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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노참봉
고대일록 제2권 / 을미(乙未, 1595) / 겨울 10월
○ 겨울 10월〔冬十月〕경자(庚子) 초하루
나는 서원(書院)에 갔다. 원장(院長), 노계시(盧啓時) 어른, 충보(忠甫)ㆍ진군술(陳君述)ㆍ강위서(姜渭瑞)와 알묘(謁廟)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왔다. 찰방(察訪) 김지화(金志和)를 개울가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회를 쳐서 먹으며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어둠을 타고 집에 돌아와 지부(志夫)ㆍ사고(士古)ㆍ형언(亨彦)과 촌사(村舍)에서 같이 잤다.
○ 10월 16일 을묘(乙卯)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城)이 남원(南原)에서 운봉(雲峰)을 지나 오후에 군(郡)에 이르렀다. 책봉천사기(冊封天使旗) 한 쌍, 좌위도독부(左衛都督府) 한 쌍, 숙정(肅靜)ㆍ회피(回避)ㆍ군령(軍令) 각각 한 쌍을 세웠고, 기타 기(旗)ㆍ고(鼓)ㆍ참도(斬刀)ㆍ철여의(鐵如意) 등의 물건들이 부사(副使)의 행차와 대체로 같지만 수(數)는 두 배나 되었다. 군호(軍號) 500여 명과 장관(將官) 62명, 병거(兵車) 19량, 천문(天文)ㆍ음양(陰陽)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 등의 관리(官吏)들이 모두 잘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국 사신의 사람됨은 모습이 준수하고 얼굴이 풍후(豊厚)하니, 진실로 부귀한 얼굴상이었다. 개벽 이래로 조사(詔使)가 이곳까지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왜적들의 난동이 없었다면, 중국 사신이 어찌 여기에 왔겠는가. 접반사(接伴使) 김수(金睟)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홍세태(洪世泰)도 이르렀다.
○ 노 참봉(盧參奉)과 충보(忠甫)가 나를 찾아와서 같이 잤다.
○ 10월 19일 무오(戊午)
나는 덕곡(德谷)으로 가서 경소(景紹)ㆍ경후(景厚)를 방문했다가 박경실(朴景實) 형을 만났다. 조간보(趙幹甫) 형을 조문하고, 해거름에 지부(志夫)의 집에 이르러 그와 함께 잤다. ○ 길에서 유정서(柳廷瑞)를 만나 김백명(金伯明)의 소식을 들었다. ○ 중국 사신이 해인사(海印寺)에 이르러 부처에게 절을 하였다. 그들의 사람됨을 알 만한데, 그들이 전대(專對)할 수 있겠는가.
○ 10월 22일 신유(辛酉)
전적(典籍) 안언우(安彦優)와 정사고(鄭士古)가 나를 찾아와 서로 이야기를 하였다. 해거름에 죽곡(竹谷)에서 성주(城主)를 뵈었다. 성주가 돌아가 부모를 뵐 뜻이 있었으나,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다. ○ 오늘 밤 임인백(林仁伯)이 찾아와 함께 잤다.
임인백(林仁伯) : 임제민(林濟民)의 자(字). 본관은 나주(羅州).
○ 10월 29일 무진(戊辰)
성주(城主)가 중국인에게 맞아서 왼쪽 뺨이 몹시 상하였다. 손목도 상처를 입었다. 근래에 중국 병사가 위세를 부림이 그칠 줄 모르니, 마을 사람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질 마음을 먹었다.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 나는 개령(開寧)에 사는 정영서(鄭狑瑞)와 잠깐 이야기를 하였다.
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봄 2월
○ 2월 9일 병오(丙午)
나와 최 별감(崔別監)이 개평(介坪)으로 가서 노계시(盧啓時) 어른을 축하하였다. 노계시 어른이 예산 감무(禮山監務)를 제수받았으므로, 이별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 지나는 길에 경소(景紹) 형제와, 지부(志夫)ㆍ극수(克修)를 보았고, 또 정 첨지(鄭僉知)의 집에 가서 노덕부(盧德夫) 어른을 만났으며 또한 노회덕(盧懷德)을 만났다. 날이 저물어 여기에 묵었다.
○ 2월 10일 정미(丁未)
지나는 길에 노 참봉(盧參奉)과 경승(景承)ㆍ경안(景安)ㆍ이복(而復)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 2월 14일 신해(辛亥)
외조부(外祖父)의 제사(祭祀)를 지냈다. ○ 오후에 뇌산(磊山)에 있는 노여임(盧汝任)을 조문하러 갔다. 성주(城主)가 순찰사(巡察使)에게 장형을 당하였다고 들었다. 순찰사의 강하고 괴팍한 성품이 집요한 까닭에 호오(好惡)가 공정하지 않으니, 탄식할 만하다.
○ 2월 15일 임자(壬子)
나는 성주(城主)를 만났다. 그리고 서원(書院)으로 가서 알묘(謁廟)하였다. 지부(志夫)ㆍ군술(君述)ㆍ위서(渭瑞)와 더불어 서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칠평(桼坪)에서 김 찰방(金察訪)을 만나 보았다.
○十五日壬子余見城主往書院謁庙與志夫君述渭瑞相話而別歷見金察訪于黍坪
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여름 6월
○ 6월 21일 정사(丁巳)
나는 도사(都事; 이숙평(李叔平), 이준(李埈, 1560~1635))를 보러 갔다. 도사는 오지 않고, 고을 원이 홀로 운고(雲皐)에 앉아 있었다. 자리에 나아가 숙평(叔平)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에 도사가 이르러, 서로 더불어 인사를 나누고 종일토록 이야기하였다. 해 저물녘〔晡時〕에 군(郡)의 사람이 달려와, 의금부(義禁府)의 나장(羅將)이 성주(城主)를 잡으러 온다고 아뢰었다. 좌우가 모두 실색하며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조금 후에 종이 달려와 문서를 내보였다. 곧 중국 사람 영 도사(甯都司)가 허랑(虛浪)한 말을 날조하여 성주(城主)를 모함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성주가 쓴 것을 가지고 파발군(擺撥軍)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에 ‘비가 개고 길이 멀지 않은데, 어찌 관아 안에 앉아 있는가?’라고 한 말을 중국 관리를 기롱하는 것으로 여겨, 접대도감(接待都監) 김명원(金命元)ㆍ강신(姜紳) 등에게 말을 하였다. 명원이 경위를 갖추어 계(啓)를 올리니,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잡아서 문초하라’고 하였다. 아! 이곳 교통의 요충지에 와서 마음을 다하여 관직에 종사했으나, 도리어 무망(无妄)한 액운을 당하였으니, 세도(世道)를 탄식할 만하다. 날이 저물어 관아로 돌아왔다. 나와 노 참봉(盧參奉)은 함께 도사(都事)의 숙소에서 잤다.
二十日丙辰都事李君叔平折簡于余多有委曲之說午後驟雨
二十一日丁巳余往見都事事不來而主倅獨坐雲皐就坐以待叔平之來午後都事果至相與叙其寒暄終日談論晡時郡人走報禁府羅將以拿推城主而來也左右失色罔知所由俄而皀隷馳來發其公事乃唐人甯都司捏造虛語誣陷城主又將城主所書贈撥軍
雨晴路不遠
胡爲坐舘裡
之語以爲譏侮唐官言於接待都監金命元姜紳等命元具由入啓傳曰拿鞫噫來此沿路盡心治官而反得无妄之厄世道可歎黃昏歸官 余及盧參奉同宿於都事下處
○二十二日戊午與叔平相別到士古家打話午後與士古渭瑞共來謁城主
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윤8월
○ 윤8월 2일 병인(丙寅)
아침 일찍 나는 서원(書院)에 갔다. 찰방(察訪) 김지화(金志和)ㆍ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양정(郭養靜)ㆍ노 참봉(盧參奉)ㆍ노지부(盧志夫)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 서로 헤어졌다. ○ 성주(城主) 조종도(趙宗道)가 병(病)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에게 사직서를 올렸는데, 도체찰사가 들어주지 않았다.
○ 윤8월 8일 임신(壬申)
서원(書院)에 가서 사당(祠堂)의 담을 쌓았다. 지부(志夫)도 와서 같이 잤다.
○ 윤8월 10일 갑술(甲戌)
서원(書院)에 머물렀다. 숙모님이 서면(西面)에서 집으로 오셨다.
○ 윤8월 15일 기묘(己卯)
날씨가 고르지 못해 서원(書院)에 가지 않았다. ○ 이날 밤에 월식(月蝕)이 있었다.
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겨울 10월
○ 10월 17일 경진(庚辰)
노지부(盧志夫)가 편지를 보내어 나를 초대하며 말하기를, ‘어제가 대부인의 생신이었네. 그래서 수연을 배설하고자 하는데, 그대가 마루에 올라 어머님께 절하는 예(禮)를 행해 주면 고맙겠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친구 사이의 좋은 일이다. 급히 가 보니, 성주(城主)와 정 첨지(鄭僉知) 부자(父子)와 노 참봉(盧參奉)이 이미 모여 있었다. 해거름에 박경실(朴景實) 형도 왔다. 나와 박 형은 마루에 올라가 잔을 올렸다. 들으니, 지부(志夫)의 어머님은 계미생(癸未生)이신데, 건강하시기가 비길 데가 없으며 눈과 귀도 밝으시다고 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생각해 보니 또한 계미생이신데, 나는 신명(神明)을 저버리고 자로(子路)의 효행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언제나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였다. 이제 부인을 뵈오니 구슬픈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잔을 들어 우러러보니 슬픈 눈물이 흘러넘친다. 아! 종신토록 사모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 10월 29일 임진(壬辰)
큰비가 내렸다. 지부(志夫)ㆍ사고(士古)ㆍ극수(克修)ㆍ경실(景實)ㆍ경정(景靜) 등이 서원(書院)에 함께 모였다.
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겨울 11월
○ 겨울 11월〔冬十一月〕계사(癸巳) 초하루
알묘(謁廟) 후에 노 원장(盧院長)네 재기(再期)에 가서 참석하였다.
○ 11월 8일 경자(庚子)
나는 서원(書院)에 가서 노 참봉(盧參奉)과 지부(志夫)ㆍ조태항(趙太沆)ㆍ노여임(盧汝任)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11월 26일 무오(戊午)
나는 진서(陳書)의 정초(正草)를 써서 성주(城主)에게 보였다.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지화(金志和) 어른이 서울에서 군(郡)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하기를, “황신(黃愼)이 밀계(密啓)를 한 후에 주상(主上)의 마음이 크게 놀라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계책을 결정하셨으며, 죽더라도 적을 제압하겠다는 뜻은 없으셨다. 사간(司諫) 김홍미(金弘微)가 간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은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는 것이 의리(義理)의 바름인데, 전하(殿下)께서는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전교(傳敎)하여 ‘천천히 의논하겠다.’라고 하시고, 사대부(士大夫)의 가속(家屬)은 임의로 도망가 숨어서 전날처럼 나라가 뒤집어지는 환란이 없도록 하라는 영을 내리시니,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흉흉하여 조석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팔도(八道)에 향(香)을 내려, 산천(山川)의 신령(神靈)에 제사를 드려서 왜적으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라는 영을 내리시니, 이것이 과연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인가. 또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급보가 있으면 세자를 모시고 북도(北道) [함경도(咸鏡道)] 로 피란(避亂)하라는 영을 내리셨다.”라고 한다. 한강(漢江) 이남(以南)은 잊힌 땅처럼 포기하셨다고 하니, 그 말을 듣고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 11월 30일 임술(壬戌)
서원(書院)에 갔다. 지나는 길에 위서(渭瑞)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정(鄭) 첨지(僉知)를 만났다. 저녁 어스름에 서원(書院)에 들어가 묵었는데, 노지부(盧志夫)와 강경정(姜景靜)이 와서 함께 터놓고 이야기하였다.
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겨울 12월
○ 겨울 12월〔冬十二月〕계해(癸亥) 초하루
이른 아침에 알묘(謁廟)하였다. 아침을 먹은 후에 정 첨지(鄭僉知)가 서원에 왔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여러 해 전 머물던 곳을 다시 본 후에 죽고 싶어서 특별히 방문한 것이다.’라고 했다. 아! 첨지의 나이가 80에 가까운데, 그 뜻이 서원을 찾아보는 데 있으니, 치하할 만하다. 치하할 만하다.
○ 12월 2일 갑자(甲子)
조간보(趙幹甫) 형을 가서 만났다. 이 형은 이미 두 번째 기일이 지났지만, 사정이 있어 가서 문상하지 못한 것이 매양 한이 되었었다. 그러므로 찾아가 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 참봉(盧參奉)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묵었다.
○ 12월 15일 정축(丁丑)
나와 사고(士古)가 안음(安陰)에 갔는데, 지부(志夫)는 먼저 현청(縣廳)으로 갔다. 한효중(韓孝仲)ㆍ경장(景張)ㆍ강극수(姜克修) 등도 역시 모여 있었다. 곽양정(郭養靜) 형, 찰방(察訪) 김지화(金志和)와 함께 자면서 실컷 이야기하였다.
○ 12월 16일 무인(戊寅)
성주(城主)가 첨지(僉知) 김신옥(金信玉)의 집에서 돌아와 현(縣)에 이르렀다. ○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성주와 양정(養靜)에게 전령(傳令)하기를, ‘뜻하지 않게 동상(凍傷)에 걸려 산성(山城)에 나아가기 어려우니, 모두 거창(居昌)에 와서 영(令)을 들으라.’라고 하였다. 두 수령은 즉시 거창(居昌)으로 향하고, 나와 사고(士古)ㆍ지부(志夫)는 집으로 돌아왔다.
○ 12월 19일 신사(辛巳)
성주(城主)가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산음(山陰)에 사는 송업(宋嶪)과 단성(丹城)에 사는 이유훈(李惟訓)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게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논의가 박회성(朴回城)의 일에 미치자 도체찰사가 크게 노하여, 그가 산성(山城)에 들어가지 아니한 죄를 따져 곤장(棍杖) 30대를 때렸다는 말을 들었다.
○ 12월 29일 신묘(辛卯)
선고(先考)ㆍ선비(先妣)와 외조모(外祖母)ㆍ외조부(外祖父)ㆍ선형(先兄)에게 제석제(除夕祭)를 올렸다. 시절이 몹시 혼란해서, 내년에도 이 제사를 반드시 지낼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렵다. 선조께 술잔을 올리는데, 쓰린 마음을 견디기 어려웠다. ○ 도체찰사(都體察使) 이 어르신〔李老爺〕께서 척지(尺旨)에 도착하여 묵었다. 중국 군대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고대일록 제2권 / 정유(丁酉, 1597) / 여름 5월
○ 5월 10일 경자(庚子)
비가 내렸다. 도원수(都元帥)가 호서(湖西)를 향해 갔다. ○ 상사(上舍) 정주신(鄭舟臣)이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서원(書院)에 갔다가 해가 저물어 공간(公幹)의 집에 경정(景靜)과 함께 묵었다. 거창(居昌)에 사는 유계룡(柳季龍)도 역시 함께 잤다.
○ 5월 12일 임인(壬寅)
일찍이 서원으로 돌아갔다. 오후에 성주(城主)가 서원에 왔다. 알묘(謁廟)하고 유숙(留宿)하였다.
○ 5월 22일 임자(壬子)
나는 개평에 가서 성주(城主)를 찾아뵙고, 노이기(盧而器)에게 병을 물은 다음, [24일 조 참조] 노 참봉(盧參奉)과 노지부(盧志夫)를 방문했다가, 해 질 무렵 위서(渭瑞)와 함께 돌아왔다. 노이기(盧而器); 1597년 5월 24일 기사 참조. 노사위(盧士偉)의 자(字). 본관은 풍천(豊川).
고대일록 제2권 / 정유(丁酉, 1597) / 가을 7월
○ 7월 6일 을미(乙未)
성주(城主)가 파면당하였으므로 내가 개평(介坪)에 가서 성주를 위로하였고, 아울러 노 참봉(盧參奉)과 노지부(盧志夫)를 만나 보았다.
○ 7월 7일 병신(丙申)
하자순(河子順)의 집에 가서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했는데, 나와 하 원장(河院長)은 교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 7월 8일 정유(丁酉)
새벽에 사근(沙斤)에 가서 김지화(金志和)를 만났는데, 그는 한성 참봉을 제수받아 가게 되었다. 점심때 척서정(滌暑亭)에 가서 성주(城主)와 곽양정(郭養靜)을 만나 보았다.
○ 7월 9일 무술(戊戌)
여러 벗들과 서원에서 함께 묵었다가, 이날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 7월 14일 계묘(癸卯)
서원에 갔다. 신백원(愼伯源)ㆍ조집보(趙集甫)ㆍ조경유(趙敬由)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러 친구들이 과목점접(科目店接)에 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 7월 15일 갑진(甲辰)
노지부(盧志夫)가 서원에 와서 알묘(謁廟)하였다. 원장과 함께 잠을 잤다. 강경정(姜景靜)도 또한 서원에 왔다.
○ 7월 16일 을사(乙巳)
서원에 머물며 부(賦)를 지었다.
고대일록 제2권 / 정유(丁酉, 1597) / 가을 8월
○ 8월 7일 을축(乙丑)
벽견(壁堅)ㆍ악견(岳堅)ㆍ정개(正介) 등 세 산성을 모두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 하니, 정말 한탄스럽다. 사람의 지모(智謀)가 이와 같으니, 천운(天運)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놀라 흩어져 모두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니, 이 같은 상황에서는 비록 이광(李廣)과 곽자의(郭子儀) 같은 장수가 있어도 국가를 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 나무로 만든 부모님의 신주를 묘 옆에 묻고, 진군술(陳君述)과 함께 서원에 가서 서책을 옮기고 신판(神版)을 묻었다.
○ 8월 12일 경오(庚午)
북면으로 가다가 길에서 사고(士古)와 조유인(趙由仁)을 만나 산성 소식을 들었는데, 대단히 허술하다는 것이었다. 안음으로부터 북쪽 3리는 단지 다섯 명이 들어갔으며, 거창(居昌)에서 들어온 사람은 하나도 없고, 함양(咸陽) 백성 역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무지 성에 들어갈 뜻이 없으니, 끝내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 8월 18일 병자(丙子)
크고 작은 피난민 무리들이 산 위에 모였는데,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점심때쯤 흰옷 입고 삿갓 쓴 자가 산허리에 불을 질렀는데, 왜적으로 의심하여 활과 화살을 엄밀하게 준비시켰으나, 문득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의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왜적 십여 명이 다른 길로 숨어들어 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돌입하니, 사람들이 모두 산골짜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다가 잃은 재보(財寶)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저녁 늦게 다시 모여 가속(家屬)들의 행방을 물으니, 큰딸, 막내딸 및 노비 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소재(所在)를 알 수 없었다. 마음과 넋이 다 빠져 울고 또 울었다. 노 참봉(盧參奉)과 손을 잡고 소리 내어 울다가, 그날 밤에 가운데 고개를 지나 백운산 바깥 기슭에 투숙하였다. ○ 적이 남원을 함락시켰고, 총병(摠兵) 양원(楊元)은 도망갔다.
○ 8월 20일 무인(戊寅)
홀로 백운산 계곡으로 딸을 찾아 나섰다. 계곡을 건너가면서 딸을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여 막내딸의 소식을 들었다. 단아(端兒)는 우비(禹婢)에 의탁해서 살았는데, 해가 저문 뒤에 서로 만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노(奴) 잉문복(芿聞卜)과 잃어버린 말이 돌아왔고, 난춘(蘭春)도 역시 왔다. ○ 노 참봉(盧參奉)ㆍ노경승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날 최장(崔丈) 계형(季亨)이 왜놈에게 죽으니, 참으로 슬프다.
○ 8월 20일 무인(戊寅)
홀로 백운산 계곡으로 딸을 찾아 나섰다. 계곡을 건너가면서 딸을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여 막내딸의 소식을 들었다. 단아(端兒)는 우비(禹婢)에 의탁해서 살았는데, 해가 저문 뒤에 서로 만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노(奴) 잉문복(芿聞卜)과 잃어버린 말이 돌아왔고, 난춘(蘭春)도 역시 왔다. ○ 노 참봉(盧參奉)ㆍ노경승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날 최장(崔丈) 계형(季亨)이 왜놈에게 죽으니, 참으로 슬프다.
○ 8월 21일 기묘(己卯)
조카가 산에서 정아(貞兒)의 시신(屍身)을 찾았다. 목이 반 이상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갖고 있던 패도와 손이 모두 평소와 같았다. 오호라! 내 딸이 어찌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들이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패도를 주면서, ‘만약 불행하게도 네가 왜적을 만나면 적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큰 도적이 지금 왔으니, 제가 반드시 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그 엄마에게 매번 하였는데, 졸지에 흉적을 만나서는 우뚝 서서 겁 없이 적노(賊奴)를 욕하고 꾸짖으며 목숨을 버려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곧도다! 내 딸이여,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오호라! 네가 삶을 버리고 의를 택했으니, 참으로 잘한 일이구나. 하지만 나는 딸 하나도 능히 구하지 못해, 흉한 칼끝에서 너를 죽게 했다. 손을 붙들고 피난하여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자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구나. 죽은 후에 황천에서 손잡고 다시 만날 때, 나는 진실로 너만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너를 위로할까! 네가 높게 세운 절개는 내 그 뜻을 글로서 분명히 전할 것이다. 의복을 모두 잃어버려 시신을 염하는 도구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한다. ○ 이날 밤에 큰비가 왔다.
○ 8월 28일 병술(丙戌)
형수와 가솔들이 묵계사(墨界寺)에서 함께 만났다. 비로소 온돌방을 얻어 잤다. 적이 이 절에 이르러 분탕질을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 하자열(河子悅)을 만나 사촌 동생 덕장(德將)과 박경실(朴景實) 형과 조간보(趙幹甫) 형, 그리고 정사고(鄭士古) 형이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 오호라! 친구들의 영락(零落)을 이렇게 한꺼번에 들으니, 외롭구나, 내 인생이여! 누구와 더불어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겠는가! 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것이 운명의 불행인가 보다. 또 곽양정(郭養靜) 삼부자(三父子)가 서로 끌어안고 통곡하며 성안에서 같이 죽었다 하니, ‘삶을 버려서 의를 취한다.’는 것을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구나. 오호라! 양정은 그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도다.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땅을 지키는 신하〔守土之臣〕치고서 맡은 지역을 지키다가 의로써 죽었다는 이는 전혀 들을 수 없었는데, 홀로 양정이 죽기를 각오하고 꿋꿋이 절개를 세웠으니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황석산성(黃石山城)이 비록 자연적으로 험하다고는 하지만, 벽견(壁堅)ㆍ악견(岳堅)ㆍ정개(正介) 등의 성(城)이 소문만 듣고서도 무너짐에〔望風而潰〕 인심이 놀라 흩어졌으니, 성을 지켜 낼 이치가 만무했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은 만에 하나의 공을 도모하여 패군의 죄를 모면하고자 망녕되이 스스로 큰소리치기를, “비록 세 고을의 군사가 없더라도 내가 김해(金海)의 군사만 가지고도 적을 막기에는 넉넉하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적군이 성을 침범하는 날에는 김해 사람 …〈결(缺)〉… 사림(士霖)은 밤중에 도망가 버려, 양정으로 하여금 졸지에 흉한 칼끝에서 죽게 했으니, 어찌할거나. 우리 좋은 인물들이 다 죽는구나.
고대일록 제2권 / 정유(丁酉, 1597) / 가을 9월
○ 9월 6일 갑오(甲午)
나는 삼술대(三述臺)로 가서 김 첨지(金僉知)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 9월 10일 무술(戊戌)
동면으로 가서 강위서(姜渭瑞)를 찾아보았는데, 위서가 어른들을 모시고 아무 탈이 없으니,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다. 선영(先塋)을 찾아 절하고 신주 묻어 둔 곳을 둘러본 다음 공간(公幹)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공간은 옛 고을〔故縣〕로 갔고, 윤명(胤明)은 흉측한 칼끝에 죽었으며, 덕장(德將) 부부는 당곡(唐谷)에서 함께 죽었고, 경정(景靜)은 그 아들을 잃었으며, 자실(子實)은 아내와 아들을 여의었고, 제중(濟仲) 일가는 간 곳을 알지 못하며, 간보(幹甫) 형제는 머리를 맞대어 칼을 맞았고, 숙보(淑甫)도 죽었으며, 덕영(德英)은 윤경(胤庚)의 뼈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해가 저물어서 유허로 돌아왔다.
○ 9월 11일 기해(己亥)
조카가 묵계(墨界)로 갔다. 점심때 비가 왔다. ○ 서원(書院)으로 와서 유허(遺墟)를 보았는데, 신판(神板)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만 서책이 불에 타서 남은 것이 없으니, 안타깝다.
○ 9월 19일 정미(丁未)
내가 유허(遺墟)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유민(李維民)을 만났고, 또 안군이 오씨(吳氏) 집안의 후사(後嗣)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十九日丁未余歸墟路見李維氏又見安喜聞安君嗣吳消息
○ 9월 24일 임자(壬子)
영각사(靈覺寺)로 들어가 묵었다. 노 참봉(盧參奉) 및 노지부(盧志夫)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 9월 27일 을묘(乙卯)
갑자기 비가 왔다. 밥을 먹은 뒤, 오현(梧峴)을 지나 우락동(雨落洞)에서 군자정(君子亭)을 구경했다. 머리를 들어 산성을 바라보고 굽어 적진을 바라보다가 양정(養靜)의 죽음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프다! 양정이 백사림(白士霖)에게 속임을 당하여 흉측한 칼끝에서 헛되이 죽었으니, 애달프기 짝이 없다. 사림(士霖)은 일찍이 성안에 있으면서, 노약자는 성을 나가게 하라는 체상(體相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전령을 숨겼다. 또한 남몰래 자신의 어머니와 두 첩을 내보내고도, 안음(安陰)과 거창(居昌)의 두 관아에는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 쓰는 것이 왜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오후에 다동(茶洞)에 이르렀다. 전유옥(全幼玉)ㆍ강위서(姜渭瑞)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헌승(軒僧)의 장막에서 편안하게 쉬었다.
二十七日乙卯乍雨食後歷梧峴雨落洞賞君子亭仰看山城俯見賊陣因 思養靜之死不覺淚下嗟乎養靜見欺於白士霖空死凶鋒可哀哀士 霖曽在城中匿体相老弱出城之傳令又潛出其母兩妾而不告於安陰居 昌兩衙處心行事與賊何異○午後到茶洞與幼全玉姜渭瑞叙話
고대일록 제2권 / 정유(丁酉, 1597) / 겨울 10월
○ 10월 13일 경오(庚午)
동이 트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나는 전유옥(全幼玉)과 함께 노지부(盧志夫)를 만나고 노 참봉(盧參奉), 강 목사(姜牧使) 및 노경소(盧景紹)ㆍ노경승(盧景承)ㆍ강위서(姜渭瑞)ㆍ강극수(姜克修)를 찾아가 방문했다.
○ 10월 14일 신미(辛未)
전유옥(全幼玉)은 나보다 먼저 출발하고 내가 뒤따랐다. 길에서 노 참봉(盧參奉)을 만나 함께 다동(茶洞)으로 돌아왔다. 산음(山陰)의 왜적들이 진주로 내려갔고, 진주의 왜적이 우리나라의 곡식을 다 타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걱정스럽다.
○ 10월 22일 기묘(己卯)
노지부(盧志夫)와 빈부(賓夫)가 나를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 10월 23일 경진(庚辰)
산성 아래로 가서 지부(志夫)와 빈부(賓夫)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10월 26일 계미(癸未)
전유옥(全幼玉)과 함께 노천(蘆川)에 도착했다. 물은 달고 토지는 비옥하며, 양지바르고 바람을 감추었으니, 참으로 살 만한 땅이었다. ○ 왜적들이 백전(栢田)에서 불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한다.
○二十六日癸未余與全幼玉到蘆川 泉甘土肥 向陽藏風 眞可居之地也
고대일록 제2권 / 정유(丁酉, 1597) / 겨울 11월
○ 11월 15일 임인(壬寅)
새벽에 다동(茶洞)에 도착했다. ○ 양정(養靜)의 여친(旅櫬)이 고향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이미 지나가 버려 보지를 못한 까닭에 노 참봉(盧參奉)과 더불어 개탄(慨歎)을 금치 못했다.
○ 11월 18일 을사(乙巳)
바람과 비가 그치지 않았다. 노천(蘆川)으로 돌아가서 노 참봉(盧參奉)과 최규보(崔圭甫)의 이웃에 임시로 거처를 정했다.
고대일록 제3권 / 기해(己亥, 1599) / 봄 2월
○ 2월 2일 임자(壬子)
길에서 노경승(盧景承)과 이정숙(李正叔) 부자, 그리고 이자용(李子容)을 만났다. 저녁에 정말종(鄭末從)의 집에서 묵었다. 이공의(李公儀字子容)
○ 2월 17일 정묘(丁卯)
하성원(河性源)ㆍ문군변(文君變)ㆍ류임가(柳任可) 등 여러 형이 열읍(列邑)에 통문을 돌렸다. 백사림(白士霖)이 사람들을 속이고 패군(敗軍)한 죄를 장차 상소를 올려 드러내고자 하였다. 백사림은 많은 사람 앞에서 큰소리치면서 말하기를, “비록 함양(咸陽)ㆍ거창(居昌)ㆍ안음(安陰) 등 세 읍에 군사가 없다 하더라도, 나 혼자서 김해(金海) 사람들과 함께 산성을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 왜적이 침입해 오던 날에 자기가 먼저 도망가서는, 항복한 왜놈 한 명과 함께 산골짜기에 숨어서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집 식구들을 보전했으며, 곽양정(郭養靜)에게 해를 입게 했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를 갈았다. 그래서 대론(臺論)이 일어나 왕명으로 그 죄를 다스렸다. 그러나 도리어 죄를 면하려고 죄 없는 사람을 언급하여 연루시키니, 사론(士論)이 원통하게 여겼다.
○ 2월 28일 무인(戊寅)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노참봉(盧參奉)ㆍ노경승(盧景承)과 함께 성(城)을 지킬 계획을 의논했다.
고대일록 제3권 / 기해(己亥, 1599) / 봄 3월
○ 봄 3월〔春三月〕경진(庚辰) 초하루
주곡(酒谷)에 가서 노지부(盧志夫)의 장례 일을 보았다. 노여임(盧汝任)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해 질 녘에 돌아왔다.
○ 3월 3일 임오(壬午)
주곡(酒谷)에 가서 지부(志夫)의 장례에 참여했다. 노 참봉(盧參奉)ㆍ노경승(盧景承)ㆍ노경소(盧景紹)ㆍ노경안(盧景安)ㆍ조유인(趙由仁) 등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3월 4일 계미(癸未)
지부(志夫)의 장례에 평토(平土)가 끝난 후, 정덕옹(鄭德翁)ㆍ최규보(崔圭甫)와 헤어졌다. 지나오면서 허중관(許仲觀)을 만났다. 해 질 녘에 정사연(鄭士淵)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僉正鄭宗懋字德翁東萊人副正 正租參石 太壹石 ▣▣▣▣(萬曆庚子) 咸陽南孝
○ 3월 15일 갑오(甲午)
나는 서원(書院)에 갔다. 위판(位版)을 감춘 곳을 헤쳐 보니, 2년 동안이나 흙 속에 있었어도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었다. 분칠한 면이 새롭게 만든 것과 같았고, 자획(字劃)도 깎인 곳이 없었다. 흉적의 화가 또한 미치지 않았으니, 참으로 하늘의 도움과 귀신의 꾸짖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자그마한 집 두 칸을 지어 봉안(奉安)할 일을 꾀했다.
○ 3월 22일 신축(辛丑)
나는 주곡(酒谷)으로 가서 빈부(賓夫) 자당(慈堂)의 장례식〔襄禮〕을 보았다. 노참봉(盧參奉)ㆍ노경승(盧景承)ㆍ노경소(盧景紹) 등 여러 분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서원(書院)에 가서 그곳에 남아 있는 위판(位版)을 봉안했다. 그런데 유생이라고는 한 사람도 오지 않았고 나 하나뿐이니, 한스럽다.
고대일록 제3권 / 경자(庚子, 1600) / 겨울 11월
○ 11월 4일 갑진(甲辰)
개평(介坪)에 가서 노 예산(盧禮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부(志夫)의 집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 11월 7일 정미(丁未)
순찰사(巡察使) 김신원(金信元)이 군(郡)에 들어왔다. 중국의 도망병 십여 명이 남원(南原)에서 군(郡)으로 들어와서는, 방자하게 위세 부리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순찰사가 명령을 내려 도망군을 체포하려 하자, 칼을 빼어 사람을 찌르려고 하였다. 태수와 여러 무사가 추격하여 서계(西溪)의 상류에서 체포했다. 도망한 무리들이 군문(軍門)의 패문(牌文)을 위조하여 각 읍을 뒤져서 수탈했으나 가짜임이 탄로 났으니, 통탄스럽다. ○ 권경지(權景止)가 군(郡)에 도착했으므로 그와 함께 노 예산(盧禮山)의 집에서 같이 잤다. ○ 나와 원장(院長), 그리고 여러 친구들이 순상(巡相)에게 정서(呈書)하였는데, 순상이 서원에 소를 하사하고 또 나무꾼 스무 명을 하사했다.
○ 11월 10일 경술(庚戌)
정여계(鄭汝啓)가 공응련(公鷹連)을 책판도청(冊版都廳)으로 위촉했다.
○ 11월 11일 신해(辛亥)
서원(書院)에 가서 노 예산(盧禮山)ㆍ양형언(梁馨彦)ㆍ치숙(致叔)과 같이 자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11월 12일 임자(壬子)
강경정(姜景靜)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밥을 먹은 후, 나촌(羅村)에 가서 서원(書院)을 옮길 곳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산천이 밝고 아름다워 장수(藏修)할 땅에 적합하다.
○ 11월 13일 계축(癸丑)
군(郡)의 관아〔郡齋〕에 들어가 성주(城主)를 뵙고, 책판(冊版) 일을 도울 수 있는 한정(閒丁) 한 사람을 얻었다.
○ 11월 28일 무진(戊辰)
노영(盧𦝚) 군이 와서 조문했다. ○ 노 참봉(盧參奉)의 편지를 보았고, 선생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대일록 제3권 / 경자(庚子, 1600) / 겨울 12월
○ 12월 18일 정해(丁亥)
원노(院奴)를 성주(星州)의 노 원장(盧院長) 앞으로 보냈다. 앞으로 서원(書院)을 회복하는 데 힘을 실어주기를 바라는 진정서를 장차 체상(體相 도체찰사(都體察使))께 올리고자 해서이다.
○ 12월 21일 경인(庚寅)
노 예산(盧禮山)이 시냇가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서 그를 만나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하위재(河偉哉)ㆍ강위서(姜渭瑞) 등도 함께 모였다.
○ 12월 23일 임진(壬辰)
선생의 답서와 노 참봉(盧參奉), 정언림(鄭彦霖)의 편지를 보았다.
고대일록 제3권 / 신축(辛丑, 1601) / 봄 2월
○ 2월 27일 병신(丙申)
개평(介坪)의 노 참봉(盧參奉)을 찾아갔다.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노경승(盧景承) 등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서(渭瑞)와 함께 왔다.
고대일록 제3권 / 신축(辛丑, 1601) / 여름 5월
○ 여름 5월〔夏五月〕무술(戊戌) 초하루
서원(書院)에 가서 사당에 배알하였다. 노 참봉(盧參奉)과 예산(禮山)이 함께 왔다.
○ 5월 7일 갑진(甲辰)
서원(書院)에 가서 권학(勸學)의 규칙을 의논하여 정하였다. 네 면(面)의 훈장(訓長)을 정하고, 해 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 5월 8일 을사(乙巳)
나는 노 예산(盧禮山)ㆍ강위서(姜渭瑞)와 함께 합천(陜川)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오후에 진목정(眞木亭)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저물녘에 이화언(李和彦)의 집에 묵었다.
○ 5월 9일 병오(丙午)
김응구(金應久)를 찾아갔다. 오후에 부음정(孚飮亭)에서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선생의 도체(道體)가 두루 평안하여 매우 안심되었다. 선생께서는 위서(渭瑞)와 함께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셨고, 최덕구(崔德久)는 예산(禮山)을 맞이하여 성주(星州)로 돌아갔다.
○ 5월 12일 기유(己酉)
하성원(河性源)이 해인사(海印寺)로 와서 서로 이야기하였고 예산(禮山)과 작별하였다. 식사 후에 여러 벗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홀로 절에 머물며 역사(役事)를 살펴보았다.
○ 5월 16일 계축(癸丑)
당형(堂兄)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빈부(盧賓夫)를 찾아갔는데, 빈부는 요통(腰痛)으로 누워 있었다. ○ 노여일(盧汝一)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너무 슬픈 일이다.
○ 5월 19일 병진(丙辰)
조카와 함께 노여일(盧汝一)에게 가서 조문하고 이어서 노 원장(盧院長)을 방문하였다. 날이 저물어 귀가하였다.
○ 5월 29일 병인(丙寅)
진주 제독(晋州提督) 김시견(金時見)이 함양군(咸陽郡)에 도착하여 서로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그와 함께 잤다.
고대일록 제3권 / 신축(辛丑, 1601) / 가을 9월
○ 9월 3일 정유(丁酉)
서원(書院)에 가서 강경정(姜景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였다. 박윤경(朴胤庚)이 호서(湖西)로부터 도착하여 공간(公幹)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 9월 4일 무술(戊戌)
개평(介坪)에 가다가 도중에 목사(牧使) 강군망(姜君望) 형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하였다. 노 원장(盧院長)을 방문하여 조용히 대화하였다. 그리고 회덕 현감을 지낸 노씨〔盧懷德〕를 찾아가서 종매(從妹)를 보았다. 그녀는 병이 위중하여 아마도 몸을 부지하지 못할 듯하니, 너무나 가련하다. 날이 저물 무렵 집에 돌아왔다.
○ 9월 22일 병진(丙辰)
위서(渭瑞)가 말을 보내 나를 초청하였다. 노 참봉(盧參奉)과 예산(禮山) 채찰방(蔡察訪)도 함께 모여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 마쳤다.
○ 9월 29일 계해(癸亥)
오늘 노 원장(盧院長)이 중풍에 걸려 억지로 혀를 놀려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분뿐인 고을 어른의 병이 이렇게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스럽다.
○ 9월 30일 갑자(甲子)
소회(疏會)로 향하다가 노 원장(盧院長)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백토(栢吐)에 도착하여 정덕옹(鄭德翁)의 집에서 크게 취하여 그곳에서 묵었다. 고을의 벗들이 모두 모였다.
고대일록 제3권 / 임인(壬寅, 1602) / 봄 정월
○ 정월(正月) 2일 을미(乙未)
서원(書院)에 가서 사당에 배알하고 개평(介坪)에 가서 노 참봉(盧參奉)을 만나보았다. 지부(志夫)의 집에 갔다가 임중(任重)의 집에서 잤다.
고대일록 제3권 / 임인(壬寅, 1602) / 봄 윤2월
○ 윤2월 4일 정유(丁酉)
나는 개평(介坪)에 갔다. 노 참봉(盧參奉)을 만나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그 어르신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 몸이 쇠약해졌으므로 비감한 말을 많이 하였다. 시사(時事)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가 밤중에 헤어졌다.
○ 윤2월 9일 임인(壬寅)
새벽 무렵에 길에 올라 부음정(孚飮亭)에 도착하였다. 원근의 문생(門生)들이 모두 모였는데,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다. 오후에 선생께서 성주(星州)로 향하셨으므로 여러 벗들과 헤어진 뒤, 시천총(施千摠)의 집에서 잤다. 어두운 심정을 감당할 수 없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윤2월 11일 갑진(甲辰)
윤여술(尹汝述)과 헤어진 뒤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하였다.
○ 윤2월 12일 을사(乙巳)
시천총(施千摠)이 서원(書院)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나아가서 함께 묵었다.
조계수(趙季修)가 함께 묵었고, 저녁에 노경소(盧景紹)도 왔다.
○ 윤2월 13일 병오(丙午)
시 천총(施千摠)과 함께 나촌(羅村)에 가서 땅을 살펴보았다. 시천총의 눈에도 들지 않아, 옛 서원(書院) 뒤편에 땅을 택하고서 신선이 손바닥으로 받드는 형상〔仙人獻掌形〕이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서원(書院)에서 잤다.
○ 윤2월 14일 정미(丁未)
시천총(施千摠)과 함께 개평(介坪)에 갔다. 노 원장(盧院長)을 뵙고 강 목사(姜牧使) 및 극수(克修)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서원(書院)에서 잤다.
○ 윤2월 15일 무신(戊申)
새벽 일찍 시천총(施千摠)에게 청하여 집으로 오도록 하였는데, 좋지 않다고 하면서 패철(佩鐵)을 띄우지 않았다. ○ 오늘은 청명(淸明)이다. 선영(先塋)에 가서 묘소를 손질하고 다시 서원(書院)에서 잤다.
○ 윤2월 16일 기유(己酉)
시천총(施千摠)을 전송하고 오후에 집에 도착하였다. 허중관(許仲觀)ㆍ노빈부(盧賓夫)ㆍ경후(景厚)가 나를 찾아왔다.
○ 윤2월 21일 갑인(甲寅)
임금께서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르시기를, “군공(軍功)이 있으나 은상(恩賞)을 받지 못한 사람, 학행(學行)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 공사(公事)로 죽은 뒤에도 아직 은전(恩典)을 받지 못한 사람, 일을 처리함에 재능이 있는 사람, 용력(勇力)이 있는 사람을 공론(公論)으로 널리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노사예(盧士豫)ㆍ박손(朴𧂍)ㆍ노사상(盧士尙)ㆍ노사개(盧士㑘)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은상(恩賞)을 받지 못한 것으로 천거되었다. 학행 및 재능이 있는 사람〔才良〕으로서 노사개가 천거되었는데, 나 역시 첨부되어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재능이 없는데 향인(鄕人)들이 천거하여 선발의 취지가 상당히 퇴색하게 되었으니, 한스럽다.
고대일록 제3권 / 임인(壬寅, 1602) / 여름 5월
○ 5월 15일 병자(丙子)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 뒤에 덕옹(德翁)을 찾아가서 보고 강극수(姜克修)를 방문하였다. 또한 노 참봉(盧參奉)을 문병하러 찾아가니, 경승(景承)ㆍ경소(景紹)도 와서 병자(病者)를 보살피고 있었다.
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봄 정월
○ 정월(正月) 2일 기미(己未)
서원에 가서 사당에 배알하였다. 성곡(省谷)에 가서 종매(從妹)를 만나보았다. 공간(公幹)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공명(功名)이 귀중함을 볼 수 있다.
○ 정월(正月) 3일 경신(庚申)
노 참봉(盧參奉)의 집에 갔다. 오후에 비가 내려서 그 집에서 잤다. 오늘 밤에 감기가 들어 매우 고통스러웠다.
○ 정월(正月) 20일 정축(丁丑)
개평(介坪)에 가서 노 참봉(盧參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강극수(姜克修)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양형언(梁馨彦)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봄 3월
○ 3월 6일 임술(壬戌)
서원을 지을 새 터〔新基〕에 가서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강경정(姜景靜)ㆍ노충보(盧忠甫)가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 박안행(朴安行)의 정려문(旌閭門)을 새로 썼다.
○ 3월 7일 계해(癸亥)
서원을 지을 새 터에 가서 역사를 감독하였다. ○ 금산(錦山) 땅에서 백년 동안 넘어져 있던 나무가 가지와 뿌리는 이미 썩은 채로 둑에 누워 있는데, 하룻밤 사이에 저절로 섰다는 얘기를 들었다.
○ 3월 9일 을축(乙丑)
노 원장(盧院長)을 가서 뵙고 날이 저물어서 서원으로 돌아갔다. ○ 박문영(朴文楧)이 교묘하게 혀를 놀려 흔적도 없는 말로 나를 헐뜯었다고 하니, 가소롭다.
○ 3월 21일 정축(丁丑)
노 참봉(盧參奉)이 병이 위중하여 나를 보기를 청하였다. 나는 저녁에 급히 개평(介坪)으로 갔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병이 위독하여 말을 하기도 어려웠으니 참담하였다. 경후(景厚)와 함께 잤다.
○ 3월 22일 무인(戊寅)
아침에 경승(景承)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시(午時)에 원장(院長)이 말씀하신 문권(文券)에 대해서는 집(盧䐕)이가 반드시 행패를 부릴 것이니, 한탄할 만하다.
○ 3월 27일 계미(癸未)
남원(南原)에 사는 정두준(丁斗俊)이 찾아왔다. 노여임(盧汝任)도 왔는데, 노 참봉(盧參奉)의 병세가 더해 가고 차도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염려스럽다.
○ 3월 29일 을유(乙酉)
노 참봉(盧參奉)의 부음(訃音)을 듣고 곧바로 달려갔으나, 이미 염습이 끝난 후였다. 아아! 이 사람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구나! 늘그막에 선행(善行)을 지향하던 뜻은 지성(至誠)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본을 보고 좇으면서 여생을 마치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혜가(蕙歌)를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저승으로 영결하려니 오래도록 비통하여 죽고만 싶었다. 그대로 머물며 호상(護喪)을 맡았다.
○ 3월 30일 병술(丙戌)
나는 조계수(趙季售)와 함께 머무르다가 새로 지을 서원에서 함께 잤다. 오늘 흰 무지개가 태양까지 뻗쳤고, 또 햇무리가 져서 빛을 잃었다.
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가을 8월
○ 8월 2일 을유(乙酉)
나는 개평(介坪)에 가서 원장(院長)을 병문안하고 서원으로 갔다.
○ 8월 19일 임인(壬寅)
〈제노 참봉문(祭盧參奉文)〉에, “예전에 개암(介庵) 강익(姜翼)이 미래의 학도를 일으키고, 선정(先正)을 추숭(追崇)하는데 뜻을 두었네. 많은 사람이 경탄하며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공의 형제가 가장 두드러졌었네. 논의하는 데 있어서 거역함이 없어, 시끄러운 잡음을 배격하고서 성실한 노력으로 도우니, 옛 학교가 흥기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는데, 저 남계서원(灆溪書院)을 바라보면 글 읽는 소리 왕성하였네.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들이 죽었네. 경적(經籍)이 비록 불탔으나 위판(位板)은 아직도 보존되었네. 참봉공(參奉公)이 중건을 창도하여 침식도 잊고 일을 하였네. 상의하여 옮기기를 도모하니, 결정하자 곧 이루어졌네. 일이 매듭지어지기도 전에 공이 병들어 누워 그것을 경영하였네. 그릇된 주장은 저절로 그치고 여염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우리 고을 운이 없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네. 아아! 슬프다. 효제(孝悌)가 온전하였고 호오(好惡)가 분명하였네. 개결(介潔)한 자질을 지니고 선함을 즐기는 정성이 있었네. 쇠퇴하지 않는 학식과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안목이라네. 끝났구나, 끝났구나! 이제 다시 회복할 수가 없구나. 하늘이 온전한 자질을 주고서도 어찌 운명은 그리 박하게 하였나? 살아서는 오복(五福)이 없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말을 함에 어찌 끝이 있겠으며, 말을 한들 무슨 보탬이 되리요? 죽지 않은 혼령이 있거든, 나의 충심을 살펴주소서. 아아! 슬프다.”라고 하였다.
고대일록 제4권 / 계묘(癸卯, 1603) / 가을 9월
○ 9월 2일 을묘(乙卯)
노 참봉(盧參奉)의 장례(葬禮)에 참여하고, 정덕옹(鄭德翁)ㆍ강위서(姜渭瑞) 등 여러 벗과 함께 여임(汝任)의 정자에서 잠을 잤다. ○ 조계수(趙季售)가 딸을 잃었다고 한다.
○ 9월 3일 병진(丙辰)
노 익산(盧益山)을 문병하였다. 오후에 두곡(杜谷)에 도착하여, 무덤에 이르러 영결하였다. 슬프도다, 집(䐕)이여! 스스로 그 죄를 알아 아들 극길(克吉)을 시켜 현훈(玄纁)을 보내었구나.
고대일록 제4권 / 갑진(甲辰, 1604) / 봄 정월
○ 정월(正月) 9일 경신(庚申)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노경승(盧景承)이 보고한 서원 서목(書目)을 보니, 수령은 노 참봉(盧參奉)을 서원 옮길 것을 처음 제창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이것을 들으니, 사람됨이 무상(無狀)하여 말할 바가 없다. 만약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이 죽었지만 의식이 있다면, 반드시 노모(盧某)가 말하여 이안(移安)하게 되었다는 설에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 세상에 호오(好惡)의 편벽됨과 집요(執拗)함으로 말미암은 어두움이 조야(朝野)가 어찌 다르겠는가? 비통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 정월(正月) 16일 정묘(丁卯)
가서 공간(公幹)을 만나본 다음 서원 모임에 참석하였다. 노경승(盧景承)을 체임(遞任)하고 강극수(姜克修)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개 경승(景承)이 수령에게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정홍서(鄭弘緖)가 찰방(察訪) 오희길(吳希吉)에게 노 참봉(盧參奉)을 무함(誣陷)하였고, 희길이 수령에게 참소하여 수령이 노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찌 그리 괴이한가? ○ 북쪽의 오랑캐가 크게 침략해 들어와 하루 밤에 봉화 다섯 개를 올렸었는데, 그 뒤로는 봉화가 하나도 오르지 않아 도성(都城)이 흉흉하고, 급히 도원수(都元帥) 이홍로(李弘老)를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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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希吉 1556 1625 羅州 吉之 鞱庵
1 吳希吉 1556 1625 吳公希吉事蹟 丙子 事蹟 任聖周 鹿門集
2 吳希吉 1556 1625 鞱庵吳公傳 傳 黃胤錫 頤齋遺藁
3 吳希吉 1556 1625 縣監吳公 希吉 墓表 墓表 趙鎭寬 柯汀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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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門先生文集卷之二十 / 雜著 / 吳公希吉事蹟 丙子
吳公希吉字吉之。韜庵其號。羅州人。狀貌魁偉。性度踈簡。師事鄭先生雲龍。又從栗谷牛溪二先生遊。遂厭科擧之業。潛心性理之學。時鄭汝立陰蓄異志。籠羅一世。朝野之稍有時名者。莫不尊慕之。公曾亦往來于其家。至丁亥春。覺其心術之不正。貽書斥絶曰自今希吉之跡。不復到於門下。及汝立伏法。籍其家藏文書。公書在其中。宣廟覽之。大加奬歎。卽馹召之。敎曰予觀爾贈汝立之書。不覺嘉歎。又下敎于政院曰見逆魁家文書。其中有吳希吉者。貽書逆魁。其言平正的確。朝廷之上。無此議論。其學術之正。所見之高。有非俗儒所及。予見而嘉歎。以爲南中有人矣。此必奇士。予欲授職。其議啓。大臣議啓則敎曰高敞吳希吉。當丁亥年間。奸黨充斥。李珥成渾爲其所擠。朝廷之上。無一人救珥渾而斥汝立者。希吉乃能於此時。貽書逆魁。推尊珥渾。斥其心術詭慝之狀極其形容。予甚嘉之。不可不褒。卽除厚陵參奉。未幾換慶基殿參奉。壬辰之難。公在全州任所。賊鋒日近。人皆鳥竄。公請于監司曰近以防禦使所得賊裝中實錄二板見之。他處實錄之並被灰燼無疑矣。參奉是守殿官耳。如御容我固當抱負跋涉。死生以之。實錄則雖非我職。我受聖上罔極之恩。得授此職。微末之官。無他報效之道。願並奉實錄以去。幸而得全則庶可以少遂涓埃之報矣。監司許之。遂奉御容祭器及實錄。移藏于井邑內藏山絶頂隱寂庵。募得驍勇僧徒及近邑山尺百餘名以守之。得保全無事。後因朝令載船達行在。上拜哭親祭。移安于寧邊。光海壬子修正實錄。公䟽陳前後事蹟。因繳進先朝所下備忘該曹啓。以國中三處所藏實錄。皆被賊燹。而獨此一本宛然獲全。其功實大。遂升六品。除東部主簿。甲寅重建慶基殿。奉安影幀而祭之。光海以公有終始保衛之功。特命爲首獻官。又錄衛聖原從二等功臣。命工畫公像以賜之。因拜泰仁縣監。後賊筠用事。打盡淸流。公亦見斥。謫巨濟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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頤齋遺藁卷之二十三 / 傳 / 鞱庵吳公傳
吳公希吉字吉之。羅州人。羅城君自治玄孫。左贊成謙從孫也。父彥麒始贅高敞縣。公以嘉靖丙辰生。魁偉簡密。幼戱異凡。乙丑就傅。旣長慕文靖金子麟厚正學大節。爲錄遺事。因從其門人奇公孝諫受小學。是婦父孝寬同堂也。又從卞公成溫,鄭公雲龍講論。無常師。葢出入父師間。專意六經及宋儒書。學與識俱進。而一以孝友忠信爲本。甲戌喪父。奉母鞠二妹。不喜交游。不㞕㞕科業。惟以母在或赴試。母沒不復出。忌祀節薦及朝夕參謁。幷一遵家禮。致誠敬尤篤。嘗於祭之日。夙興將事。旣畢不徹。圍以屛。假寐其外。忽夢父母曰汝孝可感。但飯有不潔耳。公驚起慟哭亟檢之。果得一髮寸餘。乃詣廟自笞。其後是日申誡具潔。又夢父母曰至誠所在。吾實饗之。其追遠如在者如此。先是賊臣鄭汝立師事文成李子珥。兼宗文簡成子渾。而又不仕。托講學出沒方等山中。壬午公聞其學博。一往見之。時或歷訪。甲申李子卒則汝立遽背之。附李潑一隊。追斥李子。以及成子。而處心行事。多不可測。丁亥春公始覘知。與鄭公商議。貽長書告絶曰。自此以後。希吉之跡。不復到於門下。其反覆曉斥幾千餘言。己丑汝立謀逆走死而大獄作。全羅監司洪汝諄以公名在汝立門徒錄。先囚全州獄以啓。庚寅五月宣廟檢汝立文書。得公丁亥書特釋。因令驛召。旣詣闕。亟下備忘記曰予觀爾書。不覺嘉歎。以如許學術之正所見之高。緣何出入於汝立之門。平日師某人讀何書。參初試幾度。父母兄弟俱在耶。詳悉以對。公啓以實。又下備忘及長書于政院曰。忠順衛吳希吉言論平正的確。朝廷亦無此論。其斥汝立詭慝。極其形容。有非俗儒所及。予以爲南中有人出入汝立之門。而其論如此。尤可尙也。此必奇士。予欲授職。其令議啓。領議政李山海,左議政鄭公澈,領府事沈公守慶並無異議。又下備忘記曰。當丁亥奸黨充斥。邪說肆行。李珥成渾爲其所制。雖朝廷之上無一人救珥,渾斥汝立者。吳希吉乃能貽書逆魁。推尊珥,渾。斥逆賊心術。良用可嘉。不可不褒。成子亦答書曰有此傾葢。殊以爲幸。又曰篤學趣操。可謂不移於僞學。又曰高邁秀偉。固足自拔於橫流。其見重又如此。六月六日授厚陵參奉。公上疏辭。批曰方逆賊欺世盜名。孰不推許。爾之出入其門。葢亦非恠。惟其出入而不肯比附。獨守是非之正。此予所以特恕爾跡。而深取爾心者也。古人取士。其道不一。可勿辭盡職。辛卯四月十六日換授慶基殿參奉赴全州府。壬辰四月倭賊大至。五月公官滿當去。顧大小渙散。莫有固志。乃日赴府舘。與本道都巡察使李洸,都事崔鐵堅,本府尹權燧,本府提督官洪麒祥,參禮察訪尹趌及僚官柳訒等。共議兵事。又與府人前都事李廷鸞俱習遠射。遂有糾義計。因募呈才人驍勇者百餘名以屬燧。時本殿及列朝實錄竝在府中。洸等初欲就史閣中板下埋安實錄。俄聞本道防禦使郭嶸所捕倭賊於慶尙道金山縣者。裝中有所掠星州史閣實錄二張。咸愕肰覺埋安非計。公曰我乃眞殿官。御容一本正當負抱跋涉。死生以之。若實錄非職。肰今以此推之。他處所藏必已被燹。不可不移安深山。亦安可無所處置。况我曾蒙聖褒。報効無地。願幷奉實錄。死則死耳。幸而獲全則庶報萬一也。因曰古人藏書有名山古塚複壁三策。其處事密矣。我東史家自檀君至三國無存。此必兵火所滅。尤不可不念也。洸等以爲肰。屬公遍求一道深山險絶處。公以訪武人金弘武。弘武亦驍勇有膽畧。乃與公及守僕韓春等。日夜奔走。竟得一山於井邑縣南三十里內藏山中。其絶頂則隱寂庵也。亦曰隱峯庵。 公歸語鐵堅曰海濱則扶安邊山爲可。請姑移安。急則當以舟避。陸地則隱寂棧路斷續。尤足爲久計。乃與鐵堅,訒,麒祥,趌往審之。至龍窟臺。亦曰龍窟庵。 可望不可上。惟趌超上視之。議乃定。六月賊入錦山郡。晦日官軍遇于熊峙。大敗報至。先鋒浸薄府城下。士女軍兵鳥獸竄。洸等又議擇儒士有學行智慮者二人。竝參奉周旋。而安義孫弘祿自泰仁應募赴之。公及訒乃與弘武義弘錄及春等。先移實錄。將袱袋樻各去之。七月九日。又移御容。將軸端玉飾及流蘇袱樻。以至軸上尺許兩傍寸許各去之。裹以油芚。俱務輕約。幷祭用銀器及史閣中高麗史形止案諸帙五十餘駄以行。實錄首安龍窟。而御容以次偕安。實錄尋移隱寂。再相尤險絶處。移飛來庵。九月自龍窟移御容。復偕實錄安焉。弘武義弘祿等三人。僧煕默等四五名。近邑呈才人百餘名則日夜衛庵臺不離。公及訒自鄰寺輪直。而公子以精亦從。旣以報洸及都體察使鄭公澈。以新觀察使李公廷馣。亦以申啓。幸而賊不深。御容實錄獲俱完。十一月公則官過期已久。十二月仇貞禮 一云廷呂 自行朝來代。公乃遞歸。而李道吉亦先後代訒矣。癸巳六月九日。公再授厚陵參奉。有以亂初實錄御容有從輕約者爲言。則上言待罪。自陳當時圖保。斷無他膓之實。是月賊陷晉州。命自井邑俱移西北。御容行次牙山縣權安。宣廟在行宮慟哭。命官祭告。實錄至海州牧權藏。丙申御容移江華府。丁酉又幷實錄由海道達安州牧。至寧邊府妙香山普賢寺以安。葢義弘錄陪至牙山。轉赴江西行朝而歸。春獨始終六年。勤勞居多。又有守僕姜守朴也金金順卜自全州赴守普賢亦五六年可紀。自公之遞。雖非公所與。亦莫非公功所曁也。先是乙未七月奇公卒。公爲文祭之。甲辰上疏三千三百餘言。以革弊政得民心爲綱。以海溢水旱。徭役煩重。量田不均。軍民侵漁。節義不褒五者爲目。而請用李公元翼尹公根壽李公恒福三人。上嘉之。特除沙斤道察訪。是時錄扈聖宣武二勳。上敎錄勳廳曰吳希吉,洪汝栗則保太祖御容。李爾瞻則保世祖御容。當亂保影幀。反重於護予之功。皆可錄正勳。葢汝栗以慶州集慶殿參奉。爾瞻以光陵奉先殿參奉。實與公同時同功。故有是命。而柳永慶當國爲元勳。與爾瞻分黨相惡。遂幷公沮之。戊申光海嗣位。庚戌公又上疏五千餘言。首陳傳心之法。以及治體。次陳進學之要。以及用人。次請輔導東宮。以延國祚。終請崇奬道學。以正士習。而謂金公淨,奇公遵不及與五賢從享文廟者爲可恨。又謂馬融,杜預,王弼,何休及崔致遠可黜。又謂箕子廟宜復額。求其後以祀。其言尤明白剴切。識者韙之。是年除平陵道察訪。壬子六月聞脩宣祖實錄。廣求逸事。乃隨疏進庚寅所被褒敎及壬辰奉御容實錄時事。請下實錄廳資考。七月禮曹啓陞六品。癸丑九月授東部主簿。甲寅十月韓春訢禮曹請錄公壬辰功。禮曹請公及春俱褒則光海可之。柳希奮亦惡爾瞻同功格不行。先是戊戌慶基本殿火。至是十一月。命全羅觀察使李慶全重建告成。命中官崔彥俊,左副承旨李好義,禮曹參議金闓自寧邊奉太祖御容還安而祭之。公時爲監察。特命爲初獻官。又畫像賜之。因除泰仁縣監。所以表公功也。公亦感激兩朝恩典。一心奉公。淸白自厲。丁巳三月柳訒子景纘言公旣蒙恩。而其父獨否。又有南原生員崔尙業爲崔鐵堅上疏。請與公同錄。金弘武以軍功訓鍊正。㬥與公同事狀。八月公從子乞依汝栗爾瞻例錄公。而乙卯有誣者。子以精先被拿囚刑曹。公又遞赴漢城。戊午七月以精又繼之。竟只錄衛聖功臣原從一等。贈父承旨。衛聖者。光海錄壬辰爲世子監國時衛從諸臣者也。癸亥反正幷削。惟贈父者否。 時柳希奮李爾瞻朴承宗幷稱三昌元勳。迭相傾妒。而許筠又甚。至謀害西宮。旣用事。公遂見忤。己未謫巨濟。中瘴毒痢。癸亥三月仁祖靖社。而七月二十九日公卒。未及釋。壽六十八。遠近士大夫莫不傷之。歸葬淳昌郡新垗。有二子以粹以精。公不事辭章。有道東淵源錄三卷及日記私藁若干藏于家。按吳譜公無从子。本文以子疑卽再從子以武娶公舅女者。
越松外史黃胤錫曰。世稱公壬辰之功非細也。肰特其餘事耳。何者。吾東大儒道學文章節義之備如金子者。殆無幾焉。矧湖南師法之尤切乎。公之少日已私淑有得。而又游於其高弟奇氏及卞氏。則淵源固正矣。鄭氏亦後學逮聞而有起者歟。公之從之。必非偶肰。今據庚寅召對之辭尤信。抑其發諸前後二大疏。凡所以拳拳乎君德時政。而必以正學爲歸者。𠅩非本諸師友身心之際乎。誦其詩讀其書。可知其人。玆且挈其大者。以補宣廟寶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