办教育,怎么治理地方等等的一系列非常具体、非常实用的为官经验。比如说吕坤的《明职》,就专讲这些方面,“自弟子员至督抚,按职分为十八篇,于省、府、州、县职官利弊得失,言之甚悉。”(《四库提要》)结合不同职能的官吏为政的具体情况,一一讲明为官的要领和原则。也就是说,职业化的内容大大增加了。
与官箴书相同,还出现了专为幕僚而作的幕学书,以及充满神秘色彩的“师爷秘本”。这些书的内容实际上已经超出了官箴书的传统范围,但无可否认它们是由官箴书这一源头流衍出来的。
概括地说,官箴书既能给官吏提供道德教育,又能给他们提供职业教育。在清、慎、勤这样的大原则之下,还有一些职业化的知识和技能也可以从官箴书中得到的。有这样一些方面是在官箴书中很突出的:
首先,做官一定要做好必要的准备,当官有当官的道德修养,这是不可缺少的;
其次,做官一定处在等级制度中,因此如何处理好上下级关系,也是必须知道的;
再次,做官就是要运用权力,在权力运作上有哪些规则,如何有效率、见成效,也是必须知道的;
第四,做官一定要面对舆论和民情,如何及时的了解和处理,也是非常重要的。
总而言之,官箴书中涉及古代政治文化的方方面面,且都是经验之谈,有具体的案例佐证,它对于官僚阶层来说,是不可缺少的指导。
还有一点需要注意,官箴书并不都是从正面说,你应该如何如何做,也有反面的警戒,反面的样板,就是说有些事是为官者不能做的,或者说官场有什么忌讳。明代的官场很乱,清初出了几桩大案,所以清代的统治者就对明代的为官之道做了反省,顺治皇帝主持修纂了一部官箴书——《人臣儆心录》,凡八篇:一植党,二好名,三营私,四徇利,五骄志,六作伪,七附势,八旷官。这部书特别选取古今奸臣恶迹,且对明末清初的政治现实针对性很强,故尤其具有警戒意义。顺治皇帝把它颁行天下,所有当官的都要看,《四库全书》中也收录了这部书,认为即便是再好的社会,难免会出奸臣,为官者读这本书,可以起到警示和防微杜渐的功效。
上述就是我对于官箴的一点粗浅的认识,很初步的,不能说是研究。如果各位由此产生了对官箴的兴趣,读几部官箴书,一定会有比我讲的更大更多的收获。
责任编辑:马毓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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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远文苑:当官四事“廉、仁、公、勤”
张朝俊
南宋诗人、司农少卿王迈用自己真情实感创作了“律己以廉”“抚民以仁”“存心以公”“莅事以勤”四箴。四箴讲述了“廉”是严格要求自己;“仁”是心中要有老百姓;“公”是心中要有一杆秤;“勤”是办政事要勤快。
随着时间推移,王迈的四箴引起了很多人的关注。明代万历年间,邹县县令梁州彦对四箴特别喜欢,于是刻了这块四面碑,立于县衙,借此警戒自己及其僚属廉洁勤政、为民办事。
现在我们以新时代的精神重读这箴碑,既是为了让“仕而廉则优”成为夯实当代廉政文化建设的为官之道,更是为了让“仁民爱物”的优秀传统文化在今天这个伟大的新时代得以创造性转化、创新性发展。
记得一位对我影响很大、帮助很多的老领导曾经对我说过:每次当他打开工作笔记本,都怀着一种崇敬感激之情、抱着一种谨慎警示之心,看一遍扉页上所写的“四句话”“当官四事:律己以廉,抚民以仁,存心以公,莅事以勤。”这是一面镜子,始终照着自己、始终激励自己、始终约束自己、始终警醒自己。这四件事,说起来简单,做起来难,做得好更难!
这“四句话”从对己、民、心、事四个方面概述做官的根本和宗旨。我们每个当官者都面临这四件事,只要按照这四句话的要求去做实、去落实、去求实,那才是一个好官!
春节后第一个工作日,省委、省政府开了一场不同寻常、不同凡响的大会。2月7日上午,全省改进工作作风为民办实事为企优环境大会在合肥召开。会上,省委书记、省人大常委会主任郑栅洁指出,召开此次大会一是为了宣示态度,二是为了树立导向,三是为了提振信心。要实现这些要求,必须坚定不移改进工作作风,为民办实事、为企优环境,做到对标对表,做到有求必应,做到真心真情,做到求真抓实,做到知敬畏守底线。简单地说,就是“一改、两为、五做到”。这“一改、两为、五做到”就是“当官四事”的“方向盘”“透视仪”和“加速器”!
2月9日上午,全县“改作风 优环境 办实事 勇争先”党员干部春季大培训大会在县委党校召开。会上,县委书记邹军要求全县党员干部“扪心四问”、检视“六不”和突出“六干”,正是“当官四事”的“校准器”“检验仪”和“显示屏”!
“律己以廉”要求我们在对待自己要廉洁奉公、廉政处事。出污泥而不染。但有极个别当官者是“待己以宽、待己以利、待己以贪、待己以腐。”放松自己对世界观、人生观、价值观的要求与改造,落个被社会所唾弃的腐败分子。众多贪官在忏悔时都会说“一开始是廉洁奉公的,后来放松对自己要求,不能做到“律己以廉”,以致于最后腐得一发而不可收,给党和国家及人民脸上抹黑,宣判时眼含泪水忏悔道:对不起党、对不起人民、对不起组织、对不起领导、对不起同事、对不起亲人、对不起朋友……”广西的原几位政协主席“前腐后继”不也说明这个问题与现象吗!“抚民以仁”当官者要有仁爱之心,就是今天所提倡的以人为本,也是以人为本的代名词。“十九大报告用词最多的是‘人民’,用情最深的是‘人民’,直指人心、打动人心、获得掌声最多的也是‘人民’。”要始终把实现好、维护好、发展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作为党和国家一切工作的出发点和落脚点……”这就是要求我们要深怀爱民之心,恪守为民之责,善谋利民之策,多办惠民之事,勤想尽民之孝!定远县委、县政府正在开展的“进万家门、知万家情、办万家事、解万家忧”活动不就是“抚民以仁”的诠释吗!
“存心以公”告诉我们工作中要一心为公、秉公办事,在处理解决问题时要出于公心、工作公开、办事公平、评说公道,最后由群众来公评、公论。是不是一心为公,一心为民,群众的心里最有数。把群众的事当作自己的私事来办,把自己的私事公开来做,这样才能体现“公生民,廉生威”吗!昔日的“国家干部”如今改称为“人民公仆”和“公务员”,不也正是此意吗?
“莅事以勤”即对待处理的事情,要勤政、勤勉、勤奋。工作中要超前谋划、超前决策。防患于未然、未雨绸缪、防微杜渐,把信访矛盾问题的苗头妥善化解在萌芽状态。我们守土有责,勤政尽责。众多的信访案件和安全事故都是没有及时检查督查、跟踪处置不到位,引发了触目惊心、惨不忍睹的血的教训。山西原任省长王君在抓安全生产会上表态:我们宁听“骂声”,不听“哭声”。不正说明了这个问题嘛!思想放松、认识麻痹、得过且过、督查不力是导致信访案件和安全事故的主要原因。如果多一点勤政,那么就会少一些案件和事故发生,给自己少一些处理。“莅事以勤”还内涵竞争之心、上进之心和争先进位之意、争强好胜之意。使得样样工作争第一,件件事情求最佳。出手必出彩,完成比完美。不是说“天道酬勤”嘛!只有我们“莅事以勤”,我们的各项工作才会干出特色、干出亮点、干的出彩!愿“律己以廉,抚民以仁,存心以公,莅事以勤。”能够成为我们共同的座右铭!
投稿邮箱:czdyxw@163.com
첫댓글 제4회 함양전국휘호대회 명제
구 분 학생부(초·중·고등부)
<명제 ①②중 선택>
일반부 (대학생포함)/ 기로부(1954년 이전 출생자)
<명제 ①②중 선택>
한 글
초등부
① 함양상림
② 선비문화 함양고을
중·고등부
① 선비는 마음을 거울처럼 맑게 해야 하고
몸단속은 먹물처럼 곧게 해야 한다
-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 -
② 선비의 청렴함은 마치 여인의 순결을
지키는 것과 같아 터럭만큼이라도
더러움이 있다면 평생 흠이 된다.
-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 -
① 깊은 가을 초목들은 푸른 옥빛이 말끔하네
세간의 온갖 일은 이내 사라지는 것이니
숲속의 청풍아래서 술잔을 주고 받을 만하네
佔畢齋(점필재) 金宗直(김종직)(1431-1492)
- 大館林(대관림) -
②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재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못 들어 하노라
- 梅雲堂(매운당) 李兆年(이조년)(1269-1343)
- 多情歌(다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