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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鄭逑)
출생일 1543년(중종 38)
사망일 1620년(광해군 12)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정윤증(鄭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6대조 정총(鄭摠)과 그 아우인 정탁(鄭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정곤수(鄭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1603년 『남명집(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병진(兵陳)·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한 이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오복연혁도(五福沿革圖)』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 『퇴계상제례문답(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예학은 국가례(國家禮)와 사가례(私家禮)를 하나의 체계 속에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주자의 총체적인 예학을 추구하였다. 동시에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차별성을 강조해 17세기 예학의 한 경향인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의 단초를 열었다.
이는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체재를 모범으로 하고 사마광(司馬光)·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자 등의 예설을 바탕으로 해 가(家)·향(鄕)·방국(邦國)·왕조례(王朝禮)를 복원한 『오선생예설분류』에 잘 나타나 있다.읍지에도 관심이 많아 1580년『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한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편찬해 『동복지(同福志)』·『관동지(關東志)』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하였다.
특히 『영가지(永嘉志)』·『평양지(平壤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해 후대의 읍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咸州志)』 하나 뿐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생민(生民)도 있었지만 풍속의 순화와 교육, 즉 교화에 주안점이 있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心經)』을 중시하였다. 외출할 때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였다.
1603년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비판한 이황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心經發揮)』를 저술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이정(二程, 정이, 정호)과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잘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이황학파의 하나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 역시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분류해 『개정주자서절요총목(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聖賢風範)』·『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역사서로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영향을 받으면서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를 정리해 뒤에 나타나는 정통론과 강목체 사서와의 매개 역할을 한 『역대기년(歷代紀年)』과 역대 인물들의 정리와 평가의 성격을 지닌 『고금충모(古今忠謨)』·『치란제요(治亂提要)』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문학서로서는 『고금회수(古今會粹)』·『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등을 편찬했으며, 의학서로는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집방(醫眼集方)』과 집에 소장한 의학서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뽑아 정리한 『광사속집(廣嗣續集)』 등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은 이황학파의 주자를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서경덕·조식학파의 박학(博學)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였다. 근기남인 실학파의 탈주자학적 사상의 뿌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서경덕·조식에 있었는데 그는 이 한 부분을 전달해주는 교량 역할을 했던 것이다.
상훈과 추모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구(鄭逑))]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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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시호(諡號) 문목(文穆)
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
졸년 미상(未詳) (미상)
시대 조선중기
왕대 선조(宣祖)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항목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사헌부대관(司憲府臺官)
[지방관] 조선중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릉부사(江陵府使) 1593[계사(癸巳)]
[지방관] 조선중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1595[을미(乙未)]
[관인정보]
제수년월 1594 [갑오(甲午) 11월] 래(來: 부임되어 옴)
[관력 정보]
관직 대사헌(大司憲)
[출전]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9727])
정윤증(鄭胤曾)
[생원] 성종(成宗) 3년(1472) 임진(壬辰)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3위(83/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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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어모(禦侮)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옥경(鄭沃卿)[文]
관직 : 경력(經歷)
[출전]
『성화8년임진○월○일사마방목(成化八年壬辰○月○日司馬榜目)』(전의이씨(全義李氏) 전산군파(全山君派) 이왕섭(李旺燮))
정옥경(鄭沃卿)
[문과]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3위(13/4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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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정옥경(鄭玉京)【補】(주1)
자(字) 몽필(夢弼)
생년 병신(丙申)【補】(주2) 1416년 (태종 16)
졸년 무자(戊子)【補】(주3) 1468년 (세조 14)
향년 53세
합격연령 38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乙3‧丙7‧丁30]
전력 사직(司直)
관직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문과시제 책문(策問):치무(治務)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효충(鄭孝忠)(주4)
[조부(祖父)]
성명 : 정총(鄭摠)[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추(鄭樞)[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탁신(卓愼)[麗文]
본관 : 광산(光山)【補】
[처부(妻父)]
성명 : 조자(趙慈)
본관 : 한양(漢陽)【補】
[주 1] 초명 : 『청주정씨세보(淸州鄭氏世譜)』(1827, 국립중앙도서관[古2518-70-112])와 『청주정씨대동보(淸州鄭氏大同譜)』(2002)를 참고하여 초명을 추가.
[주 2] 생년 : 『청주정씨세보(淸州鄭氏世譜)』(1827, 국립중앙도서관[古2518-70-112])와 『청주정씨대동보(淸州鄭氏大同譜)』(2002)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3] 졸년 : 『청주정씨세보(淸州鄭氏世譜)』(1827, 국립중앙도서관[古2518-70-112])와 『청주정씨대동보(淸州鄭氏大同譜)』(2002)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4] 부 :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11655]),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과 『서원정씨세보(西原鄭氏世譜)』, 『청주정씨세보(淸州鄭氏世譜)』(1827, 국립중앙도서관[古2518-70-112]), 『청주정씨대동보(淸州鄭氏大同譜)』(2002)에는 부명이 "정효충(鄭孝忠)"으로 기록되어 있음.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에만 "정충효(鄭忠孝)"로 적혀 있음.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정총(鄭摠)
[고려문과] 우왕(禑王) 2년(1376) 병진(丙辰) 병진방(丙辰榜) 을과(乙科) 1[壯元]위(1/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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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만석(曼碩)(주1)
호(號) 복재(復齋)
시호(諡號) 문민(文愍)
졸년 정축(丁丑)【補】(주2) 1397년 (태조 6)
본인본관 청주(淸州)(주3)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정당문학, 예문춘추관태학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추(鄭樞)주 01)이며, 조선개국공신 정탁(鄭擢)의 형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9세로 춘추관검열이 되고, 대간·응교·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1389년(공양왕 1)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
조선개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1394년(태조 3) 정당문학이 되고, 다시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고려사』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때마침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트집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총(鄭摠))]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기타 훈신(勳臣)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추(鄭樞)[麗文]
[조부(祖父)]
성명 : 정포(鄭誧)[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책(鄭㥽)
[외조부(外祖父)]
성명 : 한대순(韓大淳)
[처부(妻父)]
성명 : 김수(金随)
[가족과거]
손(孫) : 정옥경(鄭沃卿)[文]
[주 1] 자 :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1397) 11월 30일」 졸기 기사와 『서원정씨세보(西原鄭氏世譜)』에는 자가 "만석(曼碩)"으로,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에는 "만기(蔓期)"로 기록되어 있음.
[주 2] 졸년 :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1397) 11월 30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본관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 나오는 “청주(靑州)”는 “청주(淸州)”의 오기임.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정추(鄭樞)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2년(1353) 계사(癸巳) 계사방(癸巳榜) 동진사(同進士) 19위(29/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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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정연(鄭衍)【補】(주1)
자(字) 공권(公權)
초자(初字) 행루(行累)【補】
호(號) 원재(圓齋)
시호(諡號) 문간(文簡)
생년 계유(癸酉) 1333년 (충숙왕 후2)
졸년 임술(壬戌)【補】(주2) 1382년 (우왕 8)
향년 50세
합격연령 21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333년(충숙왕 2)∼1382년(우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
조부는 판선공(辦繕公) 정책(鄭㥽)이고, 부친은 설곡(雪谷) 정포(鄭誧)이다. 정포는 충혜왕 때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냈으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는 1353년(공민왕 2)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지공거(知貢擧)로 한 과거에 급제한 이후 예문검열(藝文檢閱) 및 여러 관직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올랐다.
1366년(공민왕 15)에 인척인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죄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큰 고초를 당하였다. 신돈은 반대파 숙청을 위한 무고의 기회로 삼으려 거짓 자백을 강요했으나 정추는 폭압적 문초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발탁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가 고려 멸망 10년 전인 1382년에 병사하였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이제현에 잇닿아 있다. 그는 문생으로서 “어릴 때부터 공경하며 역옹(櫟翁)을 섬겼다”고 하였는데, 당대의 병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문풍을 진작시키려 했던 익재의 사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익재의 영향은 그의 시문에 내용과 성격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이곡(李穀)과 돈독한 교유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는 선대의 인연을 이은 것으로 정포와 이곡 역시 돈독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수십 년간을 교류하였는데, 시적 교류 역시 왕성하여 그들의 시문집에는 서로 화운한 시편이 상당수에 이른다. 한수(韓修)는 정추와는 동갑이며 인척관계였다. 그는 문재로 이름이 있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정추는 당시 국권을 전횡하며 사회악을 빚어내던 권문세족 및 부원배(俯元輩)와 대립하던 전형적인 여말 사대부였다.
그에 대하여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는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의 치열했던 정치의식은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부친이나 좌주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변(變)’에 대한 중시라는 그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물이란 무형에서 생겨나 형(形)에 얽매이게 된다. 형에 얽매인다면 변하기 어렵다. 변하기 어렵게 되면 리(理)에 모자람이 있게 된다. 나는 무형을 주장하여 그 변을 숭상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추가 자신을 ‘무형자(無形子)’로 자호하고, 호에 ‘원(圓)’자를 쓴 이유도 바로 변의 추구에 있다. 고착화된 상태를 부정해야만 변화가 가능하며,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어야 장애를 돌파하며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할 때,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관직 첨의(僉議)
관직 동래현령(東萊縣令)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봉호 청원군(淸原君)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포(鄭誧)[麗文]
[조부(祖父)]
성명 : 정책(鄭㥽)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해(鄭瑎)[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최문도(崔文度)
[처부(妻父)]
성명 : 한대순(韓大淳)
[주 1] 초명 : 『목은방목(牧隱榜目)』(한국국학진흥원[한산이씨 소산(小山[李光靖]) 종가])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초명을 추가.
[주 2] 졸년 : 『인물 생애 정보』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정포(鄭誧)
[고려문과] 충숙왕(忠肅王) 13년(1326) 병인(丙寅) 병인방(丙寅榜) 을과(乙科) 2위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815D3ECFFFFB1309X0
자(字) 중부(仲孚)
호(號) 설곡(雪谷)
생년 기유(己酉) 1309년 (충선왕 1)
졸년 을유(乙酉) 1345년 (충목왕 1)
향년 37세
합격연령 18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전리총랑, 좌사간대부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해(鄭瑎)의 손자이다. 판선공(判繕工) 정책(鄭責)의 아들이며,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다.
정포는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얼마 뒤에 예문수찬으로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 중이던 충숙왕을 배알하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충혜왕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郎)에서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다.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면 당하였다. 이때에 어떤 이가 정포가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여 끝내 울주(蔚州)로 유배당하였다. 유배 중에도 오히려 태연자약하여 활달한 장부의 기질을 잊지 않고 풍류생활을 즐겼다.정포는 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다. 원나라 승상인 별가불화(別哥不花, 別哥普化)가 그를 한번 보고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어 원나라 임금에게 추천하였다.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포는 최해(崔瀣)의 문인으로 이곡(李穀) 등과 사귀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의 시집인 『설곡시고(雪谷詩藁)』가 전하고 있고 다수의 시가 수록된 『설곡집(雪谷集)』도 전하므로 구체적인 문학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이 쓴 「설곡시서(雪谷詩序)」에서 정포의 불행하였던 일생에 대하여 애석해한 글귀들이 나타나는바, 이를 통해 그의 인물됨과 재식(才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색(李穡)의 「설곡시고서(雪谷詩藁序)」에서 정포의 시를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않아,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하여, 높은 수준의 시경(詩境)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체험을 품격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포(鄭誧))]
[이력사항]
관직 직학(直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책(鄭㥽)
[조부(祖父)]
성명 : 정해(鄭瑎)[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현(鄭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순(金恂)
[처부(妻父)]
성명 : 최문도(崔文度)
[가족과거]
형(兄) : 정오(鄭䫨)[麗文]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정책(鄭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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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고려시대
활동분야 관료
[상세내용]
정책(鄭㥽)
생졸년 미상.
이제현(李齊賢)이 쓴 「김문영 공 부인 허씨 묘지명(金文英公夫人許氏墓誌銘)-병서(幷序)」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부인의 성은 허씨(許氏)이니, 중찬 문경공(中贊文敬公) 휘(諱) 공(珙)의 둘째 딸이다. 조부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이니, 휘는 수(遂)이며, 증조부는 예빈소경(禮賓少卿)이니, 휘는 경(京)이다. 모친은 윤씨(尹氏)이니,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평공(文平公) 휘 윤극민(尹克敏)의 딸이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근실하였으므로 문경공의 사랑을 받았다. 윤씨(尹氏)의 장삿날이 곧 을축일(乙丑日)인데, 어떤 사람이 부인이 태어난 해라 하여 다시 정하기를 청하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 이 여아는 뒤에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혐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자라서 좋은 사위를 골라 착한 정승 상락군(上洛君)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아내가 되었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 큰 가문이어서 부호함이 서로 높았으나, 부인이 예법으로 처신하니, 사람들의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문영이 늦게 노래와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질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문영공보다 12년 후인 지순(至順) 임신년(충숙왕 복위 1) 7월 신묘일(辛卯日)에 병으로 세상을 마쳤는데, 모두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김영돈(金永暾)이니,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夫典法摠郞)이요, 둘째는 김영휘(金永暉)이니, 흥위위 낭장(興威衛郞將)이며, 셋째는 출가한 이름이 사순자은종대덕(思順慈恩大德)이며, 넷째는 영후(永煦)이니, 봉선대부(奉善大夫) 자섬사사(資贍司使)이다.
맏딸은 대광(大匡) 청하군(淸河君) 정책(鄭㥽)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인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대광(大匡)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원 나라 사람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출가하니, 강절성 참지정사(江浙省參知政事)이다.
[참고문헌]
東文選益齋亂藁
정해(鄭瑎)
[고려문과] 원종(元宗) 13년(1272) 임신(壬申) 임신방(壬申榜) 을과(乙科) 2위(2/41)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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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정현계(鄭玄繼)
자(字) 회지(晦之)
시호(諡號) 장경(章敬)
생년 갑인(甲寅) 1254년 (고종 41)
졸년 을사(乙巳) 1305년 (충렬왕 31)
향년 52세
합격연령 19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밀직사사, 판삼사사, 도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정현계(鄭玄繼). 자는 회지(晦之). 대장군 정의(鄭顗)의 손자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교감(秘書校勘)에 보임된 뒤 충렬왕 초에 대상부녹사(大常府錄事)로서 필도치(必闍赤:서기직)가 되었고, 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온 뒤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다.
1292년(충렬왕 18) 우승지가 되어 전주(銓注:인사행정)를 관장함에 공정하다는 평이 있었다. 지신사(知申事)·부지밀직(副知密直)·남경유수(南京留守)·광릉부윤(廣陵府尹)을 거쳐 1298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한희유(韓希愈)를 무고한 사건으로 이듬해 파직되었다.
1303년 첨의참리(僉議參理)에서 밀직사사,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고, 1305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가 별세하였다.
1305년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한종유(韓宗愈)·김영돈(金永旽)·장자빈(張子贇) 등을 시취(試取)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낭중(征東行省郎中)·유학제거(儒學提擧)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마음은 너그럽고 조용하나 일에는 민첩하고 용감하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해(鄭瑎))]
[이력사항]
선발인원 41명
관직 찬성사(贊成事)
기타 신미사마(辛未司馬)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현(鄭儇)
[조부(祖父)]
성명 : 정의(鄭顗)
[증조부(曾祖父)]
성명 : 정효문(鄭孝聞)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란(鄭蘭)
[처부(妻父)]
성명 : 김구(金坵)[麗文]
본관 : 부령(扶寧)【補】
[처부(妻父)2]
성명 : 홍규(洪奎)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정의(鄭顗)
출생일 미상
사망일 1233년(고종 20)
고려후기 분대녹사, 섭중랑장, 대장군 등을 역임한 관리.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정준유(鄭俊儒)이다.
1217년(고종4) 거란군이 서경에 침입하자 이 틈을 타 서경인 최광수(崔光秀)등이 스스로 고구려부흥병마사 금오위섭상장군(高句麗復興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이라고 칭하며 난을 일으켰다.
이에 분대녹사(分臺錄事)로 일당 8명을 격살시키고 성을 회복하였다.
그 공으로 섭중랑장(攝中郎將)이 되어 내시에 소속되었으며 의관과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시랑을 거쳐 대장군이 되었다.
1233년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에서 모반하자 선유(宣諭)의 임무를 띠고 서경에 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의(鄭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