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부사과(行副司果) 어득강(魚得江)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은 생각하건대, 신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과 아내가 남편에게 절개를 다하는 것은 모두 하늘이 준 떳떳한 도리인데 어찌 후일의 정려(旌閭)나 상(賞)을 받는 영광을 바라서이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혼인(婚姻)을 제때에 하지 않으면 정녀(貞女)가 부정해지게 되고, 예악(禮樂)이 조화되지 않으면 군자가 화락하지 못하는 것이니 위에서 선(善)을 좋아하는 성의에 있어 부득이 권장하는 법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자면 신라(新羅) 때는 효녀(孝女)에게 곡식과 집으로 상을 주었기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성의가 후세를 용동시켰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정문(旌門)은 있으나 상전(賞典)이 없으니, 신은, 신라의 풍성함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약간의 물건을 내리고 또 거기다 복호(復戶)까지 해 주어 근대에 없던 정사를 거행해서 일대(一代)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국가의 예악(禮樂)이 백여 년이나 되었는데 주(周)나라의 법도는 금과옥조(金科玉條)여서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금슬(琴瑟)이 때때로 조화를 잃으면 반드시 바로잡아서 타야 하고, 사람이 가끔 조화를 잃으면 반드시 약석(藥石)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신이 폐단을 진술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금슬(琴瑟)에서 팽팽한 현(絃) 하나를 늦추고 사람의 몸에서 구부러진 손가락 하나를 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당장은 시원스럽게 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에 어두운 것이 폐단입니다.
신은 마땅히 서사(書肆)를 설치해야 한다고 하는데, 답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어찌 여러 책을 널리 찍어 서사에 보내겠는가.’라고 하니, 이는 오늘 서사를 설치하여 내일은 그 서사에 책을 가득 채우려는 생각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서사를 한번 설치해 놓으면 서적들이 저절로 모여드는 것이 마치 온갖 물건이 시장을 몰려드는 것처럼 된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또 전조(前朝)와 본조(本朝)의 충신(忠臣)ㆍ효자(孝子)ㆍ효녀(孝女)ㆍ순손(順孫)ㆍ절부(節婦)ㆍ열녀(烈女)에 대해 정표하는 문려(門閭)를 세우거나 혹은 장승[栍]을 세워 이름을 쓰고 혹은 비석을 세워 이름을 새기는 데 있어 수령들은 으레 자신이 직접 쓰지 않고 글씨도 잘 못쓰는 이서(吏胥)들에게 쓰게 해서 볼품이 없고 알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신은, 다시 장승을 세우고 이름을 새겨서 각(閣)을 지어 보호하고 단청(丹靑)까지 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정문에 대한 한 가지 일은 관찰사가 계문(啓聞)하면 으레 해조(該曹)에 내리는데, 색리(色吏)가 이를 문서 사이에 끼워 두고는 달이 가고 해가 바뀌도록 영원히 거행을 하지 않습니다. 충신과 효녀는 세대마다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 우리 나라의 사기(史記)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경주(慶州)에서 간행하여 그 판(板)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고려사절요》는 주자(鑄字)로 찍어 반포하였는데 이를 본 유자(儒子)가 드뭅니다. 근세에 서거정(徐居正)이 사국(史局)을 총재(摠裁)하고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하였는바 매우 해박할 뿐더러 주자로 찍어 반포한 것인데 역시 세상에 보기가 드뭅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의 사론(史論)과 권근(權近)이 쓴 《고려사절요》의 사론(史論)은 문장이 간고(簡古)하여 지금 한 마디도 도울 수가 없으나 서거정의 사론은 김부식이나 권근의 사론보다 아주 못합니다. 이는 모든 글이 서거정의 손에서 나오지 않고 보좌하던 신진(新進)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아서입니다. 만일 중국 사람이 《동국통감》을 얻어서 본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의 문장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또 《동국통감》을 찍은 글자가 너무 자잘하니 지금 다시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사론과 문장을 다시 필삭(筆削)해야 합니다.
신이 유용장(劉用章)이 편집한 《신증송원통감(新增宋元通鑑)》을 보았더니, 옛 군현(郡縣)의 이름 밑에다 반드시 현재의 이름을 쓰고 그 땅이 어디서 몇 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쓰기를 한결같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같이 하여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지리(地理)가 일목 요연합니다. 이제 의당 이것을 본받아서 《동국통감》을 《송원통감》과 똑같이 상밀(詳密)하게 하고 주자(鑄字)로 많이 찍어서 국용(國用)으로 반사(頒賜)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사(書肆)로 보내 온 나라 사람들 중에 우리 나라의 흥망의 역사를 모르는 자가 없게 해야 합니다.
대체로 시(詩)는 계산(溪山)ㆍ강호(江湖) 사이에서 많이 나옵니다. 근세 사람 김시습(金時習)이 출가(出家)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다니며 지은 시문(詩文)이 당시 제일이었습니다. 당(唐)나라의 장열(張說)은 악주(岳州) 원으로 있으면서 아름다운 강산 때문에 시사(詩思)가 크게 향상되었고,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은 우혈(禹穴)과 형(衡)ㆍ상(湘) 땅을 탐방하고는 그의 글이 웅장 심원해졌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젊고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가려 사절(使節)처럼 금년에는 관동 지방을, 다음해에는 영남 지방, 호남 지방, 호서 지방, 서해 지방, 관서 지방, 삭방(朔方)을 차례로 드나들면서 모두 탐방하게 하되 마음대로 실컷 유람하면서 그 기(氣)를 배양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주서(注書)로 있을 때 우연히 천사(天使)를 접대한 《등록(謄錄)》을 보니 관반(館伴)이 천사에게 양주(楊州)와 익주(益州)의 경치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답하기를 ‘양주는 풍요하지만 산천이 아름답지 못하고, 익주는 산천이 수려하지만 풍요하지 않다.’ 하였는데, 이를 보면 중국의 규모를 충분히 알 만합니다. 우리 나라 선비들은 우리 나라를 두루 탐방하지 않아 만일 중국에 들어갔다가 중국 사람이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중외(中外)의 거자(擧子)들이 과장에 들어갈 때, 수협관(搜挾官)이 문 밖에서 갖고 들어가는 책을 조사하지만, 한번 과장에 들어간 다음에는 전혀 검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들어간 책이 앞에 쌓여 있는데도 시관(試官)이나 대간(臺諫)이 보고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수협관이 문에 있을 것이 아니라 종일 장내를 돌아다니면서 앞에 싸놓고 펼쳐보는 책을 빼앗아 시관이 보는 앞에다 쌓아 놓고 후장(後場)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여 시험이 끝난 후에 시관이 그 책들의 목록을 갖추어 예조에 계하(啓下)해서 쓸 만한 책을 가려서 가격을 매겨 서사(書肆)로 보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런 법이 한번 시행되면 과장에 들어가는 거자들이 한 권의 책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시관(試官)으로 하여금 출제(出題)한 뜻을 장(場) 안에 게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전의 시관들은 출제한 뜻을 말해 주지 않아서 잘못 들어온 거자들이 많았으니,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국가에서 대거 취인(取人)할 때에는 3소(所)에서 각각 1~2백 명을 뽑아 강경(講經)할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정(殿庭)에서 시험보입니다. 양전(兩殿)은 모두 시조(視朝)하는 곳인데 식년시(式年試)의 거자 33인의 경우는 괜찮겠습니다마는 숫자가 많은 별시(別試)에는 전정을 마구 짓밟고 돌아다니고, 예에 따라 모두 밥을 주지만 사람이 많아서 두루 주지도 못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별시 역시 식년시의 예에 의해 초시(初試)에서 많은 선비들을 강경(講經)으로 사태(沙汰)시킨 다음에 전정에서 시험을 보이면 시관의 취사(取捨) 역시 정(精)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연례 별시(年例別試)는 초시는 지방에서, 복시(覆試)는 서울에서 보이는 것이 매우 편리하고 합당한데, 논하는 사람들이 조종조에서 그런 예가 없다 하여 팔도의 많은 선비를 모아 서울에서 시험을 보입니다. 그래서 먼 고장의 가난한 선비들이 떼를 지어 여사(旅舍)로 몰려 들어 외상으로 숙식(宿食)을 하고 뒤에 갚으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나라에서 사람을 뽑으면서 어찌 상법(常法)에 구애되겠습니까. 편리한 대로 거행하는 것이 바로 법례(法例)인 것입니다. 신은, 이후부터는 특지(特旨)에 의해 갑자기 취인(取人)하는 이외의 연례 별시는, 초시는 지방에서 하고, 복시는 서울에서 하는 것을 항례(恒例)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이덕유(李德裕)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도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장상(將相)을 두루 지냈고, 나은(羅隱)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도 역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으며, 후량(後梁)이 당나라를 찬탈하고는 그를 불러 간의(諫議)를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아 그 절의조차 높았습니다. 고려 때 임춘(林椿)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도 그의 유고(遺稿)가 세상에 전하여지고 아조(我朝)의 강석덕(姜碩德)도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역시 관직(館職)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라 하여 꼭 다 글을 잘 하는 것이 아니요, 합격하지 못한 자라 하여 반드시 글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합격하고 못하는 것은 행(幸), 불행(不幸)일 뿐인데, 오로지 과거 출신자만 취하면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이 많아서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한나라 정현(鄭玄)은 생도들을 모아 가르쳤고 수(隋)나라의 왕통(王通)은 하분(河汾)에서 강학(講學)하였으며, 당나라 이발(李渤)은 남당(南唐) 때 백록동(白鹿洞)의 주인이 되니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으므로, 송나라 황제가 구경(九經)을 내려서 장려했습니다. 주자(周子)ㆍ장자(張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에게 각기 문도가 있었는데 그 문하에서 나온 자는 모두 명공석유(名公碩儒)로서 스승보다 더 나았습니다. 이공택(李公擇)은 산방(山房)에다 만 권의 책을 간직하여 학자들과 함께 이용했고, 주희(朱熹)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백록 서원(自鹿書院)을 설립했습니다. 이런 도가 우리 나라에는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먼 곳에 있는 유생들이 어디서 학문을 배우겠습니까.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강원도는 선비들이 시서(詩書)를 숭상하니, 신은, 충청도ㆍ강원도ㆍ전라도의 중앙과 경상 좌우도에 각기 한 사찰(寺刹)을 얻어서,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를 막론하고 도내의 명유(名儒)들을 불러 모아 1년의 사중월(四仲月)에 상하의 재(齋)로 나누어 앉아 독서하게 하는 것을 연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상도는 주군(州郡)의 학전(學田)에서 나온 소출로 6월의 도회(都會) 때와 겨울 3개월 동안 모여 독서하는 비용으로 쓰는데,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옮겨다 사중월(四仲月)의 비용으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 부족한 것은 관에서 보태어 항상 40~50인이든 혹은 20~30인이든 많고 적음에 구애되지 말고 모아서, 관질(官秩)이 높은 수령을 시관(試官)으로 삼아 두 교수(敎授)와 혹은 현감(縣監)까지 세 사람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권과(勸課)하여 제술(製述)하게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 분수(分數)를 따져 생원ㆍ진사는 문과(文科)의 관시(館試)ㆍ한성시(漢城試)ㆍ향시(鄕試)에 응시하도록 차등 있게 자격을 수여하고, 유학(幼學)은 생원ㆍ진사시의 복시(覆試)에 바로 응시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선비들이 모두 즐겨 따라서 권하지 않아도 저절로 권장될 것입니다.
고려와 본조(本朝)에서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자는 의논이 있어 온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세상에 쓰인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보았던 사람으로는, 고(故) 참판 김극검(金克儉), 대사헌 이인형(李仁亨)이 있는데, 모두 장원 급제하여 청렴하기로 당시에 유명했습니다. 이인형은 여러 차례 수령을 지냈는데, 기개가 매우 굳세어 감사(監司)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청렴하다는 명망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또 이우(李堣)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어 인자하고 청렴하고 간솔(簡率)하게 정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곳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려 하였는데, 신이 그때 고성(固城)에서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생사당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을 역설하여 그 계획을 막았습니다. 이 세 사람은 그 자손들을 녹용해도 부끄럽지 않다고 여깁니다. 신이 아는 사람은 이 세 사람뿐인데 신이 모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신은, 그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관작이 그 사람과 그의 후손에게 아울러 미치는 것은 더더욱 세상에 드문 일이니 현증(顯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충신의 이름은 청백리보다 더 중합니다. 고려 시대는 시대가 멀어서 모두 녹용할 수 없지만 본조 충신의 자손 가운데 녹용할 만한 자는 녹용해야 합니다.
정여창(鄭汝昌)은 힘써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지냈는데 청렴 간결하게 법을 지켰고, 김굉필(金宏弼)은 생원으로 조정의 천거에 의해 주부(主簿)가 되고, 곧 승진하여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폐조 때 모두 서북 지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조행(操行)은 다 훌륭하지만 국량(局量)이 아주 좁아 변통성이 없었으니 한 가지 절(節)을 지닌 선비이지 사시(四時)에 유행하는 원기를 크게 조화시킨 자는 못됩니다. 그런데 근세에 사론(土論)이 이 두 사람을 존숭(尊崇)하여 후생들을 권면하기 위해 의정(議政)으로 증직하고 또 세사(歲祀)까지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5~6품(品)의 관원을 갑자기 숭품(崇品)으로 올리면 너무 지나치게 뛰어오른 것이니, 1~2등을 낮춰 다시 증직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鄭汝昌, 力學登第, 爲安陰縣監, 淸簡守法。 金宏弼, 以生員, 廷薦爲(王)〔主〕 簿, 驟陞持平。 在廢朝, 俱徙西北, 二人操行則同。 但局量頗狹, 不能變而通之。 一節之士, 非太和元氣流行於四時者。 近歲士論, 欲尊崇二人, 以勸後進, 贈爵至於議政, 又加歲祀。 臣以謂五六品之員, 遽至崇品, 超越太過。 降一二等改贈, 似爲得中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