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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환상
김 광 욱
1
성임은 칠면조처럼 차려 입고 굽 높은 하이힐을 따각거리며 대문에서 나오다가, 골목에서 승용차를 손수 수리하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반백의 머리를 햇빛에 반짝거리며 차 앞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깡마른 목줄기가 남편을 더 늙어 보이게 했다. 남편은 격일제로 근무하는 아파트 경비원인데 오늘은 쉬는 날이어서 산행을 하려는 게다. 남편은 혼자 산행하는 게 취미였다. 승용차가 낡아서 산에서 고장나면 차 안에서 일박할 때도 있지만 여간한 고장은 자신이 직접 고칠 수 있으므로 차에 대해서 걱정하진 않았다.
남편은 차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꼭 애인처럼 다룬다. 이십 년이 넘은 구형 승용차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자기 물건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아내도 승용차처럼 사랑하면 좋겠다. 아내에 대한 애정은 쑥맥이었다.
성임은 남편이 집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차와 살았다. 털고 닦고 문지르고. 그렇게 애지중지 아낌으로 해서 이십 년 동안 잘 사용한 것이다. 요즘엔 고장이 잦아서 아무래도 버리고 새차를 하나 사야 될 것 같았다. 남편은 그 돈이 아까워서 아직 구입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다.
성임은 운전을 할 줄 몰라서 남편이 태워 줄 때 외에는 승용차 곁에도 가지 않았다. 그 승용차를 타고 거리에 나가면 부끄러워서 차라리 타지 않는 게 속 편했다. 친구들 만나면 놀리기 때문이었다. 돈 벌어 놨다가 어디에 쓰느냐고 하면서 성임을 구두쇠 취급했다. 친구들은 성임이 부자인 줄 알고 있다.
그녀는 구두쇠도 아니고 돈을 쓸 때는 펑펑 쓰는 성격이었다. 화장과 몸 관리하는 데 많은 시간과 경비를 투여하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먹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란 뜻은 아니다. 가정주부로서 꼼꼼한 면도 있고 알뜰한 편이었다. 다만 먹고 노는 데 쓸 돈을 화장품과 옷과 헬스 운동에 투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남편은 구두쇠라고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얼마 전 공직에서 퇴직하여 연금도 꽤 받지만 자기 용돈한다고 아파트 경비를 맡고 있고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월급 타면 자기 용돈만 조금 쓰고 아내에게 다 갖다 주는 착실꾼이었다. 그와 일찍 결혼하여 두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걱정할 일이 없었다. 넓은 집에 부부가 단둘이 산다.
성임은 조용한 성격이어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시장 보러 갈 때와 쇼핑할 때를 제외하곤 텔레비전과 음악 감상이 주 할 일이었다. 대학시절에 사교춤을 배워서 춤도 제법 잘 춘다. 하지만 나이트클럽이나 캬바레에 가서 다른 남자와 춤을 추진 않았다. 옛날에 친구들을 따라가서 남학생들과 몇 번 춤을 춘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얌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임이 화장을 잘 하고 멋을 부리니까 바람둥이인 줄 알지만, 천만에 콩떡 만만의 말씀이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길 좋아하지 않는다.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이따금 놀이화투나 치고 친목 계모임에나 나가는 정도로 외출 범위가 협소했다.
그녀는 동네 마트와 시장에 갈 때와 친구 계모임에 참석하려고 그렇게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멋진 옷을 사 입는 것 같다고 친구들은 수근거렸다. 몸 단장에 쏟는 공력이 너무 아깝단 뜻이다.
외견상으로 성임은 화려한 여자였다. 미모와 몸매가 뒷받침을 해 주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옷이 아니어도 돋보였다. 사람들은 성임이 사십대인 줄 알고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할 때 성임의 얼굴은 삼십대 여자 못지 않게 예뻤다.
남편은 아내가 곱게 하고 다녀도 눈길을 주지 않는 목석이었다. 자기 옆에 멋진 아내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 아마 자주 보고 한 이불 속에서 잠자니까 그럴 게다. 성임이 생각하기에 남편은 사랑도 모르고 인생의 멋도 모르는 꽁생원 같았다. 남편은 꽁생원이고 아내는 진돗개처럼 집만 지키는 여자.
성임은 그런 자신이 처량하게 생각될 때가 있었다. 인생 황혼을 맞이하도록 멋진 연애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늙은 게 억울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녀에게도 갱년기의 우울증이 찾아왔다. 바람 피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처녀 시절에 그녀를 짝사랑했던 남자가 돈 많은 사장이 되어 접근했을 때 하마터면 유혹에 넘어갈 뻔하였다. 그녀는 이성으로 그 유혹을 차단했다.
이웃집에 사는 남자가 멋지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그 남자는 이사갈 때까지 끈질기게 성임을 유혹하며 따라다녔다. 시장에 갈 땐 어느 새 알고 따라와서 자기가 돈을 내고 선물도 사 주었다. 남편이 격일제로 근무한다는 걸 알고 남편 없는 날을 택하여 최근까지 뻔질나게 집에 찾아왔다.
성임은 그 남자가 주는 선물을 뿌리칠 수도 없고 또 선물 받는 게 싫지 않아서 낼름낼름 다 받다 보니 집 안에 그 남자의 선물로 가득했다. 성임은 생각다 못해 그 남자와 만나지 않으려고 그 동안 받은 선물을 그 남자의 아내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고 이사 가 버렸다.
지금도 그 남자를 만나면 미안해서 숨어 버린다. 남자란 동물은 미련이 많아서 자기가 마음 준 여자를 잊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다. 성임은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소원을 들어 줄까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면 그 다음에도 계속 육체를 요구할 것이다. 성임이 지각 없는 여자였다면 남편 몰래 얼마든지 불장난을 할 기회가 있었으나 성임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2
그녀가 억울한 것은 믿을 수 없는 나이였다. 그녀는 이제 불장난을 할 나이도 아니고 그런 일에 흥미도 없었다. 사람은 자기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녀를 젊고 예쁘다고 칭찬한다고 해서 정말 젊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자동차의 복잡한 기계 속에 머리를 처박고 땀 흘리는 남편이 가엾어서 한참동안 그 옆에 서 있었다. 쉽게 고칠 수 없는 고장인 것 같았다.
"왜 안 가?"
남편의 금속성 목소리에 성임은 움찔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남편은 아내가 옆에서 구경하는 게 부담스러운지 아내가 어서 갔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면 아내가 옆에 있어 주길 바라면서 괜히 해 보는 소릴까? 남편의 속은 알 수 없다.
차 앞뚜껑은 남편이 하도 닦고 문질러서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했다. 부속은 아직도 새차였다. 성임은 차를 남편과 비교했다. 겉은 낡아도 속은 단단한 남편. 고장나면 고칠 수 있고 고칠 능력을 갖춘 남편.
그 차가 성임이라면 남편은 아내의 고장난 부분을 열심히 고치고 있다고. 남편의 꾀죄죄한 체구와 생김새를 승용차와 비교했다. 자신이 그 승용차가 되어. 남편이 아내를 승용차처럼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녀가 남편과 함께 엮은 세월이 그렇게 덧없다고 후회되지 않으련만 남편에겐 그런 감정이 없었다. 기계처럼 빡빡하고 단단하고 건조한 사람이었다.
"바람 좀 쏘이고 오겠어요."
성임은 남편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 주면서 말했다.
"언제는 내 허락 받고 나갔나? 새삼스럽게 보고하기는……"
"점심이 걱정돼서 그래요. 상 차려 놨으니까 반찬 맛 없어도 굶지 말고 드세요."
"된장국에다 먹으면 되지 뭐."
"그럼 다녀오겠어요."
아내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내는 편안한 구두보다 굽 높은 하이힐을 좋아한다. 아내의 습성이었다. 아내는 발이 작고 체중이 가벼워서 신체 구조가 하이힐을 신기에 걸맞았다. 보통 구두를 신으면 오히려 몸의 군형이 맞지 않아 불편했다. 남편은 아내가 하이힐을 신고 따각따각 걸어가는 게 불안해서 차를 고치다 말고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일찍 들어와. 집 비우지 말고!"
"알았어요!"
집을 비우지 말란 말은 그가 차를 고쳐 가지고 산에 간다는 말이고 알았다는 말은 멀리 외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남편은 꼼생이어서 아내가 집에 없으면 마음 놓고 등산을 하지 못한다. 남편이 쉬는 날과 아내가 계모임 또는 시장 보는 시간과 겹치면 그는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켰다. 집을 비우면 도둑이 들까 봐서였다.
성임은 남편이 산행을 가지 않고 집에서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도 외출의 자유가 있다. 아내라고 해서 왜 산행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산에 가서 맑은 바람 쐬고 자연의 경치 속에 파묻히고 싶지만 그 고물차를 타기 싫어 남편과 동행을 하지 않았다. 되도록 집을 비우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다. 전에 도둑을 맞은 뒤로 조심하는 뜻에서 그런 묵약이 부부 사이에 생겼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면서 아내가 집에 있는 걸 좋아했다. 성임은 그게 싫었다. 남자들은 아내를 로보트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조금만 더 애착을 기울였더라면 성임의 일생은 훨씬 빛났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경제적으로 큰 고통 없이 살면서 그걸 행복이라고 만족하는 아내는 없으리라. 성임이 그 경우였다. 성임은 먹는 것 입는 것 기린 것 없이 살지만 그걸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행복이란 마음의 만족, 기쁨, 성취감 같은 게 아닐까? 성임은 살아 오면서 그런 감정을 별로 누려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외출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하고, 그 어떤 목적의식에서 집을 나서는 게 아니다. 그냥 심심하니까 가정이란 굴레를 떠나 보는 것이다. 가정에서 찾지 못한 기쁨을 외부에서 찾기 위해 보물찾기나 술래잡기 하듯 무작정 외출한다.
외출엔 남편의 꾀죄죄한 모습이 보기 싫은 이유도 있었다. 남편의 육체에선 애정이란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성임이 로보트라면 남편도 로보트였다. 돈밖에 모르는 기계. 생활이란 톱니바퀴 속에서 기계의 부속품처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쇳덩이였다. 성임은 그 금속적인 공기와 잠시나마 작별하고 싶었다.
3
시간은 점심때에서 치우쳐 있었다. 일곱 시쯤에 해가 질 테니까 앞으로 여섯 시간은 밖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가정주부가 할 일 없이 해지도록 돌아다니는 것도 멋없다. 저녁 일곱 시까지 돌아오려고 자신과 약속했다. 먼저 헬스클럽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땀을 빼고 샤워를 했다.
헬스클럽에서 나와 동네시장에 가서 새로 나온 물건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구경했다. 이삼 일 간격으로 열리는 동네 시장은 재래시장치곤 제법 북적거렸다. 시장의 움직임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시장에서 살 것은 없었다. 반찬거리는 집에서 가까운 마트에서 살 수 있고 그게 더 편했다. 더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 가끔 시장에 오지만 며칠 전 사 둔 게 많이 있어서 그냥 구경만 했다.
봄옷이 많이 나와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선 비린내, 음식 냄새, 가축의 냄새, 시장 특유의 냄새 속을 뚫고 시장 끝에서 끝까지 구경하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친구의 옷가게가 있었다. 성임은 거기에서 주로 옷을 많이 사 입었다.
친구는 늦은 점심을 먹다가 성임을 반겼다. 새로 나온 옷들을 보여 주며 굳이 사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새 상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절대로 안 사는 성임의 깐깐한 성격을 알기 때문에 장사보다도 흉허물없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게엔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불경기였다.
"넌 뭐가 걱정이니? 달달이 연금 나오겠다, 남편이 아파트 경비해서 월급 타서 바치겠다, 모아 둔 돈도 있을 거고. 난 이 가게 없으면 빈털터리야.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어.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일하고 벌어야 돼. 난 네가 부럽다. 너처럼 편한 여자도 없을 거야."
삶의 의미가 없다고 한탄하는 성임에게 친구가 일침을 놓았다.
"네가 어땠다고 그래? 넌 사장이야. 이렇게 큰 가게를 가지고 사업을 하잖아? 불경기에 어렵다고 하면서도 자식들을 모두 대학 보내고 출가도 시켰어. 그러면 됐지 뭐. 사업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니야. 난 네가 존경스러워."
"피! 이까짓 파리 날리는 가게? 사업이랄 것도 없어. 차라리 구걸이 낫지 못해 먹겠어. 장사도 젊어서 한 때야. 이젠 나이 먹으니까 손님도 떨어진 것 같아. 손님도 주인을 보고 오는 모양이더라니까. 쭈구렁 할망구가 버티고 앉아 있으니 정나미가 떨어져서 손님도 안 오더라고."
"아직도 탱탱하다 탱탱해. 괜히 자기비하하지 마라. 그런 걸 자격지심이라는 거야."
"그럼 넌 젊다고 생각하니?"
"아직 쓸 만하지 않을까? 내가 헬스클럽에 가면 모두 날 삼십대라고 해. 육체는 관리하기 나름이야. 너도 돈만 벌지 말고 헬스클럽에 다녀 봐."
"내가 헬스클럽에 다닐 시간이 어디 있니? 새벽부터 나와서 청소하고 물건 진열하고, 밤 열 한 시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면 파김치가 되는 걸. 장사가 안 되니까 더 지치는 거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서울 새벽 도매상가에 가서 물건 떼는 것도 큰 고역이야. 시장 보기 위해 첫새벽에 일어나 차를 운전해야 해. 장사는 안 되는데 물건값이 올라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지."
친구는 짬뽕 그릇을 치우고 나서 수돗물로 양치질을 했다. 하얀 거품이 입에서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지자 발로 쓱쓱 비볐다. 이를 닦으면서 이야기했다. 남편 흉보기였다. 친구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 죽겠는 모양이었다.
"아저씬 직장에 가셨니?"
"오늘은 쉬어. 점심도 먹지 않고 고물 차를 고치는 걸 보고 나왔어."
"네가 나왔으니까 그 양반 산에 가지 못하겠구나 호호호. 그 양반처럼 집과 차를 아끼는 분이 있을까? 쓸고 닦고 고치고, 잠시도 놀지 않더구나."
"집도 낡아서 아파트로 이사 갔으면 좋겠어."
"얘얘, 아파트보다 주택이 좋아. 아파트에서 한 이십 년 살아 보니까 병이 생기더라고. 땅에는 자력이 있는데 그 힘이 박테리아를 막아 주나 봐. 공중에 떠서 사니까 산소도 지면보다 부족하고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지 뭐야? 우리 영감이 겔겔거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야. 난 주택으로 옮길까 해."
"주택은 겨울에 춥고 여기저기 수선하는 굿이야."
"그거야 내 집이니까 내가 고쳐 살아야지. 아파트에 살면 편하긴 하지만 내 집이란 개념이 없어서 사람이 게을러져. 게으르니까 병이 나는 거야. 남편과는 잠자리를 같이 하니?"
"얘는? 우리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걸 하니?"
"그럼 남편과 멀어졌단 말이야?"
친구는 수돗물에 입을 헹구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멀어진 지 한 삼 년 됐나? 요즘은 각방 쓰고 살아."
"그건 너무한다. 네 말처럼 그 방면엔 아직 쑬 만한 나인데 삼 년 간 별거했다니 남편을 두고도 독수공방했구나. 우리 남편은 돈도 못 벌고 겔겔거리면서도 그건 밝히더라. 그 재미가 쏠쏠해요 호호호."
"네가 좋아한가 보지."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지. 오늘부터라도 좀 접근해 봐. 그걸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잖아?"
"난 보기도 싫어. 보기 싫어서 나온 거야."
"너에게 문제가 좀 있구나."
친구는 입에서 치약 냄새를 풍기며 그 일이 중요한 사건이라도 되는 듯 과장된 제스처를 했다. 친구의 기름진 몸뚱이와 비교할 때 성임은 소녀 같았다. 운동을 해도 살이 찌지 않고 가늘었다. 남자들은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친구가 아직도 억세게 부부 성생활을 누리고 있단 말을 듣고 성임은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성임은 성생활에서 졸업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의 가게에서 심부름도 해 주고 손님 행세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여섯 시에 나왔다.
4
친구가 남편과 왕성하게 성생활을 하고 있단 말을 듣고 성임은 힘이 빠졌다. 그리고 친구가 부러웠다. 부부애란 원만하고 만족스런 성행위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성임은 남편에게서 만족을 느껴 본 적이 없고 성생활을 아름답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것은 추악한 동물의 교미와 다르지 않았다. 결혼은 성생활이고 동물적 성생활이 곧 부부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 생각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만든 사람이 친구였다.
(넌 남편을 사랑하는구나.)
나는 뭔가?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 받지도 못하는 한 쌍의 암수. 그 책임이 나에게도 있었구나. 성임은 친구 말을 곱씹으며 해가 뉘엿거리는 거리를 거닐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남편 혼자 밥을 지어 먹을 게다. 남편은 그런 일을 잘 했다.
그녀는 아내가 없어 남편이 고생한다는 걸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보다 더 밥도 잘 짓고 반찬도 잘 만들었다. 아내가 없어서 남편이 불편하다고 불평을 한 일도 없고 잔소리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어도 무방 없어도 무방인 아내에게 왜 자꾸 집에만 붙어 있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를 진돗개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식모나 청소부로 취급하든지.
"얘, 그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그래? 그 재미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사니? 난 남편이 겔겔거리고 돈을 못 벌더라도 자리만 지켜 주면 좋겠어. 그게 장사보다 중요한지도 모르니까."
친구의 말이 귀에 맴돌아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친구는 행복한 여자다. 인생에 낙이 있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희망은 금전과 재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생의 보람과 희열을 느낄 때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한다. 성임에겐 그 두 가지가 없었다. 없다기보다 아예 망각하고 살았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우울증을 어떻게 치료할까? 단순한 갱년기의 우울증이 아니고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였다. 성임에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삶의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수가 결여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뭔가를 생각하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찾아 보려고 했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성임은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번화가에 내려 젊은이들 속에 섞여 여기저기 구경했다. 뭐가 그리 기쁜지 히히거리고 좋아하는 젊은이들. 어깨동무하고 다정히 걸어가는 남녀를 손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번화가였다.
젊다는 건 크나큰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그 특권이 있기에 대담한 사랑도 할 수 있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키스를 해도 아무도 욕할 사람이 없었다. 대담한 애정의 표출. 성임에겐 불가능한 전설이었다.
그녀는 전설 같은 사랑을 만나지도 못했다. 사랑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존재하는 허상이었다. 생기발랄한 젊음들 속에서 지렁이처럼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는 더 이상 그 곳에 설 땅을 잃어 버렸다. 그녀는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 건물에서 그윽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문득 춤이 추고 싶어졌다. 혼자서, 아무 상대도 없이 불빛 속에 떠도는 불나방처럼 마구 휘젓고 싶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음악은 고층건물의 지하 계단 아래서 흘러나왔다. 성임은 그 계단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지하 계단 전면에 영어로 카페라고 씌어 있었다.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춤을 추었다. 카페가 술 마시는 주점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출까? 카페는 춤추는 곳이 아닌데 나 혼자 어떻게 춤을 춘단 말인가?
성임은 돌아서서 계단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성임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성임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남자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는 고독한 성임의 가슴에 빗물처럼 다가왔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저도 처음입니다."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 넘긴 멋쟁이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성임은 남자를 비키고 계단 위로 올라가야 할지 카페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얼른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였다.
"들어가셔도 괜찮습니다."
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말했다. 남자의 긴 팔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성임은 멋쩍게 웃으며 앞장서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 들어가자 성임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광경은 무대 같은 넓은 홀에서 얼싸안고 춤추는 남녀들이었다.
"저도 혼자 왔는데 합석하실까요?"
"그러죠."
성임은 그 남자의 제의를 스스럼없이 허락했다. 남자의 첫인상이 점잖고 부드러워서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낯선 남자와 술을 마신 경험이 없었지만 오늘은 마시고 싶었다. 남자는 '신태호'라고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명함도 주었다. 명함엔 무슨 회사 부장이라고 씌어 있었다.
성임은 부장이란 직책엔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 남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성임은 술을 마시고 싶었다. 혼자서 춤추고 싶은 열망뿐이었다. 술과 춤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5
성임은 태호가 주는 맥주 두 잔에 취해서 얼굴이 발개졌다. 음악이 시끄러운 곡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태호가 춤을 추자고 했다. 성임이 사양하니까 태호는 성임의 손을 잡고 춤추는 무리들 속으로 이끌었다. 성임의 춤 실력에 태호는 놀란 듯 찬사를 연발했다.
"춤을 잘 추십니다."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춤추는 동안 성임은 차츰 대담해졌다. 오늘 밤을 이 사내에게 맡겨 버릴까. 집에서 혼자 밥을 짓고 있는 남편을 생각했다.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아내 못지 않게 잘하는 남편. 태호의 불 같은 입술이 그녀의 잡념을 막아 버렸다. 너무 짧은 시간에 빨리 가까워진 그들이었다.
태호는 오래 춤을 추지는 않았다. 성임을 데리고 자리에 앉아 병에 남은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술값은 성임이 계산했다. 태호는 굳이 자기가 내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옆에서 계산하는 걸 지켜보았다.
성임의 지갑엔 돈이 두둑히 들어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나 마음에 들면 화장품과 옷을 사려고 항상 돈을 가지고 다녔다. 태호는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서서, 거스름돈을 받는 성임의 가느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갸름하면서 복스런 손이었다. 성임이 태호를 돌아보았다. 태호는 성임의 허리에 손을 얹고 카페에서 나와 계단으로 올라갔다.
태호는 계단 중턱에서 걸음을 멈추고 성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성임의 빨간 입술이 꽃잎처럼 태호를 쳐다보았다. 성임은 이 남자에게 수줍은 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이고 태호는 성임에게 고상한 척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고 춤추는 동안 그렇게 가까워졌다.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해요."
"후회하면 안 됩니다."
"제가 후회할 것처럼 보여요?"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이런 데 자주 오는 분 같지 않아서 물어 본 겁니다."
태호는 안심한 듯 성임의 목을 한 팔로 얼싸안고 두 번째 키스를 했다. 첫 번째 키스는 춤추면서 얼떨결에 받았고 두 번째 키스는 성임이 자의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일탈된 모습에 화가 나서 될 대로 돼라고 태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요조숙녀도 이렇게 쉽게 이성을 버릴 수 있구나. 성임은 태호를 따라가면서 울고픈 심정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걸레처럼 행동하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인은 친구의 그 말 때문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가는 데까지 가 보자. 남자에게 비겁한 꼴을 보이긴 싫어. 난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성임은 자신이 목석인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육체에서 고갈됐던 희망의 불씨를 찾아 내고 싶었다. 삶의 의미를.
그들이 당도한 곳은 교외에 있는 호텔이었다. 태호는 성임이 가정주부로서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그런 장소를 택했다고 했다. 성임은 그런 것까지 생각해 주는 태호가 고마웠다. 태호는 성임이 가정주부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추측이었다. 성임은 그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성임은 낮에 샤워를 했기 때문에 태호가 샤워하는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 밖엔 어둠이 짙게 내려 산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멀리로 보였다. 한 쪽은 들판이고 한 쪽은 산이었다. 태호가 벌거숭이로 욕실에서 나와 연장을 출렁거리며 다가왔을 때 성임은 눈을 감았다.
성임이 전등불을 끄라고 해도 듣지 않고, 태호는 성임의 얼굴과 육체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행위를 했다. 성임도 그의 얼굴과 육체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빳빳한 기관이 목구멍까지 쳐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통증과 환희가 성임의 내부를 난타했다. 최후에 남은 통증마저 모두 환희로 바뀌어 그녀는 천국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는 극대화된 기쁨에 성임은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동물의 괴성이었다. 태호도 공격자의 야성을 아낌 없이 발휘했다. 그것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멋진 환희의 극치였다. 그 일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지쳐 있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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