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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선천성 면역에 관한 보고 외 2편
정민나
뇌의 두 돌기는 맞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만분의 이 센티 정도 시냅스 공간이라는 간격이 있지요
마음이 명랑하면 저절로 태양과 빗소리가 저절로
구름과 꽃들도 번갈아 말이 달려요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될 때 급등 종마가 탄생하지요 악어가 입을 벌리듯이 간격이 멀어지면 당신은 점점 무거워져요
무작정 뛰어 가면 안 돼요 천둥소리에도 베팅을 하는, 당신 몸속의 말들은 중독된 지 오래
검사를 한 번 해 보세요 핏속에 적혈구가 얼마나 섞여 있는가 산소운반을 하는 세포가 어떻게 감각의 판을 건너뛰는가
뜨거운 탕에 오래 몸 담그면 쪼글쪼글해 지는 날씨 불안하게 휘감기는 저 운동장 마음부터 고치려면 진눈깨비 휘날리듯 징검다리 건너뛰듯
꽃샘바람으로 놔두는 게 좋겠어요 이 시간이 지나 삼박 사일이 지나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유리조각의 담장을 넘어
고양이도 사뿐, 4월 꽃봉오리에 착지할 거예요
물챙이 여울
우리 애는 눈밭 위 고양이로 앉아 있고요
먹을 것 없는 덤불 속을 헤매다가 추위 속을 뛰쳐 나왔구요
아무도 아랑곳 하지 않는 개울가를 노려보고 있고요
그러나 우리 애는 햇살의 계단 거꾸로 내려오며
계단의 햇살 뒤집는 까치들 공격하지 않아요
어느 새 우리 애는 조용히 얼음 밑 소라로 걸어가고 있고요
하얀 물의 뼈로 자라고 있고요 얼마 전부터 물챙이 다리
우리 애는 자잘한 꼬챙이를 엮어 엄마인 나를 촘촘히 걸러내고 있습니다
더는 못 가겠어 소리를 질러도
우리 애는 빨간 통로에서 하얀 미끄럼틀을 주르르 내려가고 있고요
겨울 음수대는 단수되었습니다 눈의 꼭대기에서
엄마는 여기 갇혔어 소리를 지르면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입장권을 뽑아오는 물챙이 방죽
우리 애는 호루라기를 불고요 얼음 밑 물고기를 잠그고 있고요
그러면 꽁꽁 언 빙판 위에도 더 이상 헐벗은 고양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 애는 초고속 범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활처럼 휘어지는 만국기 휘날릴까요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냇물 고단한 우리 애는
아랫마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엄마가 보이지 않나 봐요
꼼꼼히 물챙이만 칩니다
뭘 먹을까?
쇼팽의 즉흥 환상곡도 현재 상영 중인 환타지 공상 영화도 에로스를 탐색한
미학 여행도 메뉴판에 있는 것은 너무 자주 먹던 것
뭐 새로운 느낌이 드는 맛난 것은 없나요 말하자면 데리다의 경첩 같은 것 보르헤스의 알랩 같은 것 연암의 코끼리 기호학 같은 것
메뉴판에 있는 것만 시키세요 식당 주인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어제의 신작시 샐러드와 다시 쓴 명상록 조림과 희망의 경제학 무침이 기본으로 놓인 식탁 앞에서
젓가락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식욕이 되살아나질 않아 기운이 푹 죽은 언어의 비름나물 한 가닥 질겅질겅 씹고 있는 여름 한낮
툭 밀어놓는 물병 속에 죽음은 어떻게 사는가 메디컬 에세이가 출렁이지 않는가
마지막 감동 한 컵 따라 마실 때 목 줄기를 타고 퍼지는 죽음 한 줄기
쌉싸롬한 이 맛이 원기가 될까 비릿한 죽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신작시>
오늘은 모르겠어* 외 2편
정민나
물이 줄어들면 나일악어 한 마리 슬슬 등을 보이고
목마른 임팔라 뻔히 보이는 악어를 살피며 물을 마시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한 개뿐인 목숨을 내어놓고
시간의 등인지 악어의 등인지 징검돌을 밟고
건기 때는 어쩔 수 없이 누구든 걸리면 끌려가고
물이 적은 늪에서 어린 새끼 몇 마리 흙탕물로 마감되고
물을 주름잡는 악어를 건너면
간신히 봄의 언덕을 기어오르고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빗방울 떨어지는 초원의 계절로 접어들고
붉디붉은 꽃들에 당도하기까지 두 번 세 번 불안을 건너뛰고
깊은 물로 들어가는 안장부리 황새처럼
암수 사랑한 후에 정교해지는 임팔라
그제서야 폭포가 쏟아지듯 풍성해지고 사분의 일초 만에
개코원숭이를 포식하는 비단구렁이 곁에서
짖꿎은 새끼들과 갓 낳은 그늘을 훈련하고 우기의 지평선에
다다르는 동안 나란히 터닝 포인트를 찍었는데
떨어지지 않은 열매는 우아하네 아직 달콤한 여름…
망설이네 악어들 떠다니는 저 늪이 둥둥 떠오르면
우기와 건기의 교차점, 날씨가 조여오네… 임팔라,
살아남는 것이 기적인 사바나 늪은 반복되네
*심보선의 시집 제목(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 힌트를 얻다.
수수께끼 은하의 계절
백 이십 기가 유에스비 세 개를 넣어둔 케이스를
찾지 못하는 동안
블랙홀은 은하 한 가운데 커다란 질량으로
미스터리 안전체로 존재한다
간혹 어떤 블랙홀은 빠르게 은하를 관통하면서
고요한 공간을 사정없이 찢어버린다
수천수만 개 별이
몇 분 몇 초 진공상태로 혼절하는 동안
삼백육십 기가 꽉 찬 유에스비가 내 몸속에서 빠져나가며
부옇게 구름띠를 이룬다
그물망으로 연결되던 우주는 오리무중
별을 짓던 한 떼기 시간이 무한대 미궁으로 빠져들어
행방이 묘연하다
누구의 오락일까
밤하늘을 재구성하는 은하
종종 지었다 부수는 저 모래성
폐허의 필경사*
줄이 끊어진 그네는 모래 위에서 여전히 그네다
아무도 타지 않는데 그네라는 이름으로 남아
푸른 바다를 향해 뜨거운 모래 위를 걷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한 발자국도 닿지 못해
흔들흔들 서정의 무능**을 온몸으로 발산한다
그네는 뒤집힌 자신의 몸을 알지 못한다
다정했던 자리가 뒤집혀도 자유로운 바람이
곁을 흩뜨리며 지나가도 영문을 알 수 없다
기울어진 세계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고 도로를 덮치고
지나가는 자동차가 깔리는 세상
인간의 비명이 묻히는 이십일 세기 폐허가
탈각한 그네의 거울에 비친다 스르르
어디선가 줄이 자꾸만 풀어지는 소리 기우뚱
그네는 불편한 심장으로 받아적고 있다
*과** 2017년 신진숙 글에서 가져옴
<시인의 에스프리>
스위치의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
정민나
1. 현재에 매몰되지 않는 생동감
태풍이 왔을 때 산 나무들은 미친 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죽은 나무들은 딱 고정되어 움직임이 별로 없다. 매점도 휴업하고 오랜만에 휴가 나온 사람들 나무토막처럼 붙박혀 있다. “Live is Life~”오퍼스의 노래가 몇 굽이 파도를 넘어가는데 보드를 든 청년이 그 새를 못 참고 사나운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움직이는 게 삶이야! 속귀에서 밖으로 흐르는 노래 세찬 파도 위로 쏟아진다. 이런 물아일체의 사태 속에서라면 나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친다.
그동안 몸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오래전에 걸린 중이염이 재발하면 그때 잠깐 병원에 가는 수준으로, 나는 근본적 치료를 미루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 남양주에 살던 언니가 얼마 전 내 집 가까이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함께 수영 하자는 말에 ‘그래 이제 좀 몸 관리를 하면서 몸무게만큼 늘어난 잔병치레도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고 개학을 앞둔 얼마 전에 덜컥 병원 예약을 하게 되었다.
수술은 금방 끝났지만 예상과는 좀 달라 잔병치레가 늘어났다. 찬 바람이 조금 스쳐도 몸살이 나고 목감기는 낫지 않았다. 심할 때는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어 학교 수업 시간에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작업한 자료를 모두 담아놓은 USB마저 잃어버렸고 지금까지 찾지 못하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다.
2. 멈춤이 있다면 치유가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야쿠시마 국립공원에 사는 일본원숭이들은 그 곳에 사는 사슴들을 위해 높은 나무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떨어뜨려 준다. 당을 충분히 섭취한 수사슴 한 마리가 조력자인 원숭이를 업어주는 모습은 생소하면서 놀랍다. 그동안 생태 위기만 보여주던 다큐 영화가 옐로스톤 강을 건너오는 아메리카 들소 떼의 모습도 보여준다.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은 지금 고릴라 천국이 되었다. 사십 년 전만 해도 열 마리 정도밖에 없던 고릴라들이 좋은 생육 조건속에서 군집을 이루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이상기후와 더불어 생태환경이 급속히 나빠지자 미국이나 칠레,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그나마 생태보건에 힘쓴 결과이기도 하다.
요 몇 년 집 안으로 외래의 바이러스가 반경을 좁혀오는 것을 목도한 우리는 그동안 반신반의하던 인간중심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려한 이 세계의 모순과 억압과 폭력이 무의식의 빙산으로 커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뒤집혀 빙산의 일각인 우리를 코 앞에서 강타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돌고래는 한쪽 눈을 감고 잠을 자는데 그러는 사이 한쪽 눈으로는 망을 본다. 한 몸 안에서도 두 개의 눈이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하물며 자기 집, 자기 몸을 안팎으로 돌보고 가꾸지 않으면 쓸데없는 먼지와 쓰레기가 쌓이고 환경이 바뀌면 다른 종의 DNA가 깃든다는 건 뻔한 이치가 되었다.
3. 나침반과 같은 언어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는 뜻을 지닌 사무사思無邪는 공자의 전언인데 지금까지 널리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특함이 없다는 것은 숨기고 있는 비행이나 악행이 없다는 의미로 당연히 시와 시인들의 강령이 될 만하다. 하여 아카데미 인문학 수강생들 앞에서 시를 논할 때 혹은 시를 합평하는 자리에서 평소 내가 강조하는 기본 입장이자 규범이 되기도 하였다.
이 기본지침(사무사思無邪)은 문학가文學家에 발을 들여 놓은 나에게 퍽이나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 주기도 했다. 어지러운 세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무의식 중에 나아갈 길이나 선택의 향방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행위 뒤에는 나름 이 구호 앞에 고해성사를 하듯 무릎을 꿇었다. 언제든 마땅한 도리에서 탈주하는 마음을 바로잡아 인도해 준 것은 이 한 단어였다. 소신으로 모시게 된 이 한 말씀 사무사思無邪의 견고하고도 당당한 교의敎義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글쓰기 강사로서 수업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수업의 방법이나 목적으로 내거는 모토가 되었고, 그들이 쓴 글을 이에 비춰 보면서 질문하고 피드백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안에 존재하는 한 어떤 모욕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어떤 면목 없음으로부터도 다시 생성하고 포용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강조하였다.
4. 유전과 환경의 인터렉션
이런 말씀의 정의를 소중히 여기고 모범으로 지키고자 했음에도 정작 나는 요 몇 개월 불신의 협곡에서 괴로워하며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몸을 돌보려고 시도했던 수술은 쉬 낫지 않았고 이전보다 더 엉망인 생활로 이끌었다. 돌이켜 보면 오랜 시간 정해진 좁은 범주에 나의 몸을 앉혀놓고 혹독하게 부림을 해 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식적인 것, 미적인 것, 정서적인 것을 추구하는 동안 나의 영적·정신적 세계는 어느 정도의 만족과 쾌락을 누려온 반면, 이 심연의 세계에서 돌아와 실재의 몸과 정면으로 만났을 때 그 느낌은 낯선 것이었다. 별거 아닌 듯 주눅 든 몸은 시시한 욕망이나 담아두었던 도구처럼 나를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킬링필드와 힐링필드가 이처럼 가깝다니! 첨예한 경계에서 정작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삐짐 너머 보이지 않는 분노로 도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자식처럼 몸집만 커다란 존재가 왜소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 그동안 버림받았고 혼자서 놀림 받아온 듯한 아이가 친모인 나를 알아보고 피하고 있는 듯. 툭하면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툭하면 물건을 안 보이는 데로 감추고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그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나는 왜가리가 물뱀을 물고 날아오르는 사진을 한 장 보게 되었는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왜가리의 위 밖으로 물뱀의 꼬리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왜가리는 물뱀을 삼켰는데 물뱀의 뾰족한 꼬리는 새의 몸을 찢고 나온 것이다. 나는 이 무서운 장면에서 갑자기 불화를 일으키는 나의 몸과 마음이 떠올랐다. 또한 시간이 흐르자 나의 마음도 차츰 몸을 따라 초록 동색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몸이 싸우는 날에는 그 방향으로 마음이 우르르 몰려가고 마음이 넘어지는 날엔 몸도 퍽퍽 넘어지기 일쑤였다.
5. 현실에 기반을 둔 전복
몸과 마음으로부터 버림받은 나는 급기야 기진하여 병원에서 수액을 맞게 되었다. 혈관이 보이지 않아 여러 번 침을 꽂았다 뺏다 하면서 맞았다. 걸죽한 수액이 흐르다 막힌 건지 혈관을 찾지 못하다 간신히 들어간 주사바늘이 휘어지면서 그런 건지 나의 손등은 곱사등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손이 막히면 몸 전체로 가는 길이 곤죽이 된다. 무거운 것 가벼운 것 알 수 없는 기류가 한 공간에 묶여 누르는 압력이 세다. 아! 그제서야 비명이 새어 나오는데 아파요! 아파요! 소리 지르면 간호사가 달려온다. 주사바늘을 빼고 맑은 수액으로 다른 부위에 침을 꽂는다.
의기소침해진 나에게 그런 배신은 올해 초에 걸린 코로나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유 역시 인류가 자신의 모태인 지구환경을 돌보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문명의 세계를 이룩한 사람들은 지구가 병들자 아픈 지구를 당장 고칠 생각보다 또 다른 우주로의 탈주를 꿈꾸거나 과학을 더욱 발달시켜 그 기술로 치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지구 곳곳에서 홍수가 나고 산불이 나고 사막은 더욱 늘어난다
고 정진규 선생님(필자의 시 스승)은 “공중돌기를 하더라도 땅을 딛고 하라‘는 전언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하지만 나의 시쓰기는 그 반대의 길을 걸어온 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환에 중대한 역할을 한 마네의 회화나 “가시성은 언표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푸코의 앎의 고고학)라는 명제 쪽으로 주욱 걸음을 옮겨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이런 관성의 습관도 조금씩 변화하는 듯하다. 미약한 주체가 느슨하게 대상을 이끄는 화법을 좋아하고 여전히 그런 글쓰기를 선호하지만 문제적 상황 앞에서는 가끔 전과 다른 문체의 글이 나올 때가 있다. 바깥세상이 내 뜻과 다르게 제아무리 암울하고 불안전하게 돌아가도 지치지 않고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수정가능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났을 때 조금 더 가능한 일이란 걸 감지하게 되었다.
6. 나오기
작가는 빛나는 사물이나 감동적 캐릭터를 그리는데 처음부터 그것의 완성체를 그리지 않는다. 별이 뜨기까지 꽃이 피기까지 비와 바람, 천둥과 번개의 과정을 상세하게 그린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을 그릴 때 그 외연에서 혹은 그 바탕에서 지지해 주는 어떤 다리, 어떤 팔, 어떤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계속해서 어둠을 쓰다가 마침내 잠깐 반짝이는 별을 비춰 보이는 것이다. 바람과 천둥과 흐린 날 속에 아주 잠깐 피어나는 한 꽃송이를 꺼내 드는 것이다. 이런 장면에 독자들이 감동한다는 걸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전승되는 인기있는 이야기의 대개가 ‘고난 끝에 얻어지는 낙’을 줄거리로 하고 있지만 현재라고 달라진 건 없다. 그야말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정진규의 시 제목)”한 것이다.
시와 논문을 쓰면서, 혹은 일을 하면서 불문주야 그것의 효능감에만 기뻐하고 골몰했지 다른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왔다. 가족들이 밀어주는 힘 덕분으로 두 권 세 권 시집과 논문집도 늘어났고 운이 좋아 그간 건강에도 큰 탈 없이 지내왔다. 내심 기뻐하면서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믿기까지 했지만 부주의하고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최근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몹시 당황하고 허둥거리게 된 내가 요즘 내 몸을 위무하듯 달래면서 쓰다듬는 것은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때늦은 후회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실수는 병가상사兵家常事라 했으므로 낙담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기로 했다. 내가 선택했다는 이유로 달라진 상황에 대해 너무 긴 자기 불화나 지나친 자기 의심에 휘둘리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 다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무임승차하는 욕망이 다시 커질 때 이런 성급한 본성의 스위치는 얼른 끄고, 유쾌한 자신감이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오래 회피할 때는 얼른 공감의 스위치를 켜주는 총지聰智의 사람이 되고 싶다.
*김경일 인지심리학 박사의 강연 중에서
정민나
1960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동국대 문예창작과 대학원(2012년) 인하대학교 한국문학과 대학원(2018년) 졸업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강사(2017년~현재까지)
시집 E 입국장, 12번 출구(2015년) 외
시론집 정지용 시의 리듬양상(2018년) 외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