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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레코드
정재분
농담인가
장구한 시간 속에서 면면히 회자 되어 온 이야깃거리가 있다. 한낱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 파급이 광범위하고 그 연원이 시초와 맞물려있다. 그러함에도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러함에도 힘과 설득력까지 갖춘 풍문에 인간들은 제 처지와 상황을 비추어보곤 한다. 일목요연하기 어려운 어떤 현상이나 답이 묘연한 의문을 여기에다 대입하면 의미가 엉기고 개념이 돋을새김 되는 역사의 퍼즐 조각이기도 하다. 푸른 녹이 꽃처럼 핀 청동거울 같은 그것은 상승의 기운이 아니라 하강의 기운임에도 그지없이 활달하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수단과 방법이 난무할 뿐 진위 따위에 개의치 않는다. 소문은 믿거나 말거나이며 역사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기꺼이 재밋거리에 머무름으로써 어떤 비전을 제시할 의무에서 제외된다. 모호함 속에서 안주하는 그것은 참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인류 정신의 근간이 되고 있다. 부추겨진 욕망에서 야기되는 갖가지 양태는 존재가 살아가는 피할 수 없는 방법론이라는 듯 사람의 정신과 삶의 태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풍조를 조성하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그것은 신화이다.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 혼재되어 있다. 진위를 따질 것 없다는 듯 기꺼이 뜬소문 방식을 취하는 신화는 그러나 인간사에 깊숙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주요하며 인간들은 그 저변을 배회한다.
소문은 모호한 상황일 때 그 상황을 설명하려는 집단적인 노력이라고 규정한다. 저 무한대로 뻗어 있는 우주 어딘가에 인간 이외의 존재가 있다는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함에도 신들의 이야기가 재생산되고 인간에 밀착되어있는 것은 뚜렷한 현상이다. 외딴곳에 사는 소수민족들도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본질을 궁구하게 만든다. 파급력이 대단한 현상이 소문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주지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심리학자 G. W. 올포트는 소문(rumor)의 정도는 그 내용의 중요성(impotance)에 불명확성(ambiguity)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하였다. R⹀ i⨯a라는 방정식은 스토리 텔링을 보여주는 동시에 은폐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사실 여부나 옳고 그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 신화는 그런 의미에서 미지수이다. 미지수 값인 신화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무게와 부피가 달라진다. 역사가 되기도 하고 망각해도 무방한, 과외 품목이 되기도 한다. 내용의 중요성에 모호함을 곱하는 소문의 형식을 취하는 신화는 발가벗고 있어서 관음하는 자의 수치스러움이 문제 되지 않는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신들은 세상을 조직했지 결코 창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아프로디테 이후 새로운 체계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 이후 수컷과 암컷의 교미를 통해 모든 것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천사들에게 종족 번식 능력을 주지 않으셨는데1) 성을 초월해야 할 수억의 천사2)들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성행위를 원했고 그것을 실행했다. 그 결과, 반은 신이요 반은 인간인 잡종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폭력을 자행했고 악이 가득하여 대홍수로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비물질인 영적 피조물들은 그들이 원할 때 물질화가 가능하고 또한 탈물질도 가능하여 대홍수 때에 지상을 떠났지만, 출생지가 지상인 반신반인은 물질계의 법칙에 지배받는 존재들이라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헤라클레스인데 제우스가 인간 여자, 알크메네를 취하여 낳은 자식으로 그는 힘센 용사였다. 신들의 세계에서 패권을 거머쥔 제우스는 남편 있는 여자였던 알크메네를 취하였다. 사랑을 얻어서 통정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변태하여 알크메네를 속이고 강간하여 얻은 아들이 반신반인인 헤라클레스이다.
진담인가
진위를 가리지도 의를 수호하지도 않는 신화와 달리 성경은 매우 대조적이다. 단호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를 발하는 것이 특징이 있다. “만물을 지으시고”3) 또한 “우리(사람)를 지으신”4) 분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5)이라고 알려준다. 성경은 “결말을 처음부터 알려주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여”6) 주어 무엇이 그분의 뜻인지 분별하도록 가르친다. 참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소명이 주어지듯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룰 것”7)이라고 명시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가장 작은 글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고 다 이룰 것”8)이라고 확약도 한다. 이토록 힘 있는 어조로 참되다고 증거 하는 성경, 창세기에서 소문으로 떠도는 타락한 천사들에 관한, 경위가 땅과 관련한 역사임을 알린다. 결과보고서처럼 간단명료한 창세기 6:1~5 내용은 이러하다.(한글 개역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나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
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느님의 아들들, 곧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의 딸들을 취해서 거인 잡종을 낳았다. 이들 반신반인은 힘이 장사인 고대의 용사였다. 그들은 힘을 오용하여 땅에 폭력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네피림이라고 명명되는 잡종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네피림은 신화의 대표적 반신반인인 헤라클레스류의 성서적 이름일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이 악하다고 정죄하여 홍수로 멸망시켰다9)고 알려준다. 네피림을 르네상스의 작가들은 특별한 존재로 묘사하여 무대에 올렸다.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지닌 그래서 다른 클래스 곧 신들에게서 이용당하기도 한 동정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시초에는 헤라클레스가 고유명사였을 것이나 언제부턴가 반신반인을 통칭하는 명칭이 된 듯하다. “15세기에 와서 우리가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는 다른 헤라클레스와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다른 한 명의 헤라클레스는 갈리아 지역에 ‘알레시아’라는 마을을 세웠고 갈리아 족장의 딸을 통해 ‘갈라테스’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가 바로 골족*의 시조가 된다.” 만일 골족이 어떤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면 “그들의 조상은 라틴족이나 그리스족보다 먼저 문명화되었고 전승되었음을 의미한다.”(<신화와 예술> P141, 헤라클레스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의 왕들이 왕통의 적법성으로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그리스 역사가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전에서 있었던 숭배의 한 가지는 여사제들이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을 신에게 매춘부로 바쳐야 하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마치 이런 기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전에서 성행위를 묘사한 조각품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전쟁으로 손상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과 인도 델리에서 400킬로 떨어진 카주라호 신전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힌두교의 비슈누 신의 적나라한 성애장면이 가득한 카마수트라는 현재 20여 개의 힌두교 사원과 자이나교의 사원을 묶은 순례지로 많은 관광코스가 되어 부도덕이라는 개념을 비웃는다.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변태적이고 쾌락적인 행태가 신전에서 시작된 것은 자명하다. 신들의 세계가 인간들의 세계에 투영된 신화에 인간 역사의 지문이 명확히 찍혀 있다. 아니 신들의 지문이 명확하게 찍혀 있다. 인간이 신들에게 무의식적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선도하고 이끌어주고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문자 신에게서 그런 기대는 부질없을지 모른다.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했던 파우스트(소설, 파우스트 괴테 作)의 경우처럼, 거래는 할지언정 참됨을 기대하기에는 절망적이다.
사랑인가
현대를 사는 인간은 스스로를 신으로 자처하는데 신바람이 났다. 부정관사와 복수 s로 표기되는 god라면 맞먹을만하다는 것일까. 인간은 스스로를 신격에 올려놓음으로써 맛본 자아도취에 중독 증세를 여실히 드러낸다. 몸신, 여신, 트로트신 등, 특출날 것도 없는 대상에 기꺼이 붙는 신종접미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너희가 하느님과 같이 된다”고 한 에덴에서의 뱀-페르소나의 말이 그럴싸해지는 지점이다. 사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놀랍다. 배고프면 잡아먹고 배부르면 누워 자는 동물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이니만치 실로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신의 경지를 넘보는 야심 찬 인간은 “우리가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10) 한” 정관사와 대문자 하느님을 모방하려는가! 인간을 닮은 기계 만들기에 주력하고 그것을 로봇이라고 명명하였다. 로봇이라는 용어는 카렐 차페크(Karel Capek)라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설가가 발간한 R.U.R(Rossum’s Universal Robota) 희곡에서 가지고 왔다. 체코어 로보타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는 의미, 그러나 로봇을 노동에 투입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은 사람과 흡사한 어쩌면 더 월등한 부면을 가진 로봇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각 분야에서 배치된 로봇을 제외시키면, 현대라는 시대적 의미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니만치 가공할만한 우려가 부각 되는 것이다.
처음 로봇을 만들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 세기가 흘렀다. 작금에 등장한 로봇은 외관으로도 사람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정교해졌다. 질문하면 야무지게 대답하는 표정이나 눈 깜박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사람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다. 바둑을 두는 알파고, 의학적 수술에 투입되는 왓슨, 위험한 일에 투입된 다양한 분야의 로봇은 인간의 집적물인 모든 데이터가 입력되었다. 기억의 오류를 가진 인간은 인공지능의 판단을 자신들의 판단보다 더 신뢰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학습하여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쾌거라고 무릎을 치면서도 역으로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닌가 염려한다. 인류는 객관성을 부여받은 기계에게 길을 묻는 미증유의 길목으로 성큼 들어섰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는 새롭게 부상한 판단 권력이 되었으며 그것은 곧 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보다 못한 사람들은 AI를 대통령이 되게 하자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맹신하는 것에 실소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결코 멈추어 서려고 하지는 않는다.
유명한 SF 작가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50년에 발간한 I Robot에서 로봇의 행동을 규제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그중 두 가지를 유의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한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둘째는,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과연 로봇에게 법규를 적용케 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로봇에게 제시한 행동 규범은 곧 그것을 만드는 인간에게 귀속되며 관련하여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지경을 예상하여 사전에 경계를 발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최소한 위에 열거한 법규가 로봇에게 직접적인 것이 되고 모종의 잘못된 어떤 행위에 책임을 물으려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의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이여!(인간들이여!) 그대들을 로봇으로 만들었더라면 규율도 교훈도 책임질 일도 없었을 것인데…… 그러나 하늘의 피조물인 천사들과 땅의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부여되었다. 따라서 정관사 및 대문자로 표기되는 창조주 여호와에게 인간을 잘못 만든 것이 아니냐고 탓할 수 없게 되었다. 개별적인 인간 행로가 운명지어졌거나 어떤 행위를 하도록 예정되었다면 지은 이에게 문제를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예정론의 대척점에 있으며 결과에 대한 책임은 행위자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무언가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 분명한 인간사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에게 전가할 수 없다. 누가 그분의 길에 허방을 두어 윤리적 책임을 운운하며 탓할 수 있을까.11) 오히려 인간에게는 “도덕적 감각과 양심 기능”12)이 장착되어 있다. 양심은 어떤 일에 경고도 하고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며 혹은 변명”13)한다. 양심과 자유의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비추어준다. 결코, 가벼운 선물이 아닌 자유의지는 그러므로 인간 존엄성이 발현되는 지점이다. 대기에 분포된 21%의 산소같이 절묘한 비율의 자유의지는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거룩한 고독이다. 생의 비의(秘義)가 겹쳐진 우주의 정신이 깃들 수 있는 살아있는 성전14)으로 안내하는 불빛이다. 인간 자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인간사용설명서를 잘 읽을 필요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힘의 우위에 있지 않으며 소유와 지식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더더욱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 변별하지 않는 세계로 안내하는 자유의지는 존재의 크기와 상관없이 만족감을 선사한다.
헤르만 헤세의 시가 노랫말이 되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며 얼싸안다/ 기어이 부숴버리고, 내일이면 벌써/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당신은 내가 드린 마음을 귀여운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장난할 뿐,/ 내 마음 번뇌에 떨고 있음은 살피지 않으십니다.(아름다운 사람 - 헤르만 헤세) 인간은 가지고 놀다가 버려도 그만인 장난감이 아니라 사랑을 구현할 수 있는 위대함의 가능성이다. 인간이든 천사이든 창조주의 속성을 구현할 때 자유의지는 존재에 가치가 부여되며 우주의 거대한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서 야기된 자유의지의 오용은 피조물이 애초부터 불량품이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가 품고 있는 벼랑을 유의하지 않은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자유의지의 사전적 의미를 고려해 보자. “여러 대안 가운데서 선택하거나, 또는 어떤 상황에서 자연, 사회, 신의 구속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선택한 결과에 따르는 책임이 행위자에게 귀속된다는 점도 함께 명시해야 마땅하다. 이미 결정된 미래시제는 현재 진행형 be ~ing 꼴을 취한다. 자유의지는 정보를 제공하되 강요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며 사랑의 있고 없음은 피조물의 몫이다.
1) 마태복음 22:30, 다니엘 7:10. 2) 유다서 6, 7절, 창세기 6:1-5. 3) 히브리서 3:14, 계시록 4:11. 4) 창세기 2:7, 욥기 14:15. 5) 디도서 2절. 6) 이사야 46:10. 7) 이사야 55:11. 8) 마태복음 5:18. 9) 베드로 후서 2:3, 3:5-6. 10) 창세기 1:26~27. 11) 로마서 11:33-34. 12) 로마서 2:15. 13) 마태 22:37. 14) 고린도전서 3:16.
*골족 : 현재 프랑스 지역은 고대에는 갈리아라고 불렸고, 골족(켈트의 한 일파. 속칭 갈리아 켈트)의 영역이었다.
정재분
2005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그대를 듣는다, 노크 소리를 듣는 몇 초간
산문집 침묵을 엿듣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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