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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1권, 태조 1년 8월 23일 壬申 2/2 기사 /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이숭인·이종학·우홍수의 졸기
○孫興宗、黃居正、金輅等還朝。 慶尙道流人李種學、崔乙義, 全羅道流人禹洪壽、李崇仁、金震陽、禹洪命, 楊廣道流人李擴, 江原道流人禹洪得等八人死。
種學字仲文, 韓山伯 穡之次子, 天性英豪。 恭愍甲寅年十四, 中成均試, 僞朝丙辰, 中同進士, 遂拜長興庫使, 積官至密直司知申事。 戊辰, 掌成均試, 陞僉書密直司事。 己巳, 同知貢擧。 時李穡當國, 種學連歲掌試, 人頗譏之。 恭讓君立, 李穡見劾, 種學亦貶。 庚午, 尹彛、李初之獄作, 父子俱在淸州逮中, 以水災, 俱得蒙宥。 壬申, 又貶咸昌。 至是, 興宗至雞林, 欲行脊杖, 門生金汝知方爲判官, 陰戒吏不得行法外刑, 因是僅活。 移置長沙縣, 興宗遣人, 追至茂村驛, 乘夜縊之, 年三十二。 子六人: 叔野、叔畦、叔當、叔畝、叔福、叔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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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種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워서, 공민왕 갑인년(1374)에 나이 14세로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위조 병진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마침내 장흥고 사(長興庫使)에 임명되고, 관직을 오랫동안 지내어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에 승진되고,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색이 나라의 정무(政務)를 맡고 있었으며, 종학이 해마다 시험을 관장하게 되니, 사람들이 자못 이를 비난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색이 탄핵을 당하고, 종학도 또한 폄출(貶黜)되었다. 경오년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매, 부자(父子)가 함께 청주(淸州)에 체포되어 있던 중, 수재(水災)로 인하여 함께 사면(赦免)을 입었다. 임신년에 또 함창(咸昌)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손흥종(孫興宗)이 계림(鷄林)에 와서 등골에 곤장을 치려고 하니, 문생(門生) 김여지(金汝知)가 그때 판관(判官)이 되어, 몰래 형리(刑吏)에게 법 밖의 형벌은 시행하지 못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겨우 살게 되어,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겨 안치(安置)되었는데, 손흥종이 사람을 보내어 뒤쫓아 무촌역(茂村驛)에 이르러 밤을 이용하여 목을 졸라 죽이니, 나이 32세였다. 아들이 여섯이니, 이숙야(李叔野)·이숙휴(李叔畦)·이숙당(李叔當)·이숙묘(李叔畝)·이숙복(李叔福)·이숙치(李叔畤)이다.
| 서하집 제11권 / 제문(祭文) / 우봉에서 익재를 서원에 봉안하는 제문〔牛峯益齋書院奉安祭文〕 우봉(牛峯)에서 …… 제문 : 이제현(李齊賢, 1278~136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역옹(櫟翁)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을 보필하여 원(元)나라를 드나들며 외교적으로 큰 공로를 세웠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있다. 우봉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옛 이름이다. 1652년(효종3)에 우봉현과 강음현(江陰縣)을 합하여 강음 금교(金郊)의 북쪽 우봉 오조천(吾助川) 남쪽에 관아를 세우고 금교의 ‘금(金)’과 오조천의 ‘천(川)’을 따서 이름을 금천이라 하였으니, 이제현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국역 여지도서 제26권 황해도 금천》 이제현을 봉안한 서원은 금천에 위치한 도산서원(道山書院)으로, 금천의 유학(幼學) 기명혁(奇命爀)이 상소하여 사액을 내려 줄 것을 청하여, 숙종이 해조에 내려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10년(1684) 10월 21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건치연혁】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김해부 산천 조를 보라.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하였다가 고릉(古陵)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고령으로 고쳤다. 고려 광종(光宗) 때에는 함녕(咸寧)으로,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명종 때에는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때에는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
| 李敏敍 | 1633 | 1688 | 全州 | 彝仲 | 西河 | 文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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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 / 황해도(黃海道) 우봉현(牛峯縣)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구룡산사(九龍山寺) 함유일(咸有一)이 구룡산사가 가장 영험하다는 말을 듣고서 사당에 가서 신상(神像)을 활로 쏘자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양쪽 문이 닫혀 그 화살을 막았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총묘】 이제현(李齊賢) 묘 고을 남쪽 도리촌(桃李村)에 있다.
【고적】 중미정(衆美亭) 고려조의 의종(毅宗)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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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6권 / 황해도(黃海道) / 우봉현〔牛峯縣〕 / 유형원(柳馨遠, 1622~1673)
능묘(陵墓)
이제현(李齊賢) 묘 현 남쪽 도리촌(桃李村)에 있다.
이종학(李種學) 묘 현 남쪽 40리에 있다.
| 이제현(李齊賢) | 1287 | 1367 | 경주(慶州) | 중사(仲思) |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 이진(李瑱) |
이핵(李翮) 조부
이진(李瑱) 부
김희조(金希祖)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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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26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 도리촌(桃李村) 기사(記事) /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옛날의 우봉(牛峯)이 곧 금천군(金川郡)인데, 도리촌은 일찍이 그 지역에 예속되었으나 지금은 개성부(開城府)에 속해 있다. 생각건대, 우리 이씨(李氏)의 선영은 익재 선생 윗대의 분묘가 모두 이곳에 있다. 또 구보(舊譜)를 살펴보니, 문희공(文僖公) 휘(諱) 세기(世基)의 묘가 우봉의 도리촌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그곳에 가서 살펴보았더니, 익재 선생의 묘 오른쪽에 하나의 큰 무덤이 있는데 예전에 예장(禮葬)을 한 것이었다. 이것이 문희공의 묘인 듯하나 증험할 만한 증거가 없었고, 오직 석곽(石槨)에 황토가 채워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 아래에 단을 설치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절을 하였는데 민(閔), 서(徐) 양단(兩壇)의 사례와 같게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현 (역) | 1999
이천(李蒨, 1274~1349) 문희공(文僖公) 이세기(李世基)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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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10월 21일 계축 3/4 기사 / 1684년 청 강희(康熙) 23년
문충공 이제현 사우에 은액을 허락하다
○金川幼學奇命爀上疏言: "本邑有高麗 文忠公 李齊賢祠宇, 配以麗末及近代名臣李種學、趙錫胤, 請賜恩額。" 下該曹許施。
금천(金川) 유학(幼學) 기명혁(奇命爀)이 상소하기를,
"본읍(本邑)에 고려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우(祠宇)가 있어 여말(麗末)과 근대(近代)의 명신(名臣) 이종학(李種學)과 조석윤(趙錫胤)을 배향(配享)하였으니, 청컨대, 은액(恩額)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해조(該曹)에 내려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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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10년(1684) 12월 11일
이제현(李齊賢)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특별히 시행하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금천(金川)의 유생(儒生) 기명혁(奇命赫) 등의 상소를 보니, ‘본 고을의 선비들은 고려(高麗)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을 위하여 사우를 건립하고, 여말(麗末)과 근대(近代)의 명신(名臣) 이종학(李種學)과 조석윤(趙錫胤) 두 사람을 배향(配享)하였으니, 사액을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현의 뛰어난 공적과 문장은 우뚝하여 당대의 훌륭한 신하였습니다. 그의 학술과 인품이 또한 순수한 유학자의 부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위란(危亂)을 당하였을 때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험난함을 피하지 않은 충성은 진실로 신하들이 본받아 모범으로 삼을 만합니다. 이종학과 조석윤의 행실과 문학은 이로써 배향하는 것이 진실로 공의(公議)에 합당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전대(前代)의 훌륭한 신하 중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강감찬(姜邯贊)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모두 사우를 건립하여 사액의 은전(恩典)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제현은 어진 것으로는 을지문덕과 강감찬의 문아(文雅)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을지문덕과 강감찬 이 두 사람에 비견하여 특별히 사액하시어 한 고을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하지만 일이 은전(恩典)에 관련되어 해조(該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특별히 사액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주-D001] 임금을 …… 충성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청주(淸州)에 파천했을 때 호종(扈從)하였던 일을 말함.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역) | 2015
숙종(肅宗) / 숙종(肅宗) 11년(1685) 8월 초5일
금천(金川)에 있는 이제현(李齊賢)의 서원에 사액하는 건
1. 금천(金川)의 유학(儒學) 기명혁(奇命赫) 등이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서원에 사액을 청한 것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금천 유생 기명혁 등의 상소를 보니, ‘본 고을의 선비들이 고려(高麗) 문충공 이제현을 위하여 사우를 건립하고, 여말(麗末)과 근대(近代)의 명신(名臣) 이종학(李種學)과 조석윤(趙錫胤) 두 사람을 배향(配享)하였으니, 사액을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현의 뛰어난 공적과 문장은 우뚝하여 당대의 훌륭한 신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학술과 인품이 순수한 유학자의 부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위란(危亂)을 당하였을 때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험난함을 피하지 않은 충성은 진실로 신하들이 본받아 모범으로 삼을 만합니다. 이종학과 조석윤은 행실과 문학으로써 배향하는 것이 공의(公議)에도 합당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전대(前代)의 훌륭한 신하 중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강감찬(姜邯贊)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모두 사우를 건립하여 사액의 은전(恩典)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제현은 어진 것으로는 을지문덕과 강감찬의 문아(文雅)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을지문덕과 강감찬 이 두 사람에 비견하여 특별히 사액하시어 한 고을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하지만 일이 은전(恩典)에 관련되어 해조(該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24년 8월 초6일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신(臣) 박태손(朴泰遜)이 담당하였는데, 특별히 사액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판하(判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24년 8월 초8일에 우승지(右承旨) 신(臣) 임홍망(任弘望)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공문을 예문관(藝文館)에 이송(移送)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역) | 2015
숙종(肅宗) / 숙종(肅宗) 12년(1686) 5월 15일
마문(馬文)
1. 예조(禮曹)의 단자(單子)에,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 지역 고려(高麗)의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과 고려 말과 근대(近代)의 명신(名臣) 이종학(李種學) 및 현신(賢臣) 조석윤(趙錫胤)의 서원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는 일로 내려갈 때, 본조(本曹) 낭청(郞廳)의 기복마(騎卜馬)와 색리(色吏)의 기마(騎馬) 등을 전례대로 병조(兵曹)에서 지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시행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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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20년 병진 > 8월 11일 > 최종정보
정조 20년 병진(1796) 8월 11일(계미)
20-08-11[07]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중외(中外)에 나누어 주고 공사(公私) 간의 압운(押韻)은 이 운서(韻書)의 의례(義例)에 따르도록 명하고, 이어 어휘(御諱)와 발음이 같은 글자가 중간에 오는 것까지 아울러 휘(諱)하는 습관을 금하였다.
○ 사액서원(賜額書院)에 나누어 준 질은 다음과 같다.
수원부 - 매곡서원(梅谷書院), 명고서원(明皐書院) -, 개성부 - 숭양서원(崧陽書院), 숭절서원(崇節書院), 오관서원(五冠書院), 화곡서원(花谷書院), 도산서원(道山書院), 표절사(表節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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燃藜室記述別集 卷之四 / 祀典典故 / 書院
黃海道
松禾道東書院 萬曆丁巳建己卯賜額 朱子趙光祖李滉李珥
安岳鷲峰書院 萬曆己丑建崇禎丁丑賜額 朱子李珥
黃州白麓洞書院 萬曆戊子建辛丑賜額 朱子金宏弼李珥
殷栗栗谷書院 萬曆癸丑建肅宗辛卯移建 朱子金宏弼李珥
忠孝祠宇 辛卯建 朴薰 長連縣監
金川道山書院 肅宗壬戌建賜額 李齊賢李種學趙錫胤
愍忠祠 甲戌建壬辰賜額 李重老 左防禦使 李聖符 右防禦使 朴榮臣 豐川府使 李師朱 伊川府使 尹廷俊 瓮津縣令
權浩源 訓局哨官 張緬 訓局哨官 方潝 防禦軍官幷詳甲子适變
平山東陽書院 崇禎壬午建肅宗丁丑賜額 申崇謙李穡
九峯書院 肅宗丙子建丁丑賜額 朴世采
太白山城祠 麗朝建壬丁兵燼丙子重建 申崇謙卜智謙 麗武恭公鐵像 庾黔弼 麗忠節公鐵像
載寧景賢書院 乙未建乙亥賜額 朱子李珥
遂安龍溪書院 顯宗壬寅建肅宗戊子賜額 漢管寧李連松 麗平章遂安君 姜栢年
延安飛鳳書院 隆慶庚午建庚申賜額 朱子崔冲金宏弼成渾李珥朴世采
顯忠祠 崇禎戊寅建肅宗甲申賜額 李廷馣申恪宋德潤 僉使 張應祺 郡守 金大鼎 府使 趙光庭 生員漢陽人居海州
文化鳳崗書院 甲申建己卯賜額 朱子趙光祖李滉李珥
程溪書院 庚戌建戊子賜額 柳寬 世宗相
忠孝祠 辛卯建 兪彥謙 孝子 洪禛 縣令丙子戰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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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봉집(老峯集) | 노봉집 제10권 | 잡저(雜著) | 연행일기〔燕行日記〕 | 민정중(閔鼎重) |
기유년(1669, 현종10) 10월 18일 무인일(戊寅日). 종이 울리자 대궐로 갔다.
신사일(辛巳日). 아침에 가서 문천(文川) 신희계(辛喜季)를 곡하였다. 유수(留守), 경력(經歷)들과 두루 작별을 하면서, 술잔이 각각 몇 순배씩 돌았다. 객관에 돌아와 밥을 먹고 즉시 출발하여, 조낙정(趙樂靜) 문장(文丈)의 묘소를 찾아가 전배(展拜)를 올렸다. 서숙(庶叔)인 별장(別將) 민광겸(閔光謙)이 어머니와 처를 거느리고 묘소가 있는 마을에 살고 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금천(金川)의 객관에 투숙했는데, 습기가 있어 향사당(鄕社堂)으로 옮겼다. 경기(京畿) 배행차원(陪行差員) 찰방(察訪) 허협(許浹)이 인사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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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집 제11권 / 제문(祭文) / 우봉에서 익재를 서원에 봉안하는 제문〔牛峯益齋書院奉安祭文〕
선생은 / 先生
산하의 빼어난 기운 타고난 / 山河間氣
조정의 큰 인재이니 / 廊廟偉器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 다 통하였고 / 學窮天人
도는 말세에 으뜸이었도다 / 道冠叔季
명성이 삼한을 뒤덮었고 / 名蓋三韓
명예가 중국까지 퍼졌으니 / 譽流上國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 忠宣在元
공이 와서 모셨네 / 公執羈靮
진량처럼 북학하고 / 北學如良
계찰처럼 관풍하였으며 / 觀風如札
서쪽으로 아민에 사신 가고 / 西使峨岷
남쪽으로는 오월까지 따랐도다 / 南從吳越
만리를 떠돌아다니며 / 間關萬里
충성과 절의 드러났는데 / 顯忠著節
거두어 동국으로 돌아옴에 / 斂以東歸
당대의 태산북두 되었네 / 爲世山斗
누차 재상 지위 맡아서는 / 累秉國勻
백성들은 부모가 있게 되었으며 / 民有父母
위기 임해서 더욱 확고하여 / 臨危益堅
험난함 겪을수록 더욱 곧았도다 / 履險逾貞
덕이 성대하고 사업이 크며 / 盛德大業
장수하고 명예 드높아 / 壽考尊名
공업과 교화 면면히 전해지고 / 功化綿邈
문교가 크게 새로워졌네 / 文敎丕變
당시에는 영화로웠고 / 當時榮焉
후대에서 사모함 게으르지 않았는데 / 後思不倦
융숭한 보답 미처 못하여 / 崇報未遑
배향한 사우가 없구나 / 腏食無所
나라 사람들 분해하고 부끄러워하며 / 邦人憤恥
모두 함께 도모하여 거행하니 / 共謀齊擧
우산의 남쪽 / 牛山之陽
바로 공이 노닐던 곳이로다 / 寔公遊處
터를 보아 사우 짓고 / 相址創宇
은혜 바라며 봉안하니 / 徼惠揭虔
수많은 유자들 / 靑襟詵詵
분주히 와서 제사 지내도다 / 奔走執籩
백 대는 먼 세월 아니기에 / 百世非遙
감응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 感應不爽
밝으신 영령은 앎이 있거든 / 明靈有知
부디 흠향하소서 / 庶歆肸蠁
[주-D001] 우봉(牛峯)에서 …… 제문 : 이제현(李齊賢, 1278~136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역옹(櫟翁)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을 보필하여 원(元)나라를 드나들며 외교적으로 큰 공로를 세웠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있다. 우봉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옛 이름이다. 1652년(효종3)에 우봉현과 강음현(江陰縣)을 합하여 강음 금교(金郊)의 북쪽 우봉 오조천(吾助川) 남쪽에 관아를 세우고 금교의 ‘금(金)’과 오조천의 ‘천(川)’을 따서 이름을 금천이라 하였으니, 이제현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국역 여지도서 제26권 황해도 금천》 이제현을 봉안한 서원은 금천에 위치한 도산서원(道山書院)으로, 금천의 유학(幼學) 기명혁(奇命爀)이 상소하여 사액을 내려 줄 것을 청하여, 숙종이 해조에 내려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10년 10월 21일》[주-D002] 충선왕(忠宣王)이 …… 모셨네 : 충선왕이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전하고 자기는 태위(太尉)가 되어 원나라 서울의 저택에 머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놓고 스스로 즐기면서 이제현을 원나라 서울로 불러들이자, 이제현이 원나라에 와서 충선왕을 모셨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주-D003] 진량(陳良)처럼 북학(北學)하고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진량은 초(楚)나라 태생이니,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으로 와서 중국(中國)에서 배웠는데, 북방의 학자 중에 혹시라도 앞서는 자가 없었다.[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 하였으니, 진량이 남방 출신으로서 중원의 도를 배웠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제현이 중국에 와서 학문한 것을 가리킨다. 이제현이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중국에 와서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과 어울리며 학식이 더욱 진취되었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주-D004] 계찰(季札)처럼 관풍(觀風)하였으며 :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인 계찰이 예악(禮樂)에 밝아 노(魯)나라로 사신 가서 주(周)나라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흥망을 알았다는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 여기에서는 이제현이 중국에 와서 견문을 넓혔음을 말한 것이다.[주-D005] 서쪽으로 …… 가고 : 아민(峨岷)은 서촉(西蜀)에 있는 아미산(峨眉山)과 민산(岷山)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1316년(충숙왕3)에 이제현이 사명을 받고 서촉 지방에 가서 아미산에 강향(降香)한 일이 있다. 《국역 졸고천백 제1권 이익재의 후서정록 서문》[주-D006] 남쪽으로는 오월(吳越)까지 따랐도다 : 1319년에 충선왕이 강향사(降香使)로서 강남으로 갔는데, 이제현이 이때 호종하였다. 《국역 익재집 습유 익재선생 연보》[주-D007] 당대의 태산북두(泰山北斗) 되었네 : 태산북두는 덕과 명망이 탁월한 사람을 가리킨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에 이색(李穡)이 명(銘)에 이제현을 칭송하며 “태산북두 같기는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로다.[北斗泰山, 昌黎之韓.]” 하였다.[주-D008] 위기 …… 곧았도다 : 1339년(충혜왕1)에 충숙왕(忠肅王)이 승하한 뒤 정승 조적(曺頔)이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몰래 왕위에 올리려고 하자 충혜왕이 조적을 죽였는데, 심양(瀋陽)에 있는 조적의 무리들이 충혜왕을 모함하자, 원(元)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소환하였다. 이에 이제현이 글을 올려 진상을 밝혀 일을 해결하였다. 《高麗史 권110 李齊賢列傳》[주-D009] 장수하고 명예 드높아 : 귀국한 뒤에는 소인들이 더욱 날뛰었으므로, 물러나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는데, 그 서문에 “내가 일찍이 대부의 반열에 있다가 스스로 물러나 옹졸함을 지키면서 호를 역옹(櫟翁)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재목감이 되지 못함으로써 장수할까 하는 뜻에서이다.” 하였고, 또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에 우정승에 올랐는데,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이제현이 오른 것을 시기하자, 세 번이나 표문(表文)을 올려 정승 자리를 고사(固辭)하였다. 그해 겨울에 조일신이 한밤중에 궁궐로 침입하여 자기가 꺼리던 사람들을 해쳤는데, 이제현은 이때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선견지명이 있어 81세의 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제현은 1362년(공민왕11)에 조정의 공론에 의해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 《국역 역옹패설전집 역옹패설 전집 서》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장성덕 (공역) | 2018
| 李敏敍 | 1633 | 1688 | 全州 | 彝仲 | 西河 | 文簡 |
서하집 제11권 / 제문(祭文) / 금천의 서원 배위에 대한 중정일 제사 축문〔金川書院配位中丁祝文〕
덕망으로 이름난 집안 자제로 / 名德之胄
의로운 공렬 더욱 빛나도다 / 義烈彌彰
유풍이 쇠하지 않았으니 / 遺風不替
부디 향기로운 제수 흠향하소서 / 尙歆芬芳
위는 인재(麟齋)에게 올린 것이다.
사류가 우러르니 / 襟紳所仰
선생 발길 닿은 곳이로다 / 杖屨攸經
감동하여 사모함이 어제 같아 / 感慕如昨
이 제수를 올립니다 / 陳此籩鉶
위는 낙정(樂靜)에게 올린 것이다.
[주-D001] 금천(金川)의 …… 축문 : 도산서원(道山書院)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인재(麟齋) 이종학(李鍾學), 낙정재(樂靜齋) 조석윤(趙錫胤)을 봉안한 서원으로, 금천의 유학(幼學) 기명혁(奇命爀)이 상소하여 사액을 내려 줄 것을 청하여, 숙종이 해조에 내려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10년 10월 21일》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서원》[주-D002] 덕망으로 …… 자제로 : 이종학(1361~1392)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이다. 1392년(태조1) 8월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후에, 그의 당으로 몰려 함창(咸昌)에 유배되었다가 장사현(長沙縣)으로 이배(移配)되던 중에 무촌역(茂村驛)에서 32세의 나이로 교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종학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손자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로, 당대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였다.[주-D003] 의로운 …… 빛나도다 : 이태연(李泰淵)이 지은 《국역 인재유고》 부록(附錄) 〈인재유고 발문[麟齋遺稿跋]〉에 “충과 효로 몸을 세우고, 문장은 여사로 여겼으며, 고려 말에 목숨을 바치고도 후회하지 않아 그 아름다움을 이으셨다. 고려 왕조 5백 년의 강상이 뿌리내리도록 도운 일은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의 사이에서 견줄 만하도다.” 하여 절의를 칭송하였고,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은 “절의를 전조(前朝)에 다했고, 목숨을 개사(改社)하는 데 마쳤다.” 하였다. 《蘇齋集 卷9 有明朝鮮國故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事李公行狀, 韓國文集叢刊 35輯》[주-D004] 낙정(樂靜) : 조석윤(1606~1655)의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이다. 1628년(인조6)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6년 8월 30일 기사에 보이는 그의 졸기에 ‘겸손하고 시사(時事)에 신경 써 상소하는 내용이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당대 인물을 논할 때는 조석윤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평하였다. 금천의 도산서원에 배향되고 저서로는 《낙정집(樂靜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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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피서록 > 피서록(避暑錄) / 정조왕 4년, 곧 1780년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의 저 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람으로서 중국을 골고루 구경한 사람으로는 이익재(李益齋)이름은 제현(齊賢)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력(遊歷)한 것이 시(詩)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정형(井陘)ㆍ예양교(豫讓橋)ㆍ황하(黃河)ㆍ촉도(蜀道)ㆍ아미(峨眉)ㆍ공명사당(孔明祠堂)ㆍ함곡관(函谷關)ㆍ민지(澠池)ㆍ이릉(二陵)ㆍ맹진(孟津)ㆍ비간묘(比干墓)ㆍ금산사(金山寺)ㆍ초산(焦山)ㆍ다경루(多景樓)ㆍ고소대(姑蘇臺)ㆍ도량산(道場山)ㆍ호구사(虎口寺)ㆍ표모묘(漂母墓)ㆍ탁군(涿郡)ㆍ백구(白溝)ㆍ업성(鄴城)ㆍ담회(覃懷)ㆍ왕상비(王祥碑)ㆍ효릉(崤陵)ㆍ장안(長安)ㆍ정장공묘(鄭莊公墓)ㆍ허문정공묘(許文貞公墓)ㆍ관용방묘(關龍逄墓)ㆍ망사대(望思臺)ㆍ무측천릉(武則天陵)ㆍ숙종릉(肅宗陵)ㆍ빈주(邠州)ㆍ경주(涇州)ㆍ보타굴(寶陀窟)ㆍ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등이 있으니, 그 발자취가 이른 곳이 모두 웅장한 곳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쳐 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 시도 마땅히 동방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그 화려하고 곱고 밝고 맑음이, 삼한의 궁벽하고 고루한 누습(陋習)을 활짝 벗어 버렸으나, 이즈음 사람들은 딱하게도 익재가 곧 이제현임을 알지 못하고, 고군협(顧君俠 미상)이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엮을 때도 고려 사람의 시는 한 수도 뽑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목암(牧菴)요공(姚公)과 염자정(閻子靜 원(元) 문학가 염복(閻復). 자정은 자)ㆍ장양호(張養浩 원(元) 문학가. 자는 희맹(希孟)) 등도 모두 익재의 시를 칭찬하였으나, 역시 한 수도 뽑힌 것이 없으니 이는 실로 괴이한 일이다.”
고 운운하였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金川) 지금리(只錦里) 도리촌(桃李村 개성(開城))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舊宅)이요, 구택에다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燕巖別業)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나도 일찍이 한두 번 서원에 가서 그 유집(遺集 《익재난고(益齋亂藁)》)을 읽고서, 더욱이 《청비록(淸脾錄)》의 논평한 말이 철론(鐵論)임을 믿었다. 그의 〈사귀(思歸)〉에는,
늦은 가을 청신(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 숲은 비 속에 잠겨 있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 저물녘 백제성(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엔 구름이 비꼈구나 / 落日雲橫白帝城
하였고, 〈이릉조발(二陵早發)〉에는,
주사(이이(李耳)의 벼슬 이름)의 약 솥에는 구름만 감돌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주(周) 문왕) 비 피했던 능엔 눈마저 덮여 있네 / 雪壓文王避雨陵
하였고, 〈주행아미(舟行峨眉)〉에는
비에 쫓긴 송아지는 어점으로 돌아오고 / 雨催寒犢歸漁店
물결에 밀린 해오라기 손님 배를 따르더라 / 波送輕鷗近客舟
하였고, 〈다경루(多景樓)〉에는,
밤들어 풍경 울 제 포구에 밀물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채 우뚝 서니 비 새는 그 다락을 / 煙簑暝立雨侵樓
하였고, 〈함곡관(函谷關)〉에는,
흙 주머니 그 입을랑 황하 북에 묶어두고 / 土囊約住黃河北
땅덩어리 둥글둥글 백일 서편 둘렀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내 이제, 한 번 고북구(古北口)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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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산서원 道山書院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에 있었던 조선후기 이제현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집필 및 수정
정의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에 있었던 조선후기 이제현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내용
1682년(숙종 8)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제현(李齊賢)·이종학(李鍾學)·조석윤(趙錫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6년(숙종 12) ‘道山(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으며, 복원 여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