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신군의 전성시대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무렵에 전국 4공자라 하여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고,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었으며, 위나라에는 신릉군이 있어서 바야흐로 앞을
다투어 선비들을 예우하여 식객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서로 남을 기울게 하고
자신의 나라를 돕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이 된 지 4년 후에 진나라는 장평싸움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격파했고, 이듬 해에는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
조나라가 초나라에 위급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므로 춘신군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되었는데 마침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기 때문에 춘신군도 귀국하였다.
춘신군은 재상이 된 지 8년 만에 북벌을 감행하여 노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에
초나라는 다시 강성해졌다.
어느 날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춘신군은 그를 임금의 객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데 그 사신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서 대모로 만든 비녀와
주옥으로 장식한 칼집을 가지고 춘신군의 식객들을 불러서 만났다. 그런데
춘신군의 식객은 3천 명으로 그 중의 많은 수가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고서
사신을 만났으므로 그 사신은 오히려 크게 부끄러워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14년이 되었을 때 진나라의 장양왕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았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2년 후에는 제후들이 진나라의 공격과 정벌이 그칠
날이 없음을 우려하고 서로 합종을 하여 서쪽으로 진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였다.
이때 초나라의 왕이 책임자가 되고 춘신군이 그 실무를 담당하였다. 연합군이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가 군대를 보내 공격을 하자 제후의 군대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고열왕은 그러한 일을 춘신군의 잘못으로 돌렸다. 이 일로
인하여 춘신군은 왕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때 춘신군의 빈객 중에 주영이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는 강대한데 나으리께서 나약한 군대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왕 시절에 진나라와 친선을
한 기간이 20년이 되는데도 진나라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진나라가 요새를 넘어서 공격하는 것이 불편하며, 동주, 서주에게 길을 빌리고, 한,
위를 등지고 우리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위나라는 아침, 저녁으로 망할 형편이므로
허땅을 할양하여 진나라에게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나라 군대가 우리 나라의
수도인 진성과 160리 정도의 짧은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는
바로는 앞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날마다 전쟁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춘신군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왕에게 말하니, 초나라는 드디어 수춘으로 수도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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